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27
27화. 종말의 사도 (1)
왜 그랬을까.
크롬벨 아저씨와 동대륙 무사 아저씨의 마지막 일격이 교차했을 때, 에리나는 지극한 슬픔을 느꼈다.
‘왜……?’
찰나의 순간, 크롬벨 아저씨와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는데.
그것보다는 두 사람의 그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칼들에게서 굉장히 슬프고 답답한 무언가를 느꼈다.
왜인지 크롬벨 아저씨를 똑바로 보기 힘들 정도로.
“에리나, 무슨 일 있느냐?”
“아니, 아니에요.”
다행히 대련은 그것으로 끝났다.
크롬벨 아저씨에게 진 그 아저씨가 동대륙에서 가장 강한 무사라고 했다.
거기다 이 서진(西晉)이라는 나라의 왕도 감히 어쩔 수 없는 신분이기까지 하다고.
때문에 심술궂어 보이는 왕도 더 이상 일행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귀빈 궁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리로…….”
태도를 180도 바꿔 극진히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는데.
대우가 달라진 만큼, 문제도 쉽게 해결되어 갔다.
“신성에 닿지 못한 자는, 종말의 사도와 싸우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개죽음당하기 싫다면 끼어들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죠.”
크롬벨 아저씨가 그 직후에 꺼낸 경고는 이전과는 다르게 무겁게 먹혀든 것 같았다.
“그대들과 중천제일검이 함께하는데도 말이오?”
“동대륙에서 마룡을 잡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강림할 종말의 사도는 그 마룡보다 훨씬 강할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통역을 거쳐 전달된 말에 동대륙의 무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보여 준 것이 있음에도, 모두가 그 말을 쉽게 믿기 힘들어하는 분위기가 에리나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그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마지막에 크롬벨 아저씨와 싸웠던 동대륙 무사 아저씨였다.
“그대 말, 믿는다. 제국에 원조, 청한다.”
서일산.
선제국의 대장군이라는 그가 그렇게 나오는 순간,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도 쏙 들어갔다.
‘아무래도, 크롬벨 아저씨보다 저 아저씨가 발언권이 센 것 같아.’
우리 아저씨가 더 강한데.
에리나는 그게 좀 못마땅했지만, 덕분에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 서쪽 해안의 백성들을 전부 대피시킨다.
– 때는 신화경의 고수들이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하는 전쟁이다.
서진의 왕은 거듭된 설득에 마침내 대피령을 내렸고.
그것을 계기로 일행은 좀 더 구체적인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군대는 큰 도움이 안 돼. 대신, 통신으로도 전했듯 그 천문금쇄진이라는 걸 지원해 줘.”
“그걸, 진짜로?”
“몽마 군단을 막아섰을 때 확실한 효과를 봤어.”
“하지만 악마 귀족과 종말의 사도가 같지는 않다, 사신.”
“적어도 종말의 사도가 일반인에게 신경을 돌리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거야.”
루나 언니와 크롬벨 아저씨가 살짝 언쟁을 하긴 했지만.
그 천문 뭐시기를 직접 본 루나 언니의 강력한 추천에, 결국 그 서일산 대장군은 억지로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말은 해 보겠지만, 제국 혼란 시기. 실행 어렵다.”
제국에 뜻을 전해 보긴 하겠지만, 받아들여지진 않을 거라는 뜻.
굳이 통역을 거치지 않고 서방어로 대답한 딱딱한 말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그래서 에리나가 나섰다.
“저, 불굴의 신 타이니 아저씨의 사도예요. 만약 제국에서 도움을 준다면, 타이니 아저씨도 잊지 않을 거예요.”
정확히는 타이니 아저씨의 이름을 빌린 것이지만.
“오, 좋다. 그거라면, 긍정적 반응, 기대.”
생각보다 반응은 좋았다.
제이 아저씨는 반대했지만 말이다.
“……제국의 반년 치 예산이 드는 작업이랍니다.”
“그런데요?”
“일이 잘 풀린다 해도, 나중에 타이니 경이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할지 장담 못 한다는 말입니다.”
“뭐, 합당한 대가면 아저씨가 감당해 줄 거고. 아니면…….”
“아니면요?”
“제국을 박살 내겠죠, 뭐.”
“아…….”
그렇게 일행의 뜻이 선 제국에 전해졌고.
그 결과, 그들이 궁에서 머문 지 3주가 지날 무렵부터 서진에 막대한 물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쿠그그긍.
“밀어!”
“서쪽 해안까지 가야 해.”
“빨리. 빨리!”
동쪽에서 바다를 건너 서진의 군도까지.
거기에서 또 서쪽 바다로 옮겨지는 온갖 재료들.
단순히 물자가 옮겨지는 것뿐이지만, 그 규모가 규모인 만큼 서진의 수도 자하에서는 때아닌 장이 열렸다.
덕분에 에리나에게도 할 일이 생겼다.
“와아! 아저씨! 저기 봐요! 저거 이상하게 생긴 물고기! 저기, 저기도요! 돼지 같은데! 발이 여섯 개!”
시장에 나온 에리나는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동대륙의 신기한 산물들을 구경하는 게 재밌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크롬벨 아저씨와 놀러 나왔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물론.
주위를 철통같이 에워싸고 동행하는 호위 무사들과.
“&@아가씨……%#!”
“&@#……예쁜……@#!”
“@#잘생……$@#.”
주변에서 자신들을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말이다.
“우리 예쁘고 잘생겼대요. 히히.”
“음? 알아듣는 거냐?”
“벌써 3주가 지났다고요. 간단한 단어 정도는 들리죠.”
“……그러냐. 하긴 너는 원래 그랬지. 말도 금방 배우고.”
그 말에 에리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는 크롬벨과 함께하는 동안 외국어를 배운 적이 없었다.
엘프어야 애초에 엘프 특유의 성대가 없다면 아예 발음이 안 되고.
엘븐하임을 떠나 둘이 살게 된 뒤로는 수련만 해 왔으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옛날의 저겠죠? 아저씨 기억 속에 있는.”
괜히 심통이 나서 쏘아붙이자 아저씨의 얼굴이 금세 흐려졌다.
“……아. 미안하다.”
“아니에요. 뭐, 다 인정하고 있는걸요. 기억은 없지만 그때의 나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에리나를 봐 주세요. 스. 승. 님!”
그 말에 아저씨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흠. 그래, 알고 있다.”
“맨날 말만……. 치.”
괜히 부루퉁해져서 시선을 돌리는데.
씁쓸한 표정의 아저씨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왜 묻지 않아?”
“예?”
“승산이 얼마나 되는지.”
서진에 온 지 3주째. 결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저씨는 점점 말수가 줄고 안색이 어두워져 갔다.
무거운 표정에 답답한 마음이 그대로 비쳐 보이는데.
그 푸른 눈동자를 보며, 에리나는 씩 웃어 보였다.
“100%죠, 뭐.”
“음?”
“아저씨가 이긴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타이니 아저씨도 그럴 수 있다고 했고.”
“그래도…….”
“그럼 100%에요. 적어도 저한테는.”
“허…….”
“뭐야, 그 힘 빠지는 소리는. 설마 약한 생각 하는 거예요?”
짐짓 노려보는 척을 하자 다시 아저씨가 푸흐흐 하며 웃었다.
“그래. 당연히 이겨야지. 아니, 이기겠지.”
“자. 하이파이브 해요! 기운 내게!”
“음?”
“어서!”
“어, 어…….”
짝!
억지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텐션을 끌어 올린 뒤, 에리나는 크롬벨을 끌고 열정적인 시장 구경을 시작했다.
그러다 크롬벨이 혼이 나간 표정을 지을 때쯤, 에리나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서대륙 스타일!! %&*@!”
서대륙 스타일?
시장의 한구석에서 서대륙 양식의 등잔을 달고 동대륙어로 영업을 하고 있는 금발의 서대륙인.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왜인지 누군가가 생각나는 느낌.
“제이 아저씨?”
자기도 모르게 외친 말에, 눈이 마주친 금발 청년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분명히 다른 사람인데, 왜 그런 느낌이 들지?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아저씨가 확인을 해 줬다.
“……그놈 맞다. 저놈 저기서 뭐 하는 거지?”
팍.
“엇!”
한순간에 호위 무사들 사이를 지나쳐 금발 청년 앞에 나타난 크롬벨.
그가 청년을 노려보는 순간.
“그, 정보 장사는 역시 술집이라서…….”
“아니, 이렇게 알아보시는 게 이상한 거라니까요.”
“저, 그냥 좀 내버려 두시면 안 될……까요. 통역은 왕궁에서 붙여 줬잖습니까.”
“아니, 저도 각하가 시키는데 무슨 용뺄 재주가 있겠습…….”
한순간에 쏟아져 나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에리나도 그 금발 청년이 제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라, 난 어떻게 알아본 거지?’
당혹스러웠지만, 또 이 상황이 재밌기도 했다.
“너 때문에 괜한 분쟁이…….”
“아니,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알아보시는 게 이상한 거라니까요? 대체 어떻게…….”
그래서 끼어들었다.
툭툭.
“응?”
“거봐요. 공작 할아버지도 제이 아저씨도, 우리가 이길 거라 생각하니까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쵸?”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타이니 아저씨가 카르마까지 넘겨주며 반신의 경지에 닿게 만든 세 사람이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공작 할아버지는 전투 환경을 살핀다며 서진 구석구석을 하루가 멀다 하고 돌아다니고 있고.
루나 언니는 종말의 사도와의 전투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애꿎은 동대륙 무사들을 달달 볶으며 훈련을 시키고 있다.
“에…… 그렇죠. 블랙윙 동대륙 지부를 설치하는 일이니까. 뭐, 일단은 덕분에 망한 것 같습니다만.”
제이가 두 사람 주변에 늘어선 호위 무사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자, 에리나는 멋쩍게 웃으며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헤헤, 그건 죄송해요.”
“아뇨. 용사님이 사람의 기운을 읽는다는데, 뭐 도리 있나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술이나 한잔하고 들어가시죠?”
자포자기한 제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제안하자.
빠악.
크롬벨의 손바닥이 그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억!? 왜……!?”
“에리나는 미성년이다. 죽고 싶냐……?”
으스스하게까지 들리는 크롬벨의 목소리에 변장한 제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물론 정작 에리나는 그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크롬벨을 말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변장이라면서 어떻게 얼굴색까지 자연스럽게 바뀌지?’
그저 제이의 변장술이 신기하다고 생각할 뿐.
그리고 한편으로는.
‘역시 발끈하는 아저씨가 더 어울려요. 힘없는 모습보다는.’
잠깐뿐일지라도, 혈기 넘치는 크롬벨 아저씨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아저씨! 한잔해요!”
“에리나!”
“저도 이제 열여섯이에요!”
“성년식은 아직이잖아!”
“동대륙에선 상관없대요!”
“뭔 소리야!”
괜히 실랑이를 벌이면서, 크롬벨 아저씨의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궁의 숙소로 돌아와 홀로 남았을 때, 간절히 기도했다.
“타이니 아저씨, 힘을 주세요. 모두가 불안해해요. 우리가 이겨 낼 수 있게 도와주세요.”
우우웅.
온몸을 타고 타오르는 성화.
노을빛 빛살이 등잔불보다 방 안을 더 환하게 비출 때까지, 에리나는 밤을 새워 가며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쭉 그래 왔듯이.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서진의 서쪽 해안가에 사는 모든 백성들에게 피난령이 내려지고.
결국, 그날이 왔다.
* * *
“가자.”
“후.”
서진의 서쪽.
부엉이 오투스를 타고 해안가를 향해 날아오르는 일행의 얼굴은 무겁게 굳어 있었다.
좌표를 지정한 곳에는 새하얀 안개가 솟구치고 있었는데.
그 규모는 어떠한 거인이라도 가둘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일행은 이미 그 천문금쇄진 안에서 움직이는 길을 숙지한 후였다.
그리고 어차피.
“공간에 간섭하는 진이라 해도, ‘신급’의 적은 오래 가두지 못한다.”
“저건, 그냥 일반인에게 주의를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라 생각하면 돼.”
선 제국의 반년 치 예산이 들어간다는 저 엄청난 진의 가치는 일행에게 있어서 고작 그 정도였다.
“이제 멀지 않았다.”
그리고 크롬벨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그 새하얀 연기 속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놈이다!”
“전투 준비!!”
“내가 먼저.”
“나 역시.”
서일산까지 모두 네 명의 초인이 한껏 기세를 끌어 올리며 안개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에리나는 오투스의 등 뒤에 남은 채 얼어붙어 있었다.
‘어, 어떻게…….’
생각해 보니 여태 묻지 못했다.
저 엄청난 적을 상대하는데, 왜 나를 데리고 왔는지.
그냥 타이니 아저씨의 사도라서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내가 저 괴물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살벌한 기세.
그 공포심에 절로 몸이 떨려 오고 있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