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36
36화. 하일론
원래 뒤가 없는 사람이, 더 내려갈 바닥이 없는 사람이 분노했을 때가 가장 살벌한 법이다.
게다가.
“사기꾼 놈을 죽이자!”
“내 돈 내놔!!”
“저 개자식을……!”
그게 물경 천 명이 넘는 인원이라면?
그리고 정작 본인은 직전에 무려 ‘신’에게 직접 지옥의 형벌을 당해 넋이 나간 상태라면?
그때 조금만 망설였다면, 아마 살점 한 점 남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일론의 삶에 대한 갈망은, 그 자신의 짐작보다 훨씬 컸다.
“신께서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 임기응변.
거의 본능적으로 나온 발언에 사람들이 주춤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이긴 하지만, 실제로 인중신이 그를 ‘살려 준’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긴 한데…….”
“아니, 그래도…….”
웅성웅성.
자신을 두고 수군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나니 살고 싶은 욕망이 더욱 커졌다.
“헌금은 그대로 가져가십시오. 저는 지금부터 진정한 그분의 사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수행에 들어가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그가 아닌 헌금함을 향했다.
그 결과.
“내 거야!”
“내 돈이야!!”
“무슨 소리, 내가……!”
피해자들은 사기꾼을 눈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본래의 그였다면, 거기서 얌전히 몸을 피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천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이 피해를 끼친 것이 인간이 아닌 ‘신’이라는 것을.
‘어쩌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두려움이, 그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내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로 나눠 주겠습니다!!! 기다리세요!!”
실제로 누구에게 얼마나 뜯어냈는지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머교가 포교된 곳은 전부 빈민가.
그런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헌금을 많이 할 수 있을 리 없다.
한 사람당 동전 한 푼, 두 푼 눈치를 봐 가며 돈을 돌려 주다 보니 얼추 계산이 맞았다.
모자란 것은 사비를 털어서까지 돌려주었다.
그러자,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주 썩은 놈은 아니었구나. 하지만 용서는 한 번뿐이다.]‘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데.’
그 목소리가 자신의 영혼에 남아 머문다는 것이 느껴졌다.
……신은 진짜 신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한동안은 정말 죽은 듯이 얌전히 지냈다.
또다시 사기를 쳤다가는 언제 인중신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공포가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으니까.
인중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목소리는 시시때때로 머릿속에 울려 퍼졌고.
그 공포가 심해져서 잠조차 오지 않을 때면, 그는 정말로 해머교의 사제 행세를 했다.
사기를 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해머교 사제의 이름으로 봉사 활동을 한 것이다.
그래야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러다 보니, 슬금슬금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그을음이라고 불리는 괴물들이 나타날 때쯤, 그는 진짜 사제로 통하고 있었다.
“해머교의 사제시라고요? 그 타이니 님을 섬기는……?”
그 상황에서 어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바라는, 세상을 구원하는 신.
그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사기를 쳤다가는 정말로 영혼까지 찢겨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성실하게 봉사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걸 지어낼 수는 없었다.
“불굴의 신께서는 왜 침묵하시는 걸까요? 그분은 저희에게, 세상에게 뭘 바라시는 겁니까?”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데.
차마 답을 할 수가 없었다.
헛소리라도 지어서 대답했다가는 재앙이 떨어질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그것은 제가 섣불리 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형제자매님들. 그분께서 응답해주시기를 바라며.”
매일 기도를 했다.
제발 날 이 지옥에서 탈출시켜 달라고.
그는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헌금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돈은 제가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십시오. 그것이 그분께서 바라는 바일 겁니다.”
“아, 역시…….”
돈이라도 받으면 후환이 될까 두려워서였지만, 그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감탄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일론 형, 나 알쥬? 왜, 그때 내가 연기해서 크게 땡겼었잖아. 이거 얼마나 큰 판이야? 사람 수 장난 아닌데, 나도 좀 끼워 줘.”
그의 원죄를 함께 만든 과거의 동료들 일부도 은근슬쩍 모여들었으니까.
하지만 하일론은 묵묵히 기도와 봉사를 이어 갔다.
그러자 그 과거의 동료들도 하나둘씩 지쳐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X발, 얼마나 크게 해 먹으려고 이렇게 오래 밑밥을 까는 거야!”
“정말 개과천선한 거 아냐?”
“지랄! 개가 똥을 끊지…….”
그 말대로였다.
개과천선이 아니었다.
그저 무서워서였다.
또다시 죄를 지었다가는, 언제고 인중신이 다시 나타나 생지옥을 선물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천 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기도를 하다 보니.
[파장이 제일 맞는 놈이 하필……. 어쩔 수 없지. 너를 통로로 삼아야겠다.]이해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그의 몸에 노을빛 성력이 내려졌다.
“오오오!”
“그분의 힘이다!”
“그분께서 내리신 힘이다!!”
그 힘, 노을빛 성력을 받은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천일기도를 이어 가던 일부 ‘사제들’ 또한 신성력을 내려받았다.
상처를 치유하고, 기운을 북돋우는 힘을.
그때부터, 다시 용기가 생겼다.
‘나는 죄를 용서받았다.’
공포가 사라지고 다시 욕심이 차올랐다.
‘여신교는 이제 없어. 신성력을 가진 건 우리가 유일해.’
죄는 용서받았고, 오히려 힘이 생겼다.
상처를 치료하는 힘으로 얼마나 큰 돈을 챙길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그런데.
[……에 거대 그을음이 나타날 것이다. 알리고, 준비하라.]신은 주기적으로 그에게 신탁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건, 신성력을 내려받은 이들 중에서도 그뿐이었다.
하일론은 그 신의 한탄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그을음이 나타날 곳에 대한 예언과 신성력을 이용해 돈을 벌 방법만을 궁리했다.
그렇게 한탕 하기에 앞서, 예언이 정말 들어맞는지를 확인하려 나서던 어느 날.
자신이 징벌을 받을 때 신의 곁에 있었던 자, 마도 기사를 만났다.
나름 열심히 도망쳤지만, 역시나 초인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이다. 사기꾼, 하일론이었나?”
그 순간 직감했다.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 후로도 몇 번 더 눈치를 보며 탈주를 시도했지만,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초인들은 오히려 더 늘어나기만 했다.
그때 확실히 알았다.
‘아, 아직 용서를 받은 게 아니었구나.’
신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은 맞지만, 완전히 용서한 것도 아니다.
그때부터 허무감이 들었다.
– 내 남은 삶은 이렇게 통제받다가 끝나는 건가.
모진 세상을 힘겹게 버텨 왔지만, 그럼에도 나름 자유롭게 살아왔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자유도 없이 고행처럼 살다 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하자,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그나마 세상을 구한 영웅들를 도우며 느꼈던 얕은 자긍심도, ‘종말의 사도’가 나타난 이후로는 사라졌다.
더 이상 신탁을 받지 않는 자신에게 초인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까.
용서받지 못한 자. 하지만 신이 필요로 하는 자.
그 말에서, 이젠 ‘용서받지 못한 자’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런데.
“아저씨, 해머교 사제예요? 그 불굴의 신? 광휘의 기사의?”
“와. 진짜 노을빛 신성력…….”
“저, 함께 기도드려도 될까요?”
어느샌가, 그의 주변에 초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성력조차 없던 과거에는 그런 관심이 두렵기만 했지만.
이번엔 왠지 달랐다.
신이 자신을 항상 내려다본다는 압박감도, 그렇기에 올바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도 여전했지만.
“사제님께서 기도해 주신대!”
“그을음이 사라지도록…….”
“사제님, 상처 치료를 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억지로 봉사 활동을 할 때마다 돈 대신 들어오는 것은 하등 이득도 안 되는 감사뿐이었지만.
“사제님, 이것 좀 드세요. 빵이 오늘 아주 잘 구워졌어요.”
“사제님, 저희 어머니가 빨래해 주신대요. 헌금할 돈이 없어서…….”
“사제님, 저희가 돈이 없는데 대신 감자 좀 드실래요?”
그럴 때마다 보답처럼 물건과 음식, 그리고 도움의 손길이 돌아왔다.
분명히 별다른 이득도 안 되는 정말 사소한 것들뿐인데.
“감사……합니다.”
어느 날, 따뜻한 빵 한 조각에 수프를 대접받고 의례적으로 나온 답례.
그 말을 하는 순간,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제님, 왜……?”
“아니, 아닙니다. 정말로 감사해서…….”
그때 깨달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아 본 건, 인중신과의 그 살벌한 만남 이후부터 지금까지가 유일하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순수한 사람들이 악의 없이 건네는 작은 호의가 이토록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사제님……?”
“감사, 감사합니다. 전부…….”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거액의 사기를 치고 진탕 술을 마실 때보다, 품 안에 두둑한 돈을 두고서도 선잠만 잤을 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고, 잠도 잘 왔다.
그리고 그제야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렸을 때의 자신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고아들이.
그때의 자신처럼 죽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아이들이.
‘빈민가의 고아들…….’
생각해 보면, 애써 외면해 왔던 인중신의 느낌도 그랬다.
파장이 연결된 것만으로도 뚜렷하게 느껴지는 그 삶의 흔적.
그것을 통해, 인중신의 출신이 알려진 것과 달리 자신 못지않게 암울했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영혼의 근간에 깔린 깊은 슬픔까지도.
그런데도.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인중신은 무모하리만큼, 아니 무서울 정도로 올곧게 살아왔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세상을 원망하며 타락했고.
그는 세상을 극복하여 신이 되었다.
그 엄청난 차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저 아이들은 커서 내가 될까, 인중신이 될까.
……적어도 내가 되어선 안 된다.
‘그래.’
그 생각이, 그 부끄러움이 평생 해 본 적 없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더 이상 초인들에겐 내가 필요 없어.’
그때부터 하일론은 현자의 탑 주변에 머물며 빈민가의 아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픈 아이들을 치료해 주고, 여유가 생기는 대로 먹을 것을 나눠 주었다.
그리고 글도 가르쳤다.
“사제님, 글공부 말고! 그냥 놀아…….”
“글을 알아야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어.”
“예에? 제가요?”
“그래. 그럴 수 있어. 나처럼……은 하면 안 되지만.”
마치 한없이 분노로만 가득 찼던,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만 가득 찼던 과거의 자신에게 사과하듯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치료하고, 먹을 것을 나눴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곁에 모여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제님, 역시 인품이…….”
“너그럽게 생기신 것 좀 봐.”
“역시 성품은 얼굴에 다 나타나나 봐.”
생전 처음 듣는 말에 오랜만에 거울을 보았다.
그 속에는 인생의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못나고 추한 얼굴, 20대부터 빠지기 시작한 머리.
여전히 그는 추하고 작은 몸의 주인이었지만, 따스하게 웃고 있는 그 미소 하나가 인상을 180도 바꿔 주었다.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주여. 저를 일깨워 주고, 제 삶을 구해 주신 신이시여.’
이제는 압박감이 아닌, 충만한 신앙심으로써 불굴의 신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혼이 고양되며 파장이 더 짙어지는 순간, 신과의 연결이 더 강해졌다.
그래서 보게 되었다.
– 나는 굴하지 않으니, 그 무엇도 나를 꺾을 순 없다!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세상을 뒤덮는 어둠 속으로 돌진하는 그 당당한 모습을.
신이 지금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그러던 와중, 그 신이 자신을 인식했다.
[해머교를 퍼트려라. 빌어먹을 카르마가 필요해!]오랜만에 신탁이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영웅들이 자신을 찾기 시작했다.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
“한동안은 내가 멀리 가서 늦게 올 수도 있어. 그러니 아껴 써야 한다.”
“사제님이요?”
“왜요!?”
“여기 계시면 안 돼요?”
하일론은 그동안 도와 오던 아이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우리 신께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계셔. 나는 그분께 조금의 힘이라도 되어 드려야 해.”
아이들이 이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미력한 힘이나마 세상을 위해, 그분을 위해 쓰기로 했다.
그렇게 미소를 짓고 말하는 순간, 뒤쪽에서 그림자가 꿈틀거렸다는 것을.
하일론은 미처 알지 못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