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09
108. 태산의 보복 >
새 의상으로 갈아입고 촬영장에 돌아갔지만, 그날은 결국 촬영을 하지 못했다. 이세하의 발목이 부어올라 병원에 가야 했다. 넘어지면서 꺾였던 발목 상태가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아직은 초반이지만, 장소 섭외가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촬영 일정이 연이어 꼬일 수 있었다. 배우가 다친 상황이라 화도 못 내는 스태프들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귀신이 나왔다며 대박 날 거라고 좋아하던 게 언제였는지 다들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오늘 이세하와의 씬을 빼면 이후의 승마클럽 촬영은 그만둔 조연 배역이 찬 후에야 있었다. 아마 오늘 씬은 그때로 미루게 될 것 같았다. 간단한 씬이니 태주는 상관없었지만, 섭외부터 세팅까지 제작진은 할 일이 늘어버렸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일정은 조연 배우가 섭외되면 다시 잡기로 했습니다.”
“네, 가요.”
“허허허.”
“누나?”
미나의 눈에서 레이저가 쏘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띄는 무엇이든 바로 절단 날 것처럼 보였다. 미나는 이세하든 이세하 스태프든 한 명만 걸리라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흉흉한 기세를 느낀 태주와 견우는 바로 장소를 벗어나기로 했다. 늦장 부리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끝없이 반복되는 잔소리 폭탄을 맞을지도 몰랐다.
*
이세하는 촬영장 한쪽에 마련된 자리에서 폰을 보고 있었다. 날씨가 선선하니 가볍게 걸칠 걸 하나 사려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있다면 직접 샵에 가서 고르겠지만, 요샌 여유가 없었다.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촬영을 며칠이나 뒤로 미뤘다. 이 이상 촬영 일정을 바꾸는 것은 무리였다.
“가을이 너무 짧아졌어. 가을 패션은 무슨.”
“냐앙.”
“야. 저리 가. 안 그래도 T사 신상 제일 앞에 애완견 카디건이 있어서 짜증 나는데.”
“냐아앙.”
“쉭쉭. 저리 가.”
이세하는 제 주인한테 가지 않고 자신의 발치에서 시끄럽게 우는 고양이 때문에 짜증 났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정을 지연시켜서 눈치가 보였다. 성질을 죽일 필요까진 없지만, 며칠은 얌전히 있어야 했다.
“냐아앙.”
태산은 자신에게 가라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이세하를 올려다보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바로 일어나 그녀의 무릎을 짚고 섰다.
무릎을 털어 고양이를 떨어뜨리려던 그녀의 시선이 태산의 푸른 눈동자에 머물렀다. 사파이어처럼 짙푸른 눈동자가 장난기로 반짝거렸다.
“아아. 왜 이리 귀여운 거야. 무슨 고양이가….”
그녀는 얄미운 태주의 고양이를 떨치지 못하고 잠시 바라봤다. 고양이는 곧 자기 주인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도 원래 하려던 일을 계속했다. 결재승인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렸다.
태주는 틈만 나면 이세하가 쉬는 곳으로 가서 귀염을 떨고 오는 태산이 못마땅했다. 성질 나쁜 배우 곁에 있다가, 험한 꼴을 보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인지. 며칠째 계속 이어지는 태산이 행동을 어떻게 멈추게 할지 걱정이었다.
“얼레? 이세하 여기로 온다.”
“네? 진짜네요.”
“네 근처로는 한 걸음도 안 오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데?”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긴 이세하가 터벅터벅 태주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손에는 쇼핑백을 든 채였다. 그녀는 태주 발치에 앉아서 깃털 장난감을 잡고 깨물어보는 태산이를 보고 인상을 썼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녀가 앉아있는 태주에게 쇼핑백을 휙 던져줬다. 태주는 난데없이 던져진 쇼핑백을 받아들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느닷없이 쇼핑백을 제게 던진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이세하와 눈을 맞추고 이 쇼핑 백에 무슨 뜻이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태주와 눈을 맞추는 걸 피했다.
“왜?”
“이걸 왜 저한테?”
“야. 아무리 애완동물이라도 그렇지. 가을인데 카디건 정돈 입혀야 하는 거 아니야?”
“네?”
“아, 몰라. 샀으니까 그냥 입혀.”
한겨울에는 패딩 같은 방한을 위한 옷을 입히지만, 요즘 같은 계절엔 상관없었다. 호랑이는 원래 털이 빽빽하게 나는 편이라서 추위도 많이 안 탄다. 게다가 날이 너무 덥거나 추우면 마법이 걸린 물품을 채워주기 때문에 괜찮았다.
이세하는 제 말만 툭 던지고 자리로 돌아갔다. 자기도 왜 이러는지 모르는 것 같은 말투와 행동이었다. 쇼핑백을 들고 멀어지는 그녀를 보는 태주와 그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미나 모두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그, 일단은 준 거니까. 열어는 보자.”
“그, 그럴까요?”
좀 전의 일이 황당한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선물인 것 같으니 열어보는 게 맞았다. 쇼핑백 안에는 회색의 니트 카디건이 들어있었다. 특유의 삼색 줄이 눈에 띄는 카디건이었다.
“이거 T 브랜드에서 나오는 강아지 옷 아니야?”
“어. 맞아요. 저 이거 본 적 있어요.”
“헐. 이세하가 이걸 왜 태산이를 사주는 거야?”
“모르겠어요. 왜 그럴까요?”
태주는 어느새 그의 무릎에 올라와 같이 카디건을 보고 있는 태산이를 돌아봤다. 이세하한테 매일 놀러 가더니 사이가 좋아진 것 같았다. 선물을 줄 정도니 해코지를 당할 것 같진 않았다. 이제 그쪽으로 놀러 가도 안심이었다.
“저번에 고양이 관리하라며 따지러 오길래, 고양이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그러게. 신기하네.”
“후후후. 역시 우리 태산이. 이 녀석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휴. 팔불출. 카디건이나 이리 줘봐. 입혀보자.”
태주와 미나가 태산이에게 회색의 카디건을 입히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멀리서 이세하가 지켜봤다. 그녀는 대체 자신이 왜 저 카디건을 산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회색 카디건을 입은 고양이가 발랄한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조금 뿌듯했다.
*
촬영 중간에 조명 장비 하나가 망가져 버렸다. 대신할 장비를 가져오고 다시 세팅하는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렀다. 촬영장에선 흔한 일이었지만, 대비하지 못한 일 때문에 촬영이 늦어졌다. 덕분에 저녁을 먹은 후로 시간이 꽤 지날 때까지도 촬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꼬르륵.
“냥.”
“아이고. 민망해라. 태산이가 들었구나. 누나가 배가 고파서 그래.”
“냐앙.”
태주는 촬영 속도가 빨랐다. 특히 단독 씬은 다른 사람보다 배는 빠르게 촬영을 해치웠다. 정말로 해치웠다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문제없이 촬영했다. 덕분에 미나는 남들 보다 배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간식을 챙길 시간도 없었다.
– 꼬륵.
“집에 가는 길에 야식이라도 먹자 해야겠네.”
– 톡.
“헐. 태산이 이거 지금 누나 주는 거야?”
“냥.”
“고, 고, 고마워. 하지만 이건 태산이 먹자.”
가방에서 어떻게 꺼냈는지, 태산이 미나에게 짜 먹는 간식을 건넸다. 좋아하는 간식을 자신에게 양보한 마음은 고마웠지만, 그것을 먹었다가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질 판이었다.
“자. 태산이 먹자.”
“냥.”
미나가 한쪽 끝을 잘라서 입가에 대주자 태산이 바로 먹기 시작했다. 태산이 정말 좋아하는 간식이라, 태주가 빼놓지 않고 챙기는 것이었다. 이걸 자신에게 양보하려 하다니, 마음 쓰는 것도 하는 짓도 너무 예뻤다.
“세상에 태산이 같은 사람만 있으면 좋겠다. 그 치?”
“냐앙.”
“아, 이쁘다. 이뻐. 우리 태산이가 제일 이뻐.”
미나가 태산이 준 간식을 돌려주었다. 태산은 자신을 예뻐하는 미나가 배고픈 게 신경 쓰였다. 자신도 가끔 놀다가 밥 먹는 것을 잊으면 배가 고파서 힘들었다.
태산은 미나에게 줄 사냥감을 찾아봤지만, 현실은 정원과 달랐다. 정원에선 조금만 움직이면 태주가 좋아하는 시큼한 것들을 구하기 쉬웠다. 하지만 여기는 그런 게 없었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태산의 눈에 먹잇감이 보였다.
시끄러운 여자. 태산이 최근에 골려주는 상대였다. 태산은 그녀를 발견하고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항상 들고 다니는 작은 네모난 것을 오늘도 쥐고 있었다. 태산은 그걸로 좋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헉. 야. 저리 가. 쉭쉭.”
“냐앙.”
“저리 가라. 저리 가.”
“냐아앙.”
꺼리는 느낌이 전보다 적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방문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미나가 배고팠고, 미나가 배고프면 태주도 배고팠다. 그리고 시끄러운 여자는 이미 골려주기로 다짐했었다.
“냐앙.”
“아아. 웬 고양이가. 이리 귀여운 거야.”
“냐앙.”
“아아.”
미나는 좀 전까지 근처에 있던 태산이 어느새 이세하에게 가서 살갑게 구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 태산이는 틈만 나면 저쪽으로 가서 귀여운 짓을 했다. 워낙 애교가 많은 아이라, 누구한테라도 귀여움받을 수 있을 테지만 조금 서운했다.
“냐앙.”
“태산이 왜 자꾸 저쪽에 가는 거야. 누나 서운하게.”
“냥.”
“호호호. 태주 말대로 정말 대답하는 건 네가 최고다.”
다시 돌아온 태산이와 촬영이 끝나길 기다리는 도중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소음이 촬영장에 가득 울리기 시작했다. 피곤하고 배고픈 사람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찰나였다. 고소한 침샘을 자극하는 냄새가 촬영장을 가득 채웠다.
– 부우우웅.
– 부릉부릉.
“뭐야? 무슨 배달 오토바이가 이렇게 몰려왔어?”
“치킨이 가게별로 다 왔는데.”
촬영장에 있던 사람들은 소음의 정체를 확인하고 다들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이렇게 여러 군데서 치킨을 배달시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제작사였다. 촬영이 길어지니 야식으로 먹으라고 제작사 직원이 시킨 것일 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일제히 제작사 직원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 제작사 직원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그 다음으로 쳐다본 것은 감독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누구보다 황당한 얼굴이었다. 그 옆에 있던 조감독도 마찬가지였다.
“xx치킨이요.”
“치킨 배달왔습니다.”
“XXX 두 마리 시키신 분?”
“혹시 주문한 사람 이름을 알 수 있습니까?”
잰걸음으로 배달 오토바이에 다가간 조감독이 주문자를 물었다. 배달을 온 사람들이 익숙하게 확인을 하더니, 모두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이세하씨요.”
“이세하님이요.”
“이세하씬데요.”
촬영장에 있던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한 곳으로 움직이는 것은 신기하면서도 무서운 일이었다. 태주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세하를 쳐다봤다.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자신의 폰 화면을 부릅뜬 눈으로 보느라 바빴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주문 금액: 380,000원 일시불.]비슷한 승인 문자가 여러 개 와 있었다. 여러 곳에서 총 100마리의 치킨을 주문한 결과를 알리는 문자가 연이어 들어와 있었다. 이세하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이런 짓을 왜 했는지 자기 머리를 열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세하 씨? 이거 어떻게 할까요?”
“같, 같이 드세요.”
“와아!”
“잘 먹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촬영장 안에 환호성이 울렸다. 지금 이 순간만은 촬영 일정을 며칠이나 늦춘 밉상 이세하가 아니라, 스태프들의 배고픈 위장을 달래줄 은인 이세하였다.
현장의 스태프, 배우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감독의 입을 바라봤다. 배달 오토바이의 등장으로 촬영이 멈췄지만, 엄밀히 말해서 NG가 난 상태일 뿐 휴식 시간이 아니었다. 그의 허락을 받아야 치킨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감독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세하 씨, 잘 먹을게요!”
감독이 이세하에게 잘 먹겠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 말을 신호로 사람들이 감사인사를 하며 각자 선호하는 프랜차이즈의 치킨을 받아갔다. 미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주 몫으로 프라이드치킨을 자기 몫으론 매운맛 치킨 등을 받아왔다.
“매니저님 이세하 씨 이상하지 않아요?”
“예?”
“이럴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확실히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출출한 시각에 치킨은 무척 반가웠다. 태주 역시 세트에서 벗어나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 역시 지금 상황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분명 스태프와 기자에게 무례하게 굴다가 사라진 연예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생각했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어서 와. 네 것도 받아놨어.”
“감사인사 하기엔 저쪽에 사람이 너무 몰렸네요. 먹고 나서 인사해야겠다.”
“그러네. 잘 먹었다고 인사하는 게 낫겠다.”
미나, 견우와 모여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서 치킨을 먹을 때였다. 이세하가 태주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왔다. 그녀는 쭈뼛쭈뼛 걸어와 태주 앞에 상자 하나를 던지듯 툭 내려놨다.
“올리브유로 튀긴 순살 치킨이래. 사람 입만 입이니? 고양이도 좀 주고 그래.”
“네? 네. 그럴게요. 잘 먹을게요, 선배.”
“그, 그래. 혼자 먹지 말고. 고양이 꼭 주고.”
“네.”
이세하는 왜 갑자기 고양이한테 먹을 걸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맛있게 치킨을 먹는데 고양이 혼자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메뉴 중에 그나마 고양이가 먹어도 괜찮아 보이는 순한 맛의 순살 치킨을 찾아서 가져다주었다.
‘흐, 흐흠. 잘 먹네.’
태주가 잘게 찢은 치킨의 기름기를 제거해서 먹이는 게 보였다. 고양이가 제 주인이 한 조각씩 떼어주는 치킨을 잘 받아먹는 게 눈에 들어왔다. 조그만 녀석이 잘 먹는 걸 보니 꽤 흐뭇했다.
먹이를 먹는 미나의 기분이 좋으니 태산이 기분도 좋았다.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태주가 먹이를 나눠주는 것이었다. 태주는 자신이 잘 먹으면 기뻐했다. 지금도 자신이 잘 먹으니 아주 좋아했다. 태산은 이번 사냥을 매우 만족스러웠다 자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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