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7
7화. 복수 (3)
정령.
마수(魔獸)나 몬스터처럼 마기를 근본으로 하지 않은, 평범한 생물이 최소 수백 년간 마나(Mana)를 축적하여 스스로 거듭난 것들을 영물(靈物)이라 한다.
정령이란, 말하자면 그 영물들의 영혼 혹은 본질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극히 보기 드문 존재지만, 그중에서도 식물이 아닌 동물의 정령은 더욱 희귀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동물의 수명이라고 해 봐야 대개 십수 년 안팎인 데다가, 괴물이 종횡하는 이 대륙에서는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아남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육체를 잃어 영혼만 남은 영물, 즉 정령은 또 다른 실체를 가진 다른 존재, 정령술사와 계약하지 않으면 세월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지기 마련이니 점점 더 희귀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정령술사의 기질을 타고난 종족, 엘프 역시 대다수가 동물이 아닌 수목의 정령을 다뤘다.
하물며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술사의 재능부터가 인간에게는 무척 드물게 나타나는 것이었으니.
– 크르르르.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동물의 정령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인 것이다.
게다가 그 정령이, 몬스터나 마수가 아닌 이 세상의 생물에게 살기를 드러내는 건 더욱 드문 일.
하지만 마냥 감탄하고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만! 그놈은 더 고통을 느끼다 죽어야 한다.”
그 말뜻이 전달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대한 늑대의 정령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자그마한 인간의 아이를 보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급격히 줄어드는 살기. 억지로나마 분노를 삭이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내 말을 알아들어?”
– 크륵.
고개를 끄덕이는 반투명한 정령의 모습에 타이니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정령술의 재능 따위는 없을 텐…… 아!’
문득 옛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세계수의 수호자라는 직함을 가졌지만, 거대한 독수리의 정령을 타고 다니는 모습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는 천공의 기사라 불리던 동료 에스티나.
그녀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 인간도 순수한 영혼과 충분한 마나를 갖추고 있다면 정령술사가 될 수 있을 거야. 뭐, 인간이 우리 기준으로 순수하려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힘들겠지만 말이야.
마나의 힘을 사용할 줄 아는 인간 중 어린아이만큼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이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즉, 인간 정령술사란 드물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 준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몸이 어리긴 한데…….’
과연 영혼이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타이니는 아직도 피가 흥건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하루 이 손에 명을 달리한 놈이 몇이던가.
죽인 놈들이 모조리 인간쓰레기인지라 죄책감 따위는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타이니는 자신의 행위에 순수라는 단어를 갖다 붙일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늑대의 정령은 마치 그 생각이 틀렸다는 듯이 고개를 젓더니, 그 거대한 머리를 타이니에게 들이밀었다.
– 크르.
“응?”
거의 사람 얼굴만 한 크기의 코가 타이니의 이마에 닿는 순간.
반짝이는 빛과 함께 늑대의 생각이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잠시 후, 타이니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늑대가 전해 준 바에 따르면, 조금 전 뇌리에 떠오른 검붉은 사슬을 깨트릴 때 끌어 올린 마나가 의도치 않게 정령석에 스며든 모양이었다.
마기에 의해 근원이 흔들려 있던 정령석과 그 빈틈을 채운 자신의 마나.
그것이 하나의 연결고리로 작용하여, 자신과 정령 사이에 교감이 가능할 정도의 유사성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계약이 가능하다?”
– 크륵.
긍정하는 듯한 울음을 낮은 소리로 토하는 늑대의 정령을 보며, 타이니는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은 다루기에 따라 전투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마법처럼 따로 신경을 분산할 필요도 없고, 그저 존재 유지를 위한 마나만 공급해 준다면 사실상 또 하나의 동료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령은.
‘술사가 강해질수록 같이 강해진다.’
에스티나가 대륙 10대 기사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무력을 자랑하던 이유도 그녀가 다루던 정령들 덕이었으니.
“……이거 뜻밖의 행운이로군.”
– 크륵.
늑대는 당연히 그렇다는 듯 고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막힌 우연. 하지만 단순히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늑대의 감정에는 사슬에서 해방시켜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듬뿍 담겨 있었다.
본래의 자질과는 별도로, 기묘한 우연과 정령의 진심이 어우러져 탄생한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당연히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럼 계약해야지.”
우웅.
머릿속에 흘러 들어온 늑대의 생각을 따라 그대로 마나를 주입하는 순간.
– 아우우우우우!
방 안을 가득 채울 것 같은 크기의 반투명한 늑대가 일순간 연기로 화해 타이니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이내 영혼이 고양되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엄습함과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기묘한 기억 하나가 재생되었다.
깊은 숲속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살아가던 거대한 은빛 늑대.
그리고 그 늑대를 공격하는, 검붉은 기운을 사용하는 무리.
‘인간인가? 아니면 아인종?’
늑대의 시선으로 본 기억이라 그들 개개인의 외모는 구별할 수 없었다. 다만, 영물이었던 늑대가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해할 정도로 불길한 마기(魔氣)를 뿜어내는 놈들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의 손에 늑대의 숨이 끊어지고, 곧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하?’
놈들이 쓰러진 늑대의 배를 가르고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바로 영혼의 정수, 정령석이었다.
이내 늑대의 정령석은 기묘한 저주가 덧씌워진 채, 희미한 정령술사의 재능을 가진 회색 머리 아이에게 건네졌다. 어쩌면 상생할 수도 있었던 정령술사와 정령의 관계가 그 시작부터 뒤틀려 버린 것이다.
이후 회색 머리 아이는 알 수 없는 저주의 힘을 빌려 정령석의 힘을 천천히 흡수하기 시작했고, 이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점차 늑대의 본성과 힘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만들어진 수인족이라고?’
그런 일이 가능했던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일단 그 과정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으니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타이니가 놀라워하는 동안에도 늑대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계속되었다.
아이가 조금씩 성장할 때마다 늑대는 존재가 소멸하는 듯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자신을 죽인 이들에게 품었던 원한이 점차 아이에게로 옮겨 간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고통을.
정령이 본래대로라면 정령술사의 자질이 없는 타이니와 억지로 계약한 이유, 그 마음이 확실히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한을 갚아 달라는 것.
‘……어려울 거 없지.’
어차피 마족과 관련이 있는 놈들은 다 쳐죽일 생각이었다.
영혼의 교류를 통해 타이니의 진심을 확인한 늑대의 영혼도 흡족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또다시 늑대의 의지가 전해졌다.
– 컹!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규정……해달라는 것 같았다.
‘규정이라니? 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정령과의 계약, 그 마지막 단계에 대해.
‘이름!?’
– 컹!
잠시 생각에 잠긴 타이니는 방금 본 기억 속, 커다란 보름달 아래서 고고하게 서 있던 은빛 늑대의 모습을 떠올렸다.
달빛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은빛 늑대.
문울프(Moon wolf),를 내 취향대로 바꾸면…….
‘동방식으로 월랑(月狼)이라고 하자.’
– 크륵.
검은색 머리와 눈동자 때문에 시달리다가 오기로 동방어를 배운 이래 자리 잡은, 다소 특이한 취향에 맞춰 지은 이름.
다행히 늑대는 만족하는 것 같았다.
– 아우우우우우.
그렇게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늑대 울음소리와 함께 생각지도 못했던 정령의 계약이 완료되는 순간, 타이니는 넘치는 충족감과 함께 다시 현실에서 눈을 떴다.
“에리……나 님, 죄송…….”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온 힘없는 목소리가 한껏 들뜨려던 마음을 다시금 훅 가라앉혔다.
월랑이 겪은 고통을 짧은 순간이나마 체험한 타이니의 시선이 사나운 늑대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대체 이놈의 뒤에 뭐가 있었던 건지.”
월랑의 기억 속에서 본 놈들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지만, 적어도 울프의 변신 상태가 전생에 보았던 것과 다른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나아가, 전생에 놈을 죽였을 때 정령석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 또한.
아마 그땐 놈이 정령석의 힘을 온전히 흡수했던 것이리라. 힘을 모두 흡수했으니, 지금처럼 병든 개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은빛 라이칸스로프로 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보기 드물게 정령술사의 재능을 가진 아이와, 그보다 더 희귀한 동물의 정령을 희생시켜 수인족을 만들어 내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여신을 부정하고 마족을 추종하는 정신 나간 것들이 있기는 했지.”
마기를 흘리는 놈을 만나면 바로 죽여 버렸던 탓에 그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세상의 마나를 오염시키고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을 병들게 하는 마기(魔氣)를 사용하는 것들에 대한 그의 인식은 딱 ‘치워야 할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왕군이 나타나기 이전에도 그런 놈들 때문에 세상이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 들었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 시기에 그는 ‘미궁’에서 몬스터를 때려잡기에 바빴고, 그가 세상에 다시 나왔을 때는 이미 마왕군의 강림이니 뭐니 하는 신탁 때문에 한창 혼란한 시기였으니까.
하지만 월랑의 기억까지 본 마당에, 결코 좌시할 수는 없었다.
“어이.”
툭.
“에리……나 님, 잘못…….”
“닥치고. 네놈이 데리고 있던 정령, 어떤 놈들 짓이냐?”
“에……리나…… 님…….”
툭 치는 정도의 자극으로는 이미 맛이 가 버린 울프의 정신을 깨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더 세게 나가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몸에서 마나가 일부 소모되며 다시금 늑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반투명하던 영혼 상태일 때에 비해 확연히 작아진 크기로 세상에 나타난 은빛 늑대는, 한층 위협적인 송곳니를 드러내며 포효를 터트렸다.
“크와아아아아앙!”
투명하던 때보다 훨씬 실감 나고 박력이 넘치는 괴성이 다 죽어 가던 울프의 눈빛을 조금이나마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놈은,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는 늑대를 보자마자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내, 늑대…….”
내 늑대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굳이 응대해 줄 필요는 없었다.
툭.
“네 뒤에 있는 놈들, 어디서 뭐 하는 놈들이야?”
“끅!”
살기 넘치는 검은 눈동자와 다시 마주치자 울프는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내.
“조, 조직.”
“그러니까, 그 조직이 무슨 조직이냐고.”
울프의 정신을 완전히 박살 내 놨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하는 순간에는 놈의 눈빛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네, 네놈, 조……직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갑작스레 분명해지는 어투, 조금 화색이 오른 얼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타이니의 시선이 슬쩍 일그러지는 순간.
쿨럭.
“저, 저주를 받을…….”
피를 토해 낸 울프가 그 한 마디만을 남긴 채 그대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
저주 운운한 것은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물론 조직 얘기도 마찬가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문득 전생에서도 이놈이 비슷한 소리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 조직이 네놈을 쫓을 것…….
그때에는 그 조직이란 게 이미 자신이 박살 낸 울프 패거리를 말하는 줄 알고 코웃음을 쳤었다. 실제로 그 후 울프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타난 놈들도 없었으니, 금방 잊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아쉽게도 울프가 죽어 버렸으니 무언가 더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이놈이 수인족(?)이라는 사실조차 패거리의 대다수가 모르고 있었으니, 그 뒤에 있는 조직의 정보를 놈의 부하들이 알 리 없었다.
“뭐, 내가 머리 굴리며 살아온 인생도 아니고.”
애초에 자신은 홀로 세상을 누비던 사람.
남을 경외한 적은 있어도 따르지는 않았고, 애초에 집단을 이끄는 것도, 집단에 속하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았다.
머리를 굴리면서 작전을 짜 본 경험조차 몇 번 없었으니.
‘이 정보는 기억해 뒀다가 검제에게나 전해 줘야겠다.’
– 돌아가면 나를 찾아오게. 내가 자네의 그 재능을 제대로 살려 주겠네.
이 알 수 없는 회귀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옛 동료…… 아니, 미래의 동료.
그 사람이라면 작은 단서만으로도 분명 실마리를 찾아 줄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크르르.”
“놈은 죽었다, 월랑. 털어 버려.”
“……컹.”
얼떨결에 얻게 된 새로운 동료와 당장 직면한 과제. 그 두 가지에 머리를 쓰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래, 그래, 착하지. 앞으로 잘 부탁해.”
“킁.”
시큰둥한 태도의 월랑을 쓰다듬는 타이니의 시선이 울프의 시신 너머, 열려 있는 금고에 닿았다.
그 시선이 가장 먼저 포착한 것은 금고 속 수많은 금화나 문서 같은 것이 아닌, 그 구석에 놓여 있는 작은 ‘금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