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1
20. 난데없이 예능
태주는 슈퍼마켓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낱개 포장된 과자를 하나씩 까먹으면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태산이가 집으로 가는 길 곳곳의 냄새를
익힐 수 있도록 느긋하게 뒤를 따라 걸었다. 봉투 속의 얼음이 녹을까 신경 쓰였지만, 아직 날씨가 선선하니 괜찮을 것 같았다.
슬리퍼에 짚업 재킷. 한 손엔 슈퍼 봉투, 다른 손엔 태산이 어깨끈까지 태주는 흔한 동네 주민1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촬영이 없는
동안 태주는 동네 백수나 다름없었다. 그뿐 아니라 일없는 배우는 다 비슷할 것이었다.
“냠. 얼레 동석이 형님이네. 촬영 중인가 보다.”
느긋하게 태산이가 가는 길로 끌려가던 태주의 눈에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배동석. 생김새 때문에 악역 전문 배우로 활동했었지만, 최근 친근한
이미지가 생겨서 한층 바빠진 사람이었다. 연기 스펙트럼을 넓힐 기회였기 때문에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미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도 무슨 예능 촬영 중인지 주변에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가득했다. 태주는 혹시라도 눈에 띌까 슬금슬금 피했다. 문제는 저 사람들을 지나가야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음이 녹기 전에 들어가야 할 텐데.’
길을 걸으면서 촬영 중인 걸 보니 금세 지나갈 것 같았다. 태주는 과자를 까먹으면서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냐우웅.”
‘쉿! 좀만 기다려.’
멈춰 선 태주가 신경 쓰였는지 태산이 다가왔다. 태주는 동석이 형님과 출연자들이 길에 멈춰서 한참 떠드는 것을 태산이를 안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형님 그냥 편의점에서 라면이나 먹으면서 인터뷰하죠?”
“아니, 그래도 저녁은 잘 챙겨 먹어야지. 라면 가지고 되겠어.”
“형님 말이 맞데이. 사람은 밥심이다.”
“어?”
길 한쪽에 비켜 서 있던 태주와 동석의 눈이 마주쳤다. 태주는 다가오려는 동석에서 손을 흔들어 거절한 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지나가려 했다.
“태주야!”
‘앗. 왜 오시는 거예요. 그냥 가시라고요.’
“하하하. 형님 오랜만이에요.”
“너 왜 그냥 가?”
“아니, 촬영하시는 것 같아서요.”
태주의 팔을 동석이 꽉 붙들었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는 듯했다.
“태주 너 여기 사니?”
“어, 네. 저기 사는데요.”
태주가 붙들리지 않은 다른 팔로 앞쪽의 건물을 가리켰다. 동석과 같이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뭐지?’
“이런, 이런. 이런 일도 다 있네.”
“원래 이렇게 지나가다 아는 동생을 만나기도 하고, 그러는 거죠.”
“그렇지. 동생의 동생이면 우리 동생도 맞지?”
“그렇지요. 원래 이렇게 다 형, 동생이 되는 거예요, 안 그래요?”
“하하. 그렇죠? 그럼 촬영 힘내세요, 저는 이만.”
배동석이 현재 촬영하고 있는 것은 ‘소소한 동네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게임에서 획득한 예산 안에서 미션 지역의 명물이나 명소를 구경하고 저녁 식사까지 해결해야 했다.
문제는 배동석과 mc 두 명이 들른 명소였다. 먹거리로 유명한 망원시장이 오늘 일행이 들른 명소였다. 세 사람은 아침도 못 먹었다는 핑계를 대며 예산을 다 쓸 정도로 주전부릴 하고 말았다.
저녁 식사와 함께 인터뷰를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 이미 세 사람은 식사에 필요한 예산까지 모두 사용하고 말았다.
“태주야 저녁 먹었어?”
다정하게 말을 거는 동석에 소름이 끼치는 느낌이었지만, 태주는 솔직하게 이제 들어가서 먹을 생각이라고 답했다. 대답을 들은 동석이 반색하는 게 조금 불안했지만 설마 촬영 중인데 무슨 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럼 형님 촬영 잘하시고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태주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예감에 속도를 높여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뒤따르는 인기척이 사라지지 않았다.
“왜 따라오세요?”
“에이, 방향이 같은 것뿐이야.”
“그래요. 설마 저희가 오늘 처음 뵙는 분을 따라가겠어요?”
“그라지요. 자아, 먼저 가세요.”
태주는 좀 전에 촬영진들이 가던 방향도 같은 방향이었기 때문에 의심을 거두고 건물로 들어갔다. 뒤편의 출연진이 서로 눈짓을 한 후 소리를 죽여 쫓고 있었지만, 태주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려달라 칭얼대는 태산이를 추슬러 엘리베이터를 타다, 동석과 두 명의 mc가 따라 타고 나서야 눈치를 챘다.
“형님?”
“몇 층이야?
“어, 5층이요. 아니, 이게 아니고요.”
태주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이미 동석과 mc들은 제작진과 타협을 하고 있었다. 얻어먹는 것이니 예산과 상관없는 것이다, 인당 얼마로 계산해야 한다며 실랑이하고 있었다.
“저, 제가 저녁을 대접하는 건가요?”
“응. 배고프다. 저녁 메뉴 뭐야?”
“메뉴는 햄버그스테이크긴 한데요.”
‘악. 나 이걸 왜 대답하고 있어.’
태주는 햄버그스테이크를 먹을 때 마실 탄산수와 얼음을 사러 다녀오는 중이었다. 태산이 산책도 시킬 겸 느긋하게 다녀오다 배동석 일행에게 붙잡혔다.
“에이, 형님. 같은 소속사 후배 집에 방문하면 사람들이 욕해요. 짜고 친다고.”
“괜찮아. 괜찮아.”
“아니, 그러다 욕먹는다니까요.”
태주가 동석을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촬영진이 우선 찍고 방영하기 힘들다고 하면 들어내고, 미션을 실패시키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태주는 몰랐다.
게다가 동석에게 붙들린 순간부터 빠르게 자리를 피하는 모습까지 모든 장면을 찍고 있었는데, 예능에 익숙하지 않은 태주는 눈치채지 못했다. 예능 촬영은 거의 모든 순간을 담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찍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태주는 동석이 저녁을 대접받길 원하니, 그저 집에서 식사하는 장면만 찍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숨기지 못한 당황한 표정이나, 잘 생긴 동네 백수 같은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꽤 재밌는 장면이 연출된 걸 미처 몰랐다.
*
5층까지 올라왔지만, 아무래도 촬영은 아닌 것 같아서 태주는 현관문이 보이자 등을 돌려서 사람들을 막았다.
“하하하. 형님, 내려가시는 엘리베이터는 저쪽이에요.”
“훗. 이 정도 방해쯤이야.”
태주의 어쭙잖은 방해를 동석은 대수롭지 않게 물리쳤다. 그저 가볍게 태주를 들어서 옆으로 치운 게 다였다. 온갖 액션을 대역 없이 모두 소화하는 사람답게 완력도 기술도 좋았다. 태주는 어어 하는 사이 동석의 손에 들려 한쪽으로 치워졌다.
방해꾼을 치운 동석이 당당하게 벨을 눌렀다. 잠시 기다리자 태우가 누군지 묻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뭐 많이 샀어? 왜 벨 눌렀어, 엇?”
놀라서 굳은 태우 대신 현관문을 활짝 열은 동석이 안으로 들어서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태주는 이미 벌어진 일에 한숨을 내쉰 후,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 되어서 따라 들어갔다.
*
주방에는 태우가 만들어 놓은 햄버그스테이크가 여러 개 있었다. 여분으로 만들어서 보관하려던 것이었다. 동석을 따라 들어온 mc 들이 숫자를 세어본 후에 인원수대로 먹고도 남는다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던 태주는 벌써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골치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태주는 식사 준비가 되는 동안 사람들에게 대접할 과일을 꺼냈다. 정원을 얻은 후로 집 냉장고에 과일이 떨어진 적은 없었다. 정원에서 워낙 많이 가져오기에 태우가 젤리나 셔벗으로 만들어 두기도 했다.
과일을 가지러 간 사이에 이미 거실은 카메라가 세팅되어 있었다. mc 두 명과 동석은 소파에 자리 잡고 촬영을 하고 있었다. 태주가 커다란 쟁반에 수북하게 쌓인 과일을 챙겨오자 잠시 대화가 멎었다.
태주는 테이블 위에 과일 쟁반을 내려놓다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태산이가 어느샌가 mc 들 사이에 앉아 촬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mc 형규가 대사를 하면 옆에서 맞장구치듯이 ‘냐웅.’이라고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집주인께서 오셨네요.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소소한 동네 여행’ 시청자 여러분. 신인 배우 이태주입니다.”
제작진들이 가볍게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mc 효동은 자리를 태주에게 내주고 주방으로 향했다. 촬영진 중 한 명이 카메라를 들고 따라가는 게 보였다.
“이 친구가 방송을 알아. 여기 카메라 정 가운데에서 벗어나질 않아.”
mc 형규가 소파 정 가운데 앉아서 냥냥 거리는 태산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태산이가 방송에 좀 익숙해서 그래요. 이래 보여도 이미 데뷔도 한 프로 연기자입니다.”
“응? 아니 이렇게 어린 새끼한테 벌써 밥벌이를 시켰어요?”
“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어휴. 요새 먹고살기 힘들다. 그치? 태산아?”
“냥!”
짓궂은 mc 형규의 말에 반박하기도 전에 대화 상대가 바뀌었다. 촬영진은 예능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버벅대는 태주도 태주와 다르게 시기적절하게 냥냥 거리는 태산이 모습도 모두 빼놓지 않고 촬영했다.
태주가 거실에서 촬영하는 동안, 태우는 mc 효동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개그맨을 워낙 좋아하는 태우는 상기된 얼굴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럼 평소에도 식사 준비는 태우, 네가 하는 거야?”
“네, 형은 완전히 똥 손이에요.”
“크흐흐. 보셨지예? 잘생기면 뭐합니까? 요리는 똥 손인데.”
올해로 경력 19년 차 개그맨인 mc 효동은 태우와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해서 신기해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십 년 전 자신이 찍은 프로그램을 알고 있는 것도 특이했다.
“제가 원래 박경진 누님 팬이에요. 그리고 코미디 프로를 좋아해서 자주 봐요.”
“보소보소. 이래 코미디 좋아하는 사람이 원래 재주가 많아.”
“큭큭.”
주방 안은 어리바리 타는 태주를 놀리며 즐거워하는 거실과 다르게 화기애애했다.
*
갑작스러운 예능 촬영이라 당황했었는데, 식사자리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사람 수 만큼이나 대화 주제는 다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린 집주인들을 배려해서인지 논란거리가 될만한 것들은 꺼내지 않았다. 특히 형제 둘만 사는 이유에 관해서 한 번쯤 물어볼 법도 했는데, 누구도 화제로 올리지 않았다.
레모네이드와 애플파이 후식까지 챙긴 세 사람은 다시 거실에서 촬영의 마무리 장면을 찍고 있었다. 한편 태우는 이미 식사가 끝났는데도 주방에서 나오지 않고, 무언갈 만들고 있었다. 태주가 슬쩍 다가가서 보니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다. 양이 상당한 걸 보니, 늦은 시간까지 촬영하는 제작진들에게 대접할 생각인 것 같았다.
‘누구 동생인지 참.’
태우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태주가 옆에서 제작진에게 줄 음료를 준비했다. 형의 모습을 흘깃 본 태우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주방에 서 있는 모습을 카메라 한 대가 촬영하고 있었다.
*
갑작스러운 태주의 예능 출연에 사무실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배동석이 직접 우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연유를 설명했다. 우 팀장은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전해 들은 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급스럽고 천재적인 이미지로 홍보하자는 결론을 낸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동네 백수 모습으로 예능에서 버벅대며 촬영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소소한 동네 여행’ 촬영진과 출연 계약을 하고 왔지만, 여전히 황당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부잣집 도련님, 천재 프로듀서 그 외 준비된 단역과 조단역 오디션에서 기획했던 이미지를 쌓을 생각이었는데, 모두 새로 짜야 할 것 같았다.
“얘기는 들으셨죠? 이태주 배우님이 배동석 배우님과 ‘소소한 동네 여행’에 출연을 하셨다고 하네요. 뜬금없이요.”
“···.”
견우는 우 팀장님의 눈초리가 따가워 슬쩍 고개를 돌렸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태주 덕에 일을 다시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뭐 이미 계약서에 도장도 찍고 온 마당에 뭐라 할 생각은 없어요. 우선 앞으로 이태주 배우님 관한 일을 어떻게 할지 논의할 겸 해서요.”
“어제 촬영한 건 언제 방영됩니까?”
“2주 뒤요.”
“촬영본을 못 봐서 어떤 이미지로 나올지 모르겠네요.”
“동네 백수랍니다.”
회의실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닫았다. 제대로 활동을 하기도 전인 신인 배우가 동네 백수 모습으로 예능에 먼저 나오게 생겼다.
“그, 친근한 이미지로 밀어볼까요?”
“어리바리 탔다는데요.”
“억. 대체 왜? 그 얼굴을 가지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지만,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저 편집이 어떤 방향으로 나오는지에 따라 홍보도 방향을 정하기로 하고 회의를 끝내야 했다.
회의가 끝난 후, 우 팀장은 견우를 따로 불러 오디션 리스트를 새로 짜라는 말을 했다. 버스킹 촬영 전에 들어갈 수 있는 촬영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신인의 입장이니, 두 달 남짓의 시간 동안 한 번이라도 더 현장에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견우는 태주와 상의해서 오디션 볼 목록을 정하겠다고 얘기한 후에 사무실을 벗어났다. 등 뒤로 우 팀장이 배동석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신랄하게 욕하는 소리가 울렸다.
배동석이 억지를 부려서 태주를 예능에 출연시키는 걸 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 태주가 ‘소소한 동네 여행’ 카메라에 담겼을 때 바로 연락을 줬다면, 회사에서 대응하기 훨씬 나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배우인 태주나 배동석이 연락을 잊더라도 매니저인 그는 회사에 연락했어야 했다. 해야 할 일을 잊은 그가 우 팀장님에게 질책을 듣는 것은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