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23
23화. 동대륙
“충!”
자신을 보며 경례하는 병사들을 지나친 서일산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설마 황제 폐하께…….’
과거의 중천제일검(中天第一劍)이자 현재 동대륙 최고 고수라 불리는 자신을 이렇게 갑작스레 호출할 정도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일은 아닐 듯했던 것이다.
10년 전, 마계의 괴물들이 난동을 피울 때도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황제다.
사실 환갑이 넘은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하다 싶었지만, 서일산은 황제가 조금만 더 오래 버텨 주길 바라고 있었다.
‘지금은, 지금은 안 됩니다. 폐하.’
마족들이 날뛸 때 적전 분열을 일으켰던 황태자 이상연은 폐위되었지만, 아직 그를 대신할 후대가 정해지지 않았다.
당시에 어렸던 2황자와 3황자가 이제 성인이 되긴 했지만, 그 둘을 지지하는 세력이 서로 너무나도 비등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태자를 책봉하시고 완전히 무게를 실어 주실 때까지는 버티셔야 합니다. 폐하, 제발…….’
마음 같아서는, 성군의 자질을 보이는 3황자가 막 성년이 되었으니 그를 지지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마족이 할퀴고 지나간 상흔을 이제야 회복해 가는데, 제 형과 다를 게 없는 2황자가 연장자 승계의 원칙을 주장하고 나서면 선 제국은 개판이 되고 만다.
그러니.
“제발…….”
혹시라도 불경한 말을 뱉으면 그것이 현실이 될까, 목구멍까지 차오른 걱정을 삼키며.
초조한 마음으로 거리를 단축하듯 황궁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노쇠한 황제는 창백한 안색으로나마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선 제국의 지배자이신…….”
“그만 됐네. 일어나게, 일산.”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쿵.
황제의 만류에도 서일산은 충실히 예를 다하며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거, 사람 참……. 쿨럭. 쿨럭. 쿠웩.”
이내 쓴웃음을 짓던 황제가 갑자기 쿨럭이기 시작하자.
“폐하!?”
그는 자연스레 숙였던 고개를 확 들어 올렸다.
그러자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젓는 황제.
하지만 옷소매 사이로 구겨 넣은 작은 비단 손수건이 피에 젖은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폐하, 차도가 생기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내 나이 환갑을 지나고도 5년을 더 살았네. 의관의 예상보다 5년을 더 버텼어. 이쯤이면 됐지, 무얼…….”
선 제국의 황제쯤 되면 욕심이 날 만도 한데, 황제는 삶에 초탈한 태도를 보였다.
“폐하…….”
삶의 끝을 앞두고도 총기를 잃지 않은 눈빛.
그에 뭐라 한마디 보태려던 서일산은 하고픈 말을 삼키며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는데.
“내일 교지가 내려갈 게야. 상환, 그 아이를 태자로 책봉한다는.”
“예!?”
바라 마지않던 말이 나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번쩍 들고 말았다.
이상환, 즉 3황자를 책봉하겠다는 거였으니.
“그나마 그 아이가 낫지 않겠나. 허허,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다행히도 그의 주군은 마지막까지도 자신이 할 도리를 지키고 있었다.
“혹시나 상운 그 아이가 반발하거든, 자네가 찍어 누르게. 동방제일검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동방제일검(東方第一劍).
그 말을 하는 이도 듣는이도, 한순간 쓴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동대륙을 방문한 한 달 동안 무수한 풍파를 일으켰던 서방제일검(西方第一劍)에 빗대어 지어진, 서일산의 새로운 별호였다.
하지만 그 후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그 서방제일검이나 검선이 닿았던 경지에 ‘온전히’ 닿지는 못했으니.
서일산은 그 별호를 입에 담은 이가 황제만 아니었다면 호통이라도 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기분 나빠하지 말게, 일산. 굳이 그 별호로 부른 것도 이유가 있으니.”
“예?”
“내가 어차피 내려질 교지를 미리 알리기 위해 자네를 불렀다고 생각하는가?”
“아…….”
순간 머리를 굴려 봤지만, 도무지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교하여 주십시오. 폐하.”
“쯧. 이래서 자네는 재미가 없어.”
“…….”
“뭐, 됐네. 아무튼, 그 최근에 나타나고 있다던 흑괴(黑怪) 있지 않은가?”
“예.”
“그놈들의 대장 격인 괴물이 서진의 앞바다에 나타날 것이라고 통신이 왔네. 서방에서 말이야.”
“아, 그렇습니까?”
“그래.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거야. 그것만 처리하면 향후 그 흑괴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말과 함께.”
“흥미로운 얘기군요.”
검은 괴물, 흑괴. 서방에서는 그을음(Soot)이라 불린다는 그 괴물에 대해 논하는데도 황제나 서일산의 태도는 그리 다급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동대륙에서 그을음을 처리할 수 있는 초인경 이상의 고수는 현재 거의 200명에 가까워져 있었으니.
원래 그런 이들을 추려 백대 고수라 불러 왔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이백대 고수까지 그 범위를 넓혀야 할 정도였고.
서대륙에 비해 동대륙에는 그 연기 괴물들의 출현 빈도가 상대적으로 낮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들의 관심사는 오히려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혹시 그자, 서방제일검도 다시 온다는 겁니까?”
바로 10년 전 동대륙의 모든 무사들에게 거대한 충격을 주었던 서방의 기사.
거대한 해머를 휘두르던 절대자의 존재.
“아니, 아니야. 그는 이제 인중신이라고까지 불린다던데, 지금은 세상의 바깥(外界)에서 흑괴를 빚어 내는 적과 싸우는 와중이라더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게 말일세. 서방인들의 언어는 번역을 해도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것투성이니,”
“그렇다면 저를 부르신 것은…….”
“서방제일검은 아니나, 그의 호적수로 불렸다는…… 용사? 뭐 그런 이가 온다더군. 그러면서 우리에게 요청을 해 왔네.”
“무슨……?”
“다른 인력은 필요 없으니, 그때 마물들을 가두었던 천문금쇄진을 다시 한번 펼쳐 줄 수 있겠냐고 말이야. 상응하는 재물로 보답하겠다고 전언이 왔어.”
헛웃음을 짓는 황제 앞에서 서일산은 안색을 확 굳힐 수밖에 없었다.
흑괴들의 대장 격 마물에 대한 걱정 따위는 없었다.
그보다.
“다른 인력이 필요 없다? 정말 그리 전해 왔다는 겁니까?”
“그래. 신화경의 고수가 아니라면 방해만 된다더군. 참으로 건방진 소리지. 안 그런가?”
우드득.
그 말에 서일산은 바로 이를 갈았다.
“……서방제일검이 없는데도 그런 말을 했다는 겁니까?”
“그래. 심지어 그와 비슷한 요구를 동대륙의 모든 나라에 보냈다더군.”
“건방진 놈들이군요. 석년에도 서방제일검을 제외하면, 요정신궁(妖精神弓)도 암천일살(暗天一殺)도 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10년 전 대륙에 위기가 닥쳐왔을 때 괴물의 토벌을 주도했던 서대륙의 고수에 대한 경의는 모두가 간직하고 있었지만, 한편 그 때문에 동대륙 무사들의 자존심에는 큰 상처가 났었다.
안 그래도 태자가 정해지고 나라의 후계가 안정화되면 서대륙을 방문하려던 참이었는데.
“제가 직접 그 건방진 자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그래. 나도 그러라고 그대를 부른 것이야. 다만 하나만 명심하게.”
“예?”
“현 십대 고수 모두가, 서대륙의 그 건방진 자들을 벼르고 서진으로 출발할 것이라는 걸. 그건 무사들뿐만 아니라 국왕들도 원하는 바야.”
“아.”
“하지만 그들로는 안 돼.”
“그렇죠.”
“우리는 기억하고 있지. 석년의 서방제일검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랬던 그의 호적수가 대표로 온다고 하니…….”
흐릿하게 웃은 황제의 눈이 다시금 자신의 충실한 신하를 향했다.
“그런데도 자신 있나, 일산?”
“……물론입니다.”
서일산은 그리 대답하며 웃었다.
그 서방제일검조차 스승이라 칭했던 동대륙 최고의 고수, 검선은 이제 존재하지 않지만.
이제는 서일산 역시 신화경에 반 발자국은 닿아 있었으니.
‘서방제일검이 답보 상태라면, 아마 호각으로 싸울 수 있다.’
그 자신감이 미소를 만든 것이다.
그러자.
“좋아. 직접 가게, 일산. 가서 동대륙 무사의 위대함을 오랑캐들에게 각인시켜 주고 오게. 그리하면 서방제일검도 자네를 다시 찾아오겠지.”
“10년 전 그날부터, 그와 다시 만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폐하.”
“한데 그렇다면, 상운의 야심을 누를 패가 따로 필요하긴 한데…….”
“일원을 남기겠습니다. 아우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십대 고수 중 하나, 개천관일창(開天貫日槍) 양일원이라면 다른 왕국의 최고 고수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좋아.”
그 말을 끝으로, 서일산의 신형은 선 제국의 황궁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이렇듯, 세상의 위기를 알리려는 서대륙의 노력은 동대륙에서 엉뚱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
특히나 타이니가 악감정을 만들어 놓은 나라에서는 더욱.
“서방제일검도 아니고, 그 건방진 오랑캐의 부하들이 감히 우리보고 이래라저래라?”
현 서진의 국왕, 진사량은 10년 전 그때의 치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감히……. 흑괴 따위가 뭐가 문제라고…….”
검은 머리의 양키에게 붙잡힌 발목이 으스러지고 중인환시리에 바닥에 패대기쳐졌던 당시의 수치가 또렷이 떠올랐다.
“전하, 그래도 허술하게 대처하시면 안 됩니다. 10년 전에도 서방제일검의 말을 무시했다가……!”
“대장군!!”
대해제일검(大海第一劍) 모용원호.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서진의 대장군을 역임하고 있는 이 노고수는 국왕의 느닷없는 호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아무리 서진 최고 고수이자 왕의 외숙부인 그라 해도, 대전에서 왕을 상대로 대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말씀하시지요, 전하.”
“대장군께서는 10년 전의 수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저 천둥벌거숭이 군주의 고삐를 잡을 자는 역시 그밖에 없었다.
“수치라니요? 서방제일검은 저희 대륙을 구원한 영웅입니다, 전하.”
“이익, 그 말을 하자는 게 아니잖소!!”
이제 50대 중반에 이른 왕은 10년 전 백대 고수의 풍모조차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당시 호되게 겪은 좌절은 진사량을 무인으로서 퇴보시켰으니.
‘진정한 무인이라면, 좌절을 바탕으로 성장해야 하는 법이거늘.’
이제 강기(罡氣)를 간신히 일으키는 정도가 된 왕의 무위로는 모용원호에게 아무런 위압감도 줄 수 없었다.
“그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전하? 개인적인 원한을 품으셨기로서니, 설마 대의를 전하는 서대륙의 사자를 어찌해 보자는 것입니까?”
응당 왕으로서 자제를 요구하는 반문이었지만.
“대의? 고작 흑괴의 두목 따위가 나타난다면서 선 제국에 천문금쇄진을 요구하고, 우리 왕국에 비상령을 내리라 요구하는 것이 대의라? 외숙부, 그게 지금 진심이시오?”
어리석은 조카, 이기적인 왕은 교묘하게 논점을 흐리며 대륙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에 대전에 도열한 대신들과 장수들의 표정도 확 바뀌어 가는데.
모용원호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나는 서대륙의 오만을 참을 수 없소이다, 대장군. 흑괴 따위를 구실로 삼아 우리 대륙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서대륙의 사자를 쫓아내고, 당당한 서진의 자존을 보여 줄 것이오!”
국왕은 모두에게 선언하듯 그리 소리쳤고.
‘하아…….’
모용원호는 한탄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말리려면 말릴 수도 있겠지만, 왕과 극단적으로 척을 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흑괴 따위야 염려할 것도 아니지.’
그리고 그것에 더해.
‘그 용사라는 자의 무위가 궁금하단 말이지.’
그 역시 동대륙의 무사. 그중에서도 십대 고수라 불리는 혼세경의 강자 중 하나였으니.
서방제일검의 호적수라 불리던 이와 검을 겨뤄 보고 싶은 마음이 크기도 했던 것이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