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21
* * *
완연한 여름.
도시 중앙에 도나우 강이 흐르고 있는 빈은 무척 아름다우면서도 활기찬 도시였다.
잘 정돈된 공원에서는 알록달록한 꽃들을 볼 수 있었고, 빈의 궁정과 성당에서는 오랜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 빈은 클래식이 한창 번성했을 때 그 클래식 음악의 중심이 되었던 도시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슈트라우스······.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곳 빈에서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 나갔다.
빈의 아름다운 거리를 걷고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음악이 떠올랐고, 동시에 내가 만들고자 하는 곡의 악상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도나우 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원의 벤치에 잠시 앉아 오선지에 음표를 끄적거렸다.
4마디 정도의 짧은 주제.
그 선율을 가만히 흥얼거려보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한국을 떠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유럽에 오게 된 뒤 하루하루 이어지는 일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적응되어버렸다.
매일 5시간 정도 피아노 연습을 하고, 여러 악보들을 보고, 책을 보고, 작곡을 하고, 음악을 들으며, 틈틈이 산책을 다니는 일상.
하루의 대부분을 음악과 함께 할 수 있는 요즘이 무척 행복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공원을 혼자 한 바퀴 돌고 왔을 때, 귀여운 꼬마아이와 그 아이를 닮은(?) 여성분이 나를 맞이해줬다.
“오빠! 아이스크림 사 왔어. 자.”
“아들. 덥지? 일단 물부터 줄까?”
“넵.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마워 수연아.”
“엣헴. 별말씀을~”
나는 아이스크림과 물을 받으며 그들 사이에 앉았다.
잠시 후, 아버지께서도 아이스크림을 한 손에 들고서 우리 벤치에 합류하셨다.
우리 가족은 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도나우 강의 윤슬을 바라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 위에서 카누를 타는 사람들.
수연이가 그들을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자 이내 그들에게서 같은 행동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몸을 벤치 뒤쪽으로 한껏 젖히셨다 .
“으음~ 좋다. 햇살도 따뜻하고, 수연이는 귀엽고, 서진이는 멋지고.”
“나는?”
“큭큭. 그래. 당신도 멋지고. 엄마에겐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 이게 다 서진이 덕분이라 더 고맙고. 감사해.”
“그런데 유럽에 와서 꽤 고생하지 않으셨어요?”
“고생?”
“네. 매번 저희 식사 준비에 빨래에 청소에······. 수연이 공부까지 늘 시켜주셨잖아요. 제가 찾는 책도 서점에서 직접 사다 주시고······.”
어머니께서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내 볼을 살짝 꼬집으셨다.
“그게 다 행복이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는 걸. 그 모든 일들이 엄마에겐 얼마를 줘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었어.”
“히히. 저도요! 오빠랑 같이 있는 시간이 너~ 무 좋았어요!”
“그치?”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사실 나도 그랬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와 수연이 말에 동조를 해줬고, 아버지께서는 수연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셨다.
우리 가족은 공원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공원을 떠나기 전, 어머니께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도 몇장 찍게 됐는데 수연이가 코에 아이스크림을 묻힌 덕분에 이쁜 사진도 하나 건질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다시 ⌜Schmid⌟의 연습실에 들렀다. 그곳에서 강유한 교수님과 함께 한 번 더 협주곡을 맞춰본 뒤에 호텔로 돌아갔다.
빈 필과 내가 첫 리허설을 하게 되는 건 내일 오후 2시였다.
아침 연습을 모두 끝내더라도 조금 비게 되는 시간.
그래서 내일 오전엔 가족들과 함께, 빈에서 꼭 가보고 싶던 곳을 가보기로 했다.
다음 날 오전.
아침 피아노 연습을 마치고, 우리는 도시 외곽으로 향하는 71번 트램을 탔다.
흰색과 빨간색의 조화가 인상적인 이쁘장한 트램이었는데, 수연이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손잡이를 잡은 채 창밖을 구경하기 바빴다.
목적지엔 금방 도착했다.
트램에서 내려 큰길을 따라 걷기를 얼마간.
이내 거대한 공원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입구에서 팸플릿을 하나 챙긴 뒤, 괜스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나서 공원 안쪽까지 들어갔다.
여름 해를 받아 더욱더 푸르러진 가로수들의 안내를 받으며 길을 걸었다.
우리가 찾아온 공원은 빈의 젠트랄프리드호프(Zentralfriedhof)였다.
한국어로 바꿔말하면 중앙 묘지.
팸플릿에 나와 있는 지점에서, 나는 그곳에 있는 묘비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그 묘비에 적혀 있는 이름을 나지막이 읽어봤다.
“······ 베토벤.”
베토벤의 묘는 생각보다 단출했다.
금색 하프와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원 안에 나비가 들어있는 금색 장식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화려한 구석은 없었다.
이곳에 오는 길에 봤던 브람스나 슈트라우스의 묘처럼 조각상이 있지도 않았고, 그 규모가 크지도 않았다.
그의 마지막 음악인 ⌜불멸⌟을 연주했던 나로서는 이곳에 꼭 한번 들르고 싶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오빠. 여기.”
내 옆에 있던 수연이가 나를 콕콕 찌른다. 그러면서 어제 내가 미리 사뒀던 꽃을 내게 내민다.
나는 수연이에게 먼저 질문을 해봤다.
“수연이가 놓고 올래?”
“아냐. 이건 오빠가 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오빠가 산 꽃이기도 하잖아.”
언제나 똑 부러지는 우리 동생님.
나는 수연이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에 그 꽃을 받았다.
베토벤의 묘비 앞은 이미 많은 이들이 놓고 간 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묘비 자체는 그리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 꽃들만큼은 무척 화려했다.
나는 묘비 한켠에 꽃을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아봤다.
불과 몇 초 되지도 않는 짧은 시간.
그런데, 그사이에 누군가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어왔다.
“빨강무늬제라늄. 멋진 꽃을 골라왔구나······.”
미국식 영어 억양이 잔뜩 묻어나오는 독일어.
나는 눈을 스르르 뜬 뒤에 고개를 돌려봤다.
그곳엔, 한 노년의 여성분이 인자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늘빛에 가까운 푸른 눈으로······.
지그시 나를 바라본다.
“혹시 이 꽃의 꽃말을 아니?”
“그······.”
조금 당황하는 바람에 바로 대답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내 말을 차분히 기다려주셨다.
“······ 위안이죠.”
“맞아. 잘 알고 있네. 위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바라고 있는 만큼 베토벤도 분명 위안을 찾았을 거야. 너 같은 아이가 있으니 더더욱 그렇게 됐겠지.”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래. 그런데 저분들은 가족들이니? 그럼 이쪽은 동생이려나?”
“네. 맞아요.”
그녀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고, 수연이를 보며 깊게 미소 지었다.
“오빠 손을 꼭 잡고 있네. 사이가 좋은가보구나. 아! 그런데 내 말을 못 알아들으려나?”
“제가 통역해드릴게요. 제 동생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그냥······. 대단한 건 아니고. 남매 사이가 좋아 보여서 그랬어. 보기 좋네. 무척.”
한쪽 무릎을 꿇으며 수연이와 눈을 마주치는 분.
그사이에 내가 수연이에게 통역을 해주자 수연이는 활짝 웃으며 배꼽 인사를 했다.
“히히. 감사합니다. 사실 저희 한 씨 남매가 사이가 좋긴 해요!”
“그래. 오빠는 잘 해주고?”
“세상에서 제~ 일 저한테 잘해줘요. 최고의 오빠예요!”
“그렇구나. 그 대신, 너도 오빠한테 언제나 잘 해줘야 한단다. 고마운 일이 있으면 고맙다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세상에 당연한 건 없으니까. 알겠지?”
“네!”
“그래. 착하네.”
나는 중간에서 통역사 역할을 하게 됐다.
그녀는 우리에게 빈 중앙 묘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셨다.
보러 가면 좋을 만한 장소나 여러 음악가들의 묘지에 대해서.
그리고.
“멋진 음악이었단다. 그 누구보다도 깊은 내면을 가지고서 그것을 표현해내는 방식이 정말 놀라웠지. 누군가가 저절로 생각날 만큼······. 그러니 앞으로도 늘 건강하게 연주 활동을 이어 나갔으면 좋겠다. 마음으로나마 항상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으마.”
“······ 제가 연주자인 걸 알고 계셨나 보네요?”
“음악의 도시 빈에서 퀸 엘리자베스 우승자를 몰라보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니겠니?”
“······.”
“그렇지?”
“······.”
나는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는 선생님도 혹시 연주자이신가요? 말씀해 주시는 내용들이 모두 음악가가 직접 설명해주시는 것처럼 느껴져서요.”
선생님께서는 다시 한번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셨다.
“그랬었지. 지금은 아니지만.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네. 그럼 빈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라마. 그리고 언제나 뜻하는 연주를 하려무나. 언뜻 보기에 어려운 길 같아도 사실은 그게 정답이니.”
“······.”
베토벤 묘지 앞에서 만난 의문의 선생님은 우리 가족과 내게 가벼이 인사를 해주시곤 금방 걸음을 옮기셨다.
양옆에 가로수가 쭈욱 뻗어 있는 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분.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녀가 간 길과 정반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수연이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장난스러운 티격거림을 지켜보며.
조금 전에 봤던 그 인상적인 푸른 눈동자를 몇 번이나 다시 떠올려봤다.
하늘빛에 가까운 푸른 눈.
그 눈동자는 내게 무척 특별한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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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빈 중앙묘지.
이번에 미국으로 가게 되면, 다시는 빈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잠깐 시간을 내서 이곳에 들렀던 거였다.
중앙묘지에 있는 음악가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
빈에서 지냈던 10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 소년을 만나게 됐다.
드문드문 동생의 음색이 묻어나오는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
마크의 음색은 결코 흔한 게 아니었기에 소피아는 그의 연주를 처음 듣자마자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혹시 마크에게 제자가 있었던 건가?
아니면 마크에게 음악을 배운 사람이라도 있었나?
그런 생각도 잠시.
마크의 사고는 12년 전이었고, 소년의 나이는 14살이었기에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저 우연의 일치.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무심히 지나치려고 했다.
그 아이의 연주를 일부러 들어볼 필요는 없었다.
베토벤의 묘지 앞에서 그 아이를 보긴 했지만, 그냥 지나가면 그만이었다.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게 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아이는 빨강무늬제라늄을 베토벤의 묘지에 놓았다.
위안의 꽃말을 가진 꽃.
그 꽃말의 깊은 뜻은······.
‘쓸쓸한 사람이나 슬픈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서든 위로해 주고 싶어 하는 당신 자신도 사실 쓸쓸해 하는 사람이군요.’
소피아는 그 소년의 곁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순수해 보였다.
그 어떤 예술가보다 맑아 보였고, 그 어떤 예술가보다 깊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정말로······.
동생을 다시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년에겐 여동생이 있었다.
보고 있다 보면 미소가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다정한 남매.
자상해 보이는 부모님도 함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소피아에겐 일종의 ‘거울’처럼 다가왔다.
과거의 어느 날, 어린 마크의 손을 잡고 공원을 거닐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래서 소피아는 서둘러 베토벤 묘지를 떠나야만 했다.
‘이만큼 나이가 들었는데도······.’
‘내 마음은 여전하구나······.’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상실의 바늘은 무뎌지기는커녕 더욱더 날카롭게 벼려져 심장을 찔러왔다.
소피아는 중앙묘지에 있는 비석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공원의 꽤 구석진 곳.
그곳엔 소피아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가 쓰여있는 묘비가 있었다.
Wiedersehen.
‘다시 만나자’는 뜻.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의 흐름은 결국 재회를 약속해줄 것이다.
소피아는 그 비석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몇 번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브뤼셀에서 소년이 연주한 ⌜불멸⌟ 영상을 재생시켰다.
빈 공동묘지에 은은히 울려 퍼지는 베토벤의 음악.
소피아는 우두커니 선 채, 숨죽여 그 아이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소년의 연주가 전부 끝날 때까지.
피아노의 잔향이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소피아는 그렇게 있었다.
* *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거점은 무지크페라인이다.
1870년 1월 6일에 문을 연 콘서트홀.
덴마크의 건축가 테오필 한센이 설계한 이 콘서트홀은 마치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했다.
나는 콘서트홀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빈 필의 지휘자님과 첫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아스킨 지휘자님,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한서진이라고합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그리고 빈 필을 선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아니스트님.”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미는 아스킨 지휘자님.
나는 그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본 리허설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15분 정도 간략하게 협주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협주의 방향성과 하모니에 대한 이야기.
오고 가는 대화라기보다는 주로 내 의견을 말하게 됐다.
“그러면 이만 무대로 나가볼까요. 말보다는 연주로 음악을 조율하는 게 훨씬 쉬울 테니까요.”
“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스킨 지휘자님께서 스코어와 지휘봉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대기실에서 무대로 향하는 문을 먼저 열어주신다.
문이 열리는 달칵거리는 작은 소리가 났을 뿐인데도 빈 필의 오케스트라 단원분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시대의 빈 필을 유일무이한 최정상 오케스트라 수준까지 끌어 올려놓으셨다는 평가를 받는 마에스트로.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지휘자.
그 뜻에 기꺼이 동조하는 60여명의 오케스트라는 지휘자를 향해 존경을 표시했다.
호벤 악장님께서는 몇 걸음 앞으로 나와 내게 인사를 해주셨다.
악장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모든 오케스트라 단원분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부터 드렸다.
아스킨 지휘자님은 곧바로 지휘대로 올라가셨고, 호벤 악장님은 자리에 돌아가 목관 악기가 있는 방향으로 신호를 주셨으며, 오케스트라는 오보에의 A 음에 맞춰 일제히 조율을 시작했다.
나는 피아노 앞에 자리를 잡은 뒤, 그들처럼 피아노 조율 상태를 확인했다.
이곳 연주자들에게 미사여구 같은 건 필요 없었다.
하물며 하나 같이 스케줄도 바쁜 연주자들이다.
빈 필이 내게 제시한 총 6시간의 리허설은 그 시간을 여유롭게 쓰라는 의미가 아니라, 더 완벽한 연주를 만들어보자는 약속과도 같은 거였다.
아스킨 지휘자님께서 지휘봉을 들며 나를 바라보신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휘자님의 지휘봉이 허공을 일순간 가로지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현 5부가 등장하며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을 일깨워낸다.
도입부부터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주를 이어 나가야 하는 피아노.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첼로 파트가 있는 곳을 잠시 바라봐야만 했고, 지휘자님의 지시가 나온 뒤에야 화음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웅장하게 느껴지는 오케스트라의 선율.
빈 필의 연주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협연자의 영혼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나는 그에 맞춰······.
더욱더 강렬하게 건반을 타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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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반가량의 협주가 끝난 뒤.
객석에 앉아 있던 콘서트홀 관계자가 무대 위로 올라와 휴식 시간을 알렸다.
“15분 뒤에 계속해서 리허설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5분 휴식입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잠깐의 휴식 시간을 이용해 로비로 나가 바람을 쐬려는 단원들.
하지만 그들 중 절반 정도는 무대에 남아있었다.
“이야. 대단하네. 저 아이, 우리 연주에 따라오는 거 봤어?”
“따라오는 정도야? 두 번째 협주부터는 먼저 주도를 하더만. 마에스트로가 그렇게 웃는 것도 처음 봤다니까.”
“나는 소름이 다 돋았어. 저 아이, 이제 14살이라며? 어디 쟁쟁한 거장 연주자들도 빈 필 앞에서는 조금씩 위축되기 마련인데. 기도 안 죽네.”
“그래도 조금 아이다운 면은 있었어. 첫 번째 협연 도입부에서······.”
비올라 수석의 말을 제2바이올린 수석이 대신 이어간다.
“아~ 살짝 늦긴 했었나?”
“맞아.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이긴 했지만. 실수는 실수였지.”
“그런데 처음 맞춰보는 협연에서 이 정도면 훌륭한 거 아냐? 그걸 아이답다고 하는 건 너무 야속하잖아.”
이번엔 첼로 수석이 그의 말을 받는다.
“그건 그렇지. 그 부분을 제외하면 완벽했으니까.”
“아무래도 첫 협주라 조금 긴장했던 걸지도 모르겠어. 오히려 아이다운 것 같아서 보기 좋기도 했고.”
“그런데 금방 연주에 몰입했었지?”
“맞아. 눈빛이 달라지더라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차이콥스키였어. 서늘한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말이야.”
“하하하. 그래. 그 말이 딱 맞구만.”
조금 전 협주에 대해 간단히 의견을 주고받는 이들.
15분은 금방 흘러갔고, 로비에 나갔던 단원들과 지휘자와 협연자 모두 무대로 돌아왔다.
아스킨 지휘자는 각 수석들을 지휘대 근처로 불러 모았다.
피아노가 놓여있는 그 자리에서 열 명 정도의 수석들에게 연주 방향을 다시 한번 짚어준다.
빈 필이 새로운 협주곡 레파토리에 들어갈 때마다 하는 일.
아스킨 지휘자는 제일 마지막에 피아니스트에게 의견을 물었다.
혹시 더 추가해야 할 사항이나 요구사항이 있는지.
지휘자와 수석 연주자들 사이의 소통을 협연자와 공유해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었다.
소년 피아니스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고칠 부분은 없는 것 같아요.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완벽한 오케스트라였거든요. 제 협주를 오랜 시간 준비해주신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제 생각엔 이 상태로 하모니만 조금 더 가다듬으면 될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다행히 협연자님과 제 생각이 통했네요. 이대로 협주만 잘 맞춰보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다른 또 한 가지는······.”
아스킨 지휘자는 수석들의 얼굴을 슬쩍 보다가 혼자서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저희 빈 필에서 어떤 눈치를 볼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나이가 어린 만큼, 이런 경험도 피아니스트님께 꼭 필요할 거라 생각합니다.”
지휘자를 바라보는 소년.
아스킨은 소년 피아니스트에게 틀린 부분을 지적해줬다.
첫 번째 협주의 도입부에서 나왔던 미세한 박자 실수.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귀가 정확한 아스킨 지휘자가 그걸 놓칠 일은 없었다.
“만약 필요하다면 조금 빠른 타이밍에 지휘를 해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없는 부분이 있다면, 지휘자에게 솔직히 말해보는 것도 일종의 실력이거든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피아니스트님.”
소년의 작은 실수.
그냥 넘어가거나 따로 불러서 이야기해도 되는 부분이었지만, 지휘자는 수석들이 보는 앞에서 소년의 실수를 이야기했다.
앞으로 연주자 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이러한 일들이 많을 것이기에, 소년이 이러한 일 또한 쉽게 이겨나갈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아스킨 지휘자를 포함한 빈 필의 수석들이 소년을 바라본다.
소년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잠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안 됐는데 잠깐 딴생각을 하다가 실수를 하고 말았네요. 아스킨 지휘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부분에서 반 박자 빠르게 지휘를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도움을 구할 줄 아는 소년.
아스킨 지휘자는 소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런데 딴생각이 들었다고요? 협주곡이 막 시작된 그 순간에요?”
“아······. 네. 이걸 말씀드려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조금 주저하는듯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제가 지금까지 들어 왔던 빈 필의 소리가 아닌듯해서요. 그래서 잠깐 주저하게 되더라고요.”
“······ 지금까지 들어왔던 빈 필의 소리가 아니라고요?”
“네. 현 5부가 조금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아! 물론, 오케스트라 연주가 잘 못 됐다거나 그런 뜻은 아니고요······!”
소년의 말을 들은 아스킨 지휘자는 일순간 눈을 빛냈다.
수석 단원들도 소년을 가만히 지켜봤다.
“허허. 비어있는 소리라······. 조금 더 정확히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네?”
“그래야 빈 필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을 테니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피아니스트님.”
“······.”
빈 필의 지휘자가 14살의 소년에게 극존칭을 사용한다.
독일어 뉘앙스에서 잔뜩 묻어나오는 존경의 말투.
소년은 조금 당황하나 싶더니, 숨을 크게 한 번 쉬고 나서 지휘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첼로. 빈 필의 중심을 잡는 하나의 소리가 빠진 것 같았어요. 제가 늘 들어오던 빈 필의 연주에서 묻어나오던 따뜻한 소리가 오늘은 들려오지 않았어요.”
“······ 첼로요?”
“네. 그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바람에 당황해서 실수를 하게 됐죠. 오케스트라 입장에서는 작은 소리일지 몰라도 제게는 크게 들렸던 소리가 있었거든요. 분명 첼로의 소리가 비었어요.”
“······.”
“······.”
“······.”
“······.”
일순간 찾아온 정적.
수석들과 지휘자뿐만 아니라 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소년의 말을 듣게 됐다.
소년은 갑자기 고요해진 무대를 두리번거렸고, 아스킨 지휘자는 소년을 향해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빈 필의 음악을 올바르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군요.”
“네? 그게 무슨······.”
“감사합니다. 한서진 피아니스트님.”
“······.”
오늘 이 자리에 없는 단원의 존재를 눈치채주는 협연자.
빈 필의 지휘자는 그런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