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73
73화. 흑마도사 (1)
‘후셀!?’
성물에만 집중하고 있던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응은 유일했다.
바로 성물의 핵을 잡아챈 상태로 본능적으로 철신갑을 전개한 뒤, 제자리에 멈춰 서기 위해 무게를 최대한 늘리는 것.
그런데 그 결과가 뜻밖이었다.
콰아아아앙!
“꿹!!!”
살벌한 기습을 감행했던 커다란 범고래가, 기괴한 비명과 푸른빛 마나의 줄기만을 잔상처럼 남긴 채 형편없이 튕겨 나간 것이다.
퍼어어엉!
검은빛 거체가 수면을 터트린 듯 요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뒤이어 산산이 부서진 이빨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당사자 또한 그 충격에 주르륵 밀려났지만, 그대로 수면을 딛고 선 채 적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허…….”
그 역시 만만찮은 충격을 받았지만, 상대가 받은 충격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황당할 만도 했다. 전혀 방비가 안 되어 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부딪친 것뿐인데, 적을 한 번에 골로 보낸 꼴이 되지 않았는가.
범고래의 표정이야 읽을 수 없었지만, 부딪치는 순간 크게 움츠러든 몸체와 떨리는 마나에서 놈의 당혹스러운 심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한 일이었다.
몸을 8분의 1로 가볍게 한 상태에서 마나를 쏟아부어 한계 이상으로 가속하고 있던 상황. 그 와중에 충돌하기 직전 중력을 반전시켰으니, 한순간 월랑과 그의 체중은 본래의 8배로 늘어났다.
그 엄청난 무게가, 한계 이상으로 가속한 질주에 실려 놈에게 부딪친 것이다.
철신갑을 한껏 전개했음에도 어깨 갑옷이 부서진 것 또한 놈의 이빨이 아니라 그 충격 때문인 듯했으니, 이 정도면 사실상 ‘벼락 떨구기’ 수준의 살상기나 다름없었다.
‘……엄청난데?’
바닷속으로 사라진 놈이 죽진 않았더라도,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멍하니 감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 그오오오오
지금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 위, 검은 안개에 휩싸인 크라켄의 본체에서 흘러나오는 울음.
그리고 멀리 왕성 위로 떨어져 내리는 놈의 다리.
그 광경을 목격함과 동시에 타이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안 돼!!”
저건 막을 수 없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고함을 지르던 타이니의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지며 두뇌 회전이 번개처럼 빨라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생사의 난관을 거치며 대부분 승리했던 괴력의 기사의 영혼은, 위기 속에서 오히려 더 기민한 판단을 이어 가는 데 익숙했던 것이다.
다만, 지금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본능적인 안도감이었다.
‘성물은 확보했잖아.’
‘최소한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후의 희생이야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비겁하고 나약한 태도라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흔들렸다.
‘뭐가 비겁해? 난 최선을 다했잖아?’
수면 아래로 조금씩 가라앉는 월랑과 탈진한 듯 바들바들 떨리는 제 팔다리를 보면, 마나가 바닥났을 뿐 아니라 육체에도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이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전생의 그 긴 세월, 누가 뭐라고 하건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멋지게 살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이런 나약한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을 보면,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언제쯤 이런 나약한 생각들이 사라질까.
‘……난 아직 멀었어.’
타이니는 억지로 주먹을 불끈 쥐며 비겁한 생각들을 떨쳐 냈다.
만족해서 한자리에 멈추는 순간, 그것은 이미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다.
다른 모두를 속이더라도 나 자신은, 스스로는 속일 수는 없다. 당당한 삶이란 남에게 그리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지.”
– 하늘 똑바로 보면서,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그렇지, 틴?
……그래.
그래야 훗날 천국에서 에리나 누나를 다시 만났을 때 가슴을 펴고 웃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절대 멈추지 않는다!’
“퉤!”
타이니는 목구멍까지 솟구친 비릿한 핏물을 뱉어 낸 뒤, 온 힘을 다해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였다.
우우웅.
무리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끄응.”
정신력이 한계에 달했는지,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 오며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혹사당한 염체 역시 비명을 질러 대는 듯했지만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회복부터…….’
최소한의 전투력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진 타이니는, 약간이나마 회복된 마나로 가장 먼저 시야를 회복시키며 왕성과 그 주변을 훑었다.
– 콰아아아아앙!
다행히도 검은 막이 펼쳐지며 크라켄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이 보였다. 악마추종자 초인이 그리 쉽게 당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당장 저곳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거리상으로도 그렇고,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도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그 짧은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을 떠올린 타이니가 눈을 빛냈다.
생각은 그 즉시 행동으로 이어졌다.
“……가자!”
우우우웅.
손안에서 맥동하는 성물, 후마니타스의 핵.
온전한 절차를 따른 게 아니라 흑마법사의 막대한 마기에 의해 억지로 뜯겨 나온 성물의 기운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을 가까스로 안정시키며, 타이니는 왕성보다 가까이 보이는 바다 위 크라켄의 본체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하…….”
제나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훑었다.
호기롭게 도발하기는 했지만, 상대는 척 보기에도 7서클급 흑마법사였다.
흑마법사는 모두 1순위로 없애야 할 쓰레기지만, 저 정도쯤 되면 쓰레기라기보단 재앙에 가까웠다.
더구나 그 뒤쪽에서는 거대한 문어의 다리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니.
‘흐, 여기가 내 무덤 자리인가요.’
절로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 거대한 다리가 1차로 노리는 것이 아무래도 저 흑마법사인 듯했다.
– 이런……!?
무언가 억울한 듯한 쇳소리 섞인 목소리와 함께 검은 막이 펼쳐지더니, 이내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앙!
그 굉음과 함께 흑마법사가 왕궁의 정원으로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다!’
제나스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그 추락 지점으로 향했다.
– 크라켄이 약속을 지키려는 겁니다!
‘그 말 믿어 보겠습니다, 타이니 군.’
크라켄을 상대하는 건 자연재해를 혼자 막는 일처럼 불가능할 테니, 그나마 검이 닿을 것 같은 적을 노리려는 것이었다.
‘이 재앙을 초래한 악마추종자 놈들……. 그중 7서클의 초인이라면 놈들의 수장쯤 되겠지.’
그렇다면 목숨을 걸어 볼 만하다.
검은 막과 충돌한 후 다시 허공으로 튕겨 나간 크라켄의 다리.
제나스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목표를 향해 질주했다.
차가운 기운을 품은 은빛 바람이 그의 몸을 감싸고, 이내 그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내성 안쪽 정원.
검은 로브가 추락하면서 만들어 낸 거대한 구덩이.
–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반경 5m가 넘는 크레이터 안에서 쇠를 긁어 내는 듯한 듣기 싫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그로서는 충분히 이를 갈 만한 상황이었다.
새끼를 잃은 크라켄의 분노가 왕성으로 떨어졌는데, 상공에 있던 자신이 ‘우연히’ 그 충격을 막아 낸 꼴이 되었으니까.
갑자기 돌멩이를 던진 이름 모를 챌린저에게 신경을 잠시 빼앗겼던 것이 실수였다.
하지만 동시에, 현 상황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소모품 놈들도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마법진의 효율이 이렇게 뛰어났던가? 내 감각도 흐릴 정도로? 망가진 것은 세 군데에 불과하다고 들었는데…….’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뭐, 아직은 예상했던 범위 내다.’
그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례 없는 해일에 대비해 왕성과 그 부근으로 백성들을 끌어모은 왕 덕분에 조직원들의 잠입도 한결 수월해졌고, 그 역시 자연스레 힘을 숨긴 채 성령 결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비록 자신이 가진 힘의 특성상 결계 안에서 바깥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크게 틀어질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성물을 지키던 놈이 조직의 일을 계속해서 방해했다는 그 모르스 가문의 꼬마가 아니었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그것이 상황을 바꿀 만한 변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
파아아앙!
그는 흙먼지를 날려 버리며 다시 일어섰다.
크라켄의 공격으로 인한 내상을 당장 치료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크라켄에게 맞설 이유는 더더욱.
해일의 마도사가 후셀의 암수에 당해 죽은 이상, 이곳에는 자신을 상대할 강자는 없을 테니까.
다만, 조금 찜찜한 점은 있었다.
바로 자신을 타격한 크라켄의 다리가 그 뒤로 다시 허공에 멈춘 상태라는 것.
‘아까도 그러더니, 도대체…….’
하지만 크라켄의 생태에 대해선 자세히 아는 바가 없으니, 그저 이전처럼 놈이 내킬 때 다시 움직이리라 생각하며 그는 시선을 돌렸다.
– 위대한 말룸(Malum)의 일원들이여 일어서라!
지금부턴 조직원들을 움직여 카룬의 왕과 귀족들을 척살하기만 하면 된다.
더 이상은 마기를 은폐하고 숨을 필요도 없었다.
대륙의 실세 중 하나를 부수고, 동대륙과의 연결을 끊는다.
그 목적을 달성할 순간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으니까.
그런데.
“적이다!”
“흑마법사다!”
“악마의 하수인들이 이 재앙을 불렀다!”
“죽여!”
뜻밖에도 오라는 부하들은 오지 않고, 카룬의 기사들만 몰려들고 있었다.
– 겁도 없이……!
짜증은 고스란히 검은 번개가 되어 주변으로 튀어 나갔고.
“아아아악!”
“끄아아악.”
이내 원하던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때.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 하찮은 놈들 사이로, 자신의 번개를 흩어 내며 순식간에 쇄도하는 놈이 보였다.
복면 위로 얼핏 드러난 어려 보이는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은빛의 바람과 냉기의 힘.
희귀한 이중 속성의 마나가 놈의 검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며,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 네놈이로구나!
크라켄에게 의외의 일격을 맞게 만든 원흉, 바로 그 챌린저 놈이었다.
고작 챌린저급 주제에 공간 장악에 대한 감각은 특별한지, 부족한 힘으로도 초인의 영역을 비집고 들어오는 공격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 어림없다!
콰아아아앙!
말 그대로 인상적인 수준에서 그치는 정도였다.
자신의 고유 마법, 흑뢰(黑雷, Dark lightning)의 힘은 공방 일체의 흑마법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 자부하니까.
그리고 그 자부심은 눈앞에서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컥!”
그는 튕겨 나가는 놈을 보며 미소를 짓고는 다시 손을 뻗었다. 상대를 확실히 끝장을 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허?”
내민 손에 어느새 새하얀 서리가 끼어 있는 것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아니, 어느 틈에?’
당혹스러웠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튕겨 나갔던 놈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더더욱.
– 건방진 놈!
우르르릉.
의지가 일어남과 동시에, 검은 번개가 사방 수십 미터를 휩쓸었다.
챌린저급 중에서도 속도에 특화된 놈이라면, 자신이 아무리 7서클의 흑마법사라도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다.
더구나 크라켄의 공격에 상당한 내상을 입은 지금은 더욱 버거울 게 분명했다.
그러나 놈이 있을 만한 위치로 예상되는 범위 전체를 날려 버릴 수는 있었다.
– 뒈져라!
꽈과과광!
“끄아악!”
“으아아악!”
“괴물이다.”
살기 어린 외침과 함께 떨어진 검은 벼락은 다시금 수많은 기사들의 비명을 자아냈다.
그러나 벼락이 그친 자리에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등 뒤에서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흥!’
흑마법사로서 마도사의 경지에 오른 자신이, 일반 마법사처럼 사각이 있을 거라고 착각한 것인가.
의지가 이는 순간 등 뒤로 쏟아진 검은 불길이 그 살기의 주인을 뒤덮었다.
콰아아아앙!
완벽하게 마법이 먹혔음을 확신한 그가 슬쩍 미소를 짓는데.
스각.
길게 찢어져 나풀거리는 자신의 로브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닿았다고?’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과 함께 분노가 솟구쳤다.
아직도 응답이 없는 부하들, 적들만 가득한 공간,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고전.
그 모든 것이 그의 짜증을 부추긴 것이다.
– 놀이는…….
짓씹듯 뱉어 낸 한마디.
– 여기까지다!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친 그의 주위로 시커먼 마기가 뿜어져 나오며, 일대를 빛 한 줄기 통과할 수 없는 새까만 어둠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7서클 마도사의 경지에 오르며 완전히 지배하게 된 속성, ‘어둠’이 모두의 시야를 뒤덮으며 마기를 더욱 증폭시켰다.
주변에 가득 넘실거리는 마기를 느끼며, 그는 놀란 듯 부릅뜬 눈으로 자신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붉은 머리 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람의 속성도 다룬다면 여기까지 닿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순간 네놈 목숨도 끝이다.’
마법사와 기사 간의 일대일 전투는 기사에게 유리하기 마련이지만, 그것도 수준이 비슷할 때나 통하는 얘기다.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그 순간 지상에서 피를 토하고 있던 붉은 머리 놈도 흐릿한 미소를 머금는 게 보였다.
‘뭐지?’
의아해하던 찰나,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하고 불길한 기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