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12
12화. 라프탄
‘젠장, 이건 안 봐도 뻔해. 전멸이다.’
라프탄은 마을 곳곳에 나타난 3~4m 크기의 그을음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대충 보이는 놈들만 얼추 50여 마리.
백 호가 될까 말까 한 규모의 마을에 저 정도 그을음이 돌아다닌다면, 이미 모든 게 파괴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바로 돌아설 수 없었다.
‘놈들이 서로 합치지 않는 건, 아직 근처에 살아남은 인간이 있다는 거야. 어딘가에 숨어 있어.’
그걸 아는데 어찌 그냥 갈 수 있을까.
‘그렇지, 라미?’
– 컹!
아직 현신하지 않은 영혼의 파트너 역시 그 생각에 동의를 표했다.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자신의 삶을 바꿔 준 은인, 감히 친구라고 한 번 불린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되는 남자의 모토.
그 말을 따르기에는 이미 과거에 남긴 부끄러움이 많았지만.
적어도 그를 만난 이후로는, 떳떳한 삶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니.
‘라미, 합신!’
– 컹!
영혼의 파트너를 외부가 아닌 자신의 몸 안에 현신시킨 그의 덩치가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마치 사자형 수인족이 된 것처럼, 온몸에 힘이 넘치고 마나가 끓어오르는데.
라프탄은 그 상태에서 바로 의태를 풀었다.
그 순간, 마을을 배회하던 그을음들의 텅 빈 눈동자가 일제히 그를 향했다.
– 고오?
– 그오오?
– 그오!!
쿵. 쿵. 쿵.
하나둘씩 그를 향해 뛰어오는 그을음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모자랐다.
라프탄은 그대로 숨을 들이켜고는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내가 시선을 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도망쳐!!!”
그 고함에 담긴 ‘피어’의 권능이 마을 전체에 퍼져,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던 그을음의 주의를 마저 끌어모았다.
– 그오오오오!
‘성공!’
이성이 있는 적에겐 전혀 통하지 않을 유인책.
하지만 그동안의 수없는 경험상, 그을음들은 결코 사리를 따져 가며 인간을 습격하지 않으니.
피어에 자극받은 그을음들은 마을을 벗어나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지만, 그리 겁이 나지는 않았다.
‘이 정도 수에 내가 당하지는 않아. 난 스피릿 유저다!’
희귀한 정령사 중에서도 무려 7단계에 오른 초인.
“우와아아아!”
기합을 지르는 즉시, 그의 키와 덩치가 그대로 열 배 넘게 부풀어 올랐다.
단순히 몸의 부피만 커진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근력과 체중까지 고스란히 증가한 라프탄의 모습은 가히 거인이라 할 법했으니.
거기다.
‘부분 의태.’
쩌저저저정.
그는 손과 발, 급소 등의 피부를 강철화해 최악의 상황에까지 대비했다.
그리고.
“전부 꺼져!!!”
꽈아아앙!
이제는 한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조그마한 그을음들을 발길질 한 방에 날려 버렸다.
– 그오?
“내가 바로 거인 기사다!!”
라프탄은 마계 대전 말미의 전투에서 얻은 이명을 자랑스레 소리치며, 계속해서 그을음들을 유인했다.
그리고.
꽈아아아앙!
쾅!
콰아앙!
잡히는 족족 패대기치고 두드리며, 거침없이 놈들을 박살 냈다.
그러나 그도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저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젠장, 젠장! 젠장 맞을 놈들!’
그의 발길질에 수십 미터 이상 나가떨어진 소형 그을음들이 하나둘씩 다시 일어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한 모습.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그을음은 오러나 그에 준하는 대마법에만 타격을 입는다.
스피릿 유저 역시 오러유저와 같은 7단계였지만, 그의 능력은 그 파괴의 권능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하지만 거인화한 육체는 그을음들을 유인하는 데만큼은 확실한 효과가 있었는데.
– 그오오오오오!
그때, 놈들도 이젠 어쩔 수 없다 싶었는지 서로 뭉쳐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 그오오오오오!
50여 마리가 합쳐진 결과, 그을음은 라프탄과 비슷한 크기의 거인이 되어 있었다.
그를 제대로 잡아먹기 위함이었다.
‘또 욕 좀 먹겠군.’
어차피 합체했을 놈들이지만 자신이 그 시기를 확 당겨 버린 것이나 다름없으니, 아마 지평선 안쪽 마을에서는 저 거대 그을음의 모습을 보고 난리가 났을 터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마을 안쪽에 남아 있던 아이들 몇 명이 남쪽으로 대피하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는 것.
‘그래, 잘했어. 이제 나만 살면 된다.’
라프탄은 이를 악물며, 다가오는 그을음을 향해 돌진했다.
쿵. 쿵. 쿵.
콰드드드득.
그리고 막무가내로 손을 뻗어 오는 놈의 몸 안쪽으로 파고 들어간 뒤, 그대로 팔을 잡고 업어 쳤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릉.
지진이 난 듯한 충격이 들판 전체에 퍼져 나갈 때.
라프탄은 쓰러진 놈의 몸 위에 올라타 펀치를 퍼부었다.
“좀!”
꽝!
“뒤져라!”
콰앙!
“망할 것들아!”
꽈아아아앙.
사정없이 두들겨 패 보지만.
– 그오오오오!
“X발!!”
역시나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은 듯한 모습이 너무나도 짜증 났다.
하지만 경험상 알고 있었다.
이쯤에서 그만해야 한다는 걸.
거대화와 의태, 피어까지 연달아 써 가면서 놈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초반뿐.
이 능력이 다하는 순간, 자신도 저놈들에게는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는 것을.
그러니.
“이거나 먹어라!!”
거대 그을음이 몸을 일으킨 순간, 라프탄은 최대한의 마나를 동원해 놈의 발목을 붙잡았고.
– 그오?
“그오는 지랄!”
쿠우우웅.
그대로 놈의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그리고 최대한 사람이 없을 만한 공간을 향해 집어 던졌다.
휘리리릭.
‘됐다!’
인적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평야의 한가운데에 거대 그을음을 던져 버린 라프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정도 크기라면 제나스 경이 볼 거야. 틀림없어.’
블루윙 단원 300명에게 오러를 동기화시킬 수 있는 북풍의 기사의 ‘절대 영역’은 그을음을 상대하는 데 최적화된 무기였으니.
‘이제는 나만 살면……. 음?’
그렇게 거대화를 풀고 몸을 줄이던 라프탄의 눈에, 보여선 안 되는 것이 보였다.
자신이 그을음을 던져 버린 곳 근처의 밭에 숨어 있던 아이들 몇 명.
공포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뛰어가는 그 모습에 라프탄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젠장!!”
X발,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재수 옴 붙은 인생.
“제엔장!”
라프탄은 욕설을 내뱉으며 다급히 내달렸다.
쿵. 쾅.
쿵. 쿵. 쾅.
우르르르릉.
작아지려던 육체를 다시금 거대화시키며 마나를 미친 듯이 끌어 올렸다.
그리고.
“날 봐라!!!! 이 새끼야!!”
피어의 권능을 한껏 동원해 목소리를 키우고.
바닥에 잡히는 적당한 바위(?)를 그을음을 향해 집어 던졌다.
콰아아아앙!
– 그오?
다행히 그것이 먹혔는지, 아이들을 향해 눈을 돌리던 그을음이 다시 그를 보기 시작했다.
‘진짜, 진짜 마지막이다. 더 힘을 낭비하면 도망치지도 못해.’
무슨 마계의 귀족들도 아니고 지성도 없는 저런 괴물한테 먹히는 최후라면, 쪽팔려서라도 사양이다.
저런 놈들에겐 거창한 기술 따위도 필요 없다.
라프탄은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거대화한 온몸의 체중을 고스란히 실어, 그을음을 향해 두 발을 모아 힘껏 걷어찼다.
꽈아아아앙!
‘됐……. 윽?’
그러자 그대로 나가떨어지는가 했던 그을음이, 가까스로 균형을 잡더니 갑자기 팔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억!?”
그의 거체가 휘리리릭 날아올라 반대편 들판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그 순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대로 소형화하는 것뿐.
스르르륵.
– 구어?
한순간에 손아귀가 허전해진 그을음이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가벼워진 만큼 더욱 거세게 날아간 라프탄의 몸은 수백 미터의 허공을 가른 끝에 맥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마나 소비도 심했고 온몸에 피로감이 가득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선방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추락 지점을 살피다가.
“억!?”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그곳에, 자신을 집어 던진 놈보다 두 배는 큰 거대 그을음이 나타나 있었으니까.
심지어.
– 그오?
그 커다랗고 텅 빈 눈이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기까지 하는데.
“그오는 얼어 죽을!!”
– 그오오오오.
멍하니 손을 뻗어 오는 그을음을 보며, 라프탄은 황급히 의태를 사용해 투명한 날다람쥐 형태로 변해 바람을 탔다.
휘리릭.
파아아아아앙.
그리고 거대한 그을음의 손을 피해 그 뒤쪽으로 낙하하려는데.
“이런 X발!?”
조금 떨어진 곳에 비슷한 크기의 거대 그을음이 있는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 뒤에 있는 또 다른 한 마리까지, 총 세 마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지금까지 3년간 그을음과 싸워 오며 얻은 경험 지식이 전부 쓸모없어진 느낌.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다급하게 하는 것은, 그 그을음들이 쳐다보는 방향이었다.
수백 미터를 날려 온 지점에서 멀리 보이는, 지평선 근처의 커다란 마을.
이곳 오렌 평야에서도 제법 큰 축에 속하는 듯 거의 천여 호는 될 법한 그 마을에, 그을음들의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 그오오?
– 그오오오오!
‘안 돼! 절대 안 돼!’
이 거대 그을음들이 저곳의 사람들을 먹고 더 커지면?
그 뒤에 서로 합체라도 한다면?
최악의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리고.
– 어쩌라고. 난 할 만큼 했어!
– 여기서 더 하면 내 목숨이 위험해!
– 냉정하게 생각하자, 냉정하게. 일단 자리를 피한 뒤 도움을 청하는 게 맞아.
머릿속을 연달아 울리는 이성의 소리와.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얼토당토않은 억지 신념, 그것도 남이 심어 준 신념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이성의 부름을 따라야 할 텐데.
그 ‘무식한’ 신념이 라프탄의 마음을 흔들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 냈을 때의 만족감이 떠오르며 그의 이성이 마비되고 말았다.
결국.
“제기라아알!!!!”
투명화해서 땅에 착지하려던 그의 몸이 다시금 크게 부풀어 올랐다.
쿵.
그그그그극.
그대로 발을 딛는 순간 땅에 거대한 고랑이 파이는데.
그럼에도 그를 쳐다보는 거대 그을음은 셋 중 한 마리뿐이었다.
자연히.
“날 봐라! 이 타이니보다 멍청한 것들아!!!!”
또다시 피어의 권능을 사용해 놈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나가 한순간에 빠져나가는데.
– 그오오?
“그래, X발 날 보라고!!”
놈들의 시선을 끌었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라프탄은 뒤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놈들에게 숫자로 밀리는 상황이었으니, 급박한 마음에 반대편으로 피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린 거였는데.
갑자기 눈앞에 시커먼 것이 보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쿵. 쿵. 쿵.
“젠장!!”
처음에 자신이 만들어 냈던(?) 비교적 작은 그을음이 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나.
‘젠장, 진짜 할 만큼 했다. 나는.’
이 난리를 봤으면, 사람들은 알아서 도망쳤겠지.
충분히 보일 덩치니까…….
이를 꽉 문 라프탄은 그대로 몸을 낮춰, 전면에서 다가오는 그을음의 가랑이 사이를 향해 슬라이딩했다.
– 그오!!
그을음이 자세를 낮춰 손을 뻗어 오지만.
그 움직임보다, 라프탄의 덩치가 작아지는 것이 훨씬 빨랐다.
휘리리리릭.
‘블루윙이 최대한 빨리 와야 할 텐데.’
그리고 이내, 그을음의 가랑이 사이를 통과한 라프탄이 푸르른 밀밭의 환경에 의태하며 몸을 숨기려던 순간.
번쩍.
한순간에 어디선가 비쳐 드는 노을빛에, 그는 상황도 잊은 채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는 기대했던 블루윙 대신 나타난 노을빛 불꽃이 자신이 지나쳐 온 그을음을 불태워 가는 것이 보였다.
“타이니……!?”
기다렸던 이의 등장인가 싶었지만.
“……가 아니, 야?”
그 익숙한 노을빛의 성화는, 하늘에 떠오른 검은 머리 소녀의 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