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63
63화. 게일 앤더슨
저벅저벅.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
횃불 하나 없는 깊은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의 발걸음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길의 끝에서 희미한 빛을 보았을 때.
남자의 발걸음은 좀 더 빨라졌다.
그렇게 다다른 동공 안.
푸른 마나의 빛이 어두운 동굴을 가득 밝히는 곳에 들어선 남자는 감탄한 듯 미소를 지었다.
“역시 완벽하군. 해일의 마도사다워.”
그 감탄사에 푸른 마나의 방벽을 유지하고 있던 노년의 마법사가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소리를 질렀다.
“닥쳐라, 리트만!”
고함을 지르려 한 것 같았지만, 목이 쉬어 갈라진 음성은 극도로 쇠약해진 마법사의 상태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이런, 이런. 음식과 물을 가져다주는 사람한테 그런 반응을 하면 쓰나. 아무것도 못 먹고 쓰러져서 저 괴물이 풀려나게 할 건가?”
쿵 소리를 내며 등에 진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은 후셀은 마나의 방벽 안에 갇힌 거대한 문어 형태의 괴물을 보며 히죽 웃었다.
“크라켄의 새끼……. 우리 조직에서도 정말 기적적으로 구한 보물이지. 카룬 군도 근처에서 해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아마 어미가 근처 심해에서 미친 듯이 찾아 헤매고 있지 않을까?”
– 끼에에에!
그 비웃음 소리를 들었는지, 방벽 안의 거대 문어가 눈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넘실거리는 마기가 거대한 몸집과 어우러져 한층 흉측해 보였지만, 후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눈앞의 방벽도 믿고 있거니와, 저 새끼 크라켄의 무력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풀어 주는 즉시 놈의 텔레파시가 어미에게 향할 테고, 설령 죽인다 해도 어미가 바로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분노한 전설의 마수가 이 오르투스를 덮치겠지. 고향이 박살 나는 꼴을 보기 싫다면 좀 더 힘을 내 달라고, 해일의 마도사 씨.”
그러자 괴물의 힘과 움직임을 묶어 두면서도 바다의 기운을 불어넣어 놈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있던 해일의 마도사 게일 앤더슨이 이를 갈며 후셀을 노려보았다.
“……네놈들은 천벌을 받을 것이다.”
그 말에 후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흥, 천벌? 천벌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받았다. 그러니 이건 그냥 정당한 복수야. 이 세상 전체에 대한!”
그 눈동자에 번뜩이는 광기는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복수를 하려면 네놈의 종족에게 해야지! 네놈을 품어 준 카룬을 노리는 게 말이 되느냐!? 네놈은 그냥 미친 거야!”
“품어? 크하하하하하! 뭐, 보기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착각은 자유니까 말이야. 마음대로 생각하시고, 좀 더 분발하시라고, 마도사 양반.”
배낭을 열어 수통과 빵 몇 덩어리를 마도사의 근처에 꺼내 놓는 후셀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아, 참. 드디어 좋은 소식이 있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게일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지만.
“오랜 기간 망설이시던 1왕자님이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더군.”
이어지는 말에는 고개가 획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뭐?”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기느니 우리에게 협력하는 길을 택한 거지. 결과가 궁금하지 않나? 우리가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지?”
“네놈!!”
우르르르릉.
게일의 분노와 함께 마나의 방벽이 흔들리며 그의 몸에서 푸른 마나의 기세가 뻗어 나오자, 후셀 역시 순간적으로 흠칫하는 듯했다.
하지만.
– 끼에에에.
그만큼 강해지는 마수의 울음소리와 꿈틀거림에, 게일은 다시 이를 갈며 방벽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피식 웃은 후셀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방벽을 해제하고 카룬을 망하게 두는 것도 한 방법이지.”
“네놈, 내가 반드시 찢어 죽여 주마.”
초인의 섬찟한 살기가 다시 후셀을 향했지만, 그는 오히려 과장된 태도로 예를 표하며 피식 웃었다.
“뭐, 꿈을 꾸시는 건 자유니까. 자, 그럼 전 이만.”
돌아서는 후셀의 뒷모습을 보며 게일 앤더슨은 다시금 이를 갈았다.
‘애초에 휴가를 갔다는 놈이 배에 탔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젠장!’
– 제가 워낙 일만 한다고, 전하께서 강제로 휴가를 주신 겁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저는 이 일을 하는 것이 휴가나 마찬가지인데.
항해 중인 배에 올라탄 놈의 너스레에 선상에서 파티가 벌어졌더랬다.
그렇게 한참 술잔을 기울이다 몰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 결과가 바로 이 꼴이었다.
“리트만, 그 미친놈이…….”
십수 년을 카룬을 위해 일해 온 공신이 대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지만.
– 키에에에.
당장은 이 전설의 마수의 새끼를 가두는 데 집중해야 했다.
놈의 말대로, 이놈을 놓치는 순간 고향이 파멸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까.
평범한 사람들이야 크라켄을 전설로만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를 비롯한 항로 개척단원은 먼발치에서나마 놈의 위용을 본 적이 있었다.
이상 기후로 마기가 고인 해역에 모여든 수많은 해양 마수들을 거대한 다리 하나로 쓸어 버리던 전설의 마수.
그리고 그것을 본 경험만으로도 게일 앤더슨은 깨달았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그 전설의 마수를 막지 못한다는 것을.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라면, 후셀이 새끼를 바로 죽이지 않고 자신에게 봉인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그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제게 선원들의 생명을 담보로 협박까지 해 가며 말이다.
‘안 그래도 막아야 했겠지만…….’
자신이 그때 막지 않았다면, 오르투스는 이미 석 달 전에 파괴되었을 것이다.
물론 굳이 자신을 끌고 온 의도 자체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놈의 동지로 보이던 흑마법사들이 그들과 동질의, 그러나 상위의 힘을 사용하는 크라켄을 온전히 봉인하기란 어려울 테니 자신을 유인한 것일 터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시기를 조율하려는 거겠지.’
크라켄의 새끼를 풀어놓고, 그 어미인 전설의 마수가 카룬을 찾아오게 만들 시기를.
그렇게 시기를 조절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은 가지만…….
‘그냥 당해 줄 수는 없지.’
콰직.
게일은 방벽을 유지한 채로 천천히 움직여 바닥에 놓인 딱딱한 빵을 주워 들었다.
질겅질겅.
놈들이 주는 음식과 식수에 마나를 약화시키는 독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은 먹을 수밖에 없었다.
‘줄었던 독이 다시 늘었다. 시기가 앞당겨진 걸까.’
놈들은 결국 힘이 약화된 자신을 죽이고, 크라켄의 새끼 역시 죽이거나 풀어놓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자신의 수명을 대가로 크라켄의 새끼를 봉인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섭리의 조각을 이해하고 이용하는 마도사를 우습게 봤다 이거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마, 악마추종자 놈들!’
결코 그냥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가오는 재앙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재앙을 일으키려는 놈들에게 막대한 손실이라도 안겨 줄 것이다.
‘제대로 망하게 만들어 주마, 쓰레기들!’
게일은 다시금 정신을 집중하여 크라켄의 새끼에게 기운을 주입했다.
자신의 수명과 영혼을 깎아 정교하게 조작한 마나가 크라켄의 새끼에게 스며들어 갔다.
‘조금만, 조금만 더!’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는 작업이었지만, 게일은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그의 마지막 유산을 만들어 갔다.
이것이 카룬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놈들 역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거다!’
자신조차 위치를 알 수 없는 지저의 동굴에 석 달째 고립된 마도사.
그의 눈빛이 위험한 기운을 담고 번들거렸다.
* * *
“음?”
오늘도 어김없이 접시를 산처럼 쌓아 놓고 음식을 위장에 쑤셔 넣다시피 하던 타이니는, 접시 아래 깔린 쪽지를 보고 순간 안색을 굳혔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조금은 빠른 발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가,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은 곳에서 쪽지를 폈다.
[작은 새가 울었다.]지극히 짧고 평범한 문장.
하지만 그 문장을 본 타이니는 그 즉시 외성으로 향해 제이의 바를 찾아갔다.
“정말 괴상할 정도로 빨리 자라시는군요. 볼 때마다 달라지시니…….”
제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카룬에 있는 동안만 거의 한 뼘 가까이 자랐으니까.
그러나 아직은 또래에 비해 클 뿐 웬만한 성인 여자보다도 작은 키.
그에게는 그다지 만족스러운 변화도 아니었다.
“지금 내 키 얘기나 할 때가 아닐 텐데?”
“흠, 그렇지요. 실례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는 제이였지만, 이내 눈을 가늘게 뜬 그는 헛기침을 하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1왕자 측에서 은밀히 배를 수배하고, 마법 물품을 사 모으고 있습니다. 그것도 전에 후셀이라는 자의 배에서 나온 것과 비슷한 물품들로요.”
제이의 말에 타이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엄청난 금액이라고 들었는데, 그 양을 전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만, 4분의 1 수준은 됩니다. 1왕자궁의 재산을 거의 털어 넣은 수준인 것 같습니다.”
“……무리했다는 거군.”
“예.”
“그 배가 후셀과 악마추종자들의 근거지로 향할 것이다?”
“1왕자가 놈들과 손을 잡았다면,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일단 그 배에 몰래 잠입하여 목적지를 알아내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됩니다만…….”
“다만?”
“……유인책 혹은 양동 작전일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무슨 뜻이지?”
“그 배가 후셀과 악마추종자들의 은신처로 가지 않을 확률, 혹은 가는 길에 왕실에서 다른 일이 벌어질 확률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전에, 놈들이 성물을 노린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렇지.”
그 말에 타이니는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 전설의 마수 크라켄을요? 길들여요? 푸핫! 유인요? 푸하하하. 타이니 경은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 마수를 다루는 흑마법사면 가능하지 않냐고요? 푸핫, 정말 진심으로 물어보시는 겁니까? 허허.
– 그게 가능했다면 악마추종자들이 대륙의 해변가 도시는 죄다 작살을 내 놨을 겁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마법사들에게선 비웃음만 돌아왔지만, 미래에 얻은 정보는 확실했다.
‘크라켄을 유인하려는 거야. 방법은 알 수 없어도.’
그러니 1왕자가 모으고 있다는 마법 물품도 크라켄의 유인을 위한 것일 확률이 높았다.
카룬의 마법사들은 일전에 후셀의 배에서 압수한 것들도 그런 용도의 마법에 쓰이는 물건은 아니라고 했지만, 크라켄이 오르투스를 덮치는 미래를 알고 있는 이상 그렇게 판단하는 게 옳았다.
‘그러니 막아야 해.’
여기서 문제는, 성물의 도난도 동시에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 7대 성물이 무사했다면, 이 싸움이 한결 쉬워졌을 것이다.
단순히 마수의 침입을 막는 광범위 결계 효과만 생각해도 성물은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다.
거기다 자신이 파악한 응용법이 정말 활용 가능한 거라면, 단순한 결계 외에도 쓸모가 많을 터였다.
‘반드시 지켜야 해.’
둘 중 어느 하나도 간과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자신의 몸은 하나였다.
“으음…….”
생각할수록 고민만 쌓이는 듯해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제이가 어쩐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왜 그렇게 보지?”
“설마 지금 배에 숨어들지, 왕실에서 성물을 지킬지를 고민하고 계신 겁니까?”
“당연하지.”
“지금 타이니 님 외모로 어디 숨어드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거야 마법을 쓴다든지…….”
“놈들이 마나 탐지를 안 할까요? 그리고 얼굴이야 어떻게든 변장한다 쳐도 덩치는요? 거기다 극비리에 움직이려고 하는 놈들이 아무리 선원이 모자란다 한들 애를 뽑을까요?”
“아…….”
“혹시 성인 체격으로 변신할 수 있으십니까? 아니면 잠영으로 배를 따라잡을 수 있으신가요? 최소 10해리(n mile) 정도는 헤엄쳐야 할 텐데요?”
푹. 푸욱.
제이의 얄미운 지적이 연달아 가슴에 틀어박혔다.
“그, 그만!”
알아들었다고, 새끼야!
심중에 끓어오르는 분노는 입 밖으로 토해지진 않았다.
끙.
‘확실히 난 머리 쓰는 건 쥐약이야.’
자신의 약점을 지적하고 보완해 주는 이에게는 분노가 아니라 감사를 표하는 게 옳다.
그것은 곧 그의 신조대로 당당한 인생을 위한 길 중 하나니까.
하지만.
‘검제나 그 부하나……. 쌍.’
어찌 지적질을 저리 얄밉게 할 수 있을까.
타이니가 부글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제이를 노려보는데, 그 시선을 느꼈는지 뜨끔한 표정을 지은 제이가 쓱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뭐, 타이니 님이 성물을 완벽히 지켜 내신다면 저희 역시 최선의 결과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너희가 배를 맡겠다고? 무력이 달릴 텐데?”
블랙윙의 최대 무력은 블레이더급이라고 들었다.
정말로 그 배가 가는 곳에 악마추종자들의 정예가 있다면, 후셀만 해도 슈페리어급이다.
하지만 그 반문에 제이는 태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이미 카룬 왕실에도 정보를 흘렸습니다. 적어도 저희만 그 배에 타지는 않을 겁니다.”
……확실히 똑똑하긴 해.
타이니가 쯧 하고 혀를 차면서도 내심 납득하는데, 제이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더구나 본가에서도 조력자를 보내 주셨거든요.”
“뭐?”
발렌티아 공작가의 정예가 카룬에서 발견되면 국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 아니었나?
그 놀란 눈빛에 제이는 태연하게 반문했다.
“눈에만 안 띄면 되는 거 아닙니까? 왕실에야 못 들어가겠지만, 외부 활동이라면 한 명 정도 변장시키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지요.”
“한 명? 누군데?”
“그건…….”
기대 어린 타이니의 표정을 보며 말끝을 흐리던 제이는 오른손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씩 웃었다.
“……비밀입니다.”
그 얄미운 미소가 타이니의 인내심을 뚝 끊어 버렸다.
“……너, 잠깐 따라 나와 봐.”
“아, 아니…… 본가 정책상 비밀이라고요!”
“닥쳐!”
“포, 폭력 반대!”
“아니, 아니지. 폭력이라니? 우정이지. 다 싸우면서 크는 거랬어.”
“전 다 컸습니다!!”
“미안, 내가 다 안 컸어.”
티격태격하는 목소리들은 그 후로도 한참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