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30
129. 단막극 박수 >
카메오 촬영은 감독님의 만족스러운 웃음과 시끌시끌한 칭찬을 받으면서 마칠 수 있었다. 태주는 매번 놀림만 당하다가, 진혁의 열 받은 얼굴을 보자, 이때까지 당한 것을 모두 갚아준 기분이었다. 아주 상쾌했다.
“아주 현실적인 연기였어. 아~주.”
“킥. 어때요? 카메오로 부르기 잘했죠?”
“잘했지. 아주 잘했어. 뿌득.”
진혁이 살짝 이를 갈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아저씨. 이봐요. 그 외 다수의 험한 말을 들었지만, 연기였다. 연기가 아니라도 진상역에 태주를 추천한 것이 자신이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저 당장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 줘야 할 것처럼 열이 나는 속이 문제일 뿐이었다.
“흐흐흐. 형 밤이는 잘 지내요?”
“영상 올린 거 못 봤어?”
“미튜브요?”
“아아. 요새 드라마 하느라 못 봤겠네.”
진혁은 태주가 알려 준 펫슬랭 레스토랑 덕에 많이 통통해졌다면서 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그의 말대로였다. 뼈밖에 없어서 날아갈 것 같았던 밤이의 살이 제법 올라 있었다. 털도 반짝거리고 코도 촉촉한 게 건강해 보였다.
“전에 네가 준 거, 펫 음료수.”
“아! 그거요? 그게 왜요?”
“우리 밤이가 엄청 잘 마시더라. 나중에 한 병 더 챙겨 줘.”
“그럴게요. 그거 강아지 몸에 엄청 좋은 거예요.”
“고맙다. 오늘 출연해 준 것도 고맙고. 나중에 부탁할 거 있으면 말만 해. 형이 두 팔 걷고 도와준다.”
바람에 날아갈 듯이 삐쩍 마른 밤이가 걱정되어서 펫 전용 치료제를 한 병 선물했는데, 효과가 괜찮았나 보다. 사진 속에서 진혁이 밤이를 다정하게 안고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밤이는 새로운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카메오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태주는 이레귤러 박재우의 기사를 찾아봤다. 할리우드로 간다는 기사가 나오고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영화 촬영과 관련한 단신 기사라도 있나 찾아봤지만, 전혀 없었다.
정원에서 가져온 물품으로 이레귤러의 기억 조작 능력이 금제됐다. 이레귤러에게 기억 조작 능력 외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제 실력으로 배우 일을 하길 바랐다.
회귀 전후 모두 배우를 선택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수 없는 이능력으로 상을 차지하지 말고 자기 실력으로 상을 얻길 바랐다.
*
소속사에선 이번에 태주가 단막극에 들어가는 것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줬다. 단막극이라지만 주연을 경험한 것과 못한 것은 작품을 선택할 때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석 달, 넉 달 이어지는 촬영 동안 작품을 이끌어 가야 하는 주연이 경험이 많은 걸 싫어할 제작사는 없었다.
단막극의 사전 미팅 장소로 향하는 태주의 기분은 상당히 좋았다. 회사의 반응도 좋았고 방송 쪽에서도 착실하게 커 나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조연 두 번 후에 단막극 주연을 맡았다. 이번 단막극 주연을 제대로 해내면, 어찌면 다음엔 드라마의 꽃인 미니시리즈의 주연을 맡을 수 있을지 몰랐다.
익숙한 tvM 방송국 건물로 들어섰다. 약속 장소인 회의실로 가자, 여랑 작가와 강은진 PD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랑 작가는 예전 펜션에서 만났던 모습에서 그다지 바뀌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강은진 PD는 그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안녕하세요. 이태주입니다.”
“호호호. 어서, 어서 오세요. 배우님.”
“하. 하. 하하하. 강은진입니다. 이쪽은 여랑 작가고요.”
“반갑습니다.”
강 PD가 정신 줄을 놓은 듯한 여랑 작가를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자기소개도 잊고 태주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랑 작가를 대신 소개한 후에 태주 일행을 자리로 안내했다.
여랑 작가는 태주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상관없어 보였다. 단단히 홀린 듯, 태주의 얼굴을 보면서 황홀해하고 있었다. 강 PD는 그런 여랑 작가의 모습에 태주가 혹시 연출진을 우습게 보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정신 좀 차려. 여랑 작가.”
“네, 네? 네.”
‘아이고.’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태주 얼굴만 뜯어보는 여랑 작가를 대신해서 강 PD가 얘기를 꺼냈다. 그녀는 우선 이번 단막극을 선택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로 말고를 텄다.
“대본 많이 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우리 작품을 선택하셨어요?”
“재밌어서요.”
“네? 그게 다예요?”
“하하하. 굳세고 의지가 강하고. 억척스럽지만 여리고. 보통 이런 캐릭터는 여배우에게 주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에선 주인공 박수가 그렇죠. 그 점이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이런 작품을 놓치면 바보죠. 저한테는 당연한 선택이었어요.”
“흐흐흠. 배우님 작품 보시는 눈이, 읍!”
태주의 말을 듣던 여랑 작가의 눈이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반짝였다. 당사자에게 대놓고 칭송을 읊으려는 그녀의 입을 강 PD가 막았다. 아무래도 상대가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인 걸 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강 PD는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여랑 작가에게 왜 그러냐는 이상한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감독님! 정신 차려요.”
“헐. 여랑 작가.”
자신을 배신한 연인처럼 보는 강 PD를 무시하고 여랑 작가가 태주에게 많이 망가지는 배역인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강 PD는 홀딱 반해서 모델 삼아 쓴 글이라면서, 주인공을 망가지게 하는 심보는 뭐냐고 속으로 욕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멋지게 찍어 주실 거잖아요.”
“무, 물론이죠. 제가 촬영 감독님 머리끄댕, 읍.”
다시 입을 막은 강 PD는 이번엔 조금 고마워하는 눈빛을 여랑 작가에게서 돌려받았다. 태주는 두 사람의 그런 웃긴 모습에 결국 참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원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강 PD 역시 왜 그리 여랑 작가가 우리 배우, 우리 배우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촬영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아! 여기요. 여기 일정표 보세요.”
“3월 초부터 이 주로 기간을 잡으셨군요.”
“네. 리딩 일자는 괜찮으세요?”
“예. 괜찮습니다.”
3월에는 태주의 일정이 화보 외엔 아직 정해진 게 없었다. 촬영 예정 일자를 강 PD가 바라는 대로 정해도 괜찮았다. 2주 정도로 잡은 촬영 기간도 나쁘지 않았다. 강 PD의 자신감이 보이는 일정이었다.
B팀도 돌리지 못하고 예산도 부족한 단막극의 촬영 환경을 고려할 때, 강 PD가 2주를 촬영 기간으로 잡은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미팅은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분위기로 이어졌다. 가끔 여랑 작가가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꼼꼼하게 캐릭터 해석이나 촬영에 필요한 준비 사항 같은 것들을 알려 줬다.
*
박수. 여랑 작가의 단막극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주인공 박수는 갓난아기일 때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쪽지와 함께 보육 시설 앞에 버려졌다. 성년이 다 되어 독립한 그는 사기꾼 무당이 쫓겨난 점집을 헐값에 빌려서 산다.
이름이 박수라 무당으로 오해받지만, 주로 하는 일은 잡일이었다. 가출한 반려동물 찾기, 어린이집 등원 대신시키기, 아기 돌보기, 초등학교 등하교 도우미 등의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번다.
어느 날, 일이 없어 박수가 방바닥을 뒹굴고 있는 점집에 손님이 들어온다. 점을 보고 싶어 하는 손님에게 박수는 무당도 아니고, 이곳도 사기꾼이 도망간 상태 그대로 둔 것임을 밝힌다.
하지만 손님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긴 금괴를 찾는 중인데, 찾으면 10%를 떼어 주겠다는 얘기를 꺼내며 그에게 점을 봐 달라 부탁한다. 손님의 말을 전부 신뢰하긴 어려웠지만, 생활비가 부족한 박수는 그 일을 받아들이고 손님과 같이 금괴를 찾기 시작한다.
“매니저님, 혹시 심부름센터 이용해 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요. 단막극 때문에 그러십니까?”
“네. 저도 심부름센터는 이용해 본 적이 없어서요. 실제로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대신 해 줄까요?”
“하하하.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우와. 진짜 대본에 나온 대사 그대로겠어요.”
대본을 확인하던 태주가 견우에게 심부름센터에 관해서 물어봤다. 주인공 박수가 심부름센터 비슷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혹시 이용해 본 적이 있나 물었지만, 견우도 경험이 없었다.
‘먹고 살기 힘들다.’라는 대사를 주인공 박수는 매일 입에 달고 살았다. 태주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대사였다. 그는 자신이 좋은 환경에서 인정받으면서 활동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그러니 저런 대사는 자신의 몫이 아니라 여기고 있었다.
아마 그런 대사가 어울리는 사람은, 24시간 대기조처럼 연예인을 위해 움직이는 견우 같은 매니저일 것이다. 아니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태주는 묵묵히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견우에게 앞으론 더 잘해 주자고 다짐했다.
*
박수의 리딩이 진행되는 회의실 안. 태주는 아무 문제 없이 리딩이 시작되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문제가 벌어지지 않는 지금 상황이 정상이었다. 그저 이제까지 태주가 겪은 드라마 리딩 현장에선 항상 문제가 생겼었기 때문에, 아무 일 없이 평온한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뿐이었다.
“아이, 씨. 애기 엉덩이 또 짓물렀잖아. 기저귀 갈고. 씻기고. 뽀송뽀송하게 톡톡! 몇 번을 말해.”
“쉬쉬. 착하지. 울지 마. 너한테 화내는 거 아니야. 네 엄마가, 네 엉덩이에 뽀송뽀송 파우더를 안 해 줘서 그랬어.”
실제로 눈앞에 아기를 두고 말을 거는 듯했다. 태주가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사를 치자마자 모든 배우가 그를 돌아봤다. 작게 속삭이듯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였는데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 애정이 깃든 부드러운 발성에 소름이 돋았다.
‘괜히 이태주, 이태주 하는 게 아니네.’
‘애기 상대로 혼잣말하는 신인데, 왜 나한테 괜찮다고 달래 주는 것처럼 들리냐.’
‘어휴. 목소리가 저렇게 달콤하니까, 노래도 잘하는 거지.’
한참 동안 태주의 대사가 이어졌다. 아기를 돌보는 일을 하는 중에 등하교 도우미 일이 들어와서 머리를 부여잡는 신이었다. 결국엔 아기 포대기를 찾아서 등에 업고 초등학교 하교 시간에 맞춰서 도우미 일을 하러 간다.
“정 모르겠으면 점이라도 좀 쳐 봐요.‘
“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못한다고. 그걸 내가 어떻게 해.”
“아니. 무당이 그것도 못 해요?”
“내가 무당 아니라고 했지? 내가 심부름 전문이라고! 집 나간 고양이랑 강아지 찾아 주는 게 전문이라고! 몇 번을 말해!”
금괴 찾는 일에 진전이 없자, 그를 닦달하기 시작한 손님한테 점집 바닥에 드러누워서 모른다고 짜증을 부리는 장면이었다. 실제로 짜증이 난 듯한 말투에 찔끔한 상대 배우가 그럼 금괴는 어떡하냐면서 작은 목소리로 침울하게 물었다.
“야이, 씨. 진짜 금괴가 있긴 있는 거야? 네 할아버지 가시기 전에 치매였다며?”
“있어요. 폰에 있는 사진도 봤잖아요.”
“내가 그놈의 금괴 안 찾고 애를 봤으면, 이번 달 방세는 벌써 벌었겠다.”
“방세 내가 내준다니까요.”
“죽을래? 엉?”
손님의 쓸데없는 친절이, 타인의 동정을 이용하는 게 죽기보다 더 싫은, 박수의 성질을 건드렸다. 삐딱하게 살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화가 난 목소리에 회의실 안에 옅은 긴장감이 돌았다.
동작이나 표정도 많이 없는 힘을 빼고 하는 연기인데도 배우들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특히 태주가 목소리에 성질을 내거나 달래는 것 같은 풍성한 감정을 실을 때면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한순간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흐름을 못 따라가고 뒤에 남겨질 것처럼 불안했다.
-짝짝짝!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체력이 다한 듯한 모습으로 배우들이 박수를 쳤다. 드라마는 체력 싸움이라는 말이 맞았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리딩에 경험 없는 배우들은 체력을 모두 소진하고 혼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 주연 배우인 태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신인 배우, 단역 경력의 배우들과 다르게 페이스 조절에 능숙했다.
가장 많은 대사와 감정을 연기하는 그는, 다른 사람들이 중간중간 캐릭터의 설정을 놓치고 혼란스러워할 때도 시종일관 자신이 구축한 박수 캐릭터를 놓치지 않고 유지했다.
일정을 재확인한 배우들이 빠져나가고, 태주와 그의 매니저까지 모두 돌아갔다. 텅 빈 회의실엔 좀 전 리딩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강 PD가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여랑 작가가 두드렸다.
“감독님 어때요? 우리 배우님. 잘하시죠?”
“…어. 솔직히 이 정도로 잘해 줄 줄은 몰랐는데.”
“내가 말했잖아요. 우리 배우님 출연하셨으니, 이미 우리 작품 반은 성공한 거라고요.”
“나도 이태주 배우 연기는 다 봤어. 그런데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예상을 못 했지.”
“전에 건 조연이어서 그런 거죠. 이번엔 주연이시잖아요.”
강 PD는 여랑 작가의 말에 동의했다. 조연을 맡아서 주연 배우들을 받쳐 주거나, 배역 사이를 이어 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시선에 담기는 감정들, 상반신의 움직임 등. 태주는 조연으로 출연한 작품들에선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던 존재감을 이번 작품에선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아주 거침없더라.”
“흐흐흐. 아! 어떡해요. 벌써 보고 싶어요. 감독님 진짜 잘 찍으셔야 해요.”
“알았어.”
“그렇게 가볍게 대답하실 거 아니에요. 우리 배우님 모셔 놓고 엉터리로 찍으면 끝이에요. 끝.”
강 PD는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끝이라고 말하는 여랑 작가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하지만 여랑 작가는 진심이었다. 얼마 전 태주의 사칭남을 추적하던 팬클럽의 화력을 생각할 때, 태주를 엉망으로 찍어 놓으면, 아마 강 PD는 욕을 먹고 영생에 가까운 수명을 쌓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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