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90
90화. 속셈
“……확실히 너무 빨리 컸다, 아들아. 과해, 과하다.”
황태자와 태자비가 물러간 대전. 황제는 한탄하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젊은 황태자는 제국의 모든 것을 완전히 손에 쥐기 위해 자식조차 늦게 낳았던 아비의 바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황실은 더욱 약해진다. 발렌티아는 오히려 더 커질 테고.”
호위 기사까지 물린 공허한 공간에 황제의 자조 섞인 혼잣말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 굳이 태자비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있으실까요?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마치 멀리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황제는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그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조금 흥분한 탓이다. 늙어서 그런 게지, 허허.”
– 발렌티아의 핏줄이 그리 거슬리십니까?
목소리의 반문에 황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한 40년쯤 되었나. 공작가의 후손이라며 인사를 온 꼬마가 나를 꺾었다. 검술을 지도해 주겠다 나섰던 나를, 열 살 좀 넘은 꼬마가 말이야. 어찌나 부끄러웠던지…….”
먼 과거를 회상하던 황제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기사의 길을 포기했지. 어차피 우리 아스란은 마법의 핏줄이라고 위안하면서 말이야. 내게 그 마법에 대한 재능도 별로 없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제국의 지배자는 부끄러운 시절의 고백을 이어 갔다.
“하지만, 결코 개인적인 감정으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야. 아무리 태평성대가 지속된다 한들, 한낱 귀족의 이름이 황가의 앞에 서서야 되겠는가! 그것은 이 나라의 근본적인 질서를 위협하는 불경이다. 역모나 다름없는 일이야!”
그러다 결국 지극한 분노를 담은 목소리가 아무도 없는 대전에 울려 퍼졌다.
누군가 듣는 사람이 있어 귀족들에게 퍼진다면 큰 문제가 될 만한 이야기.
하지만 황제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황제를 지키는 ‘그림자’의 수장이 자신의 목소리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음을 알기에.
“그 아이가 그걸 몰라, 영민한 녀석이…….”
황태자가 들었다면 그것이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냐고 반발했을 만한 말이었지만, 황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럼에도 그 법도라는 것 때문에 응징할 수가 없으니……. 우리 제국이 이만한 저력을 쌓았음에도 대륙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까닭도 그와 같다. 법도에 묶여 섣불리 나설 수 없는 황실, 커져만 가는 귀족들, 그에 따라 중앙에 집중되지 못하는 권력…….”
허공에 주먹을 움켜쥐는 황제.
그것을 응시하는 황금안은 주먹이 아닌 그 너머의 무엇, 제국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나라의 모든 전력을 황제의 손에 넣어야만 대륙 일통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은가?”
– 그렇습니다.
대답이 들리자 황제의 눈이 살벌하게 빛나고.
“그래, 그래서 구실이 필요한 거야. 그 멍청한 여자나 악마에게 홀린 잡것들 같은…….”
이내 그의 입에서 누군가 들었다면 소름이 끼칠 만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목소리는 전혀 놀라지 않은 듯 담담하게 답했다.
– 하지만 그들만으로 발렌티아 공작을 잡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악마추종자들의 한계야 뻔하니까요.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너희들이 필요한 거고.”
– 저희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그 비밀 병기라는 것도 완성되었고?”
– ……죄송합니다만, 녀석은 아직…….
“대단한 인재라 하지 않았더냐?”
– 녀석이 그대로 커 준다면, 폐하께서는 10년 내에 제국 최초로 암살자 출신의 오러유저를 거느리시게 될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유감이군.”
– 그러나, 저희와 황실 마탑이 힘을 합친다면 이미 전력은 충분합니다.
“그래야지. 안 그러면 곤란해.”
– 믿어 주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그 잡것들에 관한 사항은 태자한테도 들어갔을 텐데, 반응은 어떤가?”
–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습니다만, 아마도 놈들이 움직일 때 잡아채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분의 성정이라면…….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리되어서는 안 돼. 알고 있겠지?”
– 물론입니다. 황태자 전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실을 한참 늦게 전달받으실 것입니다.
“좋아.”
그 대답에 황제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 악마추종자에 의한 변란이 일어나고, 대귀족이자 초인, 황실의 사돈인 발렌티아 공작이 죽는다……. 이 시나리오가 최선이다.”
– 예.
“변란이 발생하는 것만으로도 황제에게 집중되지 않은 분산된 권력이 제국을 좀먹고 있다고 주장할 명분이 생긴다. 그것만으로도 차선은 되지만…….”
– 반드시 최선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좋다. 제국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보이지 않는 그림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황제는 처음으로 흐릿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 * *
“아스란 황궁의 결계는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높습니다. 그 안에서 성물을 건드리는 것은, 그분이 멀쩡하시다 해도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암실의 원탁.
구석의 말석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상석의 그림자가 들썩였다.
마치 숨죽여 웃는 듯한 모양새.
그에 따라 주변의 그림자들 역시 들썩이기 시작했다.
“뭐, 황제나 황족들이야 거만하기 짝이 없으니. 우리 정도야 마음만 먹으면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
“계속 그렇게 오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겠습니까. 일부러 미끼도 던져 줬는데.”
“그 여자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 줘야 할 텐데요.”
“뭐, 괜찮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미끼인 줄도 모르니까.”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나직하게 퍼지자, 말석의 그림자가 움찔거렸다.
“……그럼 다른 수가?”
“자네는 아직 몰라도 되네.”
“혹시 알고 싶나?”
“알려 주신다면야…….”
“왜? 그 모르스 가문 놈한테 알려 주려고?”
그 한마디에 암실에 살기가 맴돌고, 말석의 그림자가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절대 아닙니다! 제, 제가 어찌 감히!!”
그 말에 상석의 그림자가 피식 웃었다.
“그래, 당연하지. 어찌 감히 그러겠어? 위대한 분께 혼을 맡기고, 새 시대의 힘을 심장에 품은 사람이 말이야.”
“마, 맞습니다!”
자신을 옹호하는 그 말에 말석의 그림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상석의 그림자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있더라고. 그 말도 안 되는 미친놈이.”
“예?”
“새삼 신기하긴 해. 대체 아스란 놈들은 어떻게 영혼의 계약까지 무시하고 황실에 충성하는 자를 만들어 내는 걸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석의 그림자가 어리둥절해하는데.
“연기 참 잘하네. 용의 눈, 흑마 탐색부장……. 라일리.”
그 말에 순간 멈칫한 말석의 그림자가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예, 예? 용의 눈이라뇨?”
“……늦었어.”
스각.
나지막한 한마디와 함께 어디선가 휘둘러진 칼.
동시에 말석의 그림자가 털썩 쓰러지고, 암실엔 역한 피비린내가 풍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냄새를 맡은 나머지 그림자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정말 어이가 없군.”
“이로써 첩자는 걸러 냈다.”
“정말로 있었다는 게 신기해. 위대하신 분께 영혼을 바치고도 어떻게?”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
“하여간 아스란 놈들, 정말 지독하군.”
“이렇게 되면, 그 모르스 놈이 우리에게 힌트를 주게 된 건가?”
“놈이 용의 눈과 관련이 있다면, 너무 행로가 단순했던 건데.”
“흐음, 확실히 그렇긴 한데…….”
“때로는 너무 깊은 생각도 독이다. 그놈이 우리를 너무 우습게 본 거라고 본다.”
“아니, 황실이 우습게 본 거겠지.”
“하긴, 그놈들이야 항상 그러니까.”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온 목소리들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좋다. 이제 내부 정리는 끝났다. 푸른여우에게는 연락을 해 뒀겠지?”
“그래, 그 건은 나만 알고 있길 참 잘했군.”
“그는 확실하겠지?”
“그럼, 확실해. 아스란 제국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반드시!”
“좋아, 그럼 다 좋은데……. 그분의 상처는 어찌 됐지?”
“결국 회복하지 못하셨다. 크라켄의 힘이 독해……. 단순히 물리적인 상처는 아닌 것이라 결론을 내시고, 결국 ‘그 수법’을 쓰기로 결정하셨다.”
“으음…….”
“좋게 생각하라 전하셨다. 대업을 위해서는 언제고 했어야만 하는 일. 그 시간이 좀 더 당겨진 것뿐이라고 말이다.”
“역시…….”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빛이고 어둠이시다.”
“그래, 그분이야말로 위대한 분의 사도로서 적합하지.”
“우리는 그 뒤를 따를 뿐.”
“실패는 한 번으로 끝이다.”
“물론!”
“그분이 다시 깨어나시는 날……. 그날이 기대되는군.”
“으하하하!”
그림자들이 동시에 쿵 하고 바닥을 구르자, 자욱하게 일어난 검은 기운이 암실 안을 가득 채웠다.
“새로운 세계를 위하여!”
“새로운 세계를 위하여!”
“그리고 제국의 파멸을 위하여!”
“크하하하하, 그래! 제국의 파멸을 위하여!”
피 냄새가 짙게 흐르는 암실에서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 * *
“……폐하께서 나를 적대하신다? 하, 그래. 소문은 들었지만, 클로이까지 겁박하셨다고?”
“어쩌시렵니까? 아무래도 이거, 당신이 생각한 최악의 상황이 현실로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멍한 눈으로 한탄하듯 중얼거리는 공작을 보며 타이니가 툭 하니 내뱉었다.
월랑을 한계 이상으로 소형화시키고 존재감을 죽이느라, 영혼이 압축되는 고통을 견뎌 가며 얻어 낸 정보였다.
물론 괴롭기는 월랑이 훨씬 더 괴로웠을 테니, 녀석이 제대로 삐져 버렸다는 극심한 부작용(?)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니 타이니의 눈에는 그 정보를 제대로 활용해야겠다는 의지가 뚜렷하게 서려 있었다.
물론.
“황제를 죽여 버리면…… 하, 하하……. 안 되겠죠?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아, 하하……. 째려보지 마시죠? 농담이었습니다! 하, 하하……. 진짜, 진짜라니까!”
그 의지가 좀 과하긴 했지만 말이다.
“알았으니 좀 닥쳐.”
평상시라면 저 정신 나간 발언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었겠지만, 검제는 더 이상 타이니의 말에 신경을 쓰지도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폐하…….’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소년 시절, 첫 만남에서 저지른 치기 어린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부했다.
그렇게 최고의 귀족가이면서도 친황제파가 된 발렌티아.
덕분에 제국이 지난 30년간 견고한 반석 위에서 평화를 누려 왔다고 믿었는데.
“왜 이렇게 되고 만 건지…….”
검제라는 과분한 별명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쯧, 무슨 쓸데없는 고민을 그렇게 하는지…….”
서글픈 상념에 잠겨 들려는데, 또다시 들려온 건방진 목소리가 그를 방해했다.
“너, 지금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고……!”
울컥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려는데.
“그게 마왕군보다 큰 문제인가?”
들으란 듯이 중얼거리는 녀석의 말에는 일순간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는 않지?”
“그런데 왜 그리 고민을 하냐, 이 말입니다.”
이죽거리는 표정 위로 빛나는 검은 눈동자.
불길하게까지 보이는 그 건방진 눈빛은, 오직 하나의 확고한 신념만을 담고 있었다.
너무 올곧게 그것만 보기에 바보로 오해받을 만한 신념…… 아니, 집념.
“어차피 마왕군이 강림하면, 누굴 싫어하건 말건 다 뭉치게 되어 있습니다. 경험자 말이니까 믿으시죠.”
때론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저 눈빛이, 이번에는 그의 정신을 번쩍 일깨웠다.
“……그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우리야 어쨌건 인류의 전력만 보존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 그렇지. 허…….”
단순한 일이었다.
‘폐하가 나를 멀리하시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건 그게 아니거늘.’
덕분에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듯했다.
일단은 황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나대로 준비를 계속해야지.’
그러니 쓸데없이 감상에 젖을 필요는 없었다.
“……덧붙여서 예상 밖의 괴물들을 상대할 강자도 키워야겠지.”
“그렇……죠? 아, 하하……. 왜 갑자기 날 보실까요? 그것도 그렇게 무섭게……?”
딴청을 부리는 녀석을 이리저리 훑어보니, 자연스레 다시 미소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몸이 빨리도 나았구나. 더 심하게 굴려도 되겠어. 그 염체의 비전이라는 게 정말 대단해.”
“아…… 이, 이건 가렌 경이 포션……!”
“상태도 괜찮아졌겠다, 오늘부터 훈련 강도를 한층 더 올리겠다.”
“사람 말을 좀 들어!”
“나보다 강해지면 들어 주마!”
“아, 진짜! 아아악!! 귀! 아파! 아, 알았어요! 간다고, 가!”
황태자의 결혼식을 두 달가량 앞둔 시기.
수도의 발렌티아 저택은 다시 한번 떠들썩한 굉음과 비명으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달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