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20
20화. 종말의 사도
“……자기도 알고 싶지 않았다고 그러더군요. ‘너한테도 책임이 있으니까 돌아오면 싸대기 한 대 정도는 각오해.’ 라고 하면서 떠났습니다.”
크롬벨이 피식 웃으며 한 대답에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타이니가 떠난 이유는요? 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검제가 입을 열었지만, 아직 크롬벨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제 이야기를 더 듣다 보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 아직 끝난 게 아니었나요?”
“예. 아시다시피 저희는 마계 대전을 종식시켰습니다. 소멸의 주체가 되어야 할 마왕을, 1차 마계 대전 때처럼 패퇴시킨 것도 아니고 아예 없애 버렸지요. 우리와 그 타이니 경이 말입니다.”
“아…….”
“심지어 타이니 경은, 그 후에 마계와 천계의 연결마저 끊어 버렸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으로 우리 세계가 오롯이 존재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는군요. 물론 저도 동의했지만 말입니다만.”
“그럼…….”
“예. 그게 세 번째로 창세를 비틀어 버린 원인이 되었다더군요.”
“뭐야? 그럼 그놈도 한몫했네. 근데 왜 남을 팬데?”
“남편…….”
“악! 꼬집지 마! 농담이야, 농담! 분위기 좀……. 하. 하. 죄송합니다. 헛소리였슴다.”
아르곤이 주변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자, 모두가 한 번씩 피식 웃고는 다시 크롬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그을음과 그 인과율의 비틀림이 어떻게 관련이 있는 겁니까?”
“타이니 경의 말로는, 창세가 그렇게 세 번이나 비틀어지면서……. 후…….”
“비틀어지면서?”
크롬벨이 망설이는 것 같자, 검제가 뒷말을 재촉했다.
그러자.
“우주의 의지가, 우리 세상의 소멸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예?”
“뭐?”
“지금 뭐라고……?”
뒤이어 튀어나온 말에,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커졌다.
“우리 세상을 우주의 바이러스, 일종의 질병으로 판단하고 제거하려 한다는 겁니다. 그 결과가, 파괴의 권능인 오러나 그에 준하는 힘이 아니면 소멸시킬 수 없는 그을음으로 나타난 겁니다.”
“허어…….”
검제가 탄식을 뱉어 내는 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
멍하니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초인들은 잠시 후에야 다시 크롬벨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럼 타이니는……?”
그 질문에 다시금 크롬벨의 안색이 일그러지자.
여태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에리나가 대신 대답했다.
“타이니 아저씨는 차원의 장벽 너머에서 우리 세상에 진입하는 그을음들을 처치하고 계세요. 에스티나 언니랑 같이요.”
타이니의 사도, 그리고 ‘그’ 검은 머리 성녀.
에리나는 그런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그녀에 대해 일종의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예? 그을음은 이미 나타나고 있잖습니까? 차라리 그럴 거면 세상에 남아서 직접 때려 부수는 게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 검제조차도 어린 소녀를 향해 정중히 존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이니 아저씨 부부가 차원 밖에서 박살 내고 있는 그을음들 중 극히 일부, 그러니까 두 분의 저지를 뚫은 1% 미만의 개체만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거예요. 저는 다 볼 수 있어요. 그것들이 전부 나타나면 이 세상이 어찌 될지를. 또 두 분이 얼마나 애쓰고 계시는지도요…….”
그 말에 다시금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럼 우리한테 도움이라도 청해야지. 왜 혼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 아르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차원 밖에서 생존이나 전투가 가능한 건, 신과 그 반려인 그분들밖에 없어요. 여기 계신 크롬벨 아저씨도 안 되는 거라고 그러셨어요.”
그 말을 듣고는 머리를 감싸며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친놈…….”
“그랬구나. 동생이 혼자 애쓰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누난데…….”
고개 숙인 아르곤 부부의 탄식이 다시금 방 안에 침묵을 불러왔고.
모두가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럼, 이 마법진은 무엇을 위한 겁니까?”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티네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꺼낸 말에 크롬벨에 답했다.
“그을음을 굳이 정확하게 명명하자면, 종말의 사도 정도로 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종말의 사도…….”
“……이제 곧 그 종말의 사도 중 가장 큰 파편, 마지막 사도가 우리 세상에 강림할 겁니다. 그놈이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일으키기 전에, 인적이 없는 드문 곳으로 강림 좌표를 고정하기 위해 만든 마법진입니다.”
“아. 그래서 그런 구조물을…….”
한 달 내내 그 마법진을 구축해 온 아르곤이 그제야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다가.
“가만? 그게 마지막 사도라면, 타이니가 돌아와서 상대하면 되잖아. 우린 그럼 좌표 고정 마법진만 만들면 끝이네?”
희망에 찬 표정으로 꺼낸 그 말에, 다시 방 안의 분위기가 확 밝아졌다.
불굴의 신, 광휘의 기사.
타이니가 마왕을 상대할 때 보여 주었던 무위는 에리나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자 유일하게 웃지 않은 에리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꺼냈다.
“아니요. 그때 타이니 아저씨는 종말을 상대하셔야 해요.”
“응? 아니, 그래서 우리가 그놈의 강림 위치를 고정한다는 거잖아.”
“아니요. 종말의 사도가 아니라, ‘종말’이요.”
“…….”
이해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이해해 버린 순간, 아르곤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종말의 마지막 사도를 상대하는 동안, 타이니는 종말 자체를 상대한다고?”
차라리 내가 잘못 알아들은 거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반문해 봤지만, 에리나는 애석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힘드실 거래요. 하지만 꼭 막아 내실 거니까, 마지막 사도는 지상에서 처리해 주셔야 해요. 반드시.”
그 말을 하는 에리나의 눈에는 노을빛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세 분’께 일시적으로 벽을 허물 수 있는 카르마를 전했으니까 부탁한다고도 하셨고요.”
에리나가 바라보는 세 사람.
크롬벨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검제와 사신이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한 기색이었다.
“뭐야? 그게? 아니, 설마 벽을 허물 수 있는 카르마라는 게……?”
아르곤이 놀란 표정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자, 검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짐작하는 게 맞을 거다.”
“아니, 그럼 난 왜!?”
어쩐지 굉장히 억울해하는 듯했지만, 지금 그에 호응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아무나 되는 게 아닐 거야. 난 혈연이고, 크롬은 원래 카르마 활용에 능숙했어. 영감님은 타이니의 운명을 바꾼 카르마의 인도자라서 가능한 거고. 그조차도 아마 이 재앙이 끝날 때까지겠지만.”
“그래도 부러운데……. 한번 경험한 것은 차이가 클 거 아냐.”
“그래서 뭐!? 이 상황에 남편 투정 들어 달라고 타이니를 조를까?! 차원 바깥에서 3년 동안 쉬지도 않고 싸우고 있다는 동생한테?!”
“아, 아냐. 미안해…….”
그 아내조차 편을 들어 주지 않자, 아르곤은 조용히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크롬벨이 한마디 더 보탰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일시적으로 벽을 넘고 신성에 닿게 만들어야 할 정도로 위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지요.”
“그러니까 더더욱 인적이 없는 해양으로…….”
“그러려면 여기 마도사 분들과, 무엇보다 아르곤……. 자네가 제대로 해 줘야 해.”
검제까지 말을 덧붙이며 그를 띄워 주는 순간, 아르곤은 언제 침울했냐는 듯 다시 어깨를 펴고 있었다.
“그럼, 맡겨만 주시죠. 티네스 님, 록펠러 님, 조력 확실히 부탁드립니다.”
“허허. 물론이네.”
“이 말년에 또 이런 이벤트를 겪게 될 줄은 몰랐구만. 정말 세상이 어찌 되려고……. 아, 물론 잘 해결될 거라고 믿네. 허허.”
티네스가 불길한 말을 꺼내다가 황급히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이미 단합된 분위기를 흐트러트릴 수는 없었다.
“……이 고비를 넘기고 나면, 이 불완전한 세상을 안정화할 방도도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그건 …….”
에리나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모두의 눈에 다시 불안감이 깃드는 순간.
크롬벨이 에리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돌렸다.
“……어, 그건 다음에 듣는 게 낫지 않을까?”
“아……. 예.”
“또 뭐가 있는 거야?”
“이게 마지막 고비라며?!”
루나와 아르곤이 그런 그들을 보며 물었지만.
크롬벨은 쓴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마지막 맞아. 그 후의 일은 위험하지는 않을 테니까.”
위험하지는 않다.
그 말이 왜 이리 위험하게 들릴까.
“그럼, 왜 말을 안 해 줘?”
“당장은 종말의 사도에 집중하자는 의도다. 뒷일 생각하면서 만만히 넘어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닐 거야.”
“아니 뭐, 설마 그 종말의 사도가 마왕보다 세지는 않을 거 아냐?”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루나의 물음에 답한 크롬벨의 한마디에 다시금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자. 재료가 다 모였으니, 다시금 마법진 확인부터 합시다. 강림하려는 그 종……. 아니, 거대 그을음의 좌표를 고정하는 것부터. 아르곤 경이 주축이 되면 되겠지요?”
최연장자 티네스의 한마디에, 다시금 그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타이니 아저씨의 의도대로 된다면 세상은 격변할 텐데요. 미리 준비라도 하시는 게…….”
방을 나선 에리나의 말에 크롬벨은 그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게 나아. 우리 말고는.”
“왜 그런 거죠? 다 믿을 수 있는 분들 아니에요?”
에리나가 검은 눈동자에 순수한 마음을 담아 되묻자, 크롬벨은 한숨으로 대답했다.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 하지만 우리와는 달리 다 저마다 소속이 있는 사람들이야.”
“그 말씀은…….”
“의도치 않게 그 얘기가 주변에 새어 나갈 수도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렇게 세상이 움직이면, 가뜩이나 그냥 둬도 복잡해질 상황이 더욱 복잡해져. 그러니 에리나…….”
“네, 말하지 않을게요.”
“그래. 그거면 됐어.”
“그런데 아저씨.”
“응?”
“예전부터 왜 대답을 안 해 주세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크롬벨이 흠칫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뭐, 뭘……?”
“분명히 전 타이니 아저씨랑 크롬벨 아저씨를 예~엣날부터 아는 거 같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아저씨들도 맞다고 했잖아요. 제 느낌이 틀린 게 아니라고요.”
“그, 그랬지.”
……또 이거다.
큰일 났다.
“타이니 아저씨는 제가 전생에 아저씨 누나였다고 말해 줬는데, 아저씨는 왜 무슨 관계였는지 말 안 해줘요? 자꾸 피하기만 하고.”
“아. 그게…….”
전생엔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어리기만 한 열여섯 살의 소녀를 바라보는 크롬벨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왜 또 갑자기 땀을 뻘뻘 흘리시고…….”
“음. 그, 그게……. 말했잖아. 전생의 동료였다고.”
“그러니까, 무슨 동료냐고요?”
“동료가 동료지 무슨 동료야!!”
“아, 또 그 소리! 2천 년 전 옛날 1차 마계 대전 당시의 이야기는 아무리 찾아 봐도 남아 있지 않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말해 줘요! 궁금하다니까요!! 아님, 나 여기서 드러눕는다? 아, 아니다. 아예 종말을 물리치면 그 뒤에 세상이 어찌 될지 떠들고 다……!”
몇 번이고 보았던 그녀의 생떼가 시작되려는 찰나.
“아, 알았어!!”
“……닐리는 없지만. 헤헤, 말해 줄 거에요? 진짜루?”
귀엽게 웃는 소녀를 보며 크롬벨은 다시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가…….”
“내가?”
에리나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은 마치 그 시절의 그녀가 그대로 어려진 것 같았다.
그 고난의 시절, 말세의 와중에도 희망을 갖게 만들어 주었던 눈빛.
하지만.
‘……그 추억은 나에게만 있다.’
너무나도 어두운 나날들이었기에, 그만큼 더욱 빛났던 그녀.
그녀는 눈앞에 있는 소녀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속에,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아저씨? 자꾸 말 안 할 거예요?”
눈앞의 소녀가 그 추억을 기억해 내지 못하는 한, 당시의 일은 언제까지나 혼자서만 간직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그러니까, 내가 다음에요!”
그럼에도 이 눈빛을 볼 때마다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크게 신세를 진 적이 있어, 너한테.”
진심으로, 크게 빚을 졌다.
자신도 모르게 진실의 일부를 토해 냈지만.
“아니, 그게 뭐야. 진짜!”
당연하게도 소녀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고.
고대의 용사이자, 현대의 용사인 그는 다시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