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46
145. 차기작 결정 >
음식점으로 향하는 사이에 태주는 자신의 매니저를 훔쳐봤다. 견우와 같이 다닌 지 벌써 삼 년째였다. 눈빛만으로 통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렇다저렇다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별말 없이 태주와 미나가 고른 음식점으로 차를 몰고 있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게 느껴졌다. 아마 미리 감독의 성향을 파악해 두지 못했다고 자신을 탓하는 것 같았다.
‘태산이가 같이 있어서 그런 거지, 아니라면 그렇게 기분 상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감독이 무례한 사람이긴 했지만,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컷을 요구하는 광고 감독은 그 말고도 많았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추가 촬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여건이 갖춰졌을 때 최대한 많이 찍어 두려는 감독들이 꽤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김 감독처럼 소통도 하지 않고, 억지를 부리거나 막무가내로 일을 진행하려는 사람을 이해한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저 그런 무례한 사람들을 모두 걸러 내는 게 쉽지 않다는 걸 태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견우가 그 일에 너무 마음을 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오늘 촬영했으니, 며칠 있으면 광고가 나오겠네. 어떻게 나오려나.’
광고 기획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는 태주도 잘 몰랐지만, 제작에 들어가면 굉장히 빨리 광고가 완성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의 경험으론 촬영하고 후반 작업을 마쳐서 방송까지 내보내는 데까지 며칠 걸리지 않았었다. 일주일 만에 광고가 방송에 나간 적도 있었다.
만약 태주의 의도가 성공했다면, 기존 콘티와 다른 느낌의 광고가 한편 더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그는 회귀 전 이번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광고는 아니었다. 영화 촬영 중, 우연히 찍힌 장면이 너무 좋아서 기존 장면을 대체한 일도 있었고, NG일 줄 알았던 컷이 더 알맞았던 일도 있었다.
어떤 내용의 광고가 나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자연스럽게 연기한 장면이 방송을 타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김 감독의 무례에 대한 적절한 대접이 될 것 같았다.
*
트리즈 사무실 안을 태산이가 다다다다 가르고 지나갔다. 잠깐 자고 일어나서 기운이 난 건지, 좋아하는 닭요리를 먹어서 기운이 난 건지 사무실 안에 내려 주자, 기세 좋게 실내를 뛰어다녔다.
뛰어다니다 일하는 직원들을 방해할까 걱정한 태주가 아이를 붙잡으려 하자 견우가 말렸다. 견우가 눈짓으로 아이에게 주려고 서랍에서 간식을 꺼내는 직원을 가리켰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다들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간식을 꺼내 들었다.
예전에 직원들이 태산이를 귀여워해서 꼬시기 경쟁을 한 걸 본 적 있는 태주였다. 그때 그 경쟁이 그대로 산이 꼬시기로 바뀌어 있었다. 직원들은 저마다 아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들고 아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사무실을 한 바퀴 도는 잠깐 사이 태산이 품에 간식이 산 처럼 쌓여 있었다.
“오늘은 대표님이 안 계셔서 직원들에게도 차례가 돌아왔군요.”
“하하하.”
끝판왕 대표님이 계시면 직원들이 아이 머리도 한 번 못 쓰다듬어 본다며,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견우가 알려 줬다. 직원들이 산이든 태산이든 사무실에 올 때마다 대표님 혼자 독차지하는 것에 불만이 좀 쌓였다며 산이는 자유롭게 놀게 두자고 했다.
우 팀장님의 자리로 가면서 태주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보아하니 그가 붙잡아 두려 해도 태산이가 얌전히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오늘 얌전히 촬영한 게 기적일 정도로 활동적인 아이라, 지금은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두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부탁하셨던 신부님하고 어린 연인에 관해서 알아봤는데요.”
“네.”
“먼저 신부님은 대본에 문제가 있었어요.”
“대본이요? 대본 꽤 좋던데요?”
“이 배우님이 보신 건 수정 전 대본이에요.”
신부님의 대본은 처음에는 40편 장편을 생각하고 쓰기 시작한 작품이었다. 이후 제작사에서 편수 조정을 요청해서 28부로 축소했지만, 장편 편성에 부담을 느낀 방송국에서 다시 20부로 줄이길 원했다. 고생 끝에 20부작으로 수정을 마쳤지만, 결과물이 예상과 매우 달랐다.
“70분 분량 20부작이라는 애매한 분량의 대본이 탄생해 버렸어요.”
“편당 70분이요? 케이블방송국에서 편성 받았어요?”
“그게 문제예요, 편성! 편성을 KBC에서 받았어요.”
“네? 지상파에서요? 광고까지 들어가면 80분이 넘을 텐데, 그걸 어떻게 편성을 받았죠?”
“후우. 무식한 방법을 썼죠. 35분으로, 반으로 나눠서 40회 방송을 하기로 했다네요.”
우 팀장의 설명을 들은 태주는 그럼 처음 40부작 대본을 그대로 쓰지, 왜 굳이 멀쩡한 대본을 줄여서 자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드시 수정한 대본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지상파를 포기하고 케이블방송국에서 90분 정도로 여유롭게 편성을 받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수정된 대본을 못 봐서 뭐라 말을 못 하겠지만, 들어가는 건 무리겠어요.”
“후우. 그게 말이죠. 우리 배우님 중 한 분이 대본에 꽂히셨어요.”
“진혁 형님은 영화 홍보 중이실 테고, 이성군 형님이세요?”
“아니요. 배동석 배우님이요. 전직 특수 부대 출신 신부님이라는 캐릭터에 꽂히셨어요.”
“…거기 나오는 조직 두목이 아니고요?”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는 중인 배동석이었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에 홀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편성을 받은 시간도 방송국도 적절하지 않은 상황이라 회사에선 배동석을 만류하고 있었지만, 이미 배역에 꽂힌 배우를 말릴 방법이 없었다.
“이미 제작사랑 미팅을 한 번 하셨나 보더라고요. 연기력이야 의심할 필요 없는 분이시라….”
“아!”
“안타깝게도 연기력으로 배역을 가져오셨어요.”
‘그 거친 외모가 정말 도움이 안 되네.’
배동석의 얘기를 마친 우 팀장이 주변을 본 후, 태주에게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하자는 얘기를 했다. 태주가 신부님 대본에 관심이 있어서 사정을 알아봤다는 소문이 돌면, 어떻게든 캐스팅하려고 나설 것이라는 게 우 팀장의 생각이었다.
“카메오라면 몰라도. 이 배우님이 생각하셨던, 강력팀 형사 역할에 캐스팅하겠다는 얘기가 나오면 좀 불편해지실 거예요.”
우 팀장은 차기작이 정해지지 않은 태주에게 배동석이 같이 하자고 조르면 떠밀려서 하겠다고 대답할까, 걱정하는 중이었다. 태주는 우 팀장이 걱정하는 내용을 듣고 잠시 골이 띵했다. 아무리 그가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지만, 설마 일과 관련된 일까지 그럴까 봐 걱정할 줄은 몰랐다.
“제가 부탁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편인 건 맞는데요. 그런 부탁까지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에요.”
“이 배우님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배동석 배우님 성격 때문이에요. 아시다시피 그분이 우선 저지르고 보시는 타입이라서요.”
“그건 그렇죠. 수습은 나중에 하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죠.”
“이 배우님이 관심 있으시다는 얘기를 듣고 제작진한테 데려오겠다고 장담이라도 하시면 곤란해서 그래요.”
배동석이라면 있을 법한 얘기였다. 그는 자기한테 좋은 건 남에게도 좋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태주는 한동안 배동석의 연락을 피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우 팀장의 얘기에 수긍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그에게 같이 운동하자고 시달렸던 일은 여전히 피곤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우 팀장의 말대로 카메오로 출연하는 정도면 괜찮지만,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방영하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한 시간 혹은 그 이상의 러닝 타임에 익숙한 시청자에게 주 2회, 각 35분 방송은 너무 생소한 방식이었다.
“어린 연인은 제작사, 연출 모두 괜찮아요. 대본도 괜찮고요. 문제는 여주인공이 없다는 거예요.”
“네? 제가 봐도 괜찮은 배역인데,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조세라, 홍주희, 심수경이 차례대로 출연을 고사했어요.”
“헐.”
“이 배우님도 이해하실 만한 이유가 있어요. 남주로 권재형이 먼저 캐스팅된 상태였어요.”
“아!”
태주는 우 팀장의 말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권재형, 잘생기고 연기도 잘하는 배우지만, 남녀 할 것 없이 배우들은 전부 꺼리는 사람이었다. 태주 역시 꺼리는 사람이었다. 같이 촬영하는 모든 여배우와 염문설을 뿌리는 배우로 작품을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끊임 없이 들이대는 사람이었다.
그가 벌인 가장 최악의 사건은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던, 여배우에게 제작 발표회장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한 사건이었다. 작품에서 커플로 나오는 상대라 어쩔 수 없이 여배우가 고백을 받아들였지만, 권재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대에 입대해 버렸다.
그 일로 여배우는 권재형의 팬에게 테러를 당하고, 주연으로 섭외되었던 드라마에선 섭외를 취소하는 일을 겪어야 했다. 그 외에 성사 직전이었던 광고의 계약이 무산되는 등, 경력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었다.
“나이가 너무 많지 않아요? 지금 서른넷인가 그렇죠?”
“권재형이 동안이잖아요. 대본은 작년부터 돌아다녔었고요.”
“작년이라고 해도 딱히….”
“솔직히 이십 대 중반에 연기 잘하는 배우가 많지 않죠. 그 많지 않은 배우도 당시엔 대부분 다른 작품을 찍는 중이었고요.”
“그럼 다른 것들은 문제없는 거죠?”
그렇다고 우 팀장이 말했다. 대본은 이미 16화까지 모두 나온 상태였다. 시청자 반응에 따라 내용이 수정될 수도 있겠지만, 상황은 여주인공 문제만 빼면 매우 좋았다. 배역을 놓지 않고 질질 끌던 권재형도 계약을 해지한 상태여서, 만약 태주가 하겠다고 나서면 두 팔 벌려 환영할 분위기였다.
“괜찮네요. 미팅 잡아 주세요.”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박창환 감독님 영화 시사회 일정 나왔어요. 참석하실 거죠?”
“네. 제목은 뭐로 지었어요? 얼마 전까지도 가제로 불렀었는데.”
“이요.”
“아!”
대본에는 딸의 복수를 하러 가는 날, 그날의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는 묘사가 있었다. 영화 배경도 그녀의 인생에도 맑은 날이어서 그렇게 지은 것 같았다. 50년 연기 인생을 마무리하는 작품이었다. 동료 배우와 감독들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왔었다. 어떤 작품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어휴.”
“왜 그러세요?”
“아까워서 그래요. 이제 영화 개봉하고 주연 맡으시면서 입지를 다지셔야 할 때인데….”
“아하하하.”
우 팀장의 아쉬운 소리에 태주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계속 배우 일을 할 생각이라면, 그게 아니더라도 이민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당연히 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비록 시기가 좋지 않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좀 훗, 뜻밖의 광고 건인데요.”
“뭔데요?”
“생활용품 업체 광고예요.”
“생활용품이요?”
“네. 고무장갑, 앞치마, 대걸레 같은 물품을 제작 유통하는 회사 광고예요.”
웃음기가 다분한 그녀의 설명을 듣고 태주 역시 웃음이 터졌다. 단막극 박수에서 청소 솔을 들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때 사용했던 고무장갑과 청소 솔이 그 회사의 제품이었다. 그 장면이 꽤 인상에 남았는지, 광고 섭외가 들어왔다.
“호호호. 어떠세요?”
“킥킥. 할게요. 저한테 그런 광고가 들어올 줄은 정말 몰랐어요.”
“호호호. 출연료도 괜찮아요. 그리고 2년짜리 계약이라 저희가 바라는 조건에 딱 맞아요.”
이런 생활용품 광고는 일상생활 중 노출이 많은 편이었다. 광고 매체도 온라인인 경우가 많아서, 트렌드에 예민한 TV 광고보다 광고 수명도 길었다. 태주와 우 팀장은 사실 생활용품과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사무용품의 광고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일이 특이한 방향으로 풀렸다.
“부으.”
“와! 산이 멋있다. 그건 어디서 배웠어?”
“앙.”
우 팀장의 어깨너머로 태산이가 직원들에게 오늘 배운 브이를 하며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그새 그걸 사람들에게 자랑하면서 으스대는 아이 모습이 귀여웠다. 태주는 이제 자랑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브이를 가르치기 시작한 태산이 사진을 찍었다.
“오늘 배운 건가요?”
“브이요? 네. 아까 배웠어요.”
“산이가 이제 몇 개월 찬가요?”
“음. 27개월이요.”
“흐음. 짓고 계신 집 근처에 아이가 다닐 만한 어린이집이 있나요?”
태주는 우 팀장이 하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이집이라니? 그는 태산이를 왜 그런 곳에 다니게 해야 하는 건지, 바로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평소에는 대부분 호랑이 모습으로 생활하다가, 가끔 마트나 음식점에 갈 때만 산이 모습으로 변하는 태산이라 유아 교육 시설에 보낼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헉! 혹시 남들 눈엔 아이를 내버려 두는 거로 보이는 거야?’
“제가 돌볼 건데요.”
“2년 동안은 직접 돌보시기 어려우시잖아요.”
그렇네요.”
태산이는 그에게는 펫이지만 다른 사람들 눈엔 평범한 아이로 비추어지고 있었다. 태주는 태산이가 다른 아이와 다르다 보니, 지금까지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았었다. 확실히 이 문제는 좀 더 고민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너무 섣부르게 신분을 만들었나? 아니. 저렇게 좋아하는데, 안 만들어 주는 건 너무 잔인하지.’
태산이는 직원이 앉혀 준 테이블 위에서 한 손에 과자, 한 손엔 장난감을 쥐고 거마뜨와 부으를 하면서 웃고 있었다. 아이 재롱이 귀여운지 직원들은 근무 시간이라는 것도 잊은 채 모두 모여 있었다. 그런 관심이 좋은지 꺄하 하는 웃음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저런 모습을 보고도 호랑이 모습으로만 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태주는 머릿속에 떠오른 머리 좋은 마법사와 경험 많은 해나, 두 인물과 태산이 문제를 꼭 의논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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