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76
76화. 끝까지…….
파지지직.
“끄으으.”
리암은 자신의 바위 속성 마나가 검은 번개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평생을 단련한 끝에 암벽의 기사라는 이명까지 얻어 낸 그의 힘도, 이 검은 번개 앞에서는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오염시키는 마기가 섬뜩한 살기와 막강한 힘까지 싣고 있으니, 자연스레 자신의 생명이 끝나 간다는 것을 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주마등인가…….’
이제는 가물가물한 옛 기억들이 한순간 머릿속을 무수히 스쳐 지나갔다.
– 그대가 내 호위인가? 앞으로 잘 부탁하네.
왕실 신입 기사와 1왕자의 신분으로 처음 주군을 만났던 날의 기억부터.
– 성취를 축하하네, 리암. 이건 내 작은 선물일세.
– 저, 저하?
일개 기사에 불과한 자신을 꼼꼼히 챙겨 주는 그 자애로운 마음씨에 감격하여 충성을 맹세하던 날도.
– 이제는 자네가 왕실 기사단장일세. 나뿐만 아니라 작게는 왕실을, 크게는 이 나라를 지켜 주게. 할 수 있겠지, 리암?
카룬 기사의 정점에 서서 과분한 작위를 받았던 날까지.
‘괜찮은 인생……. 아니, 아니야.’
하지만 그의 일생에는 치명적인 오점 하나가 있었다.
100여 년 만에 카룬 왕국의 오러유저가 될 수 있을 거라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
주군께 죄송하지만, 안 될 일은 안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은퇴를 앞두고는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미련조차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마지막 순간을 눈앞에 두자 격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노력할걸.’
‘나는 왜 더 간절하지 않았을까.’
‘왜 더 절실하게 노력하지 않았을까.’
거대한 장벽으로만 느껴지던 7단계, 오러유저의 경지.
말년에 희미하게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길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길. 그가 가진 재능으로는 너무도 희박한 가능성에 생명을 걸어야 하는 극한의 험로였다.
더군다나 선뜻 그 길에 발을 들이기에는 그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랬기에 깔끔하게 포기하고 은퇴를 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는 그것이 사무치게 후회되었다.
‘목숨을 걸었어야 했어.’
높은 확률로 죽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오러의 힘을 터득했다면, 이 순간 이렇게 비참하게 스러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며 끝없는 아쉬움을 만들 뿐이었다.
그러자.
파지지지직.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 듯이, 검은 번개가 더욱 강렬하게 그의 몸을 잠식해 왔다.
생각은 길었지만, 실제 흐른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격렬한 통증이 전신을 덮쳐 오자, 한없이 빠르게 흐르던 의식 속 주마등이 흩어지고 현실의 감각이 돌아왔다.
“끄으윽.”
동시에 아득한 한계를 절실히 실감했다.
‘역시 난 안 될 놈이었나.’
‘애초에 왜 이렇게까지 고통을 견뎌야 하는가.’
‘……모두 끝났는데.’
극심한 통증만큼 절망감도 강해지고.
‘그래, 무의미하다…….’
버티고 선 마지막 힘마저 놓으려는 순간.
툭.
그의 눈앞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핏방울이 보였다.
아주 높은 곳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핏물.
이 강렬한 마법을 유지하고 있는 적의 피였다.
그것이 정신을 번쩍 일깨워 주었다.
‘……아니, 아니다!’
까드득.
파지지직.
혼신의 힘을 다해 버티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다.
적 역시 이미 피해가 상당하다는 걸 저 피가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순간, 검은 번개가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악마의 힘은 마음의 약한 구석을 잠식한다네, 리암. 포기하지 말게.”
부드럽고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등 뒤로 따스한 마나가 전해졌다.
자신에 비하면 미약하기만 한 마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큰 의미로 다가왔다.
갈증 끝에 마신 물 한 모금처럼 다시금 몸을 일으키게 만드는 마나.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했다.
“저, 전하! 이렇게 무리하시면……!”
“괜찮네. 이, 이 정도는!”
흠칫 놀라 돌아본 곳에는 그의 왕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자신을 믿어 주는 든든한 미소를 머금은 왕이.
어느새 리암의 입가에도 그와 닮은 미소가 번졌다.
물경 40년을 이어 온 인연.
그 믿음이 서로의 마음을 든든하게 엮으며 버틸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전하 덕분에 한결 여유가…….”
신뢰의 시선이 오가던 그 순간, 그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끼어들었다.
“그 입…… 다, 닥치시죠, 영감! 내…… 내 덕이니까요.”
둘 모두가 섬찟함을 느낄 정도로 분노가 어린 음성.
그들 사이에 끼어 늘어져 있던 제나스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도, 도와주러 온 사람을…… 바, 방패로 써요……? 대체 양심이 어디……? 비, 빌어먹을…….”
파지지직.
자의와는 무관하게 검은 번개를 뒤집어쓴 충격으로 깨어난 제나스의 갈색 눈에는 그에게서 보기 드문 분노가 가득했다.
반말에 욕까지 하는 제나스라니, 그를 아는 사람이 봤다면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물론 리암은 그의 원래 성격을 몰랐지만, 양심에 찔리는 바가 있었기에 애써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 버텨? 이걸 버틴다고!? 감히!!!? 캬악!
천장에서부터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쇳소리 섞인 음성과 함께, 놈의 옆에서 검은 불길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물을 보니, 놈도 정말 바닥까지 힘을 쥐어짜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이 빚은…… 화, 확실히 갚아 주셔야…… 하, 합니다, 리암 경…….”
그리고 다행히도, 제나스는 화를 낼 때와 참아야 할 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무, 물론이오.”
“한순간만…… 놈의 마법을…… 부, 분쇄해 드리겠습니다……. 그, 그때…….”
파지직.
검은 번개로 인해 떨리는 음성이었지만, 그 뜻은 확실히 전달되었다.
리암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 뒈져라!
상스러운 고함이 터져 나오더니, 검은 번개 위로 검은 불꽃까지 더해져 그들을 덮쳐 왔다.
동시에, 제나스 역시 움직였다.
발렌티아 검술, 제나스식 절기 2식.
미친 바람의 노래.
촤라라락.
제나스의 검이 수십, 수백 개로 분화되는 것 같더니, 일순간 은빛의 바람이 되어 사방의 모든 마기를 통째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 말도 안……!
뒤이어.
카룬 왕실 검술, 리암식 필살기.
바위 벼락.
회백색 기운을 크게 부풀린 리암의 대검이 번개처럼 회전하며 공중의 적을 향해 날아갔다.
파아아아아앙.
– ……돼! 이익!
그 대검은 흑마도사의 목소리마저 삼켜 버리며 대전의 천장을 뚫어 냈다.
꽈아아아앙.
우르르르르릉.
콰콰쾅.
부서진 천장의 잔해가 대전의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할 때.
울컥 피를 토해 낸 리암이 천장이 뚫려 드러난 하늘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며 읊조렸다.
“끄, 끝난 건가.”
“다, 다행이구나. 리암…….”
국왕 역시 안도 섞인 말을 뱉어 내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저, 전하?”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낀 리암이 눈을 크게 뜨는데, 털썩 소리와 함께 검은 천에 감긴 창백한 팔 하나가 그의 눈앞으로 떨어졌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깨닫는 순간, 리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작 팔 하나?’
그리고 그 팔을 본 다른 한 사람이 분한 듯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 도망가고 있습니다! 비, 빌어먹을. 자, 잡아야 하는데…….”
창백한 안색의 제나스가 욕설을 뱉어 내며 일어서려 했지만, 이내 옅은 신음과 함께 털썩 쓰러져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난장판이 된 대전이 일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뭐야, 이건? 내 손에 왜 칼이 있지?”
“피? 이게 대체…….”
“미친놈들!! 네놈들이 흑마법에 홀려서 벌인 일이다!”
“뭐가 어째!?”
“정신력도 약한 놈들이 귀족이라고!”
“감히 날 모욕…….”
현혹에서 풀려난 기사들의 다툼에 개판이 된 대전,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도 리암은 그나마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아쉬워하며 쓰러진 젊은 천재와는 달리.
그는 적이 도망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 * *
–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발렌티아!!!
카룬의 내성에서 도망쳐 나와 하늘을 나는 흑마법사는, 팔이 잘려 나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왼쪽 어깨를 붙들고 노성을 터트렸다.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말았다.
이 일에 투입한 조직의 병력만 해도 거의 전체의 3할이다.
거기다 자신이 얻은 중상은 그 무엇보다 큰 손실.
‘이렇게 된 이상……!’
저 멀리 멈춰 있는 크라켄을 응시하는 흑마도사의 눈빛이 검붉은 빛으로 타올랐다.
모든 것이 잘못됐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화를 북돋는 게 저것이었다.
– 왜, 왜!!
소리쳐도 닿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아직 목표를 이룰 방법은 남아 있었다.
바로 저 괴물, 크라켄.
놈이 대체 왜 멈춰 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자극하면 분명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오르투스는 박살이 난다. 왕실의 완전한 멸절은 장담할 수 없지만, 그거야 나중에 손을 써도 충분하다.
흑마도사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아 크라켄을 향해 날아가는데, 순간 맞은편에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늑대랑…… 꼬마?’
어쩐지 익숙한 조합이었지만,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꼬여 버린 현실에 분노한 탓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거기다.
“찾았다!”
그 이상한 것들이 자신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며 ‘하늘을’ 질주해 오는 광경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놈들이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온 순간.
파지지지직.
온몸과 영혼이 옥죄이는 듯한 더러운 기분이 그를 강타하며 정신을 뒤흔들었다.
– 성물 결계?!!
그건 내가 바다에 던져서 후셀에게 전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나마 이루었다고 믿었던 최소한의 성과마저 박살 나는 순간.
그는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서, 다가오는 놈들의 정체를 가까스로 기억해 냈다.
근래 받았던 최악의 보고에 자주 이름을 올렸던 특이한 녀석.
‘모르스 가문의 후예, 엘프 혼혈!’
모든 것이 망해 버린 이 X 같은 상황의 원흉.
그런 놈이, 내가 빼돌린 줄로만 알았던 성물마저 가지고 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의 눈에 귀화(鬼火)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 찢어 죽여 주마!!!
발렌티아 공작가의 하수인, 자신을 엿 먹인 주범.
그런 놈이 기어코 최소한의 성과까지 망가트렸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 철천지원수로 정의된 존재를 향한 살의가, 그의 마지막 이성을 휘발시키고 최후의 마기까지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그 거센 마기의 폭풍을 마주한 상대의 눈에 한 점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팔도 한 쪽이 없고, 큰 타격을 받은 것은 확실해.’
타이니는 적의 상태를 보고 눈을 빛냈다.
크라켄의 약속을 받아 내고 미친 듯이 질주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지친 몸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간 오히려 방해만 될 터였다.
그런 생각에 해변에 착지하자마자 급속하게 다시 마나를 회복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이쪽으로 날아오던 마기를 감지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타이니는 곧바로 월랑을 재촉해 다시 허공을 질주했다.
아직 마나가 완전히 회복되기 전이지만, 믿는 것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성물 결계가 통했다.’
우웅.
품 안에 간직한 성물의 핵이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이 부드럽게 진동했다.
물론 치명상을 입었다 한들 상대는 7서클의 흑마법사고, 자신은 아무리 특출난 힘을 가졌다 한들 고작 익스퍼트. 그나마 그 힘도 다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왕성 내부의 상황이 어찌 되었는지는 아직 몰랐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만약 저 흑마도사가 팔 하나를 대가로 목적을 이루고 돌아가는 길이라면?
‘절대 그냥 보낼 수 없어……!’
이를 뿌드득 간 타이니는 다시금 혼신의 힘을 다해 가속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최선의 수법은, 후셀 놈을 한 방에 보내 버렸던 그 기술(?).
‘더, 더 빠르게!’
쿨럭.
마른걸레를 쥐어짜듯 힘을 모아 봐도 다시금 한계가 눈앞에 다가온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컹!”
그나마 다행이라면, 놈 역시 피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
– 같잖은 놈이, 고작 성물의 힘을 빌린다고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더냐! 뒈져라!
아마도 놈은 자신의 경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테니, 그 격차를 확인하고 자신감을 가진 것이리라.
‘거기에 틈이 있지…… 간다!’
뿌드득.
타이니는 일순간 시야를 가득 메우며 쏟아지는 검은 번개와 불꽃을 보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타압!”
푸른 마나의 기운이 갑옷처럼 그의 전신을 감싸고.
부우우웅.
마나를 싣고 거칠게 휘둘러진 스탬프가 마치 방패와도 같은 바람을 일으켰다.
그 상태로, 타이니는 쏟아지는 흑마법의 세례를 온몸으로 돌파했다.
콰콰콰콰콰콰콰.
“하아압!”
파아아아앙!
– 이게 무슨……!
됐다……!
놀라는 적의 얼굴을 보니 절로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타이니는 조금 전 충돌 직전에 중력을 극대화했던 느낌을 그대로 살려서 거세게 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육중한 타격과 함께 튕겨 나가는 적.
하지만 그것을 보는 타이니의 표정은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전보다 속도가 죽었어. 위력도…….’
자신이 지친 탓도 있겠지만, 마법 세례를 돌파하며 속도가 줄어든 탓이 큰 것 같았다.
그로 인해 단숨에 분쇄됐어야 할 마법사에게 찰나의 시간을 벌어 줬고, 자신은 놈이 만들어 낸 보호막을 강타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치명타를 먹였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니.
“다시 간다!”
다시금 이를 악물고 돌진하는데,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적이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성물의 결계 안이건만, 일순간 성물의 힘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어둠.
성물의 결계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중심에서 하관만 보이는 놈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진 채로 피를 토해 내고 있었고, 놈의 오른쪽 다리는 검은 불꽃에 휩싸여 사라지고 있었다.
– 흐흐흐, 내가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다니……. 발렌티아, 네놈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처참한 몰골과 반대로 놈의 마기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소신공양!?”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타이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당연했다.
흑마법사라 한들 평생에 한 번만 쓸 수 있는, 신체 일부나 전부를 제물로 바치는 극단적인 수.
‘이미 저 팔로 소신공양으로 쓴 게 아니었어?!’
전생에도 들은 바 없던 흑마법사에 초인이라는 어마어마한 조합이라면, 놈이 그 경지를 일시적으로나마 얻는 대가로 소신공양을 쓴 게 아닐까.
놈의 잘린 팔을 봤을 때, 타이니는 그렇게 짐작했더랬다.
하지만 그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고, 이제 와 물러설 길이 없는 타이니는 그대로 적을 향해 돌진했다.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소신공양으로 힘을 회복했다 해도, 놈 역시 이미 큰 타격을 받은 것은 확실했으니까.
‘사지가 반만 남은 데다 이성이 온통 분노에 잡아먹혔어. 놈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야. 그 틈을 노린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오직 그것에만 정신을 집중한다.
그것이 바로 괴력의 기사가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거기다 지금은.
‘성물도 있어.’
우우우웅.
적을 압박할 수 없다면 광범위 결계는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타이니가 의지를 일으키자 성물의 결계가 극단적으로 수축하며, 그와 월랑의 몸 주변으로 압축되었다.
성물 후마니타스가 파장을 통해 그에게 가르쳐 준 변칙 활용법, 압축 결계.
광대한 면적을 감싸던 성물 결계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대신 그 힘을 극대화한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초인의 경지에 올라야만 가능한 변칙 활용법이지만.
‘지금의 나도 영혼만큼은……!!’
타이니는 오직 영혼의 격만으로 성물의 잠재력을 끌어냈다.
물론.
찌이이이잉.
“끄으윽.”
그 대가로 영혼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과 몸에 걸리는 과부하를 참아 내야만 했다.
‘후유증도 장난 아니겠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보다 나은 대책이 없었다.
– 티끌 하나 남김없이 소멸해라!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공간 전체를 휘감는 검은 기운.
휩쓸리는 순간 가루가 될 것 같은 엄청난 힘이 파도처럼 덮쳐 오는 와중에도 성물의 결계는 빛을 잃지 않았다.
더구나.
– 이, 이놈이 어떻게!?
당황하는 적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주변을 둘러싼 검은 기운 사이로 미약한 틈이 생기는 것도 보였다.
사지 중 둘을 잃은 흑마법사, 그의 이성이 분노에 먹혀 흐려진 탓에 생긴 미세한 틈인 듯했다.
‘지금이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견뎌 내며 전신의 힘을 쥐어짠 타이니의 일격이 그 틈을 강타했다.
꽈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온몸이 그 작은 틈 안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파아아아아앙.
타이니는 어둡지만 맑은 밤하늘을 다시 마주했다.
도박은 성공했다. 살아남은 것이다.
그렇게 안심하던 순간.
푸화학.
그의 코와 입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커윽, 쿨럭!”
– 컹.
흐려지는 성물의 결계.
소환도 유지 못 할 만큼 탈진한 탓에, 월랑의 몸도 반영체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감당하기 힘든 마법에 맞서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적은.
– ……믿을 수 없는 짓을 해내는 놈이로구나. 네 놈을 연구 재료로 써야겠다!
소신공양으로 얻은 마력 덕인지, 한쪽 팔과 다리를 잃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레 허공을 유영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동시에 타이니를 향해 뻗쳐 오는 검은 마력.
‘빌어먹을.’
타이니는 어떻게든 남은 힘을 쥐어짜 움직이려 했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려 올 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중력 속성으로 최대한 가볍게 한 스탬프를 들고 있는 것마저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기는 포기해야겠어.’
스탬프를 놓는 순간 손이 허전해졌지만.
우웅.
그 대가로 최후의 한 방을 먹일 힘이 손아귀에 남았다.
염체가 급격하게 마나 호흡을 하면서 끌어들인 힘을 바탕으로 가까스로 주먹을 불끈 쥐는데.
– 그것으로 되겠느냐? 흐흐흐.
속셈을 짐작한다는 듯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살아온 인생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생기기도 하는 법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히죽.
– 뭐, 뭐야?!
한순간 엄청난 살기가 주변의 모든 공간을 장악하는 것을, 상대는 타이니보다 한발 늦게 인식했다.
놀란 흑마법사의 눈이 하늘로 향할 때.
‘크라켄!’
밤하늘을 그대로 갈라 버릴 듯 거대한 다리는 이미 그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 어림없……!
흑마도사가 허공을 날아 다리의 궤도에서 벗어나려 하는 순간.
“어딜…… 가려고!”
우드득.
살벌하게 웃은 타이니가 그의 하나 남은 발목을 잡아챘다.
남은 힘을 모두 손아귀 근육에 집중시키고, 중력을 최대로 증폭시켜 덩치의 몇 배는 될 법한 무게로 적을 묶어 두었다.
– 이런 미친놈이……!
당황한 듯한 쇳소리가 즐겁게 들리는 순간.
꽈아아아앙!
오감으로는 인식하기조차 힘든 거대한 충격이 그들이 있는 공간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