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71
71화. 말룸(Malum)
타이니와 제나스가 왕성으로 돌진하기 직전, 왕실의 내성 중심부.
“이게 무슨 난리야?”
“젠장! 평소에 기도 좀 열심히 할걸.”
“신전 가기만 하면 돈 내라고 닦달인데, 기도는 무슨!”
“……넌 이 판국에 그런 말이 나오냐?”
사람들이 북적북적 몰려 있는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을 지키는 인원들은 왕실 기사단원들뿐이었다.
백성들을 왕성 안으로 최대한 많이 들이라 했던 국왕의 명도, 지금 여기, 성물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지하 통로만큼은 예외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의문을 품었던 명령이지만, 이 순간에는 모두가 국왕의 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저 괴물이 결계 때문에 공격을 못 하는 거겠지?”
“그럼, 걱정 마! 이건 성물이잖아.”
성물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서로를 안심시키는 기사들.
얼마 전까지는 그 존재 의의조차도 의심하는 이가 태반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변화였다. 다만 그 변화의 이유가, 나라를 위협하는 재앙을 맞닥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기사들이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늘에 떠 있는 위협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 낯선 사내가 나타났다.
“어이쿠, 기사님들. 수고들 하십니다.”
별다른 특색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얼굴.
그에 기사들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엄한 태도로 손을 내저었다.
“돌아가라!”
“이곳은 왕실의 비처, 출입 금지 구역이다.”
원칙대로라면 바로 잡아들여서 엄벌에 처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수많은 백성이 왕성으로 몰려든 탓에, 길을 잘못 드는 이들이 너무 많았던 까닭이다.
“그, 그게…… 겁이 나서 숨다 보니…… 여, 여기까지……. 죄송합니다, 기사님들. 용서해 주십시오…….”
엄포에 겁을 집어먹은 듯 굽실거리면서도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는 사내의 모습에, 기사들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다가오지 말고 돌아가! 인사는 됐다.”
기사의 어조는 차가웠다.
그도 그럴 것이, 창공에 거대한 크라켄의 다리가 떠 있는 광경은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린 두려움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사라고 한들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울먹이는 얼굴로 더욱 다가올 뿐이었다.
“아, 아닙니다! 천한 것이 잘못을 저질렀으면 제대로 예를 표해야지요……. 저를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기사들은 그제야 사내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 안전해 보이는 이곳에 있고 싶은 거겠지.
생각이 통일되는 순간, 행동도 바로 나왔다.
챙.
“물러가! 오늘 우리의 임무는 성물의 수호다. 백성들의 보호가 아니다!”
“그대로 돌아 나가서 다른 기사들을 찾아라. 더 이상 다가오면 베겠다.”
기사들은 위협적인 어조로 경고하며 칼을 뽑아 들기까지 했다. 경험상 이 정도까지 나오면 대부분의 평민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런데 사내의 반응은 좀 달랐다.
“거참, 쉽게 안 넘어가네.”
고개를 갸웃하며 피식 웃는 사내.
그러면서도 다가오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뭐?”
“지금 뭐라는 거야?”
“이놈!”
기사들이 한층 더 위협적으로 외쳤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역시, 결계 안에선 현혹이 통하지 않는다 이거지? 짜증 나는군…….”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과 함께 사내의 주위로 검은 번개가 튀더니, 일순간 그의 몸이 검게 물들었다.
“……이 기운도 거슬리고 말이야.”
쇳소리가 섞인 음성 뒤로, 검은 번개가 더욱 격해지며 주변의 빛살과 거칠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파지지지지직.
그그그그그.
요란한 소음이 터져 나오고, 사내의 주변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점점 그 크기를 불려 갔다. 마치 검은 물감이 새하얀 빛을 억지로 밀어 내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 광경에는 기사들도 즉각 반응했다.
“이, 이놈!”
“적이다!”
“……악마추종자!”
열여덟 명, 세 개 조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그중 전위 여섯 명이 사내를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쩌저저저적.
번쩍.
쾅!
검은 번개가 일렁이는 순간, 사내를 향해 돌진한 기사들의 몸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파바바바박.
파편이 되어 쏟아지는 피와 살점들.
뒤이어 산산이 부서진 쇳조각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 때도, 그 뒤에 있던 기사들은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새 그들의 발목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온 검은 기운이 하반신을 마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기사들은 아직 굳지 않은 성대로 목청껏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적이다!”
“악마추종자가 나타났다!”
“성물을 지켜라!”
지금 전력으로는 놈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소용없다. 너희들의 비명은 내 귀에만 들리니까.”
어느새 평범한 사내의 모습은 사라지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이가 쇠를 긁는 듯한 기괴한 목소리로 그들의 발악을 비웃었다.
* * *
– 그오오오오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크라켄의 다리는 지켜보는 모든 이에게 감당키 힘든 공포를 선사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다리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닌 도시 외곽에 내리꽂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쿠우우우우우우웅.
우르르르르르릉.
그 충격으로 인한 지진 역시 위협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으아악!”
“자, 잡아!”
“기둥, 아, 아니 탁자 밑으로!”
“신이시여! 제발……!”
결계가 있는 내성 안에 들어가지 못한 시민들은, 제각기 머무르는 건물이 무너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기둥 뒤나 탁자 아래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외부에 있는 타이니는 또 다른 위험을 감지해 냈다.
“……젠장! 제나스 경, 더 빨리!”
“뭐!?”
“크라켄이 상륙하려 합니다!”
멀리 바닷속에서, 끔찍한 마기를 뿜어내는 괴물의 본체가 솟구치고 있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더욱 빨리 질주하는 월랑과 타이니의 모습에, 제나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제야 그의 기감에도 감지된 불길하고 거대한 기척. 무심코 바다를 돌아보니, 형태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물체가 수면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아 절로 시선을 피하게 되는, 괴물의 본체였다.
‘빌어먹을!’
제나스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는 먼저 달려 나간 타이니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그리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 머릿속에는 파고들 만한 의문이 남아 있었다.
‘크라켄이 상륙하는 기척을 나보다 먼저 느꼈다고? 익스퍼트가?’
자신의 앞에서 질주하고 있는 어린 소년.
검술과 마나연공법을 배운 이래, 끊임없이 천재라는 소리를 들어 온 자신이었다. 검술에 대한 재능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마나 감응력에 자신이 있었고, 지금은 무려 챌린저급에 올랐다.
그만큼 기감도 엄청나게 증폭되었는데…….
그런 자신보다 3단계 아래인 녀석이 먼저 저걸 느꼈다고?
‘이게 말이 되나?’
제나스는 그 황당함으로 두려움을 억누르는 동시에 애써 호승심을 일으켰다.
“어디까지 날 놀라게 할 수 있는지 봅시다, 타이니 군.”
왕성으로 향하는 그의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그 시각.
왕성에 몰려 있는 이들, 특히나 결계 바깥에 있는 저택에 몸을 숨긴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저, 저게 뭐야!”
“아아아악!”
“끄, 끄르륵.”
먼 바다 위로 검은 그림자가 솟구치자, 그것을 목격한 것만으로 비명을 지르거나 거품을 물고 실신하는 이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단순히 공포심 때문에 일어난 발작이 아니었다.
“젠장, 기사들은 마나를 끌어 올려! 피어(Fear)다!”
결계 밖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파견되어 있던 기사들이 곳곳에서 소리를 질렀다.
“바다를 보지 마라!”
“괴물에게서 눈을 돌려!”
피어(Fear). 마물이나 몬스터가 적이나 먹잇감을 위협하기 위해 내뿜는 기세.
피식자가 공포에 질려 굳어 버리게 만드는 그 기운이, 엄청나게 먼 거리를 격하고 사람들을 실신하게 한 것이다.
“빌어먹을! 우리를 노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라니? 이게 말이 돼!?”
한 기사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이를 가는데, 하나둘 쓰러지는 백성들 사이에서 몇몇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바다가 아닌 왕성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크라켄을 응시하지 마라. 하급 흑기사들은 마나에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대부분 왕성 안에 있는데?] [그분이 직접 나서셨으니 기다려라.] [이제 곧…….]그들이 은밀한 수신호로 정보를 교환하며 육지 방향만 응시하고 있던 그때, 그들의 뒤쪽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으아악, 저게 뭐야!”
“뭔가 온다!”
“괴물이 마법을……!”
지시 때문에 왕성을 응시하고 있던 그들조차 무슨 일인지 궁금해지게 만드는 비명들.
[크라켄이 마법을 쓴다고?] [그럴 리가?]지휘관급에 속하는 마병이나, 흑마법사 중 크라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호기심에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다 위에 산처럼 솟구친 마수의 머리에서부터 이곳까지, 하늘을 어둡게 물들이며 직선으로 쏟아져 오는 검은 기운을 보고는 안색이 확 변했다.
“뭐, 뭐야! 저게!”
“이게 무슨!?”
하늘에 갑자기 거대한 검은 강이 흐르는 듯한 광경은 어찌 보면 장관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불길했다. 그 검은 강의 종착지가 아무래도 자신들이 있는 곳 같았기 때문이었다.
“피, 피해야 하나!?”
……어떻게?
누군가 외쳤지만, 아무도 그 목소리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새까만 연기가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으며 그들이 있는 곳을 강타했다.
우르르르르르릉.
쨍그랑!
스아아아아아아아.
생각했던 만큼 큰 충격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부서지며, 검은 안개가 순식간에 실내로 파고들었다.
그 결과.
“꺼, 꺼윽!”
“수, 숨을…… 못 쉬겠……!”
“아, 안 돼!”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거품을 물고 기절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그중에서도.
“끄아아아아악!”
유난히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아예 몸이 녹아내리는 자들이 ‘일부’ 있었다.
마치 촛농처럼, 온몸이 검은 물로 변해 흘러내리는 사람들.
그 충격적인 광경은 가뜩이나 불안에 떨던 주변 사람들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으아아악!”
“악마다!”
“악마가 보낸 괴물이야!”
그리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이들의 눈, 코, 입으로 검은 안개가 스며들자.
“끄, 끄르륵.”
그나마 버티고 있던 사람들마저 하나둘 기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범한 백성들보다 더욱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조직’의 일원들이었다.
[우, 우리 조직원들이?] [하급 흑기사들부터 아예 녹아 버리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버, 버텨라!]어지럽게 수신호가 오가지만, 지휘관급 조직원들마저도 이내 비명을 지르며 목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끄, 끄륵. 아, 으윽. 안…….”
체내로 파고드는 검은 연기. 친숙하지만 그 이상으로 두렵게 느껴지는 ‘상위의 기운’이, 그보다 ‘하위의 기운’을 가진 자신들의 몸을 안에서부터 녹여 버리고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럴 수가……!”
크라켄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 작전이 틀어졌다, 그것도 치명적으로!
지휘관 중에서도 그나마 정신이 붙어 있는 강자들은 가까스로 버티고 서서 신호를 교환했다.
[그분에게 알려야 한다!] [어떻게? 우리는 결계 안에 들어갈 수가 없잖아!] [어떻게든…….]그렇게 지옥도가 펼쳐진 가운데.
와장창!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흐릿해진 검은 안개 사이로 두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제나…… 경! 서 있는 놈들은 전부 마병입니다!”
“거참, 알아보기 쉽군요.”
살벌한 목소리들과 함께, 푸른빛과 은빛이 저택 안을 번개처럼 누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