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85
85화. 대련
황도, 아세리안.
황태자의 결혼식 준비로 몇 달간 떠들썩하던 인간족 최대의 도시에, 엉뚱한 소문이 슬금슬금 퍼지기 시작했다.
웨폰 마스터가 발렌티아 공작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오러유저들 간의 대련.
양식 있는 자들은 국가 사절로 와서 분란을 일으키는 웨폰 마스터의 행태에 분기를 보였지만, 대다수의 압도적인 흥미 앞에서 소수의 이성은 목소리를 잃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그 소문을 그저 뜬소문으로 취급했는데, 그들의 상식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오러유저끼리 싸우다가 크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국가적 손실이지 않나?”
“그럼, 마도사들처럼 안전하게 겨룰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러에 다치면 신성력으로도 회복이 힘들지. 혹시나 치명상이라도 입으면…….”
국가 전력인 오러유저가 전쟁도 아닌 대련에서 망가질 수도 있는 상황.
설령 당사자들이 원한다 해도 이 아스란 제국의 군주, 황제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도 대련을 허락하셨다.
귀족들로선 황당하기 그지없는 소문이 연이어 황도를 강타한 가운데, 며칠 지나지 않아 전격적으로 대련 날짜가 잡혔다.
게다가.
– 제국의 검이 최강이라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겠다!
– 우습구나! 인간족의 최강자는 연합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겠다!
양측 모두 노골적으로 판을 크게 벌이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말을 주고받은 결과, 대련은 저택이나 황궁의 비처도 아닌 무려 콜로세움에서 개최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것은 이내 황태자의 결혼 소식까지 덮어 버리고, 황도 최고의 이슈로 떠올랐다.
“우와아아! 우리도 초인들의 대결을 볼 수 있는 거야!?”
“빨리, 빨리 가자!”
“표를 사야 한다던데?”
“그게 대수야? 용돈을 털어서라도 사야지!”
“재산을 털어야 할 것 같은데…….”
처음 소문이 퍼진 지 고작 일주일 만에 벌어진 엄청난 이벤트.
사람들의 관심이 황도 외곽에 있는 투기장, 콜로세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 * *
“옛날에는 가문 간의 대규모 결투 같은 데 이용되기도 했지만, 최근 백여 년간은 제국 기사 대전 같은 이벤트 때나 사용되는 장소다.”
복잡한 황도의 몇 블록을 통째로 잡아먹은 거대한 원형의 투기장, 콜로세움에 대한 공작의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했다.
그랬기에 따라붙은 제나스가 바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기사들이 보기에나 그렇지, 실제로는 대극단이 마법을 동원한 공연을 열기도 하고, 국가적 이벤트 때도 개장하는 황도 내 ‘문화의 장’ 같은 곳입니다.”
온갖 기사의 모습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고, 그 옆으론 화려한 벽화들이 가득한 콜로세움의 모습.
“문화의 장이라……. 그럴 만하군요.”
주변을 둘러보는 타이니의 감탄 어린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 나왔다.
전생에는 제국 내전 당시 반파되었던 흔적밖에 보지 못했었고, 공작이나 클로이는 다른 민생 사안들 때문에 재정이 빠듯해서 콜로세움을 복구할 생각을 못 했다고 들었다.
그랬기에 멀쩡한 상태의 콜로세움을 보는 게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 솔직하게 감탄하는 모습에 공작의 눈빛이 슬쩍 흔들렸지만, 그는 굳이 무슨 말을 보태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다른 곳에 관심을 둘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곁에 있던 제나스가 공작의 집중을 흐트러트렸다.
“그나저나 황제 폐하께서 대련을 허락하신 것을 좋게 봐야 할지…… 조금 염려가 됩니다, 주군.”
“음…….”
모두가 예상외라 생각했던 그것.
여차하면 황제와의 독대를 청해 허락을 구할 생각까지 했던 공작이었기에, 그 역시 마냥 무시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나를 믿으시는 거겠지.”
……과연 그럴까요?
제나스는 목구멍까지 치민 진실의 소리를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황제가 자신의 주군을 견제하여 로히터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는 둥, 이전부터 안 좋은 소문이 많이 돌고 있었으니까.
물론 소문이 사실이라면 황태자 전하와 공녀님의 결혼을 허락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한다.
‘그래, 아닐 거야…….’
황태자가 적극적으로 결혼식을 밀어붙였기에 성사된 것이라는 또 다른 소문은 애써 떠올리지 않았다.
그것은 직접 황태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본 주군이 더욱 잘 알…….
– 황태자 전하 납시오!
“헙!?”
제나스가 그답지 않게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왜, 왜 온 거야!? 아우 씨…….”
황태자와 관련하여 굉장히 껄끄러운 과거를 가진 타이니가 화들짝 놀라 어디 숨을 곳이 없나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고, 공작 역시 헛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신이 이 방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과는 관계없이 이내 대기실의 돌문이 열리며, 황금용이 수놓아진 화려한 예복을 입은 황금안의 청년이 들어섰다.
뒤따르는 수십의 호위 기사들과 시종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인 외모를 가진 황태자, 브레들리 반 아스란이 공작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빙긋 미소를 띤 황태자를 보며 공작은 황급히 예를 표했다.
공식적으로야 황자와 공작은 의전 서열 동급이지만, 그중에서도 황태자는 특별한 존재인바. 아무리 공작이 황태자의 예비 장인이라 한들 예를 취하는 것이 마땅했다.
자연히 그를 따라 제나스와 타이니 역시 무릎을 꿇는데, 황태자는 바로 손을 내저으며 그런 그들을 만류했다.
“이거, 중요한 일을 앞두고 내가 괜히 와서 부담을 주는 건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그저 영광일 뿐입니다, 전하.”
“하하하, 다행입니다. 그냥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기에, 그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괜한 부담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말에 듣고 있단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지금 상황에서 안 좋은 소문이라 하면 한 가지밖에 없었으니까.
제나스 역시 걱정했던 그것.
황제가 발렌티아 공작을 견제한다.
차라리 대련에서 크게 다치거나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귀족들 사이에 쉬쉬하며 퍼진 소문이었다.
“하하, 헛소문에 신경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이들뿐이지요. 과한 걱정이셨습니다, 전하.”
“물론 공작께서는 오해하지 않으시리라 믿고 있었습니다만, 좋은 일을 앞두고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좋을 것은 없으니…… 미리 끊어 내고자 왔습니다. 뭐, 다른 볼일도 있지만요.”
그 ‘다른 볼일’이라는 말과 함께 어딘가로 향하는 시선.
동시에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타이니는 정수리가 따끔따끔한 것을 느꼈다.
굉장히 찜찜한 기분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황태자를 비롯한 사방의 시선이 제게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저요?”
X 됐다.
입가가 바르르 떨려 오는 것을 참아 가며 애써 태연한 척 스스로를 가리키는데.
“하하, 물론이네. 타…… 흠, 토렌 군?”
……어라?
황태자가 자신이 위장한 신분을 말하며 씩 웃었다.
그에 타이니는 당황하면서도 내심 안심할 수 있었다. 황태자가 알면서도 숨겨 준다는 건, 혹시라도 황실의 괜한 오해를 살까 걱정했던 게 해결되었다는 뜻이니까.
‘……역시 다 생각이 있었구려, 영감님!’
거보란 듯이 웃고 있는 공작의 모습을 보며 재차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타이니는, 그 즉시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여, 영광입니다, 전하! 한낱 종자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떨리는 것은 진심이었기에 연기는 제법 그럴듯했다.
물론.
‘굳이 찾아온 이유가 뭐지?’
황태자가 위장을 받아 주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그럴 거면 아예 시선도 안 받게 해 주는 것이 최선이다.
제나스의 종자라는 명목으로 공작과 가까이하고 있는 지금에는 더더욱.
“아! 내가 일정이 빡빡하다 보니, 미리 말 못 했네.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짬이 나지 않을 것 같지 않아서 말이네.”
“예?”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달고 왔다는 건 이해했다.
그래서, 왜 온 건데……?
타이니가 어이없다는 기색으로 황태자에게 눈빛을 보내자.
“나의 피앙세가, 자네가 키우는 강아지를 보고 싶어 해서 말이네.”
“아…… 예?”
생각지도 못한 말이 돌아왔다.
덕분에 타이니는 그리 좋지 않은 머리를 벼락처럼 회전시켜야 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황궁의 비처에서 신부 수업을 받고 있는 클로이는, 공작을 제외하고는 혈육도 만날 수 없었다.
지금 그녀와 함께 있는 이는 어릴 적부터 그녀의 호위 기사로 점지된 비비안뿐.
그녀 역시 황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닐 터였다.
그런데 굳이 콕 찝어서……?
이것도 공작이랑 얘기가 된 말일까.
티 나지 않게 눈알을 굴려 보니,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영감의 모습이 보였다.
‘하긴, 뭐……. 우리한테는 좋지.’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게 기회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 커, 컹!
영혼의 반려가 반발하는 게 느껴졌지만.
‘한 번만, 쫌!’
– 끼잉.
억지 허락을 받아 낸 후, 그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품 안에서 월랑을 소환하여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끼잉.”
“이 아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 그렇다네! 이 아이가 월인가? 과연 그녀가 찾을 만해. 무척이나 귀엽군.”
은빛 털이 찬란하게 빛나는 작은 강아지(?)의 모습에 황태자의 입에서 경탄이 나오고, 뒤에 늘어선 시종들의 입에서도 작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체 공작이 황태자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흐뭇한 표정으로 월랑을 받아 드는 황태자의 표정이 연기 같지는 않았다.
“정말 내가 데려가도 괜찮겠나?”
“영광입니다, 전하.”
“하하, 아닐세. 내가 오히려 고맙지. 미안하지만, 결혼식 때까지는 이 아이가 내 피앙세의 외로움을 달래 줘야겠어.”
“녀석도 영광으로 생각할 겁니다.”
“컹!”
월랑이 미쳤냐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짖어 댔지만, 다행히 지금 모습으로는 그조차 귀엽기만 했다.
‘좀만 애써 줘. 부탁한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황궁 내에서도 월랑의 소환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전생에 실험해 본바, 황궁 결계의 마나 장악력이라는 것도 그의 압도적인 마나 감응력을 누를 수는 없었으니까.
‘뭐 초인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그 외의 경우라면 나 정도만……. 어, 가만?’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아닙니다, 공작. 중요한 시기에 괜히 방해나 안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힘이 나지요.”
“그럼 정말 다행입니다.”
웃으며 덕담을 주고받는 공작과 황태자를 보니, 이 또한 계획에 포함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황태자 일행의 방문이 있은 후 바로 나온 공작의 말은, 그 짐작이 사실임을 알려 주었다.
“네가 굳이 여기까지 온 이상 능력을 써먹을 방법은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다행히 혹시 모를 악마추종자들의 도발을 경계하겠다는 말에, 황태자 전하께서 응해 주셨다.”
“……다행이군요.”
“황궁 내부에, 특히나 내 딸 근처에 이상한 분위기가 없는지 잘 살펴라.”
“물론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정령으로 음흉한 짓하면 그대로…… 알지?”
목을 긋는 제스처로 경고하는 공작을 보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듣고 있던 제나스 역시 고개를 돌리고 쿡쿡거리는데.
“아, 진짜!! 사람이 좀 진지해지려고 하는데……!”
“……난 진지하게 말하는 거다.”
그 살벌한 시선에 타이니는 웃던 표정 그대로 살짝 굳을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역시 공녀의 안전을 바라는 바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어깨를 두드리며 돌아서는 공작.
“그리드 그 양반에게는 이미 전서를 보내 놨다. 패자가 승자의 요구를 하나 들어주기로. 그의 요구사항이야 알 바 아니지만, 내 요구는 뭔지 알겠지?”
끄덕.
“그래,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가 웨폰 마스터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자신감 어린 공작의 말이 끝난 직후.
대기실 밖, 콜로세움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타이니도 제나스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30여 분가량이 지났을까.
내내 집중력을 끌어 올려 정신을 가다듬던 공작이 벌떡 일어섰다.
“시간이 됐군.”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콜로세움 안쪽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우와아아아아아아!
– 웨폰 마스터다!
– 오러유저! 초인이다!
– 대륙 7대 기사!
수만 명이 동시에 내지르는 목소리.
“이거, 이런 쇼는 또 처음인데.”
그 함성을 들으며 슬쩍 웃은 공작이 대기실 문을 열고 콜로세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대편도 거의 동시에 나온 듯, 반대쪽에서 이를 드러낸 채 미소 짓는 얼굴이 보였다.
동시에.
스아아아아아아.
– 뭐, 뭐야.
– 왜 갑자기…….
관중의 절반 가까이를 강제로 침묵시키는 엄청난 투기가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드……. 흐, 여전하군.”
그저 투기만으로 만 단위의 사람들을 닥치게 만든 숙적을 보며, 공작 역시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