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21
21화. 에리나
“자자, 거기 조심!”
“아가씨, 비켜요.”
거대한 짐마차가 흔히 보기도 힘든 마법 재료들을 한가득 싣고 달려오고 있었다.
드르르르륵.
“왼쪽!”
쿵. 쿵.
“거기 쌓아 놔!”
우르르릉.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공동의 작업을 진행하는 모습.
에리나는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이 신기했지만, 이제는 지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재미없어…….’
할 일이 없고 심심하니 자연스레 과거가 떠올랐다.
어린 날의 그 순간, 타이니와 크롬벨 아저씨를 만나고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오르던 그날 이후.
불행만 가득했던 그녀의 삶은 완벽하게 바뀌었다.
‘그때가 좋았는데…….’
에리나는 당시 공작가를 떠나 엘븐하임으로 떠났고.엄마와 타이니 아저씨 부부, 그리고 크롬벨 아저씨와 엘프들이 지키는 그 이상향에서 아주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다만 딱 하나의 아쉬운 점이라면, 그녀가 자라는 동안에도 엘프 친구들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는 것.
‘르무엘도, 하루엘도 아직도 애기 같다고. 쳇, 귀엽긴 한데…….’
인간과 엘프의 성장 속도 차이는 주변에서 또래의 친구들을 앗아 갔고.
자연히 그녀가 이야기하며 놀 상대는 어른들밖에 없어졌다.
그나마 언제나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는 엄마, 친절한 타이니 아저씨와 에스티나 언니, 그리고 무뚝뚝하지만 자신의 말에 항상 귀 기울여 주는 크롬벨 아저씨가 있어서 크게 외롭지는 않았지만.
3년 전, 타이니 아저씨 부부가 심각한 재앙을 막기 위해 사라지면서부터 그녀의 일상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북부의 수림에서 크롬벨 아저씨와 수련만 계속해 온 지도 3년.
무뚝뚝하기는 해도 잘 챙겨 주고 이상하게 따뜻한 마음이 드는 크롬벨 아저씨가 싫지는 않았지만.
항상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아서 섭섭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엘븐하임에라도 갔다 올걸.’
이제는 그 크롬벨 아저씨도 저 거대한 마법진을 작동시킨다고 안 놀아 주니, 심심하기까지 했다.
치.
“엄마 보고 싶다…….”
괜히 서운한 마음에 발로 땅바닥에 그림만 그리고 있을 때.
“심심하십니까, 성녀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획 돌아본 곳에는 새하얀 머리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 공작 할아…….”
그 따뜻한 웃음이 오래된 기억 속, 어린 시절 처음 받아 보았던 환대를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눈앞의 할아버지가 그 당시처럼 친근하게 대할 수 없는 신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 각하. 아, 안녕하세요.”
실수를 했다 생각했는데.
“하하. 저는 할아버지라 불리는 게 더 좋습니다만?”
그 푸근한 미소가 다시 그녀를 배시시 웃게 만들었다.
“예! 그럼 저도 성녀 말고, 그때처럼 에리나라고 불러 주세요. 할아버지.”
“음 그럴까? 허허, 사실 나도 조금 어색하긴 했거든.”
“네! 좋아요!”
처음으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줬던 남자 어른.
어릴 땐 목마를 태우고 놀아 주던 할아버지.
에리나는 오랜만에 떠오르는 옛 추억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
그런데.
“왜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이 할애비한테 말해 줄 수 있겠니? 엄마가 보고 싶은 거니?”
“아…….”
그 할아버지가 부끄러운 것을 캐묻자 괜히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우리 아가씨가 왜 엄마가 보고 싶을까? 에리나, 주변에서 섭섭하게 대했더냐?”
하지만 따뜻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를 보니 조금 용기가 났다.
“아뇨. 다들 잘 대해 주세요. 지금 바쁜 것도 이해하고요.”
“그런데?”
“그게…….”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 두었던 감정이 조금씩 풀려나왔다.
“……엄마 말고는, 다들 저를 다른 눈으로 보니까요.”
아, 내가 그랬구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음?”
“……전생의 제가 어떤 일을 했는지, 저는 몰라요. 그런데 타이니 아저씨도 크롬벨 아저씨도, 지금의 저보다 전생의 저를 보면서 대하는 것 같아요. 엄마 말고는,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저를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정말…… 싫어요.”
그렇게 한번 말문이 열리고 나니, 속마음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저는 그냥 아저씨들한테 도움만 받은 에리나인데, 자꾸 저한테 고맙다고 그러고, 감사한다고 그러고……. 만나는 분들마다 저한테 신세를 졌다고 그러고. 흑……. 저, 저는 전생의 그 사람이 아닌데……. 흐윽. 나는 그 사람이 될 수 없는데, 어쩌라고요. 끄읍.”
결국 왈칵 눈물까지 쏟아지고 나서야, 스스로 마음속에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어린 마음에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쌓아 왔던 부담감.
“그래서……. 엄마가 보고 싶었나 봐요. 크응. 죄송해요, 울어서. 울면 안 되는데.”
그 모습을 안쓰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검제는 고개 숙인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아니다. 울고 싶으면 울어야지. 울음은 담아 두면 쌓인단다. 그리고 그게 큰 병이 되는 거야.”
“……그런데 제가 울면, 주변에서 난리가 나요. 그래서 울면 안 되는데.”
“……타이니 녀석이 과잉 보호를 한 모양이구나. 쯧쯧.”
“아니에요!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 저 웃게 하려고 뭐든 하셨어요!”
“그래, 그걸 과잉보호라고……. 아, 물론 그게 다 널 아끼는 마음이라는 건 알고 있지?”
“……예. 하지만 그건 저한테서 다른 사람을 보고…….”
“하하. 아니, 아닐 거란다. 얘야.”
“……예?”
“혹시 날 처음 만났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니?”
“……예.”
“그때 이 할애비가 네가 누군지 알아서 잘해 줬던 걸까?”
“……아!”
에리나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며 검제는 다시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는, 너란 아이는 그때도 아주 사랑스럽고 귀여웠단다. 타이니도 크롬벨 경도, 결코 전생의 너만 보고 널 아끼는 것은 아닐 거야. 그건 이 할애비가 장담할 수 있어.”
그 미소를 보는 에리나의 눈동자는 점점 흔들리다가, 이내 다시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직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눈물.눈물이 흐르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 아저씨, 근데 왜 내가 아저씨 누나예요? 내가 훨씬 작은데요?
– 으음? 아, 그건 네 전생에…….
– 그런데 생각이 안 나요. 저도 기억하고 싶은데…….
– ……떠올리지 않아도 돼. 아니, 기억 안 했으면 좋겠다.
– 예?- ……누나는 참 힘겹게 살았거든, 난 네가 굳이 그 힘겨운 기억을 갖길 바라지 않아.
문득 목마를 태운 자신에게 안쓰러운 듯 당부하던 타이니 아저씨의 목소리가 떠올랐고.
– 그러니까, 무슨 동료였냐고오오!!
– 그냥 동료! 서로 목숨을 구해 주면서 싸운 동료! 됐냐!
– 치, 맨날 그 말뿐이야. 치사하게……. 내가 서러워서라도 반드시 기억해 내고 만다.
– ……그럴 필요 없어. 아니, 그럴 수 있어도 그러지 마.
– 예?
– ……너무 힘든 시절이었다, 에리나. 지금의 네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좋은 추억보다 힘겨운 기억이 훨씬 많은 날들이었어.
매번 자신을 아련하고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하던 크롬벨 아저씨의 말도 떠올랐다.
그리고.
– 그냥 네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두 사람이 똑같이 해 주었던 그 말도.
왜 여태 잊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갑자기 떠올랐다.
‘그건 전생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 한…… 말.’
그 걱정 어린 눈들은 정확히 그때의 자신을 보고 있었는데.어린 자신은, 그때부터 전생에 관한 말만 신경 썼던 것 같았다.
“감……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한번 울어 버리고 나니, 이상하게 기분이 상쾌했다.
“무얼, 누구나 해 줄 수 있는 말 가지고. 허허. 그런데 타이니 그 녀석은 자기 사도한테 이런 것 하나 신경 안 써주나? 쯧쯧, 그 녀석도 이름만 신이지 아직 애송이…….”
“아니에요!”
“깜짝이야. 갑자기?”
“타이니 아저씨는 일부러 제 마음 안 읽는댔어요! 사도의 자격을 부여해 준 것은 제 ‘비극의 카르마’를 끊어 주기 위한 거라고, 일부러 신성력도 조금만 투입했다고 하셨어요!”
어찌 되었건, 그녀는 불굴의 신의 사도.
타이니 아저씨…… 아니, 자신의 신을 타박하는 말을 그냥 웃어넘길 수는 없었다.
“……으음. 그래, 그랬구나. 할애비가 실언을 했어. 미안하다.”
그런데 그렇게 사과를 하던 검제가 문득 위화감을 느낀 듯 물었다.
“신성력을 별로 안 받았다고? 성자급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아저씨 신성력의 씨앗만 받았고, 그 이후로는 제가 수련해서 키운 거랍니다. 에헴.”
에리나는 일부러 과장해서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런 그녀를 보는 검제는 오히려 조금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검은 머리 성녀의 업이…….’
하지만 조금 전까지 전생이라는 말에 부담을 표현하던 아이한테 다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하하하. 역시 대단한 재능이구나. 그래. 성녀 소리를 들을 만해.”
“그렇죠?”
“그럼. 그러니까, 이제 슬슬 같이 가자꾸나.”
“예?”
“사실 난 널 데리러 온 거란다. 마법진의 준비가 다 끝나 가니까.”
“어……. 그런데 제가 할 일은 없을 텐데요?”
“아르곤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힘겨워하면 회복시키는 역할이 필요해. 알다시피 크롬벨 경도 이번에는 마법사로서 참여하게 될 테니까.”
“아! 좋아요! 아싸! 할 일 생겼다!”
인류의 운명을 건 상황임에도 에리나는 자신이 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검제는 싫은 소리를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기운이 넘치는 건 좋지만 들뜬 모습은 보이지 않도록 해라, 에리나. 이 대규모 마법진을 유지하는 이들도 모두 긴장한 상태니까 말이야.”
“아, 예. 알겠습니다!”
그 대답조차 너무 씩씩해서 살짝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데.
검제는 그 맑은 눈을 바라보다 문득 느낀 직감에 혹시나 하고 물었다.
“혹시, 너는 지금 이 위기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니?”
“예? 그럴 리…….”
“솔직하게.”
“사실, 네! 어차피 타이니 아저씨가 다 해결할 거니까요.”
“그건 성녀로서의 예감이니? 아니면 사도……?”
“예! 이래 봬도 저는 불굴의 신의 사도고, 당연히 신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으니까요!”
타이니가 해결한다고 했다. 그러니 믿는다.
그 단순한 논리가 검제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만…….”
“그렇게 될 거예요!”
“그, 그래. 그렇구나”
검제는 당혹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인류의 위기니 재앙이니 하는 것들도, 지금 에리나에게는 조금 크게 지나가는 바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그렇겠지. 당연히.’
신과 사도 사이인 두 사람의 그 신앙에 가까운 신뢰 관계가 이제야 피부로 와닿았다.
하지만, 괜히 속으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타이니 이놈이, 멀쩡한 애 하나를 망쳐 놨어.’
신이건 뭐건 간에, 돌아오면 단단히 따지겠다고 다짐하며.
검제는 간만에 이를 갈았다.
물론.
“그래. 그럼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갈까?”
“예!”
다시 온전하게 밝은 모습을 되찾은 불굴의 사도에겐,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