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95
95화. 카리나
파바바바바박.
파아아아앙.
산길을 빛살처럼 달려 나가는 거대한 은빛 늑대가 지나간 자리에 파공음이 일며 조용한 산속에 소란을 일으켰다.
그러다 어느 순간.
“컹!”
늑대는 등 뒤에 탄 기수에게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절벽의 존재를 알렸다.
반대편까지 폭이 1km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절벽.
동이 터 오는 뒤편에서 내리쬐기 시작한 햇살이 거대한 골짜기에 비쳐 들자, 어렴풋한 빛을 받은 골짜기 위의 암석들이 환하게 빛났다. 반면 여전히 어둠이 가시지 않은 골짜기의 아래는 그 명암이 더욱 대조되어, 마치 지옥의 입구 같은 음산함을 풍겼다.
그러나.
“뛰자!”
기수는 겁이 없다 못해 오히려 신이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것을 예상했다는 듯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은 늑대, 월랑은 절벽의 끄트머리에서 그대로 반대편을 향해 점프했다.
콰아앙!
힘껏 디딘 자리의 돌이 움푹 패며 폭발적인 굉음이 울리는 순간, 거대한 늑대와 기수는 그대로 새벽녘의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이야아아! 야호!”
골짜기에 메아리치며 울려 퍼지는 짜릿한 목소리.
하지만 그 높은 기세와는 달리, 상승하던 늑대와 기수는 절반 지점에 이르기도 전에 다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허공을 밟으며 재도약한 거대한 늑대는 같은 동작을 몇 번 반복하더니 금세 반대편에 착지했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
‘나 어떠냐?’라는 뜻이 담긴, 자랑스러운 하울링.
“잘했어, 월랑. 가자!”
월랑의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어 준 타이니는 씩 웃으며 다시금 갈 길을 재촉했다.
그러자 다시 바람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늑대가 그대로 산의 저편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
– 이제 얼마 안 남았다.
타이니가 남긴 목소리의 잔향이 울려 퍼지고.
– 짹짹.
– 크르르르.
– 쪼르르르르.
난데없는 하울링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산맥의 짐승들이 소란스레 아침을 맞이했다.
“저기군.”
마지막 산을 넘는 순간 나타난 너른 들판.
그 들판의 지평선 너머로, 홀로 볼록 솟아난 성의 첨탑이 보였다.
오랜만에 평지를 만나 탄력을 받은 월랑이 바람처럼 질주를 시작하자.
파아아아아앙.
콰콰콰콰콰콰.
은빛의 거체가 지나간 자리에 흙먼지의 폭풍이 일었다.
그 요란한 질주 중에도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던 타이니는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 성벽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이 정도면 반나절 정도는 더 줄일 수 있겠어.’
하지만 그건 기분 좋은 착각이었다.
사흘 동안 잠도 최소로만 자고, 식사도 산중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멧돼지 한 마리 잡아먹은 게 고작(?)이었으니, 시간 단축은 당연한 결과였다.
‘성물이 나한테 있는 이상, 어설픈 악마추종자들은 접근도 하지 못한다. 시간 안에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아.’
그러니 저기 보이는 저 성벽 너머에 있는, 봉기했다는 악마추종자들만 후딱 정리하고 돌아가면 된다.
봉기한 이들이 전부 악마추종자들은 아닐 테니, 핵심만 제거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정신을 차릴 터였다.
아니, 만약 악마추종자가 정말 수뇌부의 전부라면.
‘내가 나설 틈이나 있을까?’
성물의 힘을 생각하면, 지금 자신이 저 성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전부 정리될 수도 있었다.
도무지 변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일.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질주하는 은빛 바람은 빠른 속도로 카리나 성에 가까워졌다.
* * *
“나는 옳다, 내가 옳아.”
카리나 성의 전 총관이자 임시 성주, 벤자민은 대전의 상석에 앉아 끊임없이 같은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미남형의 얼굴은 볼이 홀쭉 패어 볼품없어졌고, 눈가에는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다크서클이 깊게 자리했지만.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게…… 옳아.”
X 같은 세상.
그의 아비는 평생 충성을 바쳐 온 영주에게 한 번 실수했다는 이유로 팔 하나가 잘렸고, 그 충격에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직도 그때, 혼수상태의 아버지가 계속해서 중얼거리던 말을 잊지 못했다.
– 주, 주군. 어, 어째서 제게…….
아버지가 죽은 것이 팔이 잘린 후유증 때문인지, 배신당한 마음의 충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충격으로 쓰러진 어머니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대대로 카리나의 총관을 세습해 왔던 준귀족 가문의 재산은 친척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 사라졌다.
그런데도 가해자는 금화 몇 개를 보상이랍시고 던져 주고는 자신의 관대함을 칭송하라 말했다.
그런 악독한 지배자를 처벌할 자도, 탓하는 이도 없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15세.
주변에 도와주는 이 하나 없던 그로선, 살기 위해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과분한 은혜에…… 가, 감사드립니다…….
가슴 속에 쌓인 한이 넘쳐 흘러내린 눈물이 영주에게는 감격의 눈물로 보였던 것일까.
영주는 갑자기 흡족한 미소와 함께 아버지의 잘못을 용서한다면서, 그를 다음 대 총관으로 삼겠다 말했다.
‘그 후로 20년…… 20년을 숙이고 살았다. 오직 복수를 위해!’
사실 영주를 없앨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겁이 나서 차마 실행하지 못했던 과거.
이불보를 뒤집어쓴 채 자책하던 습관이 자학으로 이어진 게 몇 번이던가.
그러다가 최근에야 그 복수를 도와줄 존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의 복수심에 공감해 주며, 새로운 세상에 대해 말했다.
그로선 혹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복수에 성공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세상이 잘못된 거야. 내가 옳아…….”
끊임없이 그렇게 되뇌며 스스로를 위로해 봐도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더구나 며칠 전, 무려 ‘성물’을 가진 자가 카리나로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후부턴 불면증이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그런데 그때.
– 서, 성주님. 조식을 대령했습니다.
외부에서 목소리가 울리더니, 바로 대전의 문이 열렸다.
그그그긍.
“어, 어떤 놈이! 누구 마음대로 문을 열어!!? 내가 성주야! 내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온 시종은 그 호통을 듣는 순간 몸을 움츠렸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고, 그것이 스트레스가 가득 차 있던 벤자민을 폭발시켰다.
“하찮은 시종 주제에 감히 나를 무시해!? 오냐, 내가 네놈을……!”
그제야 걸음이 느려진 시종이 몸을 부들부들 떨 때.
“진정하시오, 성주.”
시종의 뒤에서, 뒤늦게 들어온 ‘조력자’들 중 한 명의 목소리가 그의 이성을 붙들어 주었다.
“게론?!”
검은색의 음침한 로브가 왜인지 반갑게 느껴지는데.
“꺼져라.”
“예, 옙!”
조력자, 게론의 한마디에 시종이 바람처럼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지금 누가 이곳의 진짜 주인인지를 확실히 보여 주는 모습이었지만, 벤자민은 시종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함정에 대한 점검은 끝났소이다, 성주.”
……점검.
“수, 수고하셨소이다.”
성물을 가진 자는 오직 한 명.
하지만 꽤 강력한 기사라 하니 함정을 팔 수밖에 없었고, 그에 맞춰 ‘조력자’들의 도움도 있었다.
“좋군. 놈이 황도에서 출발한 것이 사흘 전……. 이제 며칠 안에 도착할 테니, 무운을 빌겠소.”
“자, 잠깐. 그게 무슨 말이오? 설마 지금 나를 두고 떠나겠다는 거요?!”
“워워, 진정하시오, 성주. 성물을 가진 자가 오고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우리가 어찌하겠소.”
“아, 아니. 당신들이라면 방법이 있을 거 아냐! 제국과 싸울 수 있다고! 사방에서 일어날 거라고 했잖아!”
“그거야 미래의 일이고, 성물은 또 다른 얘기요.”
“성물 하나에 물러서면서 무슨 제국을 상대하겠다는 거야!”
벤자민은 그럴듯한 말로 반박하며 고함을 질렀지만, 뒤집어쓴 후드 아래 게론의 얼굴엔 그저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시오. 성물을 들고 다닐 수 있는 놈이 있다는 게 이상한 거 아니오? 역사상 그런 일이 없었는데……. 아무튼 살아서 봅시다.”
혼잣말 같은 넋두리를 뱉던 그는 이내 말이 많았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입을 닫고는 몸을 돌려 버렸다.
그 모습에 벤자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그럼 나, 나는?!”
“그대는 ‘그것’을 조종해야지. 그대가 아니라면, 현혹된 기사들과 병사들은? 또, 함정은 누가 가동하라는 거요?”
게론의 턱 끝이 벤자민이 쥐고 있는 검은색 구슬로 향했지만, 벤자민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 하지만…….”
“당신마저 도망치면,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더 늦어질 뿐이오. 그래도 상관없겠소?”
그 말에 벤자민이 핏발 선 눈을 부릅뜨며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지. 알겠소이다.”
그 모습을 본 게론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놈을 물리치고 성물을 확보하면 연락하시오. 파괴자를 보낼 테니. 그 후에 우리는 진정한 승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이오. 수고하시오, 성주. 새로운 세상을 위해.”
“……새로운 세상을 위해.”
벤자민은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았고, 게론은 그대로 대전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밖에서 기다리던 동료들이 그를 맞이했다.
“해결은 잘 되었나?”
“저놈이 뭐 어쩌겠어.”
“그래, 그렇겠지.”
“놈이 실패하더라도, 돈으로 매수해 놓은 이들이 있다. 그들이 정보를 전해 주긴 할 거야. 놈이 어떻게 성물을 휴대하는지.”
“……다시 생각해 봐도 참 좋은 아이디어야.”
“그럼, 내가 누군데!”
똑같이 검은 로브를 입은 그들이 키득거리며 웃는 모습을, 대전을 지키는 병사들은 그저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때.
땡땡땡땡땡땡땡땡땡땡!!
내성 밖에서부터 급박한 종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검은 로브들의 안색이 확 변했다.
“버, 벌써!? 어떻게?!”
“아, 아냐. 그럴 리가! 황군인가?”
“제엔장!”
자신만만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고, 그들은 황급히 밖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성 밖으로 뛰쳐나온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멀리 외성의 성벽 위로 뛰어오르는 거대한 은빛 늑대와 그 위에 올라탄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놈이다!”
“젠장, 튀어!”
“늦었어! 함정이나 발동해!”
“그, 그럼 우리는!?”
“이미 늦었다고! 우리가 정령보다 빨라!?”
“어, 어떻게든 버텨 봐야지. 젠장!”
눈앞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투명한 장벽.
거기서 그들 존재의 본질을 위협하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생생히 느낀 검은 로브들은 순식간에 안색이 파래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재앙이 닥쳐오는 듯한 절망감이 엄습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새로운 세상을 위해!”
“위대한 분이시여, 저희에게 힘을!”
이를 악문 그들은 품 안의 보호구를 움켜쥐며 ‘위대한 분’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다가온 투명한 장벽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사, 살려!”
마치 용암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그들의 전신이 검붉은 연기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그들 중 가장 높은 경지의 흑기사였던 게론만이 투명한 장벽을 몸으로 받아 낸 채, 그 속도 그대로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이이익.”
게론의 창백한 두 손이 검은 연기를 내며 타오르고, 후드 아래 악다문 입술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던 그때.
– 어딜!
노을빛 마나가 일렁거리는 거대한 워해머가 빙글빙글 돌며 그의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빌어먹을!!”
생을 포기한 그의 손이 마지막에 뿌린 마력이 적의 발밑을 향해 쏘아지고.
꽈아아아아아아앙!
그의 몸이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가며, 내성 앞마당이 검붉은 불꽃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