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88
88화. 대책
그 뒤에 이어진 대화는 순조로웠다.
“그러니까, 나한테 마지막에 써먹은 그 수법이 너한테 들어서……. 허, 허허……. 그럼 전생에는, 원래는 어떻게 됐는데?!”
“비긴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당신이 ‘그래도 검술 하나만큼은 네가 위다.’라고 인정해 줘서 검제라는 별명이 붙었었죠.”
“젠장! 이건 사기야! 당장 대련 날짜 다시 잡아!! 당장!”
웨폰 마스터, 그리드 반 셀던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생떼를 부리며 소란을 피웠다.
지켜보는 사람까지 기운이 빠질 정도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길 잠시, 그는 이내 오히려 차분해져서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마도사들이 초인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그럼 결국 오러유저가 중요하다는 건데……. 확실히 미래에 우리가 쓰는 수법을 먼저 알게 되면, 적어도 그때보다는…… 아니, 솔직히 월등히 강해지겠지! 저 고지식한 놈이 생각해 냈다기에는 너무 좋은 아이디어야. 젠장!”
“허…….”
검제가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쉬었지만, 그리드의 갈색 눈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7대…… 아니지, 그때는 10대 기사가 된다고 했나? 그럼, 너 외에 나머지 둘은?”
“사신(死神)은 제국 어딘가에서 훈련 중일 테고, 마도(魔道) 기사도 현자의 마탑 내부에 있을 겁니다. 지금으로선 어떻게 접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죠.”
“사……신? 마도 기사? 별명이 너무 직관적인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그리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데, 타이니는 그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접촉하기 곤란합니다.”
“흐음. 그래 뭐, 전력이 모자라면 암살자나 편법쟁이라도 써먹어야지. 그건 그렇다 치고, 결국 지금은 황실의 변란을 막는 데에 신경 써야 한다는 거지? 하지만, 알잖아? 나는 황궁에 못 들어가.”
“외부에서 대기만 해 주시면 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일어난다면 원군이 돼 주셔야죠.”
“……하, 참 제국의 원군이라니. 내가 살면서 별짓을 다 하게 되는군.”
“당신이 할 일이 없는 경우가 최선입니다.”
“그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군. 얌전히 수련이나 하게. 그럼 왕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설욕을 할 수 있겠지.”
“퍽이나…….”
검제가 코웃음을 쳤지만, 그리드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대응할 뿐이었다.
이미 자신이 미래에 사용할 기술에 대해 많은 설명을 들은 그리드였다. 5개의 초월무구를 연계한다는 그 전투법은, 지금의 그에게도 연신 감탄이 터져 나오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다만 문제라면.
“……나 초월무구 3개뿐인데? 확실히 5개였어?”
“……예.”
“흠…….”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하나 생겼다는 것.
‘설마 나 때문에 역사가 바뀌어서 초월무구를 못 얻는다거나 하진 않겠지……?’
괜스레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지금으로선 애써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무엇보다 강조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악마추종자들의 소행으로 추측되는 재앙들도 많지만, 아닌 것도 있습니다. 솔직히 ‘그 전쟁’은 내전으로 약해진 제국을 왕국 연합이 도발한 것에 가까우니까요.”
“……그런 일은 없어야지. 애초에 이번 일을 막아 낸다면, 제국이 약화되는 일도 없을 테고 말이다.”
검제가 다짐하듯 그리 말했지만, 그것은 최선의 경우를 가정한 말일 뿐이었으니.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나서서 막아야 한다는 거지?”
“……예.”
그리드 반 셀던, 마탑과 더불어 왕국 연합의 중심 역할을 하는 셀던 왕국의 대공인 그의 힘이 꼭 필요했다.
‘그것만으로도 가장 큰 재앙 중 하나를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리드에게 시간 회귀의 비밀을 털어놓은 가장 큰 목적이 그 전쟁을 막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다행히 웨폰 마스터는 그에 대해 완전히 납득한 듯싶었다.
“흠, 흠. 그래, 그런 거라면 당연히 내가 나서야지. 제국에야 유감이 좀 있지만, 싸워야 할 상대가 마왕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지. 전설의 존재가 강림한다고? 이거 기사로서 피가 끓는구먼! 흐흐.”
반듯한 머리와 정돈된 콧수염에 어울리지 않는 투지 넘치는 외침.
갈색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흥분은 대외적 언행에 감추어진 그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 모습에 새삼 걱정이 되었는지, 검제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이 얘기는 외부에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
“날 바보로 보지 말라고, 위대하신 검제 나리. 그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으니까.”
어린애 같은 시비에 검제가 한숨을 푹 내쉬자, 피식 웃은 그리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신전이 알게 되면 큰일이니 7대, 아니 10대 기사…… 씁, 그 말 참 입에 안 붙네. 아무튼 우리 중에서도 갓 핸드 그 양반한테는 말하면 안 되겠네?”
“그렇지.”
“……흠, 그건 좀 아쉽군. 아무튼 납득했다.”
“……정말 납득하신 겁니까?”
이번에는 타이니가 나서서 딴지를 걸었다.
“내가 더 들어야 할 말이 있냐? 애송…… 큼, 타이니?”
“전생에도 당신이랑 하이넨은 다 알았다는 듯이 말해 놓고 사고를 친 적이 많아서 말입니다.”
그 말에 그리드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검제가 웃음을 참지 못해 쿡쿡거렸다.
“흠, 드워프족의 첫 번째 망치도 사람이 좀 호쾌한가 보구먼.”
민망해진 그리드가 애써 딴청을 부리는데, 검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애매하면 그냥 닥치고 있으면 된다, 그리드. 네가 평소 하던 대로 꼴리는 대로 저지르고 보면 곤란해. 이번 대련처럼 말이야.”
“거, 공작이 단어 선택 좀! ‘꼴리는’이 뭐……. 아, 알았다. 알았다고!”
괜한 꼬투리를 잡던 그리드는 찔리는 구석이 있는 만큼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크라켄을 막아 내고 카룬을 구한 영웅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믿지 않을까. 비밀은 지키겠다. 믿어라. 웨폰 마스터, 그리드 반 셀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이죽거리다가 갑자기 무게를 잡고 말하는데도, 그 근엄한 외양 때문인지 그다지 위화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쨌거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은 무조건 지키는 양반이었지.’
타이니가 기억하는 옛 동료는 분명히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 * *
“그런데, 제나스 경에게는 언제 얘기하실 겁니까?”
그리드가 떠나간 뒤, 생각에 잠겨 있던 공작에게 타이니가 불쑥 물었다.
이미 카룬에서부터 자신을 도우라고 파견된 블루윙의 기사단장.
그리고 ‘죽지만 않는다면’, 언제고 오러유저가 될 것이라 짐작되는 천재.
거기다 상호 간의 확고한 신뢰도 쌓였으니, 타이니는 제나스를 꼭 끌어들여야 할 인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은 그 질문에 대답을 회피하듯, 한숨을 쉬며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한테 제나스 경을 보냈을 때 이미 이 판에 끌어들일 생각이셨던 게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이번에.”
“예?”
“……이번 황실의 일이 무사히 끝나면, 그때 생각해 보자.”
“…….”
역시…….
검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번 황실의 재앙에서 제나스가 죽을 것이라 짐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미리 얘기해 주고 대비하게 만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악마추종자가 일을 벌일 것이라고, 네가 이미 말해 놓지 않았느냐.”
“그래도 좀 더 자세히…….”
“몸을 사리라 말하면 오히려 덤벼들 녀석이다.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나아.”
그 말에는 타이니도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나스 프리웰에 관한 건 자신보다 검제가 훨씬 잘 알 테니까.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전부 취했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뿐이군요.”
“그래, 7서클의 흑마법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준비. 혹시나 그런 놈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 허, 참 어처구니가 없구먼.”
“그래도 확실히 대비해 놓으셔야 합니다.”
“그래,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도 말해 놓았다.”
“예?”
“전에 보았잖느냐? 물론 휘하의 녀석들에게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악마추종자가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고만 말씀드렸다. 그중에 흑마도사가 있다는 것도.”
“……그렇군요.”
타이니는 공작의 대답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아스란 황족은, 저들끼리 미친 짓을 하다가 자멸하고 나라까지 말아먹은 멍청이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공작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황실의 정보 조직을 우습게 보지 마라. 어쩌면 그들은, 이미 놈들에 대한 단서를 잡았을 수도 있어.”
“그랬다면 이미 난리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이번 일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예방, 막아 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다만 요즘 내가 걱정하는 것은…….”
“……?”
“이 재앙이 만약…… 악마추종자들과는 상관없는 황실의 내부 권력 다툼에 의한 것이라면,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 말에 타이니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가능성이 충분한 듯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황궁에 손을 쓸 여지도 없어진다. 황족의 내부 다툼에 신하가 간섭할 수는 없으니…….”
이어진 공작의 말은 그가 생각지도 못한 맹점까지 짚고 있었다.
“황도가 박살이 나더라도,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까?”
“그래, 그게 원칙이다. 그래서 차라리 악마추종자 놈들이 관련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하, 진짜 이게 무슨 아이러니한 바람인지.”
공작은 푸념 같은 말을 늘어놓다가도, 이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작은 한숨과 함께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게 걱정이지만, 그조차 황태자 전하께 미리 언급했으니 알아서 조치하셨을 거다.”
“그러는 당신도 지금 불안해서 말 꺼낸 거 아닙니까?”
“……그래. 황궁의 완벽한 방비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자꾸 그쪽으로 의심이 쏠릴 수밖에 없으니까.”
“뭐,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군요.”
“음?”
“황족 중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거 아닙니까. 악마추종자와 손을 잡았는지 아닌지는 옵션이고.”
“……그렇……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에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아직 발렌티아 가문 소속이 아닌 건 아시죠?”
“……그게 왜? 너, 무슨 생각인 거냐? 설마……?”
무언가를 짐작한 듯 공작의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타이니는 당당한 미소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의심 가는 황족들 목록을 정리해 주시면, 제가 때려잡고 튀겠습니다. 퇴로만 열어 주시죠.”
그 순간 공작의 얼굴이 한순간에 폭발할 것처럼 달아올랐다.
“이 미친 새끼가……!!!”
분노한 공작의 고함이 저택의 방음 마법까지 뚫고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 * *
“각하께서 그리 화나신 것은 처음 봤어. 푸하하하! 대단하네, 타이니 경. 대체 각하께 무슨 소리를 한 건가?”
팔다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타이니를 보며, 가렌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타이니로선 자신과 일면식밖에 없는 이 기사가 왜 여기서 떠들면서 울화를 돋우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었다.
다만,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아니, 진짜 확실한 방법이었는데…….”
모든 사고를 미연에 예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사고를 칠 만한 놈들을 싹 다 죽이면 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위험 부담은 자신이 지는 것이니, 공작으로서도 환영할 만한 제안이라 생각했는데.
– 네놈이 마왕의 골통을 깨야 한다! 너도 그러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 놓고 제국의 수배범이 되겠다고?
미친 듯이 화를 내며 자신을 두들겨 패던 공작의 모습이 떠오르자 상처가 다시 쓰려 왔다.
‘염체가 경험을 새길 수 있다는 말을 괜히 해 줬어, 젠장…….’
수련을 핑계로 정말 죽기 직전까지 굴렀다.
블레이더급에 단기간에 올려 준다는 방법이 이딴 거라면 절대 사양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공작이 그렇게 화를 낸 이유에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는 것은 아무리 바보라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까.
전생에서 동료로 등을 맡길 때와는 또 다른 느낌.
그 생경한 느낌에 새삼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는데.
“대체 각하께 무슨 말을 한 건지 말해 주겠나, 타이니 경?”
옆에서 이빨을 터는 기사가 자꾸만 생각을 방해했다.
“……부단장님은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신 겁니까?”
“음? 아, 아직 못 들었나? 각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다음 임무를 함께해야 할 사이인데, 파트너의 성향을 좀 알아 두고 싶어서 그러네. 이참에 친분도 좀 쌓아 둘 겸.”
“……예?”
이게 무슨 소리지?
다음 임무?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요새는 친분을 다친 사람 약 올리면서 쌓나?
타이니가 황당한 마음에 눈만 끔뻑거리는데.
“아, 이런. 이거부터 준다는 게 깜빡했군.”
가렌은 그의 심정을 모르는 듯 씩 웃으며, 품 안에서 빨간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빛을 품은 붉은 액체. 그건 분명히……
“빨리 나으라고 고급 포션을 사 왔네. 아, 부담스러워할 거 없어. 그냥 내 마음이니까. 원래 친구는 서로 돕는 거 아니겠나?”
슬쩍 윙크를 날리는 중년 아저씨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오던 그 때.
– 컹!
영혼의 반려에게서 신호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