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11
11화. 검제
“우쭈쭈. 여기요, 여기. 할애비 여기 있지요.”
“꺄하하하하!”
백금발의 여자아이가 백발의 노인을 쫓아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웃음을 터트리자.
그 모습을 보는 노인의 입가에는 함박웃음이 걸렸다.
이제 서른이 가까워진 황후, 클로이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 풀 죽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마마마.”
“음?”
“외조부님께선 저보다는 셀린느가 더 좋으신가 봅니다. 검술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녀의 옆에서 서운한 얼굴로 투정 부리는 남자아이.
역시나 백금발에 푸른 눈을 빛내는 이 아이가 바로 10년 전의 마계 대전 직후 태어난 아스란의 황실의 적장자, 타이 반 아스란이었다.
황태자치고 다소 단출한 이름이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시기에 태어난 아이, 특히 남자아이에게 ‘그’와 비슷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은 것은 모든 부모의 똑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설령 황제와 황후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거 아니야, 타이. 할아버지는 손자들을 다 똑같이 사랑한단다, 아들.”
클로이가 섭섭해하는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달래 주었지만,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검제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는 어렸을 적 자신과 꼭 닮은 ‘유일한’ 손녀인 셀린느를 가장 아낀다는 것을.
‘하필 오빠들도 죄다 아들만 낳아서…….’
하지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곧 셀린느 재우고 나면 검술 가르쳐 주실 거야.”
“그럴까요?”
“그럼. 할아버지가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시는데. 조금만 기다려.”
“……예.”
아직은 한창 귀여울 나이인 아들을 꼭 안아 준 클로이의 시선이 다시금 화원에서 뛰어노는 딸과 아버지를 향했다.
때마침 아들과 한 말을 들었는지, 아버지는 셀린느를 번쩍 안아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황녀님, 이제 코~ 잘 시간이에요.”
“꺄하하. 할부지! 따가!”
재운다면서 꺼끌꺼끌한 수염이 난 뺨을 비벼 대니, 아이는 오히려 더 깔깔대며 할아버지의 얼굴을 퍽퍽 때렸다.
하지만 이내 인자하게 웃은 검제가 부드럽게 볼을 쓰다듬으며 살살 달래는 순간, 아이는 금세 거짓말처럼 조용히 잠이 들었다.
“수고하셨어요, 아버지. 이리 주세요.”
“옙, 황후님.”
“그리고 이번엔 한참 기다린 손자를 맡아 주시고요.”
그녀가 눈짓으로 아들을 가리키자, 빙긋 웃은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손짓했다.
“분부하신 대로. 이리 오세요, 타이 황자님.”
“예, 외조부님!”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구요.”
“어이쿠, 딸아. 아무리 그래도 나, 검제 에스가르드가 애들하고 노는 걸 걱정해 주는 건 너무 간 거 아니냐?”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걸 보여 주시려고 저한테 자주 들르시는 거 알아요, 아버지.”
그 말에 움찔하는 아버지를 보며 클로이는 미소를 지었다.
10년 전 그때,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갑자기 확 늙어 버린 아버지가 한 번은 팔도 잘렸었다는 것을 알기에, 감정이 복받쳐서 대성통곡을 했었다.
그 후로도 걱정을 많이 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충분히 회복하신 게 보였다.
지금의 아버지는 10년 전의 그때보다 오히려 조금 젊어 보일 정도였으니.
“대신 그만큼 제나스 경이 고생하고 있잖아요. 이제 충분히 알았으니, 아버지도 그을음 처리에 손을 보태세요. 이대로는 비비안한테 제가 너무 미안하단 말이에요. 신혼 때도 제대로 못 챙겨 줬는데.”
“비비안도 지금은 블루윙으로서 그 녀석을 따라다니는 중인데…….”
변명하던 검제는 이내 딸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잉. 알았다, 알았어.”
“외조부님, 그럼 제 검술은…….”
“아, 우리 손자…… 황자님 검술은 충분히 봐주고 가야죠. 걱정 마세요.”
검제가 손자이자 황자의 볼을 장난스레 잡아당기며 웃어 보이자, 불안해하던 타이 황자 역시 그제야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역시, 프로 엄마.”
이상한 목소리와 함께, 낯선 사람이 클로이의 옆에 쓱 등장했다.
“꺅!”
화들짝 놀란 클로이가 이내 등장한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한발 늦게 사방에서 튀어나온 ‘그림자’들은, 낯선 이를 향해 돌진하려다가 검제의 손짓 한 번에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폐하께서 허락하신 방문이다. 다 제자리로 돌아가.”
자신들을 교육한 자이자 9대 기사 중 1인인 사신 루나 모르스의 손짓에 따라 그대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저것들이 그 허락이라는 걸 확인이라도 해야…….”
끌끌 혀를 찬 검제가 루나를 바라보는데.
“루나 양? 아, 이제 부인이라 불러야 하나?”
“어떻게 부르셔도 상관없어요, 어르신.”
“그런데 갑자기 여긴 웬일이지?”
“아, 황후님께 육아 상담 좀 하려고 왔어요.”
“에엥?”
검제 뿐만 아니라, 듣고 있던 모든 이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상식적으로 황후가 육아 경험을 쌓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황실에서는 그녀를 대신해 아이를 돌보는 도우미들이 24시간 교대로 일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황후에게 육아 문제를 물으러 왔다.
심지어 황궁 심처에 갑자기 나타나서.
“……농담인가?”
“농담 아닌데요, 어르신.”
어처구니없어하는 검제의 질문을 루나는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받았고.
“……그래, 모르스를 이해하려고 하는 내가 바보지. 그럼.”
그 눈빛은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검제를 설득했……. 아니, 포기하게 만들었다.
정확히는, 검제의 관심이 다른 쪽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말 짧게 하는 것도 확실히 고친 것 같고……. 자네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때? 오랜만에 대련 한번 해 보겠나?”
그 말에 조금 전까지 육아를 운운하던 루나 역시 눈을 빛냈다.
“바라던 바입니다.”
물론 그 엉뚱한 전개에 한 소년은 반발했다.
“외조부님?”
“아, 황자님. 검술 교육 한 시간 하는 것보다 이거 보는 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예?”
“느낌만 기억해 두세요. 느낌만.”
검제는 손자가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면서, 그의 등을 떠밀어 엄마에게 보냈다.
그리고.
“굳이 자리를 옮기지 않아도 되겠지?”
“진심으로 하실 거 아니잖아요, 어르신. 서로 ‘확인’하고 싶은 거 아닌가요?”
“……그렇지.”
싱긋 웃은 검제가 손을 드는 순간, 황실의 정원에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오러의 막이 만들어졌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이들이야 9대 기사 중 최강이라 불리는 검제가 하는 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루나만큼은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넘어서셨네요.”
“그걸 알아보는 자네도 역시.”
“이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아시죠? 우리 둘 다 말이에요.”
“……그럼. 물론이지.”
검제의 쓴웃음을 끝으로, 둘은 서로만 이해하는 대화를 끝내고 잠시간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사라지는가 싶더니.
쩌어어어어엉!
굉음과 함께 오러의 막이 한차례 크게 출렁였다.
“어머니!?”
놀란 황자가 동생을 안고 있는 클로이의 앞을 보호하듯 가로막았지만.
클로이는 그런 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뒤에서 꼭 안아 줄 뿐이었다.
“괜찮다. 괜찮아, 타이.”
“하, 하지만 지금 엄청난 힘이…….”
클로이 역시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네 외조부께서 하시는 일이란다. 걱정할 필요 없어.”
그리고 그렇게 모자가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거대한 오러의 막 안의 두 사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연달아 격돌하고 있었다.
쩌저저저저정.
마나에 재능을 가진 황자나 그림자들은 순간순간 출렁이는 오러의 막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릴 정도였지만.
정작 그 안에서 격돌을 하고 있는 두 초인의 표정에는 옅은 미소만이 어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쯤이면…….”
“……충분하네요.”
나직한 두 목소리가 교차하고.
스르르륵.
검제가 만들어 낸 오러의 벽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리고 안에서 엄청난 충돌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정원에 피어 있는 모든 꽃들은 한 치도 상하지 않았으니.
마나나 검술에 조예가 깊은 이가 아니라도 모두가 놀랄 만한 상황이었다.
오직 두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타이니 녀석 짓이겠지?”
“그것 외에는 없겠죠. 원래 안 되는 거라고 했으니까요.”
“그럼 왜 그랬을까?”
“……저야 모르죠.”
“뭐, 들은 거라도 없나? 녀석이 사라지기 전에.”
“아. 제가 한창 아이 갖기 힘들어서 신경이 날카로웠던 때라, 마음 좀 편히 먹으라는 말은 들었어요.”
“하, 그거 말고…….”
검제는 꽤나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잠시 머리를 굴려 봤지만, 딱히 답이 나오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
“아, 남편은 벽을 못 넘었어요. 그러니 뭔가 다른 조건이 있는 것 같아요.”
“조건? 자네와 나만 충족했을 만한 거라면…….”
“피가 가깝거나…….”
“아니면 그 운명에 깊게 관여했거나. 그 정도겠군.”
“무슨 차이일까요?”
“필요해서겠지.”
“예?”
“녀석에게 필요하니 뭔가 한 거겠지. 나는 그 이유가 새삼 걱정이 되는구만.”
“그럴……까요?”
“아니면, 달리 짐작되는 거라도 있나?”
“그냥, 선물?”
고개를 갸웃하는 루나를 보며, 검제는 자신도 모르게 또 이를 갈았다.
“그럼 그렇지. 내가 모르스의 종자들이랑 무슨 대화를 하겠다고…….”
“그거 인종 차별이에요!”
“사실이 그런데 차별은 무슨! 하다못해 가문 차별이라고 해라! 이 빡대가리들!”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참다못한 검제가 폭발하면서 마무리되었고.
“이 노인네가…….”
우우우웅.
이번에는 사신이 만든 검고 투명한 막이 정원을 감싸기 시작할 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검술 수련은요!!?
”한 소년이 떼를 쓰는 목소리가, 그들의 대립을 중단시켰다.
“끙……. 나중에 하세. 손자부터 봐줘야겠구만. 그래서 황궁에 얼마나 있을 건가?”
“남편 소식 들을 때까지요.”
“남편? 아르곤?”
“예.”
“그 녀석이 왜?”
“어디서 그을음 예언가 하나 주웠다고 신나서 외박 중이거든요. 잡히면 죽일 거예요.”
“……내가 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면 안 되겠나?”
“거봐요. 자기도 잘 못 알아들으면서…….”
“아니, 자네가 전후 과정을 모조리 생략하고 말을……! 끄으응.”
검제는 다시 분통을 터트리려다가도 울먹이는 손자의 얼굴을 보며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화내 봤자 나만 열 받지.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후우우…….”
그리고.
“외조부님?”
“으음. 할아버지 화 안 났어요. 그럼. 괜찮아요. 근데 잠깐만 기다려 줄래요, 황자님? 이제 정말 잠깐이면 돼요.”
“……예.”
“자, 루나 양. 처음부터 자세하게 하나씩 말 좀 해 주겠나? 아르곤이 어딜 갔다고?”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힌 그가 다시 한번 침착하게 물었고.
“아, 그게…….”
그렇게 시작된 루나의 말이 길게 이어지자.
검제의 표정은 황망함에 굳어졌다.
“아니, 그럼 자네들 딸은?”
“영지에 잘 있죠.”
“그런데 딸을 두고, 여기에 와 있겠다고? 차라리 영지에서 기다리는 게…….”
“……믿을 만한 사람이 있어요. 내키진 않지만, 그 사람도 용서받을 핑계가 필요할 테니까.”
루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 그 말은 역시나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만약 제국 쪽으로 아르곤이 다시 온다면, 소식은 금방 들어올 건데. 이거 나도 궁금하긴 하군. 해머교라…….”
검제는 루나의 말에 꽤나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같이 가시게요? 아버지! 제나스 경을 돕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이게 그 해결을 위한 길 같기는 하단 말이지.”
클로이의 만류를 뿌리친 검제의 말에 루나도 관심을 표했다.
“도와주시는 거예요?”
“음. 블랙윙에 알려 놓으마. 아르곤이 제국 안으로 들어온다면 행선지 정도는 금세 알 수 있을 거야.”
사실상 현 황실보다 강한 영향력과 힘을 가진 발렌티아의 가주가 하는 말이었으니.
루나의 입가에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