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74
74화. 흑마도사 (2)
“간다!!”
끄응.
지끈지끈한 두통을 견뎌 내며, 타이니는 계속해서 마나를 끌어모았다. 그리고 월랑의 공간 밟기를 이용해 크라켄을 둘러싼 검은 안개 사이로 몸을 던졌다.
다행이라면, 손에 든 후마니타스의 결계가 검은 안개를 밀어 내 주고 있다는 것.
그 덕분에 마나 호흡이 한결 수월해지긴 했지만, 마냥 안도할 수는 없었다.
‘이게 통해야 할 텐데.’
오늘 하루의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은, 크라켄은 분명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추측이 맞다면, 녀석은 이 성물의 결계를 충분히 인식할 것이다.
결계는 카룬의 왕성 내성 전체를 뒤덮을 정도의 넓은 범위를 자랑했으니, 잘만 하면 크라켄이 이 결계의 빛을 느끼고 물러서 주지 않을까.
……그런 바람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 그오오오.
반응은 있었다.
그것이 비록 그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그그그그극.
“윽!”
살기가 눈에 보이게 실체화되면 이런 느낌이 들까.
검붉은 기운이 주변을 자욱하게 물들이더니, 그의 마나 호흡까지 어렵게 만들었다.
‘젠장, 안 통한다고!?’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서 던져 본 한 수가, 오히려 최악의 상황을 유발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영혼을 뒤흔드는 파동이, 그가 도약하고 있던 공간 전체를 울렸다.
– 물……러……서……라……. 계……약……자…….
“헙!”
그것은 목소리라기보다는 파동에 가까웠다,
너무나도 큰 파동이 공간을 장악하며, 가뜩이나 지끈거리던 타이니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당장은 고통보다는 놀라움이 더 컸다.
“마수와 말이 통한다고!?”
비록 크라켄의 말은 오랜 세월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 더듬더듬 토해 낸 음성처럼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그 의미만큼은 반강제로 뇌리에 새겨졌다.
– 물……러……서……라……. 아무……리…… 계약자라……해도…….
– 더 이상은…… 봐……주지…… 않는다…….
게다가 연달아 이어진 파동은 알아듣기도 한결 쉬웠고, 두통도 차츰 줄어드는 듯했다.
왜 자신을 계약자라 부르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짐작이 가는 게 하나 있긴 했다.
‘……성물 때문이겠지.’
다만 지금은 호칭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크라켄과 말이 통한다면…….
“공격을 멈춰 주십시오! 사건의 원흉은 악마추종자들입니다! 저곳에 있는 카룬의 백성들과는 무관합니다!!”
타이니는 진심을 담아 외치자.
– 알고 있다…….
절로 화색이 돌 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안심하는 것도 잠시.
– 그렇다고 한들, 내가 참아야 할 이유는 없다.
– 성물은 저곳에 없으니…….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말과 함께, 크라켄의 몸체에서 감당할 수 없는 마기가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무고한 생명이 희생됩니다! 신화시대의 약속을 조금만 넓게 해석해 주십시오!”
사실 타이니는 그 약속이 정확히 뭔지도 몰랐지만, 일단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 세상을 좀먹는 해악을 쳐 죽이기 위해서라면, 인간 따위 조금 죽어도 계약과 어긋나지 않는다.
– 그러니 너는 나를 강제하면 안 된다, 계약자여.
크라켄의 뜻은 확고했고, 마기의 흐름은 이미 격해질 대로 격해져 왕성 방향으로 뻗은 다리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타이니의 마음은 자연히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멈춰! 멈추라고, 이 문어 새끼야!!!”
생각이고 뭐고 할 새도 없이 튀어나온 맥락 없는 욕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순간 마기의 흐름이 멈췄다.
덩달아 멈칫한 타이니가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 계약자여…… 너는 내게 아이를 잃은 슬픔을 참으라 하는 것이냐!
지극한 분노와 슬픔이 담긴 파동이 그를 강타했다.
쿨럭.
“……커윽.”
어마어마한 충격에 피를 토해 낸 타이니가 가까스로 몸을 바로 하며 검은 안개 속 거체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복잡한 마음과 의문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크라켄이 왜 자신의 말을 들어 주는 것일까.
정말 성물 때문일까?
……왠지 그게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대로 멈추라 하면 정말 멈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저 그 파동에 담긴 마음이 너무 슬프게 느껴져 자연스레 목소리를 높일 뿐.
“내가, 내가 놈을 잡을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줘! 제발!!”
진심을 담아, 간절한 바람을 담아 타이니는 그렇게 악을 썼다.
그러자.
– ……지금 네 힘으로는 어렵다, 계약자.
조금이나마 분을 삭인 듯한 크라켄의 의지가 전해져 왔다.
“알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든 해낼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줘!”
근거라고는 전혀 없는 억지 주장.
하지만 그 말에, 크라켄의 살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 그렇다면…… 조금은 힘을 보태 주겠다.
그 말과 함께 다시 마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힘의 흐름을 느낀 타이니의 안색이 순간 하얗게 질렸지만.
“안……!”
이내.
콰콰콰콰콰콰.
이미 한 번 도움을 받은 적 있는, 그 거대한 검은 기운이 왕성 방향으로 밀려가는 것을 보는 순간 말이 쏙 들어갔다.
“……돼, 돼! 된다고! 좋아!”
머리가 어질어질한 채로 입과 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거칠게 닦아 내면서도, 타이니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약속 지킬게! 조금만 기다려 줘! 꼭!”
그리고 다시 허공을 밟고 왕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 이게 무슨……!?
콰콰콰콰콰콰콰.
왕성의 하늘을 뒤덮으며 쏟아지는 검은 기운.
그것은 마치 검은 기운으로 뭉쳐진 폭포처럼, 흑마도사가 만들어 낸 어둠을 단숨에 쓸어 내며 사방을 뒤덮었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마기는 섬뜩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미 그것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제나스로선 오히려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크라켄!’
그 농밀한 마기와 독기는 제대로 퍼진다면 왕성에 있는 이들을 몰살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 흉흉한 기운들이 오직 하나의 타켓을 향해 쏟아지고 있다는 게 그의 감각에 고스란히 느껴진 것이다.
‘역시 전설의 마수!’
물론 쾌재를 부르면서도,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저렇게 기운을 조절해서 타격할 능력이 있다면, 아까는 왜 일반인들까지 모조리 뒤덮는 안개를 뿌렸을까?
마인들만 치명타를 입었다고 한들, 백성 중에서도 노약자는 여럿 죽었을 텐데?
그러나 이어져 떠오르는 상념들은 검은 안개가 시야를 뒤덮는 순간 지워져 버렸다.
“끄아악!”
“어, 어윽!”
“수, 숨이.”
꼬르르륵.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지금은 그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아까보다 더욱 독한 기운 같긴 하지만, 그중 가장 강렬한 독기는 놈에게 집중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
그러니 여기서.
‘놈과 끝장을 봐야겠군.’
제나스는 시야가 가려져 소용이 없어진 시각 대신 마나의 감각만을 극도로 끌어올리며, 검은 안개 속에 몸을 맡겼다.
‘나는 북풍의 사자, 차가운 바람 그 자체다.’
자신의 속성을 극대화하는 이미지를 떠올린 그의 몸이, 이내 은빛 바람이 되어 공간을 가로질렀다.
‘이, 이게 대체…….’
검은 로브를 두른 말룸의 수장은 온몸을 파고드는 마기를 느끼며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인류 중 마기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도 쉽게 떨쳐 낼 수 없는 마기였다.
심지어 일반인들에게는 극소량만 침투하면서, 마기를 지닌 존재에게는 오히려 치명적인 독이 되는 마기라니.
7서클의 흑마도사인 자신조차, 내상이 악화되고 머릿속이 어지러워져 더 이상 속성 지배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지금 이곳에서 이런 마기를 다룰 수 있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다.
– 크라켄!!
어처구니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어째서 크라켄이 자신을 콕 집어 공격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크라켄의 새끼를 죽인 후셀의 협력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 녀석은 오직 순수한 마나를 다루는 슈페리어이지 않은가.
‘아무런 마기의 흔적도 남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당장 의문을 풀 길은 없었다.
이런 공격이라면, 자신은 어떻게든 버틴다 해도 부하들은 모두 죽게 될 테니까.
빨리 벗어나서…….
‘아니, 그것도 아닌가? 설마, 소모품들이 응답하지 않은 것이……?’
독한 마기와 투쟁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 몰려드는 복잡한 상념들을 엮어 내 그럴듯한 결론을 내리던 순간.
점차 옅어지는 검은 안개 사이로, 너무도 푸르러서 오히려 새하얗게 보이는 빛살이 날아들었다.
‘뭐야?’
꽈아아아아아앙!
잠시간 딴생각을 한 대가는 강렬한 충격으로 돌아왔다.
자동으로 공격에 반응하게 만들어 놓은 방어막이 깨어져 나가며, 그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 네놈!
“……아깝군.”
건방진 소리를 남기며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은빛 머리.
그는 겹겹이 쌓인 울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사방으로 마기의 폭풍을 일으켰다.
– 감히 네깟 놈이!
쾅.
둔중한 충격파와 함께 놈이 튕겨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히 그랬는데.
쾅!
섬뜩한 감각과 함께 또다시 보호막이 터져 나갔다.
그제야 보이는 것은 전면에서 사람 형태로 부서지는 얼음 조각.
동시에 후방에서 엄습하는 살기에 재빨리 몸을 트니, 냉소를 짓고 있는 놈이 보였다.
“네깟 놈이라니.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쓰레기가 감히!”
다시 검은 안개 사이로 사라지는 놈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번쩍 일깨웠다.
‘내가 고작 챌린저급 하나한테?’
흑마도사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힘과 감각을 크게 제한하던 성령 결계는 이제 없다.
아무리 크라켄에 의해 내상을 입었어도, 생각지 못한 공격에 마기가 꼬였어도…….
초인은 초인이다.
고작 저깟 놈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건, 분명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상황들이 이어진 탓일 터였다.
– 후우우
냉정을 찾아야 했다.
차가운 한숨과 함께, 그의 주변에 다시금 검은빛을 띠는 번개와 불꽃, 바람이 휘몰아치며 검은 안개를 밀어 내기 시작했다.
“칫.”
바로 옆에서 놈이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의 정면, 다시 밝아지는 왕성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생각해 보면, 성물을 후셀에게 던진 후부터 모든 것이 이상했어.’
아니, 그전부터 일은 단단히 꼬여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 일이 이렇게 된 건지는 몰라도, 부하들은 거의 다 죽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 챌린저 놈 하나가 문제가 아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였다면 조직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였으니, 최소한의 대가라도 받아 내야 했다.
‘……카룬의 혼란.’
왕과 그 자식들을 처단하고, 고위 귀족들을 죽이는 일.
사실 오르투스의 파멸은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덤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긋났다면.
‘최소한의 목적이라도 쟁취해야지.’
그렇게 마음을 굳힌 순간.
뒤쪽에서 바람이 이는 게 느껴졌다.
시리도록 하얀 은빛의 검기가 공간을 십자로 가르며 쏟아지는 모습.
분명 강력하고 뛰어난 공격이었다. 복면 위로 드러난 피부만 봐도 어린 것이 여실히 드러나니, 놈은 차후 후환이 될 소지가 분명한 강자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놀아 줄 시간이 없었다.
하수를 상대로 한 추태는 여기서 끝내야 했다.
– 떨어져라.
공기에 압력을 가해 놈의 바람 속성을 흐트러트리고.
“윽!?”
– 묶어라.
그대로 추락하는 놈의 주변에 마계의 넝쿨을 소환했다.
미약하지만 순도 높은 크라켄의 마기를 역이용해, 소환 마법을 순식간에 시전해 낸 것이다.
그리고.
– 이제 뒈져라.
어지럽게 얽혀 든 검은 벼락과 불꽃이,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사신의 손길이 되어 하늘에서 쏟아졌다.
콰콰콰콰콰콰콰.
“어림없다!”
새하얀 청광이 다시 십자로 솟구치며 마계의 넝쿨을 끊어 내고, 그 위로 떨어지는 마법을 향해 쇄도했다.
‘하찮은…….’
그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는데, 그 옆으로 회백색 거대한 검 하나가 끼어드는 것이 보였다.
아니……?
“흐아압!”
얼굴을 가린 붉은 머리 놈과는 달리, 그 회백색 검의 주인은 정체가 분명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노기사, 리암 폰 피터슨.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는 흑마도사도 표정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이내 심혈을 기울인 복합 마법이 허공에서 터져 나가는 순간.
‘과연 암벽의 기사라 이거지? 흐, 이렇게 되면…….’
검은 안개가 걷힌 자리, 흑마도사의 흔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