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25
124. 차기작 고르기 >
태산이는 며칠 동안 계속 아칸서스 가족이 이 층에 머물자, 그대로 계속 정원에서 같이 살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태산이 바람과는 다르게 해나와 희가 모아 놓은 드라마, 영화 등을 모두 본 후에 아칸서스는 미련 없이 정원을 떠나 버렸다. 시끌벅적한 걸 즐기는 그가 지내기에는 정원은 너무 조용했다.
아칸서스 가족이 돌아간 후, 태산은 틈만 나면 이 층에 올라가서 모린을 찾았다. 그런 녀석이 안쓰러워 맛있는 간식도 꺼내 주고 좋아하는 끈도 꺼내 줬지만 소용없었다. 태산의 우울함이 나아지지 않았다. 모린이 돌아간 일이 꽤 충격인 것 같았다.
“착하지. 다음에 형이 연락해서, 모린이 또 데려오라고 할게.”
“냐앙.”
“오늘은 말고. 어제 갔잖아. 며칠 지난 다음에.”
“냥.”
기운 없이 구석에 웅크린 녀석이 안쓰러워서 다음에 다시 모린을 초대하자고 달랬다. 모린 이름만 들어도 반가운지 고개가 번쩍 들렸었다. 기대하는 얼굴에 차마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며칠 뒤에 부른다고 하자, 다시 ‘나 우울해요.’를 시전 했다.
사실 한가로운 정원에서 태산이가 기운 차릴 만한 일은 별로 없었다. 특히 태주는 태산이가 최근 뭐에 흥미가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최근 그의 모든 관심은 폭포와 개천 주변을 꾸미는 데 쏠려 있었다. 다양한 색과 향기를 가진 온갖 화초를 배치하고 심기 바빴다.
‘한동안 땅파기에 심취해 있더니. 요샌 그것도 시들하고. 그렘린하고 몰려다니면서 장난치는 일도 적고.’
“우리 태산이가 뭐가 하고 싶을까? 응? 형이 뭐 하고 놀아 줄까?”
“냐앙.”
“아이. 이걸 어쩌나.”
그는 터벅터벅 다가와 안기는 태산이를 어쩔 줄 몰라 하며 품에 안았다. 그의 어깨에 턱을 괴고 온몸의 힘을 뺀 채 늘어진 태산이 등을 토닥였다. 현실에서 한참 기세 좋게 보디가드 임무를 하던 녀석이 축 처진 걸 보는 그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별똥별 껍질 묻으러 갈까?”
“냐앙.”
“그럼 생쥐 인형 잡기 할까?”
“냐앙.”
태산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자고 달래 봐도 소용없었다. 사실 그는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정원을 꾸민 조경수들의 가지치기와 모양내기가 그것이었다. 며칠 동안 폭포에만 신경을 썼더니, 그사이 삐쭉삐쭉 보기 흉하게 나뭇가지들이 튀어나왔다.
“정원사 씨 오늘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조경수 모양내기를 좀 하려 했는데.”
“어디? 미로주위?”
“네. 폭포에만 신경 쓰다 보니, 가지치기할 시간이 좀 지났어요.”
“흐응.”
태주가 정원 일 중 어려워하는 것 중 한 가지가 조경수 모양내기였다. 처음 가위를 들고 웃자란 나뭇가지를 쳐주거나 죽은 가지를 잘라낼 때는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어려워했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예쁘게 모양내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해외 유명 정원, 아니 한국의 잘 꾸며진 집 정원에도 동글동글하게 혹은 뾰족하게 모양을 살린 조경수들이 있었다. 태주도 조금만 재주가 늘면 그렇게 모양을 내 볼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저 나무가 다른 나무를 가리지 않거나, 죽은 가지를 자르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가지치기만 할 거야?”
“그래야죠. 아직 모양내기를 하려면 좀 더 키워야 할 것 같아요.”
“호호호. 그건 그래. 저번 같은 참사가 벌어지지 않으려면 큰 나무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지.”
“윽. 해나.”
사실 태주가 정원수 모양내기를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도넛 모양의 링을 제일 아래에 만들고 그 위로 점점 작아지는 둥근 공 모양을 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결과는 해나가 놀리는 것처럼 나무가 너무 작아져, 온갖 영양제와 성장 촉진제를 써서 회복시켜야 했다.
“냐아앙.”
“응. 알았어.”
태산이 해나와 얘기하느라 등을 쓰다듬던 손이 멎자, 울음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던 해나가 혀를 차고 돌아섰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태산이를 안고 쩔쩔매는 정원사나 푹 안겨서 정원사의 손길을 만끽하는 펫이나 그녀에겐 이미 익숙했다.
아무리 봐도 정원사가 자신만 신경 써 주는 게 좋아서 더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정원사는 귀여운 거짓말쟁이에게 또 속은 것 같았지만, 아마 그래도 좋다고 할 게 뻔했다.
저러다 태산이 곧 다른 것에 흥미가 생겨서 정원사를 두고 놀러 가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얄미운 녀석이라고 툴툴거리면서 밀린 정원 일을 하러 갈 것이다.
혀를 차면서 돌아선 해나였지만,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도 펫을 대하는 게 어설픈 정원사와 주인이 좋아서 얌체 짓을 하는 펫은 여전히 흐뭇하고 보기 좋았다.
그러니 정원사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있는 태산이 표정이 애처로운 울음소리와 다르게 매우 만족스럽다는 것은 알리지 않기로 했다. 정원사가 조금 속는 거로 이런 광경을 계속 볼 수 있다면, 귀여운 거짓말쟁이를 도와주는 게 나아 보였다.
*
이레귤러가 할리우드로 벌써 가 버렸는지 아니면 아직 한국에 남아 있는지 몰랐다. 태주는 경계는 하되 우선 본업에 충실했다. 이레귤러를 경계하느라 자기 일에 소홀해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촬영에 몰두하자, 어느덧 새해를 하루 앞둔 날이 되었다.
각 방송국에서 연기, 연예, 가요 등 각 분야의 시상식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태주와는 관계없었다. 더 노블레스의 마지막 촬영 일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노블레스의 성적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회차가 쌓일수록 고정 팬도 늘어났고, 다른 드라마에 실망한 사람들의 유입도 늘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촬영에 다들 지친 모습이었지만, 출연진, 연출진 할 것 없이 기대보다 훨씬 좋은 성적에 싱글벙글하고 다녔다.
그런 사람들과 다르게 마지막 촬영을 앞둔 태주는 고민에 쌓여 있었다. 더 노블레스를 찍는 중간중간 그에게 들어오는 대본들을 확인 했지만, 마땅한 대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본이 마음에 들면 감독이 이상한 사람이었다. 또는 감독은 괜찮았는데 대본이 망작의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너무 급하게 찾느라 그래.’
신조선 사또전이 밀리면서 틀어진 스케줄이 많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시기는 더 노블레스를 촬영하지 않고, 휴식기를 가지면서 예능이나 화보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쉬면서 차기작을 찾고, 촬영 전 사전 미팅을 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일정이 틀어지며 눈 앞에 생기는 일들을 하는 사이, 그가 눈여겨본 내년 상반기의 괜찮은 작품과 배역은 모두 주인을 찾았다.
“이태주 배우님 촬영 시작할게요.”
“네. 갑니다.”
차기작 선택에 난항을 겪는 것과 별개로 더 노블레스의 촬영이 끝나는 것은 반가웠다. 빡빡한 스케줄도 스케줄이었지만, 그보다는 피하고 싶은 인물이 있어서였다. 지금도 촬영장 한쪽에서 자신을 뜨거운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 이세하였다.
태주는 이세하에게 태산이 옷과 사칭남 퇴치의 보답으로 정원에서 만든 피부 크림을 선물했다. 선물한 크림이 그가 직접 만든 것으로 평소 자주 사용하는 물품이라는 것을 설명하자, 그녀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뻐했다.
상급 허브를 골라 만든 크림은 확실히 효과가 좋았다. 현실의 고가의 기능성 화장품보다도 샵에서 관리받는 것보다도 효과가 좋았다. 그 크림을 몇 번 써본 후부터 그녀는 태주를 매일 쫓아다녔다. 판매하는 물품이 아니라 태주의 수제작품이라는 것을 안 후로 친해지자는 눈빛을 마구 보냈다.
‘안 돼. 이세하 선배는 위험인물이야. 선배랑 친해지면 흑역사만 생길 거야.’
이세하와 태주는 의미는 다르지만, 서로를 위험인물로 정의했다. 태주는 그녀와 엮일 때마다 부끄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로션도 사칭남도 결과는 괜찮았지만,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민망했었다. 다행히 오늘로 그의 촬영이 끝난다.
*
더 노블레스의 촬영이 끝난 태주는 회사에서 가져온 대본들을 뒤적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월 초부터 다시 스케줄이 있기에 쉴 수 있는 시간은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차기작을 고르는 사이사이 섭외 들어온 CF나 예능 목록도 확인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끌리는 것이 없었다.
“이것 참.”
“왜 그러십니까?”
“아이. 민망하게. 우리 아기 첫 로션 광고가 들어왔어요. 온 가족이 같이 쓰는 로션이라는 콘셉트요.”
“하하하. 산이 로션 말이군요.”
“킥. 네.”
태주가 아기 로션을 사용하는 건 촬영장에서만 돌던 얘기였는데, 사칭남이 응징당하는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태주가 사용하는 로션 이름도 덩달아 알려졌다. 사칭남의 일도 화제가 되었지만, 그보다 더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그가 사용하는 로션과 고양이를 화장실까지 데려간다는 민망한 얘기였다.
“어휴. 이세하 선배는 왜 그런 말을 해서.”
“하하하. 괜찮지 않습니까. 팬들은 스타의 그런 모습도 좋아합니다.”
“산이랑 같이 CF를 찍자는 건데. 이런 걸 찍어도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그 전에 산이로 변신을 해줄지도 의문이군요.”
“아! 그렇네요. 최근엔 산이로 거의 변한 적이 없었죠.”
최근엔 음식점에 갈 때를 제외하곤 전혀 변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촬영장에 따라다니느라 피곤할 태산이에게 광고를 찍자고 산이로 변해달라 요구할 생각은 전혀 없는 태주였다.
“그나저나 정말 차기작으로 마땅한 게 없어요. 영화도 별로 없고.”
“조금 쉬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 쿠첼 제가 말하는 걸 잊었네요. 제가 쉬지 않고 작품을 찍으려는 이유는 군대 간 사이에 잊히지 않으려는 거예요.”
“…군대요?”
“네. 그동안 태산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군대. 쿠첼루스는 김성진의 안티를 하면서 한국 남자 연예인에 관한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배우가 배역을 가리지 않고 받으려면 군대에 다녀와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면제를 받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이 경우 안 좋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었다.
쿠첼루스는 태주가 군대에 가야 하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기왕이면 편하고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손을 쓸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태산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쿠첼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힘이 많이 돼요.”
“…큼. 저야말로 태주 씨를 만나서 다행입니다.”
두 사람이 만난 지는 사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반년 조금 넘게 같이 지냈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는 제법 굳건했다. 본인은 잘 못 느끼고 있지만, 회귀 전보다 훨씬 다정하고 주변을 더 많이 배려하게 된 태주였다. 그리고 쿠첼루스는 그런 그가 베푸는 친절과 배려를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
가져온 대본을 반납하러 들른 회사에서 우 팀장과 앞으로 일정을 논의했다. 태주에게 들어온 대본 중엔 마음에 드는 대본이 전혀 없었다. 대부분이 어디서 본 것 같은 내용의 재탕이었다. 주인공의 나이와 직업만 바꾼 똑같은 내용의 드라마를 대체 왜 만드는 건지, 같은 내용이어도 새롭게 연출할 자신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대본 마음에 드시는 것 없죠?”
“네. 확실히 괜찮은 작품이 없네요.”
“2월에 바로 촬영에 들어가는 작품의 주연 자리라고 하면, 사실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먼저 하게 되죠.”
“그건 그렇죠. 그나마 괜찮은 작품은 전부 부잣집 도련님 역이고요.”
“호호호. 그런 배역을 연이어서 하시게 둘 순 없죠. 이미지가 고정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더 노블레스에서 보여 준 재벌 이미지가 강했는지, 태주에게 들어오는 배역이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미 성공한 이미지를 쓰고 싶어하는 제작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스물둘인 배우에게 이미지가 고정될 만한 배역을 들이밀 수는 없었다. 그게 아무리 인지도와 몸값을 한창 높여 가는 중인 배우라 해도 말이다.
‘작은 회사 같았으면 같은 이미지로 두세 편은 더 찍게 할 텐데.’
“개성 있는 캐릭터를 하고 싶어요.”
“음. 확실히 들어온 대본 중엔 없군요.”
“진혁 형님은 영화 잘 찍고 계세요? 전에 통화해서 저보고 카메오로 나와 달라 하시던데요.”
“아아. 꽤 재밌는 역할이던데요. 하실래요?”
잠입 수사 중인 형사들이 차린 치킨집 건물의 건물주 아들 역이었다. 철없는 동네 백수로 매일 치킨 먹으러 와서 까탈을 부리는 진상이었다. 우 팀장의 설명을 들은 그는 마음이 솔깃했다. 합법적으로 진혁 형님에게 짜증을 내고 진상을 부릴 기회였다.
“흐흐흐. 촬영 일정 알아봐 주세요.”
“호호호. 알겠어요. 그리고 차기작은 너무 급하게 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네.”
“음. 혹시 단막극은 어떠십니까?”
회의 내내 우 팀장과 태주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견우가 차기작에 관해서 의견을 내놨다. 두 달 전쯤 방송국의 단막극 공모전 결과가 발표됐다. 단막극은 출연료는 적지만, 캐릭터 성이 강한 배역이나 실험적인 스토리로 제작되기도 한다. 주로 신인 작가나 PD, 배우의 등용문 성격이 강했지만, 최근엔 중견 배우나 신예 배우들도 많이 출연한다.
“단막극 제작하는 곳이 tvM하고 KBC네요. 두 곳 모두 이 배우님하고 올해 작품을 했던 곳이고요.”
“수상작 중에 제작 들어가는 건 몇 작품인가요?”
“tvM은 10작품이고, KBC 6작품입니다.”
“입상작 수랑 같네요. 흐음. 이 배우님은 단막극 괜찮으세요?”
“네. 작품만 괜찮으면요. 차기작을 못 고른 상태니, 단막극도 괜찮을 것 같아요.”
우 팀장이 제작에 들어가는 단막극의 시놉시스를 받아오겠다는 얘기를 끝으로 회의를 마쳤다.
단막극. 보통은 2주에서 3주 정도로 촬영 기간도 길지 않고, 제작비도 여유롭지 않았다. 여러모로 부족한 촬영현장이 될 게 뻔했다. 태주는 예전에도 단막극은 촬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차기작을 정하지 못해서 불편한 마음뿐이었는데, 지금은 새로운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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