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72
72화. 성물의 핵
멀리서 보는 그 광경은 기괴하면서도, 어찌 보면 아름다웠다.
왕국을 강타한 검은 안개의 파도가 왕성 주변에 깔리면서, 평상시에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을 구 형태의 성령 결계가 일반인의 눈에도 또렷이 보이게 된 것이다.
다만 그 주변에 겹겹이 쌓인 검은 안개 속에 갇힌 사람들에게서 소름 끼치는 비명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마냥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었다.
오르투스 백성의 절반 이상이 왕성 밖에 있을 테니까.
“안 돼!!!!”
왕성 근처에 다다른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뱉어 낼 수밖에 없었다.
“개 같은……!! 저 엿 같은 마수 놈이!!!”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냥 다 죽이기로 한 건가?’
그런데 흘깃 바다를 돌아보니, 크라켄의 본체는 스스로 뿜어낸 마기 가득한 안개 속에 잠겨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것으로 복수는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수단을 고려 중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능하면 전자였으면 싶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타이니는 그리 나쁜 상황이 아니라는 걸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안개에서 느껴지는 마기가 어째…… 생각보다 약한데?’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검은 안개의 힘.
하늘을 모조리 뒤덮을 것 같던 기세에 비해, 그 안에 실린 마기가 이상하리만치 옅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일반인이라도 버틸 만한 수준의 독기야.’
물론 그렇다고 멀쩡히 서 있기는 어려울 테고 노약자는 다소 위험할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너무 약했다.
그때, 월랑이 그의 의문을 한층 키우는 신호를 보내 왔다.
– 컹!
월랑이 감각으로 전해 준 정보.
‘백성들이 대부분 살아 있다고?’
이 거리에서 하나하나의 영혼을 다 느끼는 것은 월랑에게도 무리였지만, 수많은 영혼이 왕성 주변에서 군집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게 뭐지?’
크라켄이 대체 뭘 한 거지?
온갖 의문이 솟아오르는데, 마찬가지로 얼굴이 잔뜩 굳어진 제나스가 소리를 질렀다.
“젠장, 다 죽었겠어! 타이니 군, 이래서야 바로 왕성 안으로……!”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타이니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아닙니다!”
“뭐?”
“백성들 대부분이 살아 있습니다!”
그 말에 제나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방금 그렇게 어마어마한 마기를 품은 안개가 직격했는데 백성들이 살아 있다고?
그 당황스러워하는 속마음이 고스란히 읽히는 듯했지만, 설명해 줄 시간은 없었다.
“내성이 아니라 주변의 저택으로 가시죠! 악마추종자들은 결계 안에 들어가지 못하니 왕성 주변에 숨어 있을 겁니다!”
“아니, 갑자기……?”
물론 초인급 이상의 흑마법사나 마병이라면 결계 안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전생에서 악마추종자들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초인급이 등장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다.
그러니 결론은…….
“그들은 크라켄에 의해 성물이 부서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타이니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성물을 지킨 건 정말 최고의 한 수였어.’
크라켄은 결국 신화시대의 약속을 지키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검은 안개를 뿌린 것은, 나름의 분노 표출이라고 보면 되는 걸까?
타이니는 그렇게 짐작했다.
그리고 그렇다면, 굳이 성물을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크라켄이 약속을 지킨다면 성물을 ‘옮길’ 이유도 없을 테니까.
“크라켄이 약속을 지키려는 겁니다! 그러니 왕성 밖, 주변에 있는 놈들만 처리하시죠!”
그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결국 제나스를 설득했다.
와장창!
그렇게 벽을 부수고 뛰어든 저택 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엉망으로 널브러진 사람들 사이에 까맣게 녹아내린 형체들과 목을 부여잡은 채 버티고 서 있는 이들이었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컹!”
월랑이 전해 준 놈들의 정체는 타이니의 그 짐작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마물을 잡는 마수! 전설이 사실이었어.’
정확한 원인은 제대로 분석해 봐야겠지만, 지금의 광경만으로도 모든 의문이 술술 풀리는 듯했다.
“제나…… 경! 서 있는 놈들은 전부 마병입니다!”
“거참, 알아보기 쉽군요.”
나란히 살벌한 미소를 지은 타이니와 제나스는 저택 안을 쏜살같이 누비며 남은 마병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제각기 피투성이가 된 검과 망치를 든 두 사람은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저택 안에는 쓰러진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그중에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이들도 많았지만, 당장 타이니와 제나스가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마병들 상태가 다 비슷한 듯하니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주변도 당장 처리하시죠!”
타이니의 외침에, 역시나 힘들이지 않고 마병 여럿을 처치한 제나스가 묘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게 다 크라켄의 짓인가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해일의 마도사 게일 앤더슨의 작품이기도 하지요.”
“아까도 그 말을 했었죠. 그런데 그 사람, 죽었다고 들었는데요?”
“그 죽음과 맞바꾸어 이뤄 낸 성과입니다.”
타이니는 이제 진심으로, 대화 한번 나눠 보지 못한 죽은 마도사를 존경하게 되었다.
물론 그 중간 과정을 전혀 모르는 제나스로선 어리둥절할 뿐이었지만.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듣기로 하죠.”
지금은 설명이나 듣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 상태가 비슷하다면 알아보기도 쉽겠군요. 그럼 난 이쪽으로.”
“그럼 전 오른쪽으로.”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왕성을 가운데 두고 각각 반대편으로 원을 그리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저택 안을 누비기 시작했다.
목표는 멀쩡히 서 있거나 반쯤 녹고 있는 마병과 흑마법사들.
타이니는 그야말로 일말의 자비도 두지 않고 스탬프를 휘둘렀다.
“뒈져라!”
“안 돼……!”
콰앙!
끄륵.
익스퍼트급으로 보이는 마병이 미처 방어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박살이 나 쓰러지고.
“저, 저주를…….”
쾅!
4서클급으로 느껴지는 흑마법사 역시 폭주하는 마기를 조절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쓰레기들!’
하나같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기운을 풀풀 뿜어내며 썩어 버리는 놈들.
한 줄기의 자비도 아까운 인간쓰레기들의 시체를 양산해 내며, 타이니는 거침없이 내달렸다.
– 아우우우!
마병들의 상태를 보고 따로 보낸 월랑 역시 그 못지않게 활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령술사의 3단계, 권능개화(權能開花, Power link)를 터득한 이후 월랑의 움직임 역시 훨씬 빨라졌으니, 더 이상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마병들쯤이야 녀석 혼자서도 거뜬히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왜 결계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놈들이 이 근처에 모여 있는 거지?’
도대체 왜?
처음부터 떠올렸어야 했던 의문.
그것을 뒤늦게나마 떠올린 순간, 타이니는 자신의 치명적인 실책을 깨달았다.
“……후셀!”
그놈을 잊고 있었다.
악마추종자의 편임에도 마기는 지니지 않은 놈이라면, 성령 결계 안에서도 활동할 수 있을 터였다.
지금 이놈들이, 변장하고 숨어든 후셀이 무언가를 하길 기다리고 있던 거라면?
그렇다면 놈들이 결계 주변에 모여 있는 것도 말이 된다.
‘리암 경도 지금은 내성에 없다! 이런……!’
아차 하는 마음에 내성을 돌아보는데, 깨달음이 너무 늦은 것 같았다.
우르르르릉.
멀리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우우우우우웅.
이내 성물이 만들어 낸 결계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이런 바보 같은 놈!”
타이니는 자신의 머리를 탓하며 저택을 부수고 튀어 나갔다.
‘내가 멍청했어, 빌어먹을!’
달려가는 방향은 내성 안쪽.
“월랑!!!!”
대저택의 3층에서 뛰어내린 타이니가 사위를 떨어 울리는 고함을 내질렀다.
“컹!”
콰아아앙!
그와 동시에 거대한 늑대가 벽면을 뚫고 나오더니, 떨어지는 타이니에게로 도약해 그를 등에 태웠다.
“아우우우우우우!”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월랑은 우렁찬 포효를 터트리며 허공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공간 밟기(Space Step)를 발동, 마나 소비를 감수해 가며 최단 거리로 내성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하는 늑대와 기수.
그런데 그때.
– 지독한 성물이여……. 하지만 나의 승리다. 흐흐흐흐!
쇠가 긁히는 듯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내성 안쪽에서 울려 퍼지더니, 빛나는 성령 결계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분명히 떠오르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몸에 시커먼 번개를 두른 검은 로브와 함께.
멀리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마기는 섬뜩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보다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후셀이 아니라고?!’
예상했던 놈이 아니라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이내 타이니는 더 심각한 사실을 깨달았다.
성령 결계 안에서 마기를 사용하면서도 활동하는 악마추종자라면…….
‘초인급?! 그럴 리가!?’
당연히 아닐 거라 생각했던 전제가 무참히 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전생의 기억이 무언가 잘못된 것일까.
허공을 질주하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온갖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지만, 더 길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 이제 꺼져라!
그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성물 결계, 아니 성물의 본질 그 자체가 크라켄이 있는 동쪽으로 날아가는 광경이 보인 것이다.
‘성물의 핵!?’
우우우우웅.
“안 돼!!!!”
타이니와 월랑은 멀어지는 결계를 향해 본능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편 내성을 지키던 빛나는 구형의 결계가 사라져 버린 자리에는 어느새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몰려들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저 위에 저자는 또……?”
내성 안에 있던 백성들과 기사들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혹스러워할 때.
다시금 지독한 마기를 담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 새 시대를 열 때가 왔다. 새 시대의 첨병들이여, 모두 일어서라!! 구시대의 상징들을 모두 쳐 죽여라! 크하하하하!
통쾌한 감정이 실린 웃음소리.
그러나 이내 그 목소리는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 이것들이 지금 다 뭐 하고 있……!?
그리고 그런 검은 로브를 향해, 은빛을 담은 돌멩이 하나가 번개처럼 쏘아졌다.
콰앙!
돌멩이는 검은 로브의 주변에서 번뜩이는 시커먼 번개를 뚫지 못하고 부서졌지만, 그의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 웬 놈이냐?!
“악마에게 혼을 판 얼간이, 나와 한번 붙어 보자!”
검은 로브가 내려다본 지상에서는, 하관만을 복면으로 가린 붉은 머리 사내가 그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 * *
“더, 더! 빨리!”
타이니는 속이 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동쪽으로 날아가는 성물을 향해 질주했다.
그러나 월랑의 공간 밟기는 만능이 아닌바. 허공에서 속도를 내면 낼수록 마나가 쭉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의 시선은 동쪽의 바다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성 쪽에 초인급 흑마법사가 나타난 것도 치명적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 그오오오오오.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크라켄이었다.
“조금만 참아 달라고, 제발!!”
하지만 그 바람과는 달리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6개의 다리.
그 다리들이 향하는 곳은 아무리 봐도 왕성 방향이었다.
결계가 사라진 지금, 크라켄이 신화시대의 약속을 지킬 이유 또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게일의 유산이 먹혀들었다는 확신이 있었으니, 타이니는 저 다리들이 노리는 것이 오르투스의 백성들은 아닐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마도 목표는 허공에 있는 7서클급의 흑마법사일 터.
‘놈의 마기가 여기까지 저릿저릿하게 느껴지고 있으니까.’
그렇다 해도 놈이 크라켄을 어쩔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게 더 문제야.’
까득.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간 타이니가 허공에서 꿈틀거리는 다리들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저것들이 왕성 위로 떨어지면, 밑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죽는다!’
저 거대한 크라켄이, 과연 흑마법사와 일반 백성들을 구별해서 후려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생각이나 있을까?
그러니 그 전에 수를 써야만 했다.
“더 빨리! 결계를 복구한다!”
“컹!”
그그그그극.
허공을 질주하는 은빛 늑대와 기사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창공을 가르는 둘의 모습이 한 줄기 은빛 섬광처럼 보일 때쯤.
마침내 그들은 흑마법사가 집어 던진 성물, 정확히는 거대한 수정석 안에 수천 년 동안 자리 잡고 있던 ‘후마니타스’의 핵이 바다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에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파괴하지 않은 거지……?’
어쩌면 허약한 육체를 가진 흑마법사라면, 아무리 초인이라도 성물의 결계를 끝까지 견디며 파괴하는 데 무리가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성물의 핵이야말로 이 세상을 수호하고자 하는 성물의 본질 그 자체니까.
짧은 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교차하고.
“됐……!”
다급하게 팔을 뻗은 타이니의 손안에 성물의 핵이 잡히려는 순간.
“캬오오오오오!”
괴성과 함께, 바닷속에서 커다란 검은 물체가 갑작스레 튀어나왔다.
몸길이만 5m에 가까운 거체.
그 전신에서 회오리치는 물결에는 진득한 마나의 기운이 어려 있었고, 쩍 벌어진 아가리 안에 촘촘하게 박힌 날카로운 이빨에도 푸른빛 마나가 넘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