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97
97화. 사신
다행히 반나절이 지나자 다시 월랑을 소환할 수 있었다.
타이니는 그 즉시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직전이던 말을 방생하고, 카리나에 올 때처럼 월랑을 타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너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을 텐데, 미안하다. 좀 서둘러 줘.”
“컹!”
타이니의 말처럼, 현신했던 육체가 박살이 나 역소환되는 충격은 정령인 월랑에게도 무시 못 할 데미지였다.
덕분에 올 때에 비해 속도가 느려진 것이 티가 날 정도였지만, 그래도 일반 기마에 마력질주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빨랐다.
‘아직 시간은 충분해…….’
그럼에도 불안감이 가시지를 않았다.
그러니.
‘섭식도 최소로 하고, 잠도 포기한다.’
그렇게 각오를 다진 타이니는 이틀 동안 잠시도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질주했다.
이틀 뒤.
파바바바박.
산길을 질주하는 월랑의 움직임은 이틀의 시간이 지나자 점차 나아졌다.
다만 그 위에 올라탄 기수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는데.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이를 악문 타이니는 한눈에 봐도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다. 정령이 잠시도 쉬지 않고 질주한 이틀 동안, 타이니에게는 그 충격이 조금씩 쌓여 온 것이었다.
그가 아무리 블레이더급을 초월하는 전투력을 가진 강력한 육체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말이다.
아니, 그랬기에 오히려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있었다.
전생에 블레이더급에 도달했던 당시, 그는 이삼일 정도 잠을 자지 않고 전투를 치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랬기에 당연히 현생에도 그럴 수 있다 생각했는데.
꼬르르르륵.
배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이건 유일한 단점이군.’
전생보다 육체가 훨씬 강해진 만큼 유지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저번처럼 멧돼지라도 한 마리 안 튀어나오려나?’
그런 기대감에 산속에서 움직이는 생물들을 찾기 위해 감각을 확장시킨 지는 꽤 되었지만, 아예 가던 길을 멈추고 사냥을 나서지 않는 것은 당장 허기를 달래는 것보다 황궁에 빨리 도착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순간, 섬찟한 예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타이니는 본능적으로 주변으로 확장시켰던 감각을 앞으로 모았다. 머지않아 그는 월랑의 머리 위쪽을 살짝 스치는 위치에 투명한 줄이 걸려 있는 것을 인식했다.
어두운 밤에 녹아들 듯 귀신처럼 허공에 그어진 투명한 줄. 재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 속도 그대로 질주하면 상체가 두 쪽으로 갈라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확연하게 들었다.
“흡!”
탕.
예리하게 세운 마나의 칼날에, 투명한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져 나갔다.
동시에 우지끈 소리와 함께 전방에서 좌우로 쓰러지기 시작한 나무들이 그와 월랑을 덮쳤다.
보통의 기마보다 월등히 빠른 월랑의 속도를 예측한 듯, 줄이 있던 곳에서부터 수십 미터 뒤에서 쓰러진 나무들은 그들이 질주하는 길목을 절묘하게 막아섰다.
“컹!”
월랑이 그 나무들을 피해 허공으로 도약하는 순간.
숲속 사방에서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흥!”
타다다다다당.
타이니는 그와 월랑의 전신에 철신갑을 두르는 것만으로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튕겨 냈다.
‘마나가 실리지 않았잖아?’
다소간의 충격을 각오했지만,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아 어리둥절하던 찰나.
그 짧은 틈을 타고 시커먼 무언가가 그의 눈앞에 훅 다가왔다.
‘큭!’
스각.
황급히 고개를 젖혀 피했지만, 검은 물체는 그의 오른쪽 볼에 옅은 상처를 남기고 스쳐 지나갔다.
‘단검……?’
그것의 정체가 짙은 그림자를 두른 듯 은밀하게 튀어나온 단검이라는 것을 인식한 순간,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설마!?’
그사이 지상에 발을 디디려던 월랑의 발밑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불쑥 새카만 창이 튀어나왔다.
“합!”
파아아앙!
타이니의 감각이 먼저 그것을 인식한 순간, 월랑은 반사적으로 허공을 밟으며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고.
– 아!?
그 움직임은 예상 못 한 듯, 아주 작은 탄성과 함께 검은 창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그 자리에 나타난 호리호리한 복면인.
마치 창이 사람으로 변신한 듯한 귀신 같은 인영은 이내 다시 어둠 속에 녹아들었지만, 착지한 월랑 위에 올라탄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사신!?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사신(死神).
죽음의 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전생의 10대 기사 중 한 명.
그리고 검제나 갓 핸드 이상으로 멀게 느껴지던 그의 동료이자, ‘그림자의 법’이라는 고대의 마력회로 공법을 극한까지 익힌 최강의 암살자.
출신이 출신인지라 말수가 적은 편이기도 했지만, 동료들 중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멀리했기에 사실 녀석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 뒤늦게 떠오른 사실이 하나 있었다.
‘실수했어.’
저 녀석이 사신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건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후, 제국과의 전쟁을 주장하던 왕국 연합의 마도사 게쉬타프 클레멘을 그의 안방에서 암살한 뒤의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쯤 녀석의 신분은 아마…….
“대답해라! 황실의 그림자가 왜 나를 노리지!?”
밤하늘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타이니는 빠르게 몸을 돌리며 그대로 스탬프를 휘둘렀다.
파아아아아앙.
그러자 단검으로 그의 뒷덜미를 노리며 다가왔던 인영이 그대로 허공에서 사라졌다.
“왜 네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타이니가 다시금 고함을 질렀지만, 마치 그것을 기다린 듯 바로 그의 목 앞에서 단검이 솟아났다.
‘X발!’
스각.
타이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왼쪽 볼에 상처 하나를 내어주 면서도, 사신의 복부를 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쾅!
확실한 손맛이 느껴졌지만, 득을 보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깐, 이 습격자가 정말 사신이라면…….’
불길한 예상을 증명하듯, 그 순간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젠장! 그림자 독(Shadow Poison)!!”
타이니는 황급히 염체를 운용해, 어느새 몸속에 스며들어 신경을 교란시키는 ‘그림자 마나’를 가까스로 몰아내 뱉어 냈다.
“캬악, 퉤.”
다행이라면 그 잠깐의 아찔함에 균형을 잃었는데도 이어지는 습격이 없었다는 것.
타이니는 좀 전에 충돌이 있었던 자리에 흩뿌려진 옅은 핏자국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돌렸다.
확실히 아까 새어 나온 작은 목소리도 그렇고.
‘……아직은 미숙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사신이라는 흉흉한 이명을 가진 이 옛 동료는 타이니와 고작 네 살 차이. 아마 이제야 열여덟 살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짐작을 증명하듯.
– 어떻게, 알지?
녀석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귀신 같은 울림을 가진 괴이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전생의 사신이었다면 사냥감이 무슨 말을 하건 죽이기 전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을 텐데.
타이니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다.’
자신이 여기서 죽을 수도 없고, 여기서 사신을 죽여서도 안 된다.
마족들과의 전쟁이 시작되면, 특정 상황에서는 10대 기사 중 최강의 전투력을 발휘하는 사신이 있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많을 테니까.
‘지금은 챌린저급? 아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슈페리어급 암살자……. 그래도 단순한 제압은 불가능해.’
하지만 어두운 밤하늘 아래 숲속이라는 공간에서는 사신의 독특한 전법이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투가 아닌 대화를 하고자 했다.
“그것만 알까? 네가 익힌 마력회로의 술이 그림자의 법이라는 것도 알지.”
사실이었다. 전생의 말년, 대륙 10대 기사는 절박함 속에서 결속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의 정보를 숨김없이 공유했으니까.
이제는 이 서대륙에서도 마나연공법에 밀려 사장되어 가는 마력회로의 술.
범용성 대신 특화를 선택하는 마력회로의 술 중에서도 특이하다 못해 기괴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림자의 법’을 익혔다는 것은 사신이 스스로 말해 준 사실이었다.
– 어, 어떻게? 이제는 나만 아는 것일 텐데……?!
무심하던 목소리가 이제는 확실히 떨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흔들리는 것은 좋은 신호였지만, 문제가 있었다.
‘나만……? 황실 조직에서 배운 거 아니었어?’
그림자의 법의 특성과 효용성, 거기서 파생된 기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사신보다는 그가 더 잘 알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디서 나온 수법인지는 전혀 몰랐다.
‘황실 그림자들 수장이 배우는 수법인 줄 알았는데…….’
전생에 사신이 자신의 과거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모르는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웨폰 마스터를 포섭할 때처럼 진실을 말하고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애초에 사신은 명령에 따르는 데에 익숙한 암살자 출신. 전생에 동료로 합류한 계기조차 임시 황제였던 클로이의 명령 때문이었으니까.
‘나중에 상황이 바뀐다면 모를까…….’
지금은 옛 동료 중에서도 1순위로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그걸 어찌 모를까? 나 역시 같은 수법을 조금 익혔으니까.”
거짓말로 연기를 할 수밖에.
하지만.
– 헛소리!!!
역효과였는지, 살기 가득한 고함과 함께 흐릿하게 느껴지던 기척마저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진짜 X 같은 수법이야.’
이 어둠 속에서 감각을 교란하는 수법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술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크르르.”
몇 번의 접촉 끝에 영혼의 냄새를 각인했는지, 월랑이 사라진 사신의 기척을 완벽하게 쫓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득.
‘그렇다면…….’
조금 더 연기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다면, 즉 경계 태세에 시간을 뺏기지 않는다면, 현생에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수법도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월랑의 그림자 아래로 다시 파고드는 사신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척 서 있다가.
몸 안의 마나를 일부러 부자연스러운 패턴으로 이끌며, 그에 맞춰 월랑도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크르르.”
타닥 하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일순간 3개의 환영으로 분리되는 타이니와 월랑의 모습.
그 순간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길쭉한 그림자의 창이 가운데의 환영을 통과하며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이내.
“일루전 스텝(Illusion step)!?”
날카로운 육성이 튀어나왔다.
암살자답지 않게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
심지어 이번에는 어둠 속에 숨지도 않고, 타이니의 전면에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남자만 한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 복면을 쓰고 있는 얼굴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대로 먹혔다.’
한 번도 안 써 본 기술을 즉시 실현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마나 감응력을 가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록 기술의 본래 목적과는 달리 준비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그 원형이 되는 마력회로를 새기지 않았기에 효과에 비해서 지나치게 많은 마나와 체력을 소모하는 비효율적인 수법이었지만.
적을 혼란시키려는 지금의 의도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지, 진짜?”
지나치게 당황하는 모습에 조금은 양심이 찔렸지만, 그에 대한 타이니의 대답은 태연했다.
“당연하지.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나도 너와 같은 출신이라고.”
……사실은 네가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뻔뻔스럽게 여유로운 웃음을 연기하는데.
“……머리, 염색?”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리키는 녀석의 손가락이 떨리고, 그 복면 사이에서 좀 전보다 더욱 떨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응?’
그에 오히려 어리둥절한 타이니가 자신의 머리를 만져 보았다.
“그렇긴 한데…….”
갈색으로 물들인 지도 꽤 지났으니 머리카락 뿌리에 검은색이 올라와 염색한 티가 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왜 이렇게까지 놀라지?’
그로서는 그냥 어리둥절할 뿐이었는데.
“워해머, 검은 머리, 검은 눈, 범상치 않은, 늑대……. 그래, 정령. 워해머, 휘두르는, 검은 머리, 정령 기사!”
사신의 입에서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설마 내 정보도 모르고 습격한 건가?’
대체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어 눈살을 찌푸리는데.
“광휘의 기사, 타이니……!”
“그래, 내가 바로…….”
“……타이니 모르스.”
“응?”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정말, 가문의, 후손이라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