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83
83화. 재회
“저곳이 바로 아스란 제국의 황도, 아세리안입니다. 여기서만 봐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육포, 아니 그레임 폰 리버티는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성벽을 가리켰다.
거인이라도 능히 막아 세울 듯 30m나 솟은 성벽이 끝도 없이 이어진 광경이 멀리서도 보이니, 대도시의 장대한 규모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심지어 그 높은 성벽 너머 먼 곳에는 황금빛 용의 형상을 한 황궁의 지붕이 불쑥 솟아올라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용이 도시에 둥지를 튼 것 같았다.
아직은 멀쩡한 인류의 저력을 보여 주는 것처럼 웅장한 모습.
그것이 타이니에게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아세리안…….’
마수병단을 막아 내고 인류 연합군의 반격을 준비하는 토대가 되었던 성.
황금룡의 후예라 자처하는 아스란 황실의 유산들이 살아 숨 쉬는 대마법의 도시.
왕국 연합의 중심이 되는 현자의 마탑이 아세리안의 황실 마탑을 따라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아세리안은 현 인류, 특히 인간족이 만들어 낸 역사의 정점이라 할 수 있었다.
“멀리서 봐도 웅장하지만, 안은 더 엄청나지요.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상주하고, 그 몇 배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대륙 최대의 도시! 아마 성문 안으로 들어서기만 해도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레임의 자부심 어린 말이 결코 큰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안에서 난리가 난다는 것은 확실하지.’
그것도 성물의 결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강력한 마법 결계에 휩싸여 있는 황궁의 중심에서.
아니, 대체 어떻게……?
새삼 의문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이제부터 그걸 알아봐야겠지…….”
“예?”
“아, 아닙니다, 그레임 경, 안내 감사드립니다.”
“하하, 그래도 이제는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시는군요.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기사의 말에 타이니의 얼굴에 쓴웃음이 맺혔다.
전생에는 악연이었던 이 기사를 통해 새삼 느끼는 점도 있었으니, 타이니는 정중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때는 정말 실례했습니다, 경.”
“하하, 아닙니다. 뭐, 닮은 사람이야 많으니까요. 안 그래도 제 주위에, 경의 외모에 대한 소문 때문에 착각한 사람도 있는걸요.”
“예?”
“아, 그게…… 별것은 아닙니다만…….”
말을 흐리려던 그레임은 독촉하는 듯한 검은 눈동자를 보며 멋쩍게 웃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광휘의 기사는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검은색인 소년이라고 소문이 났을 때, 오랜만에 동생에게 연락이 왔었습니다. 자기가 경에 대해 알 것 같다면서.”
“……동생이요?”
“예. 아실지 모르겠지만, 작년에 제국에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발렌티아 공작령 산하에…….”
슬며시 제나스의 눈치를 보던 그레임은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마음을 놓았다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필레스라는 곳의 영주가 썩은 시체로 발견된 적이 있었지요.”
……허?
“예, 추측하신 대로 악마추종자의 증거였습니다. 사제가 확인까지 마쳤다지요. 하필 제 동생이 그곳에 기사로 있었는데, 자신이 아는 천재 꼬마와 동일 인물이 아닐까 하면서 연락을…….”
슬쩍 눈치를 보던 그레임은, 이내 굳은 표정의 두 사람을 보며 바로 손을 내저었다.
“아하하, 그렇게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이 어디를 봐서 꼬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생이 착각한 거겠지요.”
혹시나 해서 꺼내 본 말이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상대방이 어처구니가 없을 듯했다.
‘일 년 새 50cm 이상 크는 사람이 어딨겠어.’
그러나 그레임이 급히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는 동안, 제나스와 타이니는 본능적으로 서로를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레임 폰 리버티…… 흠, 리버티라……?’
고개를 숙인 그레임의 익숙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전생이 아닌 현생에서 보았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필레스의 기사 중 그나마 인간미가 있었던 기사.
‘그때 그 기사……!’
자신에게 여비까지 챙겨 주던 중년 기사가 떠올랐다.
제나스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보였지만, 타이니는 풀썩 웃으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렇군요, 제가 그때의 그 꼬마가 맞습니다. 그…… 기사님께는 신세를 좀 졌지요.”
“엑!?”
오히려 말을 꺼낸 그레임이 놀라는데, 타이니는 자연스레 웃었다.
“제가 그동안 좀 많이 컸습니다.”
지금은 모르는 눈치지만, 어차피 월랑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 들킬 일이다. 검은 머리와 동물 정령의 조합이 또 있을 리는 없으니까.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라면, 굳이 속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아하하하, 그렇군요. 저희 형제가 이렇게 경과 인연이 닿았을 줄이야. 이거 정말 기쁘군요!”
다행히 그레임은 비인간적인 성장 속도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았다.
“형제분들에게 연달아 신세를 지게 되는군요.”
“하하, 신세라니요! 인연이지요. 이 인연을 평생 자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저도 감사하지요.”
“하하, 저는 그럼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북풍의 기사님과 함께 가면 소문이 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레임의 시선이 갈색으로 염색한 타이니의 머리를 지나 제나스에게 향하자, 제나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으로는 블루윙의 기사단장이 뒤늦게 공작가에 합류하는 모양새를 취하기로 했던 것이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레임 경. 기억해 두겠습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두 분을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히이이잉.
그레임은 그 말을 끝으로 말과 함께 멀어졌고, 동시에 제나스가 도끼눈을 뜨고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왜……요?”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어차피 들킬 이야기인데 굳이 속일 필요 없잖아?’
타이니가 억울하다는 생각에 입을 열려고 하는데.
제나스는 예상 밖의 얘기를 꺼내 들었다.
“기사에게…… 아니, 사람한테 몇 번이나 육포니 뭐니 하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를 떠나 인간으로서 덜된 겁니다, 타이니 군. 그레임 경의 속이 넓어서 다행이지…….”
“……아, 하하. 그, 그게…… 자꾸 입에 붙어서…….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어요. 다시 실수를 반복하지만 않으면 되는 겁니다. 각하도 저도 타이니 군에게 거는 기대가 크니까요.”
“예?”
공작은 그렇다 쳐도…… 당신도?
타이니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제나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당신이 아무리 강해져도, 사람을 예의로 대하지 않으면 결국 혼자 남게 됩니다. 명심하세요, 타이니 군.”
“그거야, 알고 있…….”
당연한 상식처럼 대답하려던 타이니는, 이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피식 자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아니, 아니네요. 머리로만 알았지, 실제로는 잘 몰랐던 거 같아요. 명심하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흐뭇하게 웃는 제나스를 보다 보니, 멀리 앞서간 그레임이 다시 떠올랐다.
그를 보며 새삼 느낀 바가 있었다는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같은 사람이라도,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거지. 그래, 그게 당연해.’
전생의 그레임은 제국의 난리를 틈타 외성 경비대장이라는 지위까지 올라가서 그런지, 꽤 거만한 태도로 일관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의 그를 생각하면, 지금의 저 기사는 그야말로 다른 사람이라 봐도 무방했다.
전생엔 대륙 10대 기사 앞에서도 콧대를 세울 정도로 정신 나간 놈이었으니, 방금도 광휘의 기사나 북풍의 기사라는 이름 때문에 정중히 대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아무리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공작도 그렇고, 저 기사만 봐도 전생과는 다른 사람들이야.’
오직 전생의 기억만으로 사람을 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 그레임의 존재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생에 보았던 쓰레기들도, 어쩌면 이 시기에는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터무니없는 기대도 문득 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타락한 정령술사나 수배된 성기사도 지금은 사고를 치고 있지 않으…….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놈들은 아니지.”
이어지던 생각 끝에 절로 표정이 구겨진 타이니가 혼잣말을 내뱉자, 제나스가 다시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 아닙니다. 가시죠.”
“……알고 있겠지만, 이제부터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생각이 쓸데없이 길어졌다.
제나스의 재촉에 타이니는 스스로 뺨을 두들기며 잡생각을 털어 버렸다.
당장은 황궁의 일만 생각해도 버겁다.
불과 석 달 뒤에…….
‘……이 나라의 직계 황족이 모두 죽는다.’
그리고 비운의 황태자비이자 전대 황녀의 딸이기도 한 클로이가 임시 황제로서 정권을 잡기까지, 제국은 무수한 피를 흘리게 된다.
그 속에서 스러져 간 인재들만 해도 셀 수 없을 수준일 테니.
‘엘븐하임보다 이곳에 집중하는 게 옳아.’
다시금 자신의 선택을 확신하며, 타이니는 인간족 최대 도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헛! 북풍의 기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충!”
수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아세리안의 동문은 제나스의 신분만으로도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 부작용도 조금 있었다.
“자네, 제나스 경을 모시다니 부럽군.”
“말고삐는 좀 느슨하게 잡게.”
“종자, 수습기사라……. 하,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어으으…….’
그의 말을 끄는 종자가 된 타이니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사들의 간섭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들이야 나름의 격려를 해 준다는 거겠지만.
‘이게 몰매지, 격려야? 하, 그것도 아니면 설마 질투냐?’
성질대로 나댈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보니, 그 간섭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제가 늦어서 갈 길이 바쁘니, 이만 종자를 놓아 주시지요. 제가 다음에 한번 다시 들러 인사드리겠습니다.”
“아. 무, 물론입니다!”
“말씀 좀 편하게 하셔도…….”
발렌티아 공작가의 힘 덕인지 아니면 제나스 개인의 위상 덕인지, 황도 외성 수비대 소속 기사들에게 제나스가 거의 우상처럼 대우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열렬한 추종자들에게서 간신히 벗어나고 나니, 5~6층 규모의 건물들이 양옆으로 쭉 늘어선 어마어마하게 넓은 대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과 물건 또한 눈이 돌아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륙 서쪽 끝, 마역에서 나온 몬스터 부산물이 있습니다!”
“제국 남부 끝에서 온 아르마의 열매입니다! 맛이 끝내줍니다!”
“……카룬에서 갓 올라온 크라켄의 고기 파편입니다. 얼른얼른 맛보시고 장수하세요!!”
……뭔 파편?
아니, 그런 게 있을 리가…….
황당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이미 수많은 사람이 바글거리고 있어 헛소리의 주인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같은 소리를 들었는지, 웃음기 섞인 제나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많은 만큼 사기꾼도 많지요. 하나하나 다 잡아내기도 힘드니, 알아서 가려서 들어야 합니다.”
“……큼,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바가 아닌데, 현생에선 처음 경험하는 탓인지 자신도 모르게 장사꾼의 허풍에 반응하고 말았다.
‘……쪽팔리게.’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은 제나스는 덩치만 큰 소년의 달아오른 귀를 모른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발렌티노에 비해서도 압도적 규모긴 하지요. 아세리안에 없는 물건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말도 있고요. 어떤가요, ‘토렌’ 군?”
토렌.
아직은 어색하기만 한 임시 가명에 표정도 덩달아 어색해졌지만, 확실히 눈에 들어오는 황도의 모습은 화려하고 또 화려했다.
‘역시……. 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냄새도 안 나고, 무엇보다 내가 알던 것보다 사람이 배는 많아.’
전생의 경험이 있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사방으로 눈이 돌아갈 정도였다.
내전이 발생하기 전의 제국이 얼마나 융성했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타이니가 그 화려한 광경을 열심히 눈에 담고 있는 동안.
“역시, 소식이 빠르군요.”
제나스의 말과 함께, 멀리서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달려왔다.
이후 일행은 블루윙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반나절은 더 이동한 다음에나 검제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잔뜩 찡그린 얼굴로 타이니를 맞이하던 공작의 눈은 그를 가까이서 보는 순간 부릅떠질 수밖에 없었다.
“……놀랍군. 대체 뭘 얼마나 처먹었길래 1년도 안 된 사이에 몸이 그따위로 커진 거냐?”
제국의 공작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품위 없는 말투.
타이니는 새삼 공작이 자기한테만 이러는 건지 남들 앞에서도 이러는지가 궁금해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공작의 눈을 바로 보았다.
“도무지 걱정이 되어서 엘븐하임으로 향할 수가 없었습니다. 황도에 들어와서 보니 더 그렇고요. 혹시 그놈들이 무슨 짓을 할 것 같은지, 예상이라도 되십니까?”
엘븐하임에 가지 않은 것을 공작이 꾸짖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버린 것이다.
그에 다시 인상을 찡그린 공작이 마찬가지로 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것은 없다. 황궁의 경비는 완벽하니까. 하지만…… 네게 들었던 미래의 결과와 현 상황을 비교해 봤을 때, 그따위 일이 벌어질 만한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그럼 추론은 가능하지.”
공작의 무거운 눈은 창문 밖,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황궁을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