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43
43화. 작별 인사
“어머니 세계수께서 힘겨워하고 계신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프의 대장로 트루엘이 하던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자, 새하얀 머리의 주름 많은 장로 에우리나가 말을 보탰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세상으로의 이주라니요. 그 기약 없는 약속을 위해서 우리 엘프들의 정신적 지주를 봉인하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한때 인간을 적대시하던 노엘프는 자신의 편견을 깨트렸던 기사, 인중신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럼 이대로 세계수가 말라 죽길 기다리실 겁니까?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다른 세상에서의 부활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런 참담한…….”
타이니의 담담한 말에 에우리나는 시선을 깔고 신음 같은 목소리를 흘렸다.
“세계수가 사라지면, 우리는 정령과의 소통도 어려워집니다. 뿐만 아니라…….”
“수명도 조금씩 줄어들겠지요. 더 이상 ‘하이엘프’라 구분되는 이들이 나오지도 않을 테고요.”
다시금 변명하듯 나오는 트루엘의 말에 이번에는 에스티나가 끼어들었다.
“대장로님, 저도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세계수와 함께 말라 죽지 않으려면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그 누구보다 세계수와 가까웠던 세계수의 수호자, 에스티나의 말에 다른 장로들마저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당연한 말이지만, 어찌 됐건 어머니 세계수의 뜻이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타이니는 그렇게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엘프의 장로들은 다시금 우울한 얼굴로 자신들의 결정을 엘븐하임에 알리기 위해 움직였다.
물론.
“아, 다른 세상에 관한 이야기는…….”
“금지지. 알고 있네, 수호자.”
“죄송합니다, 장로님.”
차갑게 돌아온 답변에 에스티나가 굳은 안색으로 고개를 숙이는데.
그제야 에우리나가 인상을 펴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른 방법이 없었나, 정말?”
“예.”
“……최근에 태어나는 아이들도 그렇고. 참 걱정이 크구만.”
“그게 옳은…….”
“옳은 방향이라는 것은 아네만, 아무래도 늙은 탓이라 그런지 나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네그려. 수호자, 나는 그래서 자네의 젊음이 부러워.”
“……아직 정정하세요. 에우리나 님.”
“농담도.”
피식 웃은 에우리나가 그렇게 돌아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하던 엘븐하임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
“♬♬♬!”
새소리와 닮은 요정어가 엘븐하임 전역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지자.
엘프 주민 대다수가 엘븐하임의 중심부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준비가 됐네.”
대장로 트루엘과 다른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시작으로.
서로 손을 맞잡은 엘프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아아아아아♪!
엘븐하임에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아리아.
그리고 그 목소리가 가장 커진다 싶을 때.
상공에서, 그 노랫가락에 답하는 듯한 화음이 들려왔다.
– 아아아아아♪!
단순한 음악 소리 같았지만, 타이니는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마주 본 아내의 눈빛에서도 그것을 확인하고는.
“……가자.”
“응.”
부부는 각자의 정령을 타고 그대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엘븐하임 상공의 은폐장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나무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오오!”
“♪♬!?”
“♬♬♬!”
엘프들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뜨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한눈에 봐서는 짐작조차 안 되는 엄청난 크기.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멀리 가지와 잎이 보이는 태초의 나무.
넘쳐흐르는 생명력, 마나의 힘이 축복처럼 그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순간.
“♪♪♬!”
“♪♪♬!”
엘프들은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장로들을 비롯한 일부 늙은 엘프들은 웃지 못했으니.
– 어머니 세계수의 마나가 예전보다 확실히 못하다.
세계수를 근거리에서 본 적 있는 나이 든 엘프일수록 그것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엘븐하임 상공에 뛰어오른 타이니와 에스티나는 속삭이는 세계수의 음성을 들었다.
– 사아아아♪
사람의 목소리도, 하다못해 단어나 문장도 아니면서도 그 뜻이 선명하게 전해지는데.
“짐작하고 계셨다고요?”
– 아아아아♪
“그럼, 어찌하시겠습니까?”
– 아아아아♪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그 뜻을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에 응답하듯, 세계수의 거대한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동시에 떨리기 시작했다.
스아아아아아아.
따스하게 부는 바람과 위아래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
이내 그 바람을 느끼고 소리를 들은 엘프들의 눈에서는 하나둘씩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으니.
– 작별의 시간이다, 내 아이들아.
그 안에 담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어떤 언어보다 확실하게 전달된 것이다.
그 무엇보다 확실한 작별 인사.
그리고.
“그럼…….”
마찬가지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반려를 바라본 타이니는, 이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다시 녹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파지지지지지지직.
파직.
세계수가 통과할 수 있는 거대한 아공간을 그대로 열어젖혔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궁.
허공에 떠오른 세계수가 그 검은 구멍에 뿌리까지 빨려들어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엘프들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파지직.
결국 그 구멍이 닫히는 순간.
티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에서, 모든 엘프들이 눈물을 흘렸다.
안타까운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부부.
신들만 외면한 세상의 시간이, 그 후로도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강림의 날 이후 20년.
– 세상의 마나가 소실되고 있다.
그동안 모두가 쉬쉬해 온 세상의 변화가 결국 민간에도 공표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20년 전에 비해 30% 이상 마나가 줄어든 현상은 결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세상의 권력자들은 공포에 젖어 들었다.
– 마나의 힘, 귀족의 기득권을 받치고 있던 자원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우려대로, 이능력자들의 수준은 실시간으로 떨어져 가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의 깨달음은 그대로인데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단계는 한 단계씩 낮아져 갔고.
기사들의 능력 역시 마찬가지로 하향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능력자 중 멀쩡한 것은, 재앙을 물리쳐 낸 9대 기사와 불굴의 신.
그리고 그 불굴의 신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타이니교의 사제들뿐이었다.
불굴의 신을 섬기고 그 뜻을 받들기로 한 이들은 신성력을 내려받고 그것으로 사라져 가는 마나를 대신하기도 하였으니.
세인들의 시선은 이제 양대륙의 유일한 종교가 된 해머교, 아니 타이니교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연히 권력자들은 불안해했다.
“타이니교의 위세가 너무 커지고 있습니다. 적당히 자제를 시켜야…….”
“이러다 온 나라가 타이니교에 먹히고 말 겁니다.”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대책? 무슨 대책? 누가 그 인중신을 찾아가 따지기라도 할 거요!?”
속수무책의 상황에서 권력자들이 발을 동동 구를 때.
타이니교의 신전에서 교황 하일론과 성녀 에리나가 내린 선포는, 오히려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타이니교의 사제를 뽑는 수를 매년 줄이겠다!
“들었어? 타이니교에서 사제들 뽑는 기준을 강화한대.”
“경쟁이 더 치열해지겠어.”
일반인들이야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지만.
“왜지?”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우리야 좋은 일 아니겠소?”
“그자들에겐 정치에 관여 안 하겠다는 교리도 있으니까.”
그로 인해 권력자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제야 10년 전 제국의 발렌티아 공작가에서 실시했던 정책에 눈길을 돌렸다.
“이제 마나가 없다고 관리 채용을 안 하다가는 행정이 마비되게 생겼소.”
“우리도 따라야지.”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인재 선발 과정에서 마나 감지력의 유무가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혹시 불굴의 신도 약해지고 있는 건가?”
그런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감히 그 의혹을 증명하겠다며 나서는 미친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간들의 나라가 마나 소실에 대한 대책 마련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다른 종족에서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왜 우리 애가 인간 같지?”
“왕실의 발표가 정말로……?”
“이, 이게 진짜…….”
수인족의 나라, 웨어비스트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짐승의 태가 아닌 온전한 인간의 모습인 경우가 많아졌고.
“오오. 크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크지?”
“키만 크지, 뼈대는 약하구만. 그래서 걱정이야.”
“귀도 짧고.”
“요새 태어나는 애들이 다들 그렇다는데…….”
“이거, 첫 번째 망치께서 하신 말씀이 정말이던가.”
드워프 족에서는 키가 종족 평균치를 훨씬 뛰어넘고 골격은 종족 평균치를 훨씬 못 미치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으며.
“피부가 하얘…….”
“어떻게 오크가…….”
“덩치도 작고, 이게 무슨”
“대전사께서 공표하신 말이 있지 않나.”
“그래도…….”
오크족에서도 특유의 녹색 피부가 아닌 인간의 살결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늘어만 갔다.
많은 이들이 그 변화의 원인을 이미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종족에서 배우자의 외도, 특히 인간과의 불륜을 의심하는 이들이 나오면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다수는 이미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식하고 있었다.
–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세상과 종족의 변화.
그 극점에서 신이 선언했다.
[두려워 말라! 끝없이 유지되던 생명의 수는 이제 제한되지 않을 것이며, 생명은 유한해지되 무한하게 뻗어 나갈 것이다!]인중신이 모든 인간의 머릿속에 직접 때려 박은 메시지.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모두가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이 변화가, 결코 재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마나니 마법이니 하는 것들과 인연이 없었던 일반 백성들은 그저 신의 목소리를 듣고 안심할 뿐이었다.
반면 계속되는 변화에 여전히 안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 이들의 걱정은, 그 후로 다시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현실로 이루어졌다.
왕국 최고의 검호라 불리는 사내가 40년 전 블레이더급 수준에 머무르게 된 시기.
지방의 하급 귀족들이 거느린 기사라고 해 봤자 무기를 든 일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압도적인 무력의 격차가 사라지자, 백성들은 숫자의 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악덕 영주는 물러가라!”
“우리를 착취하는 영주는 필요 없다!”
“끌어내려!!”
가진바 무력을 믿고 백성을 찍어누르던 귀족들이, 그 백성들에게 잡혀서 머리가 떨어지는 일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의 마계 대전부터 종말의 재앙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초월적 존재가 일으킨 위기를 겪어 온 이 세계에.
바야흐로 초월적 재난이 아닌,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대격변의 시기가 도래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