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3
22. 흔한 기획사 업무
정원은 난쟁이들의 소환 시간이 끝나기 전에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태주는 난쟁이들이 꾸며준 정원이 마음에 꼭 들었다. 그들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묻자, 그들은 솜사탕 무지갤 원한다고 답했다. 식초를 만든다고 많이 잘라냈지만, 아직 반도 넘게 남아있어서 태주는 기쁜 마음으로 솜사탕 무지개를 잘라 선물했다.
태산이와 단단도 새로 꾸며진 정원이 마음에 드는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확인하고 있었다.
태주는 희와 과실수들이 심긴 구역을 확인하러 갔다. 에릴의 말에 따르면 한동안 과실수는 영양이 많은 비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과일을 며칠 동안 수확하지 말고 그대로 쉬게 해주는 것도 좋다고.
“희, 며칠간은 열매를 따지 말자. 나무들이 휴식이 필요하데.”
“응, 태주. 나무는 쉬어야 해.”
과수원에서 나와 온실 방향으로 가자 향긋한 꽃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정원 이곳저곳에 심어둔 야생화를 온실 근처와 돌담 주위로 옮겨 놓았더니 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쿡쿡.”
“태주, 왜?”
“아무것도 아니야.”
야생화 포기를 옮긴 후에 정령들이 팔로 이마를 훔치던 광경이 떠올랐다. 땀을 흘린 것도 아닐 텐데 어디서 보았는지 그런 동작들을 하곤 꺄르르 웃었다.
“이렇게 꾸미니 정말 좋다. DP는 바닥이지만.”
“응, 태주. 정말 좋아.”
태주가 확인해보니 이제 겨우 몇만 DP 정도 남아있었다. 백만 DP가 넘게 있었는데, 어느새 다 써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온실에 미로까지 지었으니 한동안 DP를 쓸 일은 없어 보였다.
*
태주는 매니저님이 챙겨온 리스트에 있는 역할이 상당히 다양해진 걸 알아챘다. 전에는 기획 회의에서 나온 이미지에 어울리는 역할 만 골라왔었는데, 다시 받은 리스트는 동네 양아치 역도 있었고, 왕따 당하는 학생역도 있었다.
“역할이 다양해졌네요. 지금 오디션 보고 들어갈 수 있는 것들만 챙기신 거죠?”
“네, 버스킹 촬영이 6월 초에 들어갑니다. 그 전에 사전미팅이나 리딩도 있으니 실제로 몇 건이나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흠. 그럼 여기 PC방 양아치 역하고, 뺑소니 목격자 역, 짝사랑 남 역 이렇게 오디션 볼 수 있나요?”
“그렇게 준비하죠.”
견우는 태주가 고른 역할들이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연기력이 충분하니 문제가 될 건 없겠지만, 태주가 고른 배역만 보면 다양한 체험을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우로서 좋은 자세였다.
“이번 달은 오디션만 보겠네요.”
“하하. 그런데 예능은 어떠셨습니까?”
“어휴, 말도 마세요.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쉽지 않았어요. 저보다는 태산이가 잘했어요.”
그러면서 태주는 태산이가 mc들과 소통하고 귀염을 떨던 장면들에 대해서 얘기해주었다. 아마 방송이 나간다면 태산이의 팬이 더 많아질 게 분명했다.
*
사무실 안에 긴장이 돌았다. 배우 전문 기획사라 사실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예능을 모니터링하는 일은 자주 없었다. 하지만 이번 주는 달랐다. 배동석과 이태주 두 명의 배우가 ‘소소한 동네 여행’이라는 예능에 나오기 때문이다.
“팀장님. 우리 태산이도 전속 계약서 써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음. 고려해 보겠습니다.”
“하하하.”
“호호호호.”
태산이도 예능에 함께 나온다는 얘기에 사무실 사람들 사이에 기대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워낙 귀엽고 붙임성이 좋아서 태산이는 사무실 사람 누구나 좋아했다. 가끔 태주가 데려오는 날이면 사람들의 사진 촬영소리가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
“자, 이제 시작하니까, 조용히 집중합시다.”
배동석이 반려동물과 함께 나오는 예능을 한 번 찍은 후에 험악한 이미지를 벗게 된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외모 때문에 성정과 다른 잔인한 역할이 많이 들어와서 오랫동안 고민을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에 태주가 휘말린 건 조금 곤란했다.
배우에게 처음 생기는 이미지는 꽤 오래간다. 사람들은 배우 이름은 몰라도 ‘어디에 누구로 나왔잖아.’라고 하면 쉽게 기억해내곤 한다. 그만큼 배역의 이미지가 주는 영향이 크다. 게다가 맡은 역할을 평상시 모습에 이입하는 사람도 꽤 있어서, 우 팀장은 가능하면 태주에게 좋은 역할을 맡게 하고 싶었다.
‘부디 괜찮게 나와야 할 텐데요.’
*
평일 저녁 11시에 시작하는 예능이라 그런지 본래 시청률이 아주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전에 하는 드라마가 꽤 인기 있어서 그대로 채널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덕분에 배동석과 태주가 나온 예능은 나쁘지 않은 시청률로 시작할 수 있었다.
“커뮤니티 반응은 나쁘지 않아요. 배동석 배우님하고 두 mc분이 너무 잘 드셔서 그런지 호의적인 내용이 많네요.”
“그러네요. 다들 군것질거리 대란이 일어난 것 같네요. 배달시키자는 얘기가 태반이네요.”
“저희도 분식 좀 시키죠. 저는 떡볶이랑 김밥이요.”
“이미 시켰어. 신경 쓰지 말고 일봐.”
화면에 떡볶이가 나오자마자 배달 앱으로 분식 세트를 주문한 김 이사였다. 직원들의 환호를 받으며 승자의 세레머니를 한 김 이사가 다시 자리에 앉아서 직원들과 화면을 같이 봤다.
무서운 식탐을 보이는 세 명의 출연진에 게시판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프로그램의 내용보다는 뭐가 맛있는지, 어떻게 먹어야 더 맛있는지 난상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트리즈의 직원들도 슬쩍 분식대전에 참가했다. 떡볶이 국물에 김말이가 더 맛있네, 달걀이 더 좋네, 의견이 분분했다.
‘태주야, 저녁 먹었어?’
화면 안에서 배동석이 다정하게 식사 여부를 묻고 있었다.
“풋.”
“크큭.”
“어쩜 좋아. 아니 뒤에 따라오는데 왜 몰라.”
mc들이 몰래 따라가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둔한 모습에, 엘리베이터에서 나누는 맹한 대사까지 화면 속 태주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견우야 원래 태주 씨가 저렇게 좀 허당기가 있어?”
김 이사의 질문에 대답하기 참 난감했다. 그렇다고 하자니 자신의 배우를 흉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라고 부정하자니 현관문을 막았다가 배동석에게 가볍게 들려서 치워지는 모습이 참 어설펐다.
“어머! 태주 씨 알아보는 댓글도 있네요. ‘사랑비가 내리다.’에서 나온 도련님 아니냐는데요.”
“그보다는 흔한 동네 백수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네요.”
와아!
노트북으로 커뮤니티의 반응을 살피던 직원들까지 모두 한마음이 되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태산이가 자리를 잡은 mc들 사이로 뛰어올라 화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잠깐 뒷모습을 보여준 태산은 곧 카메라 정면으로 돌아앉았다. 그리고는 배동석과 mc 들이 인사를 할 때 같이 냥냥 거리면서 인사했다.
“세상에. 아까 안겨 있던 것도 모자라서 화면에 제대로 나오네요.”
“우 팀장. 우리 태산이 포털에 프로필 올려야 하는 것 아니야?”
“안 그래도 이태주 배우님한테 물어보려 했습니다. 견우 씨 이태주 배우님한테 태산이 홍보 도와드려도 되냐고 문자 넣어 보세요.”
직원들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견우를 쳐다봤다. 몇몇은 태산이 사진을 폰에서 고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황당하게 보던 견우에게 태주의 허락과 감사하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견우가 오케이 사인을 하자 직원들이 너도나도 커뮤니티에 태산이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어째 우리 배우님 두 분보다 태산이 홍보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은데.’
“김 실장아, 그거, 태산이 공 쫓아가는 동영상 네가 찍었지?”
“제가 이미 올렸어요. 링크 드릴까요?”
“응, 줘봐. 이런 건 다 같이 봐야 해.”
“대표님도 보고 계시나 봐요. 좋아요 다 누르셨네.”
견우의 의문을 뒤로하고 기획사 직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서 홍보에 힘을 쏟았다.
*
커뮤니티 반응도 예능 시청률도 모두 괜찮게 나왔다. 태주와 배동석의 솔직한 모습이 상당히 좋게 비추어진 것 같았다. 경악한 표정, 넋이 나간 표정, 허술한 행동 등 연기가 아니라면 보여줄 리 없는 모습들이 가감 없이 나온 것이 시청자에게 좋게 비친 것 같았다.
특히 마지막에 동생과 둘이 다정하게 주방에서 샌드위치를 만드는 장면과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후에 올라온 제작진의 감사인사 등 인간적인 면모가 많이 부각 되었다.
뜻하지는 않았지만, 예능 출연 덕분에 다양한 이미지와 의외성을 갖게 된 점은 긍정적이었다. 기존 계획대로 이미지 관리를 했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태주의 피지컬은 독보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초반에 대중에게 호감을 얻는 것만은 못했다. 끼워팔기 아닌 끼워팔기를 한 꼴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예능 출연은 태주에게 나쁘지 않았다.
배동석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가장 이득을 본 것은 다름 아닌 태산이였다. 태산이가 예능 후반부의 모든 화제를 집어삼켰다. mc 형규와 같이 태주를 놀리고 피디의 무릎에 드러누워 애교를 떨고, 햄버그스테이크를 덮치다 잡히는 등 쉴새 없이 카메라 화면에 등장했다. 사랑스러운 외모와 장난기 많은 행동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우 팀장님. 태산이 출연 섭외가 또 왔는데요.”
“어딘데요?”
“‘연예 세상’이요. 이태주 배우님이랑 태산이를 인터뷰어로 섭외하고 싶다고.”
“네? 인터뷰어요?”
연예 세상에서 동물과 함께 하는 힐링 인터뷰라는 코너를 준비 중인데, 마침 태주와 태산이 눈에 띈 것이었다. 인터뷰는 동물과 놀면서 5~7분 안팎의 짧은 인터뷰를 진행한다. 주로 가벼운 일상이나 근황 등의 얘기를 나누게 된다. 최대한 편안하고 온화한 분위기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기획이었다.
“기획은 상당히 마음에 드네요. 일주일에 한 번이고, 이 정도면 이동시간까지 해도 반나절로 충분할 것 같네요.”
“그렇죠. 신인이라 페이는 크지 않지만, 데뷔 초에 이런 고정 자리가 하나라도 있으면 홍보에도 상당히 도움이 될 겁니다.”
“좋아요. 이건 내가 이태주 배우님하고 바로 얘기해서 정할게요.”
그저 태산이 화제를 이용하려는 게 아닌 제대로 된 기획과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 팀장은 이 소식을 곧바로 견우와 태주에게 알렸다.
*
태주는 예능 세상의 인터뷰어 건을 큰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태산이가 촬영장 분위기에 익숙해질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촬영이 시작되면 태산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희와 단단이 있는 정원에 두고 다녀올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태산이 싫어해서 그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태우와 연우에게 맡기기엔 둘 다 너무 바빴다. 공부와 미튜버 일을 병행하는 둘은 한창 활동적인 태산이와 놀아줄 시간이 부족했다. 덕분에 회사에 종종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런 인터뷰 일을 하면서 태산이 현장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영화나 드라마 촬영현장에 데려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어린 새끼라 무리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저 촬영장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면 그걸로 충분했다. 태주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뒤집어 누운 태산이 배를 살살 긁어 주었다.
“이러다 태산이가 형보다 더 인기 많겠다. 큭큭.”
“니아웅.”
태주는 가끔 태산이 자신의 말을 전부 알아듣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대답하는 타이밍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나중에 DP에 여유가 생기면 붉은 상자를 열어 볼 생각이다. 동물 언어 통역 아이템 같은 게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
“어? 이 알람을 놓쳤네. 희도 놓치다니 별일이네.”
태주는 태블릿에서 식초가 완성되었다는 알람을 발견했다. 정원을 꾸미기 직전에 만들어서 창고에 두었는데 그대로 잊고 말았다. 아마 그날 난쟁이들과 꾸민 정원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것 같았다. 오늘 정원에 들르면 통을 열어봐야겠다고 기억해 두고, 버스킹의 대본을 들었다.
촬영이 가까워지자 태주는 정원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미 상대역의 대사는 물론 지문까지 통째로 외운 대본이었지만, 손에서 놓지 못하고 읽고 또 읽었다.
지금 태주는 예전과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이 시간들 속에 과거와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전과 다른 환경과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 벌어질 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태주는 이미 촬영했던 영화나 드라마를 다시 찍을 생각은 없었다. 유일하게 후회로 남았던 바이올린 영화는 선율을 찍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당시에 연주장면은 직접 찍었지만, 사용된 곡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한 곡이었다. 곡을 제대로 익힐 시간이 많지 않았었다. 그 점이 못내 후회로 남았었다. 하지만 선율에서 직접 제대로 연기하고 연주하면 분명 만족하게 될 것이다.
버스킹은 이전 생에선 보지 못했다. 정한선을 좋아해서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를 대부분 챙겨 봤었지만, 버스킹이라는 영화는 없었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 촬영하지 못한 대본인 것 같았다.
세상에 없던 영화가 나오고 태주는 예전보다 4년 이르게 데뷔를 했다. 얼마나 많은 변화가 더 생길지 모르지만, 태주는 이미 뻔히 결승점을 알고 있는 길을 다시 가는 것보다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는 게 더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