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73
172. 드라마 방영 시작 >
그날 이후 보석 거울은 틈만 나면 정원에 출몰했다. 거울 몸체에 조그마한 티끌만 묻어도 정원으로 날아와 태주의 앞에서 알짱거렸다. 희와 해나는 보석 거울의 아름다운 모습이 마음에 든 듯 정원에 올 때마다 반겼지만, 그는 아니었다.
‘저 얌체. 희한테는 온갖 재롱을 다 부리는 주제에 나한테만 까탈을 부리다니.’
그가 본 보석 거울은 꽤 영악했다. 제가 한 잘못을 아는 건지 아니면 태주가 희의 말은 전부 들어주는 걸 아는 건지 보석 거울은 희한테만 애교와 재롱을 부렸다.
보석 거울은 사물을 길게 늘이거나 빵빵하게 비추는 재주가 있었다. 그걸로 희와 정원 식구들의 환심을 사더니, 자신이 기억하는 배경을 거울에 비춰주는 거로 쐐기를 박았다.
거울을 보는 장소는 오두막의 거실이었는데, 비추는 장소는 요정 숲의 꽃밭이었다. 보석 거울이 기억하는 곳이 많지 않아서 배경이 요정 숲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희와 해나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카메라 앱 배경도 아니고. 거울에 무슨 그런 기능이 있는 거야.’
“저리 가라, 얌체야. 지금 허브티 만들고 있잖아.”
-부르르.
“아침에 왔다 갔었잖아. 왜 또 왔어?”
-부르부르.
“어휴. 이 자식이 진짜.”
보석 거울이 시시때때로 나타나서 방해하는 통에 그는 처음으로 정원의 방문자 거절 기능을 켜 둘까 하는 고민을 했었다. 물론 다른 방문자가 올 수도 있어서 생각만 해 봤었다.
얌체 보석 거울한테서 빨리 풀려나는 방법은 만족할 만큼 거울을 닦아 주는 것뿐이었다. 태주는 알을 위해 사놓은 최고급 클리너를 알보다 거울이 더 많이 쓰는 게 얄미웠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꼼꼼하게 닦아 줬다. 집중해서 거울의 보석을 하나하나 닦는 손길은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사실 고풍스러운 금속 테에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보석 거울은 얄미운 행동과 다르게 상당히 그의 취향이었다.
*
밤낮없이 드라마를 촬영하다 쉬는 날에는 예능을 촬영하는 일정을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6월 마지막 주의 수요일, 탐정 박수의 첫 방영일이 돌아왔다.
박수의 제작진은 이른 저녁에 촬영을 마치고 다 같이 모여서 첫 방송을 보기로 했지만, 태주는 참석하지 못했다. 어린 연인이 촬영 막바지에 다다랐고, 오늘은 야간 촬영이 예정되어 있어서였다.
어린 연인에선 조세라의 실권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그녀가 10살 연하의 사회 초년생을 사귀는 걸 가십으로 삼는다. 회사의 인트라넷과 SNS에 악의적인 찌라시를 유포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회사 동료와 지인에게 곤욕을 치르는 그를 본 조세라가 헤어지자는 말을 한다.
오늘은 이별을 통보받은 그가 밤거리를 헤매며 우는 장면을 찍을 예정이었다.
미리 촬영 허가를 구해 둔 거리의 한쪽에 촬영 장비가 설치되기 시작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무슨 드라마인지 누구의 촬영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현장을 감독하던 AD는 점점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촬영이 늦어질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수요일, 평일 저녁에 하는 촬영인데도 인파가 상당했다. 미리 관공서에 촬영 협조를 구하고 하는 일이었지만, 간간이 불평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여기서 진행될 태주의 촬영이 쉬워 보이지 않았다.
“감독님. 사람이 너무 몰리는데요?”
“여기서 태주 씨 촬영하는 거 알려졌어?”
“아니요. 그랬으면 겨우 이 정도로 안 끝났죠.”
“그건 맞는데…. 우선 태주 씨한텐 차에서 내리지 말라고 전해. 촬영 바로 직전에 나오시라고 해. 힘들겠지만 사람들 좀 해산시키고.”
“네.”
태주는 밴 안에서 기다리면서 감정을 다잡고 있었다. 도로변에서 하는 야외 촬영이라서 NG 없이 한 번에 가고 싶었다. 일찍 촬영을 끝내고 탐정 박수의 회식 장소에 잠시 들르려던 그는 대본을 보며 감정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 촬영은 다른 사람과 대사를 주고받거나 하는 촬영은 아니었다.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울다 한 줄 뿐인 대사를 말하면 되는 간단한 촬영이었다. 회상하는 신이나 이별을 통보받는 신은 이미 촬영을 마친 상태라, 나머지는 감독님의 몫이었다.
스태프의 부름에 밴에서 태주가 내리자, 그때까지 기다리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가로등에 상가의 간판과 조명으로 거리는 사물을 식별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곳에 단정하게 슈트를 입고 백팩을 손에 든 태주가 서자 순식간에 소란이 일었다.
-꺄아아.
-찰칵찰칵
-이태주다 이쪽 좀 봐 주세요.
수없이 터지는 플래시에 사람들을 통제하던 스태프들이 촬영하지 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행인 역을 맡은 보조 출연자들이 한 쪽에서 기다리는 것을 확인한 태주가 감독이 있는 방향으로 가는 도중에도 스태프의 말을 무시한 사람들의 사진 촬영이 계속됐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줄지 않자, 리허설을 생략하고 바로 촬영하기로 결정이 났다. 태주는 자신이 지나갈 거리를 확인하고 머릿속으로 끝없이 동선을 그려봤다. 길쭉한 화분이 놓인 구간을 지나서 조금 더 걸은 뒤에 대사를 말하면 끝나는 간단한 촬영이었다.
태주가 촬영이 시작될 지점에 자리를 잡고 서자,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봤지만,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않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태주는 주변 상황에 동요하지 않고 감정을 다스리며 감독의 사인을 기다렸다. 그런 그의 침착한 분위기에 물든 것처럼 사람들 사이의 소란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때를 기다린 것처럼 감독이 촬영 시작을 알렸다.
거리를 걷는 그는 몸이 기억하는 방향으로 걷고 있을 뿐 자신이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왜 걷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이별을 통보받는 만남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오늘은 그녀를 만나지 말고 그냥 가 버릴 걸 그랬다.
터벅터벅 걷던 그가 한 가게 앞에서 멈췄다. 그녀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신발 가게였다. 구두를 선물하면 연인이 떠난다는 속설 따위 믿지 않았는데, 그게 실수였나 보다. 왜 하필 구두를 선물했을까.
그녀와 함께 왔던 매장 쇼윈도에 자신 혼자만 비치는 게 슬펐다. 하얀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구슬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빵!
“컷! 야이씨! 차량 통제 제대로 못 해!”
몸을 돌려서 대사를 말하기 위한 위치로 이동하려던 찰나 커다란 화물 트럭이 지나가면서 경적을 울렸다. 순식간에 촬영이 멈추고 화난 감독의 고함이 스태프에게 쏟아졌다. 인도 바로 옆의 도로는 통제 중이었는데, 화물차 운전자가 무시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NG가 나버렸다.
태주는 끌어 올렸던 먹먹한 감정이 한순간에 식어 버린 것이 허탈했다. 꽤 잘 진행되고 있던 촬영이라 조금 아쉽기도 했다. 아마 감독도 그처럼 이번 장면이 마음에 들어서 평소보다 예민한 것 같았다.
“태주야 고개 조금 숙여 봐. 눈 좀 보자.”
“이렇게요?”
“응. 다행히 충혈되진 않았네. 눈물 자국만 지우면 되겠다.”
“네.”
메이크업을 고쳐 주는 미나의 얼굴을 보는 태주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자신이 괜히 욕심을 부렸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피로에 절어 있었다. 입술은 하얗게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텄고, 눈 밑에는 시커먼 다크서클이 사라지지 않았다.
“누나 괜찮아요?”
“아니. 졸려 죽을 것 같아.”
“미안해요.”
“그 소리 하지 말랬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래도요.”
그녀는 괜찮다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태주는 미안한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대여한 물품을 반납해 줄 사람만 한 명 더 있어도 그녀가 이렇게 피곤해하지 않을 텐데, 그녀는 영 내켜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어서 그의 미안함이 더 컸다.
미나도 처음엔 두 작품의 일정이 겹치는 동안은 어시스턴트를 두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고용한 어시스턴트를 바로 내보냈다. 그냥 내보낸 것도 아니고 자신의 눈에 띄면 업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할 거라고 경고까지 한 뒤에 내보냈다.
당시엔 미나가 그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몰랐었다. 그러다 미나가 너무 힘들어하는 걸 본 그가 어시스턴트를 다시 고용하자고 얘기를 꺼내자, 매니저님이 따로 불러서 이유를 알려줬다.
어시스턴트가 새로 들어온 후로 태주의 물건 중 작고 눈에 잘 안 띄는 것들이 자꾸 사라졌다. 새로운 어시스턴트를 의심하던 미나가 현장에서 그녀를 잡았다. 값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배우의 물건에 손을 대는 스태프와 같이 일할 수는 없었다.
그 어시스턴트는 태주가 쉬는 모습을 몰래 찍어서 사진을 팔기도 했고 사생에게 대가를 받고 훔친 태주의 개인 물품을 넘기기도 했다. 게다가 도둑질하던 현장에서 잡힌 어시스턴트는 어차피 쓰지도 않는 물건인데 어떠냐는 식으로 뻔뻔하게 굴어 미나의 화를 부추겼었다.
그 일을 겪은 후로 미나는 다른 어시스턴트를 고용하길 바라지 않았다. 일이 좀 많긴 하지만 그냥 자신이 조금 더 고생하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하암. 다음 주부턴 좀 나아지겠지.”
“그래야죠. 누나 제가 준 영양제는 잘 드시죠? 피로 회복제도요.”
“어. 그거 안 먹는 날에는 확실히 표시가 나더라.”
“다 먹으면 얘기해요.”
“응. 알았어.”
정원에서 쉴 수 있는 그와 달리 그의 스태프의 세 명은 정말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태주는 그런 그들을 위해서 좋은 약초와 과일을 골라 피로 회복제를 만들어 줬다. 효과는 그녀의 말대로 꽤 좋아서 견우와 형식도 잊지 않고 챙기고 있었다.
메이크업을 마치자마자 바로 촬영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차량 통제에 문제는 없었다. 그저 보조 출연자 중 한 명이 넘어질 뻔하면서 NG가 나서 다시 찍어야 했다. 태주는 다시 메이크업을 받고 자리에 서면서 어쩐지 오늘 촬영이 길어질 것 같다는 안 좋은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의 상상은 실제가 되었다.
돌돌 말은 종이로 어깨를 몇 번 두드리던 감독은 짜증을 참기 힘든지, 갑자기 악 소리를 질렀다. 근처에 있던 스태프들은 자신들을 향한 게 아닌, 그냥 내지르는 소리인데도 지레 찔려서 고개를 돌렸다.
물을 마시면서 그 모습을 보던 태주는 감독의 심정이 이해됐다. 오늘은 그럴 만도 했다. 첫 촬영의 화물 트럭을 시작으로 온갖 잡다한 상황 때문에 계속 NG가 나고 있었다. 보조 출연자, 바람에 날아온 전단, 출동하는 소방차 등 촬영을 방해하는 요소가 너무 많았다.
“태주야 너 눈 좀 부었다.”
“진짜요? 좀 앉아야겠어요. 너무 울었더니, 머리가 다 띵해요.”
“여기 앉아. 어서어서.”
촬영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지만, 눈가의 열기와 붓기가 가시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길게 다리를 쭉 뻗고 등을 최대한 기울이고 앉은 그는 그대로 잠시 눈을 감았다.
‘헐. 엄청 편해 보이네. 태주가 앉으니까 간이 의자가 무슨 선베드라도 되는 것 같아.’
태주가 획득한 나태의 재능은 저도 모르게 가장 편한 자세를 찾게 만드는 효능이 있었다. 예전의 그라면 도로 한쪽에 놓인 간이 의자에서 절대로 이런 자세를 취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나태의 재능을 얻은 그는 몸이 피곤해지자 자연스럽게 가장 쉬기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휴식을 취한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서, 태주의 상태를 확인하러 스태프가 왔다. 촬영 허가를 받아 놓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촬영이 시작되고, 무수한 방해로 NG가 났던 구간을 무사히 넘겼다.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태주의 대사를 기다렸다. 그가 무사히 대사만 마치면 오늘의 촬영은 끝이었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더 좋다며. 왜? 그런데 왜 나를 버려?”
후두둑.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몇 시간 동안 계속 우는 장면을 찍었는데도 태주는 처음의 그 감정을 그대로 연기하고 있었다. 대사를 마친 그가 아랫입술을 작게 물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감싸고 앉아서 소리를 죽여 우는 그의 곁으로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멍멍.”
“크흥. 너도 혼자야? 왜, 왜 너도 혼자야?”
태주는 갑자기 뛰어든 강아지의 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느라 한 번에 끈을 잡지 못하고 바닥을 몇 번 더듬었다. 그리고는 예정에 없던 대사를 하고 강아지를 붙잡고 감독의 컷 사인이 날 때까지 그렇게 계속 울었다.
“컷! 조감독, 강아지 주인분 좀 모셔 와.”
“헉! 알겠습니다.”
갑자기 난입한 강아지의 주인을 모셔 오라는 소리에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좀 전에도 감독이 허공에 고함을 지르며 화를 냈었다. 또다시 방해를 받은 감독이 이번엔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웠다.
그런 스태프의 반응을 보지 못한 감독은 좀 전 촬영분을 보고 있었다. 강아지 주인이 괜찮다고 하면 좀 전에 촬영한 걸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강아지한테 왜 혼자냐고 따지는 부분이 나쁘지 않았다.
미안한 얼굴로 다가온 강아지 주인과 얘기를 마친 감독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촬영 종료를 선언했다. 휴우. 스태프들이 내쉬는 안도의 한숨이 감독의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들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 앉아 있던 스크립터가 내쉬는 소리였다.
“자. 정리하고 퇴근합시다.”
“수고하셨습니다.”
*
예상 밖으로 길었던 촬영을 마치고 밴으로 돌아오자, 견우가 돌아와 있었다. 태주는 그를 보고 탐정 박수의 회식이 이미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능하면 들르려고 했는데, 미안하네.’
“매니저님 계산은 잘하셨어요?”
“네. 여기 카드 받으십시오.”
견우는 태주의 개인 카드로 회식비를 내는 게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회사에서 내주겠다고 하는데도 굳이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고집을 피운 그를 말리지 못하고 수백만 원이 넘는 식비를 그의 카드로 긁었다.
“매니저님 1화 보셨죠? 잘 나왔어요?”
“잘 나왔습니다. 시청률도 예상보다 높습니다.”
“진짜요? 얼마 나왔어요?”
“8.3%입니다.”
“와!”
생각보다 1화 시청률이 괜찮게 나왔다. 초호화 캐스팅에 수백억의 자본이 들어간 드라마들이 기록했던 1화 시청률과 비슷했다. 사람들이 예상하던 4~6%대를 훌쩍 넘어선 기록이었다.
기분 좋은 소식 덕분에 차 안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비록 다들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온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웃는 얼굴은 무척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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