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7
16. 대표님
태주는 아침 일찍 [선율] 대본 책을 챙겨서 사무실로 나갔다. 딱히 스케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매니저도 대동하지 않고 사무실에 나온 태주를 사람들이 잠시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곧 우 팀장에게 안내해 주었다.
태주가 우 팀장님 자리에 가서 앉기 무섭게 견우가 다가왔다.
“어쩐 일이세요. 연락하셨으면 모시러 갔을 텐데요.”
견우는 말은 태주에게 하면서 눈은 이동 장 안의 태산이를 보고 있었다. 태우가 개학한 뒤로 태산이를 데리고 다녀야만 했다. 이제는 바깥 외출이 많이 부담되는 시기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이것 때문에 의논 드리려고 왔어요.”
태주가 가방에서 꺼낸 책의 표지를 보고, 우 팀장도 견우도 얼굴이 굳었다. 이들은 이미 이 영화 대본에 얽힌 얘기를 잘 알고 있었다. 소속 배우인 이성군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후우. 이건 어디서 나셨어요?”
“어제 진혁 선배님댁에서 이성군 선배님이 전해 주셨어요.”
“바이올리니스트···.”
“네, 바이올린 켤 줄 아느냐고 물으시더니 주셨어요.”
태주는 책의 표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냐아웅!”
‘윽. 태산아 형 지금 좀 진지한데.’
분위기 좀 잡으면서 대화 방향을 이롭게 끌어올 생각이었던 태주의 계획은 이동 장이 답답했던 새끼 백호 덕분에 망가졌다. 태주는 한숨을 쉬며 이동 장의 문을 열어주었다.
“읏.”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매너 있게 모른 척하며 태산이를 내려 주었다. 지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굳이 태산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강제할 필요는 없었다. 사무실에서 태산이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대본에 얽힌 얘기는 저도 들어서 알아요. 그런데 끌리네요.”
“이건 독이 든 사과나 다름없어요. 다른 사람이 피하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맞습니다. 태주 씨 지금은 이런 모험을 할 때가 아닙니다.”
예상대로 두 사람은 이 작품을 촬영하는 것을 반대했다. 태주 역시 당연히 반대할 거로 생각해서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다.
데구르르르르.
“냐아아아웅.”
“아이고 잘 뛴다.”
우 팀장의 고개가 태산이를 향해 돌아갔다. 사무실의 누군가가 던진 공을 태산이가 신이 나서 쫓아가고 있었다.
“흠흠. 솔직히 이 영화, 이태주 배우님이 촬영을 수락하셔도 제대로 크랭크 인이나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에요.”
“어째서요? 바이올리니스트 역만 찾으면 된다고 하시던데요.”
“배급사가 없습니다.”
“아!”
영화는 배우가 있다고 끝이 아니다. 극장에 걸리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필요했다. 배급사를 찾지 못하면 만들어 둔 영화를 극장에 걸지 못한다.
“그리고 이 책 보시면 바이올린 독주 부분에 CG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요. 그런데 스튜디오들이 누구 눈치를 볼 것 같아요? 감독? 제작사?”
“이런.”
“아마 제대로 된 CG 스튜디오도 못 찾을 거예요. 영화의 영상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할 게 뻔하죠.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 촬영에 들어갔는데, ‘작품 퀄리티가 떨어진다.’ 이런 상황을 납득 하실 수 있겠어요?”
납득 할 수 있을 리가. 태주가 아무리 상업영화를 선호한다지만 작품의 퀄리티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4번이나 천만을 달성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상업성과 작품성 그리고 완성도가 모두 채워졌을 때 그 영화가 흥행할 수 있었다. 아무리 돈을 물 쓰듯 써서 홍보해도,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면 외면당한다.
“지금 말한 모든 조건이 채워져도 이태주 배우님이 촬영에 들어가시는 게 쉽지는 않죠. 6월부터 ‘버스킹’ 촬영하시잖아요. 지금 ‘선율’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버스킹’ 촬영하면서 ‘선율’ 촬영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어요.”
“그 부분은 괜찮아요.”
“자신을 너무 과신하시는 것 아닌가요?”
정원에서 악기 연주와 연기 연습을 할 수 있는 태주의 특성을 모르는 우 팀장의 당연한 평가였다. 태주는 억울해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남들보다 48시간을 더 가질 수 있는 걸 모르니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회사에서 기획한 이미지대로 천재라고 여겨질지도 몰랐다.
“기타도 바이올린도 연주 연습은 항상 충분히 하고 있어요. 가끔은 연주가로 직업을 바꾼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연습하고 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연기적인 부분은요?”
“그 부분은 제가 자신 있다고 지금 말해도 믿기 힘드실 테죠? 저도 이해시켜 드릴 방법이 지금은 딱히 없어요. 현장에서 보여드리면 좋을 텐데.”
“그렇게 그 배역이 마음에 드세요?”
“네. 꼭 하고 싶어요.”
우 팀장은 한참 동안 태주의 눈을 들여다봤다. 태주의 눈은 고요했다. 단순하게 하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이 역할을 하겠다 생각하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우선 이 건은 대표님과 상의해보겠습니다.”
우 팀장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견우는 옆에서 묘한 표정으로 우 팀장을 보더니 태주를 일으켜 세웠다.
“다행입니다. 대표님은 아마 반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최대한 연기자의 의견을 들어주시거든요.”
태주를 자기 자리로 데려오며 견우가 작은 목소리로 알려줬다. 태주는 너무 기쁜 표정이 되지 않도록 살짝 입술을 물어 표정을 감췄다.
“냐아웅냐웅.”
“우와! 이거 태산이가 잡았어요? 잘했어요.”
태산이는 사무실에서 제 인기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태주와는 통성명도 나누지 못한 직원이었는데, 태산이는 알고 있는 듯했다.
“태산이가 참 인기가 좋네요.”
“귀여우니까요.”
견우와 몇 가지 얘기를 나눈 뒤에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은 수업도 없고, 따로 약속도 없었다. 바래다주겠다는 견우를 거절하고 나온 태주는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아직은 쌀쌀했지만, 햇볕이 좋아서 걷기에 좋은 날이었다.
“냐아엉.”
‘울음소리가 제법 굵어졌네. 제대로 크고 있구나.’
두 달 가까이 키우는 동안 탈이 난적이 없어서 가볍게 생각했지만, 태산이 상황은 다른 반려동물들과는 달랐다. 병에 걸리거나 다쳤을 때 동물병원에 데려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외양만 보면 백호지만, 진짜 백호와 아주 같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한 번 검사를 해보긴 해야 할 텐데 말이지.’
지금까진 수의사와 관계가 없는 삶이었다. 태산이가 처음 키워보는 반려동물이니 어쩔 수 없었다. 태주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수의사와 친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산이를 위험하게 하지 말자고 거듭 다짐했다.
*
며칠이 지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대표님이 태주를 만나고 싶다고 시간이 날 때 회사에 들러달라는 얘기였다. 태주는 지난번처럼 태산이를 데리고 회사에 갔다.
얼마 전 태산이를 잠깐 혼자 두고 외출을 했었다. 태우가 등교하고 연우도 학원에 간 상태라 점심용 샌드위치를 사러 베이커리에 다녀왔었다. 20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는데 태산이가 열이 오를 정도로 울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출근할 시간이라 건물이 비어서 다행이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울음소리에 식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두어서 어딘가 다친 줄 알았더니,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눈물에 콧물 범벅이 되어서 울던 모습으로 엉기던 게 어찌나 짠한지, 이후에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을 여러 번 한 후에야 겨우 떼어놓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외출할 때마다 태산이를 데리고 다니고 있었다.
“오늘은 대표님이랑 얘기해야 하니까, 조금 얌전히 있자. 응?”
“냥?”
‘제길, 귀여워.’
“그래. 그냥 마음대로 해라. 너한테 누가 뭐라고 하겠니.”
이동 장 안에 깔아준 담요를 질겅대며 갸웃거리는 모습에 항복하고 말았다.
대표실은 단조로운 색으로 심플 하게 꾸며져 있었다. 앤틱 가구나 고풍스러운 장식을 좋아하는 태주와는 취향이 달랐다. 태주는 소파에 앉아 대표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선율이라는 영화 말입니다. 사실 처지는 안타깝지만, 신인배우가 들어가기에는 상황이 너무 안 좋습니다. 아시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시고 싶은 거지요?”
“네, 그 배역을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접니다.”
“흠. 자신감은 좋네요. 그럼 하세요.”
태주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견우가 귀띔해 주기는 했었지만, 이렇게 쉽게 허락을 하다니. 진심인가 싶어서 대표의 얼굴을 확인해보았다. 진지하게 그리고 약간 즐겁게 웃고 있었다.
“의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작품이 좋고, 배우가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거죠. 그 외의 것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라고 소속사가 있는 거죠.”
“와!”
“큼큼. 제작사가 거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거기 아니면 우리 배우가 들어갈 곳이 없겠습니까. 이태주 배우님은 다른 것 신경 쓰지 마시고 체력관리에 힘쓰십시오. 일정을 보니 버스킹 촬영 끝나면, 휴식 없이 바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일정을 벌써 알아보셨어요?”
“말은 하시라고 쉽게 했지만, 회사라는 게 여러 가지 따질 건 따져봐야 하니까요.”
“감사합니다. 좋은 작품 보여드릴게요.”
“하하하. 그거면 됩니다.”
평판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예전엔 트리즈 소속 남지혁에게 학을 떼서 모두 싸잡아 외면했던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곳에 와서 만난 사람들은 태주가 그렇게 저평가해도 될만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태주는 편견에 사로잡혀 멋대로 욕하던 과거의 자신을 나무랐다. 앞으로는 좀 더 객관적으로 사실을 볼 수 있게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그, 거기, 그 안에 들어있는 아이가 태산입니까?”
“예? 아, 네. 태산이 맞아요. 지금은 잠이 들어서요.”
“아이고. 안타깝네요. 사냥을 그렇게 잘한다고 칭찬이 자자하던데.”
아까부터 눈에 들어오던 쥐 모양 장난감은 태산이를 위해서 준비해 둔 게 맞나 보다. 오늘 태산이는 이동 장 안의 담요를 못살게 굴더니 지금은 둘둘 감고 자고 있었다. 대표님의 안타까운 눈빛이 좀 걸렸지만, 자는 아이를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태주는 오랜만에 딸기를 수확하고 있었다. 호박은 가격은 좋았지만, 간식으로 먹을 수가 없어서 텃밭 하나는 딸기를 수확하기로 했다.
‘이상하네, 숫자가 너무 적어.’
“희, 딸기 먹자.”
“태주, 좋아.”
딸기를 다 수확한 후에 나무를 뽑아 두었다. 이번 딸기는 반은 팔고 반은 현실로 가져갈 생각이다. 딸기의 정체를 설명하기 난감했지만, 사무실 사람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 태산이를 돌봐준 것도 고마웠고 어쩌면 앞으로 또 태산이를 맡기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미리미리 뇌물 삼아 뿌려둘 생각이었다.
“태주, 어젯밤에 무서운 소리를 들었어.”
“뭐? 희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 봐.”
“태주는 자고 있었잖아. 그런데, 챠압챱 소리가 들렸어.”
“아니, 어젯밤에 낚시했는데. 안 잤어.”
잤다. 낚싯대 던져두고 태산이 끌어안고 푹 잤다. 그냥 멋쩍어서 우겨봤지만, 희를 보니 거짓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미안, 희. 낚시하다가 잠들었었어.”
“태주, 괜찮아. 태주는 낚시가 재미없는 거지?”
“좀 그래. 한 마리라도 잡히면 좀 재미가 있을 것 같긴 한데.”
희는 괜찮다며 태주의 사과를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태주, 어젯밤에 챠압찹 소리를 들었어.”
“소리? 혹시 슬라임이 남았나?”
“아니. 슬라임은 퐁퐁, 통통하잖아.”
“그렇지. 그럼 어디서 소리가 난거지? 희, 딸기 먹고 정원을 한 번 둘러보자.”
“좋아, 태주. 탐험이야.”
희가 흥분해서 날개를 떨었다. 반짝이는 가루가 빛을 내며 공기 중에 퍼졌다. 탐험은 아닌 것 같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태주도 희의 흥분에 동참했다.
태주와 희, 태산으로 구성된 탐험대가 출발했다. 정원을 크게 돌며 이상한 것이 없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태주가 동요를 부르자 태산이와 희가 좋아했다. 이 조그마한 두 녀석은 노래나 연주에 익숙했다. 태주가 매일 연주를 하거나 음악을 틀어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취향은 좀 달랐지만.
태산이와 희는 동요를 가장 좋아했다. 그 덕분에 태주는 평생 불러본 적 없는 동요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태양의 조각이 깃든 기타라는 보물을 가지고 동요를 연주할 때마다, 기타에게 살짝 미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둘이 좋아해서 태주도 기쁘게 연주하곤 했다.
“희, 여기 봐봐. 이거 발자국 맞지?”
“태주, 맞아. 발자국이야.”
정원에 침입자가 있는 것 같았다. 과일나무 아래에 발자국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어쩌면 딸기 숫자가 부족한 것도 이 침입자의 소행일지도 몰랐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상점에서 마법 주문서를 살까? 저번에 슬라임킹을 잡을 때처럼?”
“아직 정체도 모르는걸. 오늘 밤엔 희가 지켜볼게.”
“희 위험할 수도 있어.”
“희는 괜찮아. 희는 높은 나무에서 지켜볼 거야.”
밤이 되기 전에 정원에서 돌아가야 하는 태주는 희가 걱정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원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에는 제한이 있으니까.
“희 그래도 얼리기 주문서는 하나 사자. 혹시 모르니까.”
“으응. 그럼 마법 로프를 사줘.”
“마법 로프?”
“응. 희가 마법 로프로 침입자를 잡을 게.”
“희! 위험한 일은 하면 안 돼.”
“하지만, 희는 정원의 관리자 인걸. 희는 정원을 지킬 거야.”
희가 관리자가 된 건 순전히 태주의 소망 때문이었다. 태주는 어쩐지 죄책감이 들었다. 태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희가 계속 우겨서 결국 마법 로프를 사주고 말았다. 태주는 절대 위험한 일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에 현실로 돌아갔다.
태주가 현실로 돌아간 후, 희는 작은 주먹을 꼭 쥐며 반드시 정원을 지키겠다 다짐했다.
‘정원은 희와 태주의 집인걸. 꼭 지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