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49
49화. 세상을 바꿀 씨앗들
“에나 모르스 양이죠?”
녹색 머리 여인이 말을 건네는 순간, 싱그러운 숲의 향기가 사방을 장악하는 것 같았다.
‘엘프…….’
아무리 엘프라 해도 이상할 정도로 뚜렷한 존재감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어디선가 이 여인을 본 것만 같은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뒤늦게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예. 맞습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자신도 모르게 정중히 예를 갖추게 되는데.
엘프 여인은 그 말에 엉뚱한 말로 답했다.
“대답을 해 주고 싶어서 왔어요. 그이를 대신해서.”
“대답……이요?”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에나 양이 신의 존재를 갈구하는 건, 아무래도 어려서 겪은 그 일 때문이겠죠?”
이어서 나온 여인의 말에 에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에나 님, 도망치세……!
아득한 기억 속에 있는 그 사건.
제국 고위 귀족가의 공녀로서 세상을 항상 아름답게만 보며 저택 밖을 궁금해하던 어린 시절.
그녀는 치기 어린 마음으로 가출을 결행했다가, 흉악한 범죄자 무리를 맞닥트렸고.
가문에서 먼 도시까지 가까스로 자신을 쫓아온 시종들이 갱들에게 농락당하고 살해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 가만 보자, 어느 집안인가. 몸값을 얼마나 받을 수 있으려……. 모, 모르스? 이런 젠장!
– 신의 혈족!? 그 모르스 공작가?
– 맞아. 문장도, 신분패도……. 젠장, 이런 빌어먹을! 모르스가 왜 여기 있어!?
– 그냥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라며!?
– 어떡하지?
– 어떡하긴 뭘 어떡해!? 천벌 받기 싫으면 튀어야지.
– 미친놈아! 애가 우리 얼굴 봤잖아!
– 그래서 이 애를 어떻게 하자고? 모르스인데?
– 빌어먹을…….
덜덜 떨면서 최악의 순간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당시의 무력감. 그것은 트라우마로 남아 항상 악몽을 꾸게 만들었다.
만약 자신이 신의 혈족이라 불리는 모르스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더 험한 꼴을 당하거나 죽었을 것이다.
그날의 그 사건은, 그녀가 힘에 대한 집착을 갖게 하고 끝내 성기사까지 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다.
신전에서도 아는 사람이 몇 없는 이야기인데.
“그걸 어찌 아셨죠? 설마 에시르와 관계가 있나요? 그 녀석, 설마 거기까지 읽고 장난을…….”
“에시르 그 아이는 그이가 만나고 있을 거예요. 나는 에나 양과 얘기하고 싶어서 왔고요.”
“예?”
“말했죠? 답을 주려 왔다고.”
“무슨……?”
“우리의 대답은 이거에요. ‘다 자란 성인을 부모가 계속 돌보는 것은 과보호다’.”
“……예?”
“에나 양은, 부모님이 에나 양의 미래와 선택에 계속해서 관여하길 바라나요?”
“그거야 아니지만, 왜 그런 말씀을……?”
“그래요. 에나 양의 부모님도 그러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예요. 똑바로 자란 아이들이니까요.”
우리 부모님이…… 똑바로 자란 ‘아이들’?
에나의 눈이 조금씩 커지던 그때.
“신이라는 부모가 인류라는 아이를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인류는 이제 스스로 살아갈 때가 된 성인이거든요.”
태연하게 그리 말하며 미소 짓는 여인의 모습에, 비로소 그녀를 어디서 보았는지가 기억이 났다.
바로 가문의 전설인 고조부모님들이 동료들과 함께 남긴 초상화에서.
“천공의 기사! 에스티나!!”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지르자, 여인이 풋 하고 웃음을 지었다.
“신의 반려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기억해 주는 사람은 오랜만이네요.”
“정말, 정말 그분…….”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고서야 깨달았다.
이 인상적인 여인을 대면하고 있는데 중앙 신전의 그 누구도 근처에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과 여인이 있는 공간이, 녹색의 아지랑이 같은 기운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정말, 그분이십니까?”
“그래요. 당신이 그이를 찾았기에, 그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내려온 거랍니다. 아직 인류는 달에 올 수 없을 테니까요.”
달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장로 회의에서 논의 중인 기밀인데, 여인은 그 사정까지 훤히 꿰고 있다.
게다가 그녀의 주변에는 기이한 에너지까지 흐르고 있었으니.
‘설마 이게 오러?’
신성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힘.
그것이 에나를 설득시키고 감격하게 만들었다.
“오, 오. 이, 이런 어떻게…….”
내가 이렇게 당황할 리 없는데.
할 말을 골라야 하는데.
머릿속에 무수히 떠오르는 생각들은 그 무엇도 제대로 입 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여인이 했던 말이 뒤늦게 생각났다.
아니, 그제야 이해가 된 거였다.
“신이 인류를 계속 돌보는 것은 과보호다……. 라는 말씀이, 제가 원한 대답이라고요?”
“그래요.”
“어떻게, 어떻게 그게 말이 됩니까!”
그 미소와 함께 나온 단순한 대답이, 신의 반려를 마주한 감격을 뚫고 울컥한 감정이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인류는 언제나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기아와 질병, 그리고 전쟁까지요.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신께서 직접 행사하시지 않았다면 대참극이 벌어졌을 겁니다. 그래서 직접 나서셨으면서!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과보호였던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하고 있어요. 우린 신이기 이전에 인간이기도 하니까요.”
그 씁쓸한 미소에 에나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말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정말, 정말 떠나시려는 것은 아니죠? 예? 신이 계시기에 인류가 번성하는 겁니다. 타이니 님이 계시기에 인류가 평화를 유지하는 겁니다! 가시면 안 됩니다!”
“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어요.”
“왜요!”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라도요.”
“그게 무슨 말씀…….”
“불완전한 창세를 마무리하며 얻은 인과. 우리가 이 세상에 더 머무르면 세상이 무너져요.”
신이 떠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진다.
그 엄청난 발언에 에나는 더 이상할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한마디만 더 할게요.”
그런 그녀를 보며 신의 반려가 쓴웃음을 지었다.
“부모는 아이가 성인이 되어 독립하더라도, 걱정할 수밖에 없답니다. 원래 그런 존재니까요. 그러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떠나는 건, 여러분을 걱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해요.”
좀 더 지켜줬으면.
“걱정은 되지만, 부모는 성인이 된 아이가 훌륭하게 살아가리라 믿을 거랍니다. 그렇게 세상에 전해 주세요.”
더 돌봐 주시면 안 될까요.
아이는 아직 홀로 살기 무섭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와 말문을 막았다.
“에나 모르스. 당신은 우리 친인들을 많이 닮았고, 그만큼 강인했어요. 이 대답은 당신의 용기와 결단력에 대한 보답이랍니다.”
“그런…….”
간신히 입을 떼는데.
“만나서 반가웠어요. 에나.”
여인은 짙은 숲의 향기만 남긴 채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에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신이 남긴 대답을 곱씹었다.
“신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할 시기…….”
가장 고귀한 핏줄의 종교인이, 신 없이도 살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신의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씨앗이었다.
* * *
“어떻게, 어떻게 해야…….”
아드리안은 어질한 정신을 붙잡기 위해 애쓰며 무작정 걸었다.
설마 신이 정말 달에 있을까.
그 말을 꺼낼 때만 해도 아니길 바랐는데.
아무래도 그게 진실인 것 같았다.
“안 돼. 안 되는데…….”
다른 방법이 없을까.
신을 만나지 않고도 가문의 비기를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이…….
그러나 아드리안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갖 방면으로 노력해 보면서 깨달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나마 신을 만날 방법이 있다던 에나 모르스에게 남은 희망을 건 것이었는데.
“어흐, 어흐흐…….”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만취한 것 같은 기분.
세상이 뿌옇게 보이며 발걸음이 비틀거린다 싶던 그때.
눈앞에 이상한 남자가 보였다.
전설에나 나오는 특이한 어깨 갑옷을 걸치고 거대한 망치를 든 거한.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전사.’
남자를 보는 순간, 그 생각이 들었고.
자연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중앙 신전에도 전신(戰神)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이 있는지 몰랐네. 하긴, 신전이니까.”
그저 헛웃음을 지으며 그 옆을 지나치려는데.
이상하게 남자와의 거리가 좁혀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네 말대로 나는 전신. 싸움의 신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왜 너는 내게 네 마음의 구원을 바라느냐?”
그 남자가 불쑥 꺼낸 말에 아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전의 초인인가.
“장난칠 기분 아니니까 비켜 주쇼.”
그렇게 퉁명스러운 말을 뱉고 지나치려 했는데.
그 남자가 자신의 앞으로 작은 책자를 내던졌다.
“이게 네가 원하는 것이면 가져가라.”
“무슨…….”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내리자 책자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劍帝祕傳(검제비전)]그 동대륙 글자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기분 나쁜 장난을…….”
장난질이라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책자를 주워 내용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욕설을 하며 책장을 넘기던 그의 안색은 점점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 봤던 그대로……. 아니, 더 구체적이고 발전된 형태다.’
착. 착. 착.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점점 더 빨라지고.
이내 겉핥기로나마 책자를 일독한 아드리안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이걸……?”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그제야 조금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거한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노을빛 아지랑이.
그 공간이 마치 세상에서 격리된 것처럼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날 찾았던 것이 아니냐, 아드리안.”
태연하게 나오는 사내의 말, 손에 들린 비전서, 주변의 공간.
그 모든 것을 인식하는 순간, 아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털썩 꿇고 말았다.
“신, 신이십니까!? 정말로 불굴의 신!? 그럼 이건 정말로 제게 주시는 선물……?”
“그렇다.”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타이니 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하는데.
“그런데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것이더냐?”
무심한 듯 들려오는 목소리가 들뜬 그의 마음을 확 가라앉게 만들었다.
‘정말 내가 원하는 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아. 당연히 아시겠지만, 지금 세상에는 마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나 없이도 가문의 비전을 재연할 수 있는 방안을…….”
“그게 아니겠지.”
“예? 아,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가문의 비기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만 있으면…….”
“그것이 있으면 네 어미의 죄가, 아니 네 죄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말에 열심히 떠들던 아드리안의 몸이 딱 움직임을 멈췄고.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아드리안? 그것은 그저 핑계일 뿐이라고.”
이내 머릿속으로 오랫동안 되새겨 왔던, 그러면서도 매번 잊고자 했던 과거가 되살아났다.
– 엄마, 나 이거 보면서 밥 먹다가 실수로 찢었어.
이젠 실용이 없어졌으나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가문의 비전.
어느 날, 그는 장손 자격으로 그것을 열람하다가 저지른 실수를 엄마에게 알렸다.
아버지가 대수롭지 않게 주길래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엄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애드. 절대, 절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거라. 이건 엄마가 한 거야. 알았지?
– 어? ……응.
그의 실수는 엄마가 대신 덮어썼고.아버지라는 인간은 분노했다.
– 쌍X이 가문의 보물을 망쳐!? 여봐라! 저년을 당장 별채에 가둬라!!
작은 별채에 갇혀 나오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말라 죽어 가던 어머니.
그 모습은 어린 아드리안의 양심을 사정없이 후벼팠다.
그래서 고백하려 했는데.
어머니가 말렸다.
– 네 아버지는, 그냥 핑계가 필요한 거야. 내가 아니라면 네가 갇혔을 거야.
– 나서지 마라, 애드.
아버지는 가문의 비전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가문에 막대한 배상을 받아 냈다.
그리고 발렌티아는 더 이상 무가가 아니라고 세상에 선언했다.
동시에 큰돈을 잡아먹기만 하던 블루윙 기사단을 해체했으며.
제국 최고의 기사 가문이라는 명예를 버리고, 아니 이용해서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째어머니가 낳은 동생들을 자신의 자리에 들였다.
– 네 어미의 죄가 있으니, 너는 후계가 될 수 없다.
가문은 부강해졌지만, 그럴수록 아드리안의 마음은 부서져 갔다.
“내, 내가, 가문의 비기를 복원할 거야. 그래서…….”
그렇게 발렌티아에 세계 최고의 미남 돌아이가 탄생했다.
지금 눈앞의 남자는, 그 상처를 다시 억지로 끄집어낸 것이다.
“그런 걸 가져간다 해도, 네 아버지가 네 죄를 사해 줄까? 네 어머니를 별채에서 꺼내 줄까?”
“추, 충분히 가능성은…….”
“아니지. 아무리 멍청한 척해도 사실 알고 있잖느냐, 아드리안? 네 아버지가 어떤 인간인지.”
“아버지는…….”
어떻게든 항변하려던 아드리안은 그 순간 스스로 답을 떠올렸다.
마나가 필요 없는 검제비전? 설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아버지는…….
‘비싸게 팔아먹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루이스 폰 발렌티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난 여태까지 뭘 한 걸까?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다가 남자에게 물었다.
“그럼 저는 뭘,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이 준 가문의 비전. 그것이면 과거의 죄는 덮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네 아버지라는 인간은 허물이 너무 많지. 그리고 네 곁에는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친구가 있지 않느냐?”
아.
그 순간 머릿속에 광명이 비추는 듯했다.
‘대체 난 여태 뭘 하고…….’
삐뚤어진 집착이 부서지며 이제야 온전히 이성이 돌아오는 기분.
그러자 남자가 웃었다.
“이 대답은 너의 삐뚤어진 노력에 대한 보답이다. 잘못된 노력이었더라도 그 이유만큼은 가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세상을 똑바로 봐야겠지, 애드?”
그 말과 함께 남자는 사라졌고.
멍한 눈의 아드리안은 한참 뒤에나 신이 사라진 자리를 향해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든 그의 눈에는 이전과는 다른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부 부숴 주겠습니다, 아버지. 아니, 루이스 경.’
가장 고귀한 혈통의 남자가, 스스로 가문을 부술 결심을 했다.
아래에서부터의 혁명이 아닌, 위에서부터의 변화.
세상의 흐름을 바꿀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할 때.
신은, 오크족으로 태어나 인간이 된 남자의 앞에 서 있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