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4
54화. 현왕
“어…….”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거지?’
모든 것이 완벽했고, 운까지 따라 준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혹스러운 마음에 쉽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만 벌리고 있자니, 그 마음마저 짐작한다는 듯 왕이 다시 웃으며 말을 꺼냈다.
“놀랄 것 없다네. 이 나이가 되도록 이 자리에 있다 보면, 쓸데없는 지식도 많이 생기는 법이거든.”
“예……?”
“이를테면, 엘프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였다면 결코 검은 머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일세.”
“앗!?”
이렇게 허망하게?
“그렇게 놀라지는 말게. 여기 서대륙에서는 우리 왕실 사람들이나 알 만한 지식이니까. 뭐, 누가 알겠나? 검은 머리의 인간조차 얼마 없는 이 대륙에서.”
타이니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도 다물지 못하는데, 담담한 왕의 말이 이어졌다.
“해낸 일은 훌륭하고 정령까지 봤으니, 성품조차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알려 준 정보 중 정작 혈통이 거짓이다. 그러니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 추론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나마 자신에게 유리한 말이라 굳이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타이니는 빠르게 당혹감을 수습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사과가 아니라 이유라네, 타이니 ‘군.’”
부드럽게 웃는 늙은 왕의 말은 오히려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씁……. 뭐, 어찌 보면 잘된 거지.’
자신에게 호의로 대하는 이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내내 찜찜했던 타이니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연기에 대한 미련을 털어 버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진실을 털어놓았다.
“……악마추종자들을 쫓아왔습니다.”
“……뭐!?”
“정확히는 그들이 이곳에서 벌일 일을 막으려고 왔습니다.”
고개를 숙인 타이니를 보는 왕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길 잠시.
“놈들이 성물, 후마니타스(Humanitas)를 빼돌리고 오르투스에 재앙을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걸 막고자 왔습니다.”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답변에 왕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러다 한참 후.
“허…….”
작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은 현왕(賢王), 에머드 폰 카룬은 한숨과 함께 물었다.
“그 정보의 출처는 어디인가?”
그 날카로운 눈빛에 타이니는 또다시 움찔하면서도 가공된 정보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스란 제국의 발렌티아 공작가입니다. 최근 휘하의 영주가 악마추종자로 적발된 곳이지요.”
“제국…… 하, 제국이라니…….”
카룬이 중립국을 자처한다지만 사실상 왕국 연합 소속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하듯, 왕의 어조에서는 긍정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다.
다만, 때로는 그 부정적인 감정이 오히려 도움이 될 때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신분을 숨겼겠지. 그럴 만한 일이긴 해. 아무런 근거 없이 제국에서 그리 말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테니까.”
왕은 연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인류의 해충들이 내 나라에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아냈나?”
“성물을 빼돌리려 한다는 것 외에는…… 아직입니다.”
“으음…….”
왕이 생각에 잠기자 타이니는 잠시 고민했다.
‘크라켄의 이야기를 할까?…… 아니, 아니야.’
그것은 지금 검제도, 자신도 반신반의하는 부분이었다.
크라켄은 마왕군의 군단장급에 준할 것이라 여겨지는 전설상의 해양 마수.
마기에 오염된 중간계의 생물인 다른 마수들과는 다르게, 그 태생조차도 신화 속에서나 언급되었을 정도로 급이 다른 마수였다.
게다가 검제의 말을 인용하자면.
– 무려 심해의 지배자로 운명 지어진 마수다. 마수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바닷속에서 발생하는 마물들을 먹이로 삼으니, 인류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바닷속의 마물 청소부나 다름없는 존재지.
오히려 세상의 균형에 이바지하는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그런 크라켄을 악마추종자들이 조종할 수 있다면, 아무리 아르곤이 흑마법사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해도 놈들의 난이 그렇게 쉽게 제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납득할 만한 결론은…….
– 크라켄을 잠시나마 유인할 방법이 있었거나, 정말로 성물이 사라진 후 우연히 벌어진 재앙이거나…….
– ……아니면 돌대가리인 네놈이 완전히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셋 중 하나……가 아니지!
‘둘 중 하나지! 그 빌어먹을 영감탱이, 누굴 똥멍청이 취급하는 거야!?’
까드득.
순간적으로 이를 가는 바람에 늙은 왕의 눈길이 다시 그에게 향했다.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건가 보군.”
사실상 심증은 확실했다.
놈들이 크라켄을 유인한 게 아니라면, 그런 천재지변이 한순간에 겹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전하의 판단에 혼란만 더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거짓을 지어내도 모를 텐데, 차라리 믿음이 가는군.”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겁니까?”
“안 믿어서 생길 손해와 믿어서 생길 손해를 저울질해 보던 참이었네. 하지만 아무래도 후자는 별것 없을 듯하니 믿어야지. 무엇보다 정령술사인 자네가 악마추종자들과 결탁할 리도 없고 말이야.”
왕의 논리는 지극히 간단하고 명쾌했다.
정령술사가 무조건 착하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지만, 악마추종자와 적대한다는 것만은 진실…… 아니, 운명이라고 봐야 했다.
라프탄 놈이 아닌, 다른 사악한 정령술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성품일 뿐이다.
이 세상 마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정령의 존재 자체가 마기를 거부하니, 애초에 정령술사는 놈들과 어울릴 수 없을 테니까.
“……다행이군요.”
제 말을 믿어 준다니 조금 당혹스럽긴 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더 좋았다.
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성물의 실종을 저지하고 악마추종자들을 찾아내는 일도 한결 수월해질 테니까.
“그렇다면 저를 성물 수호대로 보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런데, 자네가 말한 놈들의 목표 말일세. 그게 좀 찜찜해.”
“예?”
“성물은 이제 와서는 그저 상징에 불과할 뿐이야. 성물의 대마물 결계의 범위는 기껏해야 이 내성을 살짝 벗어난 정도고, 그 효과도 마물을 밀어내는 것밖에 없다는 건 누구나 알지 않나.”
틀린 말이 아니었다.
“수백 년 전부터 오르투스를 지키는 것은 성물이 아니라 우리 카룬의 군대니까.”
“……그렇긴 하죠.”
“더구나 마기를 보유한 놈들이라면 성물에 접근도 못 할 텐데, 어떻게 놈들이 그걸 빼돌린다는 거지? 그래서 또 뭘 하고?”
“그건……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왕의 거듭된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놈들이 성물을 빼돌릴 것이라 확신하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연로하지만 지혜로운 왕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찔러 왔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에서 봤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전하께 만족스러운 답변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와 발렌티아 공작은 그리 확신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저’와 발렌티아 공작이라? 마치 자네가 발렌티아 공작과 동급이라 생각하는 거 같은데?”
……당신, 소야?
‘왜 말 하나하나를 되새김질하고 난리야!’
문제는 그 되새겨서 나오는 질문 하나하나가 너무 날카롭다는 거였다.
“흠, 뭐…… 난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예?”
“어린 나이에 그 정도 재능을 가졌으니 오만할 만도 하지. 물론, 제국의 공작과 맞먹으려 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뜨끔한 마음에 타이니가 어색한 표정을 짓는데.
“숨기는 게 많다는 점이 좀 걸리지만…… 좋아. 이번만큼은 믿어 주겠네. 그래서 손해 볼 것은 없으니.”
일방적으로 몰아치던 왕이 솔깃한 말을 꺼내 들었다.
“성물 수호대 소속으로 가게. 하지만 수호대의 임무에 매이지는 않아도 될 것이네. 단독 작전권과 내성 감찰권까지 줄 테니.”
“예?”
“단, 감찰권은 악마추종자 한정이야. 만약 엉뚱한 일에 간섭하려 들면…… 지금 나눈 대화가 모조리 없던 일이 될 것이네. 무슨 뜻인지 알 것이라 믿네.”
“……물론입니다.”
어찌 거부할까.
너무 좋은 조건이라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더구나.
“……어린 게 분명한데, 정말 어린 나이 같지는 않다는 게 또 신기하군. 자네는 정말 흥미로운 인물이야.”
왕이 눈을 빛내며 부언하는 것이 타이니로선 심히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 관심 좀 거둬 줬으면 좋겠는데요.’
검제와는 결이 다르지만, 대화하기 부담스러운 인물이란 건 마찬가지다. 이런 왕이 전생에는 망국의 마지막 왕으로 이름을 남겼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그가 복잡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왕은 반대로 홀가분한 표정으로 손짓했다.
“좋아, 그럼 나가 보게. 지금 한 약속은 오늘 중에 공표될 걸세.”
“……정말로 이거면 된 겁니까?”
“뭐, 다른 필요한 게 있나?”
“주시면 받겠습니다만…….”
“……뻔뻔한 것도 마음에 드는군. 나는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할 말이 남았다면, 눈치 보지 말고 털어놓고 가게.”
“아,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
“이 나라에서 수작을 부리는 놈들 중, 수장급에 후셀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을 겁니다. 듣기로는 수인족이나 오크족이 쓰는 이름이라던데…….”
그 말에 왕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 * *
– 악마추종자들을 처리한 기사가 왕실 기사에 임명되고 성물 수호대로 발령받았다.
– 그는 카룬에 숨어든 악마추종자들을 색출하는 임무도 맡게 될 것이다.
이어진 왕의 공표는 내성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외인이 갑작스레 왕실 기사로 임명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반발하기에는 그 지위가 애매했던 것이다.
“성물 수호대는 한직인데……?”
“공을 인정해 주긴 하되, 실권은 안 준다는 건가?”
“역시 현명하신 전하…….”
대다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유독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여기 타이니 경이 그 악마추종자들을 처리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우리 성물 수호대에 ‘단독’ 작전권을 가지고 파견되었으니 모두 환영해 주도록.”
“엑!? 저 꼬마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기사의 말에 병사들이 도열해 있던 연무장이 대번에 시끄러워졌다.
타이니의 외양을 생각하면 그런 반응을 보일 법도 했지만.
“엘프 혼혈이라고 하니, 마냥 어리게 보지 말고 예를 갖추도록. 개고생 한번 안 하고도 단번에 기사 작위까지 받은 ‘훌륭하신’ 분이니까.”
타이니를 소개하던 기사의 말이 그 소란을 한층 부추겼다.
“모두가 알아서 모시도록! 무려 ‘악마추종자’에 대한 감찰권까지 가지고 계시다. 할 일은 알아서 하실 테니 간섭하지 말도록! 괜히 책잡히면 악마추종자로 몰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기사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고깝다 이거겠지.’
성물 수호대는 한직이라는 검제의 말은 사실이었다.
미리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곳에 발령이 난 기사들은 사고를 쳤거나 실력이 정체되어 발전의 여지가 없는 낙오자들뿐이었다.
‘그나마 다른 기사들은 나오지도 않았네. 다들 떠넘긴 거겠지.’
아마 저 기사가 성물 수호대 소속 기사 중 가장 막내일 것이다.
후임이 들어왔는데 단독 작전권이니 감찰권이니, 이름부터 거창한 무언가를 주렁주렁 붙이고 들어왔다.
굴러들어온 돌이 간신히 박혀 있는 돌을 뽑아 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저 고까움에 상당량 반영되었을 것이다.
‘시간만 많다면 오해가 풀리길 기다리겠는데.’
이제부터 대략 4개월…… 사실 말이 4개월이지, 성물이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는 모른다.
그저 이즈음 성물이 사라지고, 연말에 크라켄의 습격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 뿐.
그러니 단시간에 교통정리를 끝낼 필요가 있었다.
“마손 경이라고 했나?”
“했……나? 허, 타이니 경.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같은 기사라도 엄연히 선후배가 있어. 단독 작전권이니 뭐니 해도 연공 서열이…….”
쾅.
“크르르르르르.”
가볍게 내디딘 발 하나로 연무장의 일각이 내려앉고, 그 뒤로 드리워진 거대한 늑대의 영체가 살벌한 눈으로 마손을 응시하자 한순간 주변의 소음이 사라졌다.
건방진 후배를 교육하려 했던 기사 마손의 입이 자연스레 다물어지는데.
“선후배는 모르겠고 위아래는 알고 있지. 그래. 말 잘해 줬어. 안 그래도 본보기로 화형에 처할 악마추종자가 필요했는데, 혹시 자네는 아니겠지?”
악당 취급을 하겠다면 아예 상상보다 더한 악당이 되어 주마.
짙은 살기가 이제 고작 2단계의 초입에 불과한 마손의 전신을 엄습했다.
그에 마손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 절대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 타이니를 비웃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손은 자신도 모르게 절도 있는 자세로 경례까지 하고 말았다.
막 훈련소를 나온 신병처럼 확실하게 기강이 잡힌 모습에 타이니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려 했지만, 키가 닿지 않아 대신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앞으로 잘해 보자, 마손.”
무슨 생각을 했는지 ‘히엑!’ 하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앞으로 튀어 나간 마손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였다.
“예, 예,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 놈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건 말건 타이니는 관심도 없었다.
‘다른 기사 놈들도 확실하게 잡아 놓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계획을 정리하는 그의 머릿속에는 왕과 나눈 마지막 대화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 후셀이라…… 허, 고약하군.
– 네?
– 확실한 정보인가? 잘 말해야 할 걸세. 우리가 쌓은 얕은 신뢰가 대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 말이니.
– 5서클에 가까운 마수조련사가 머리가 터져 가며 뱉어 낸 말입니다.
– ……으음, 나가 보게. 그 건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으니.
대전을 나서는 순간, ‘빌어먹을’ 하고 나직하게 뱉어 낸 왕의 욕설을 타이니는 똑똑히 들었다.
그 반응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왕은 후셀이 누군지 알아.’
그리고 그 후셀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왕의 큰 신뢰를 얻고 있다는 것까지.
자연히 타이니 역시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왕을 두들겨 패서 토설하게 만들 수도 없으니.
‘생각보다 쉽게 풀리거나, 아니면 말도 안 되게 꼬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현왕으로 불리는 에머드 폰 카룬이 제발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타이니는 마음속으로 바라고 또 바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