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33
232. 기억 속의 영화 >
차려진 음식을 적당히 먹고 나서 김은혜는 돌아갔다. 출국 준비를 미뤄둔 채 나온 김에 태주를 보러 온 것이라 그녀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었다. 그래도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보통 사람이 삼사일 정도 떠들 분량을 혼자 떠들고 돌아갔다.
“정, 정신없었어요.”
“미안, 연우야. 내가 여기 주소를 알려주는 바람에.”
“아니에요.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나 김은혜 누님 영화 다 봤는데. 평소 모습이 이런 줄 상상도 못 했어.”
“나도. 진짜 예상 밖이었어.”
연우도 태우도 김은혜의 실제 모습에 환상이 깨진 모습이었다. 범죄자를 뒤쫓는 카리스마 있는 검사,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 긴 시간 동안 추억하는 순애보. 영화 속의 매력적인 모습은 오늘의 식사 자리에서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우, 태주야. 너 차기작 걔랑 하는 거지?”
“네.”
“걔랑 나랑 장르가 달라서 다행이다, 정말.”
“그러고 보니까 형이랑 나이 차이 별로 안 났죠? 전에 같이 작업한 적 없어요?”
“지금 보니까, 내가 운이 좋았나 봐. 나 드라마 할 때, 저쪽은 영화 하고. 내가 영화 할 때 저쪽은 해외 활동 중이었거든.”
“부, 부럽네요.”
진심이었다. 회귀 전 이 시기에 태주의 활동 방향은 지상파 드라마였었다. 김은혜는 영화 촬영에 주력하는 중이었다. 그가 영화 쪽 작업을 병행하기 시작했을 때 김은혜는 미국에서 시즌제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었다.
태주는 나이 차이도 좀 있었고, 활동 시기나 분야가 겹치지 않아서 만난 적이 없었는데, 진혁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았다.
“네 드라마 김정훈 감독이라고 했지?”
“네. 김은지 작가님 대본에 김정훈 감독님 연출이요.”
“겪어 보면 알겠지만, 김정훈 감독은 좀 피곤한 스타일이야.”
“어떤 스타일인데요?”
“맘에 드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주야장천 찍는 스타일. 스태프나 배우나 죽어나는 현장으로 유명해. 그나마 결과물이 괜찮아서 계속 기용되곤 있지만, 피하는 사람도 꽤 있어.”
김정훈 감독과 작품을 하는 건 회귀 전후를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었다. 김은지 작가와는 대화도 잘 통하고 취향도 비슷해서 문제가 없었는데, 김정훈 감독과는 어떨지….
계약서를 쓸 때도 촬영 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얘기할 때도 딱히 까다로운 사람이라고는 못 느꼈는데, 사람 좋은 진혁이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데뷔 초기에 김정훈 감독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거든. 그때 엄청 깨졌었어. 같은 신을 스무 번도 넘게 찍었다니까.”
“무슨 신이었는데요?”
“그렇게 까다로운 신은 아니었어. 한석기 선배랑 같이 범인 검거하는 신이었어. 지금이라면 쉽게 할 텐데, 그땐 왜 그리 얼었는지.”
“아아. 불량 형사 시리즈.”
“어, 그거. 그게 벌써 십몇 년 전 일이니 한참 전이지만, 스타일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 태주는 회귀 전 김정훈 감독이 어땠나를 떠올려 봤다. 그에게 김정훈 감독의 작품 콘택트가 왔던 적은 없었다. 아니 그가 데뷔한 후로 김정훈 감독의 작품이 극장에 걸린 적이 없었다. 나이 때문인지 성격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김정훈 감독의 새 작품을 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 뉴플릭스에서 투자받는다며?”
“네. 투자 단위가 달라요. 편당 제작비가 어마어마해요.”
“엄청나네. 영화 제작비랑 맞먹겠는데?”
“네. 비슷할 거예요.”
정확한 금액을 밝히기 껄끄러웠던 태주가 손가락을 두 개를 펼쳐서 진혁에게 보여 주었다. 편당 제작비 약 20억. 총 8화로 구성된 1시즌 제작비가 거의 160억이었다. 뉴플릭스의 콘텐츠 제작 투자 중 북미 지역을 제외하고 가장 큰 규모라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가 회귀할 즈음에는 그보다 더 큰 자본이 들어가는 드라마들이 왕왕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놀랄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예전 SBC에서 방영했던 도 200억이 훌쩍 넘는 제작비가 투입되었지만, 그건 24화로 편당 제작비가 의 반도 되지 않았다.
“기사는 아직 안 나오던데.”
“네. 제작하고 심의받고 하려면 내년 여름쯤 공개하지 않을까 해요. 그 시기 맞춰서 홍보도 시작하겠죠.”
“그러겠지. 진짜 좋은 기회다. 열심히 해 봐.”
“네.”
김은혜가 다녀가면서 분위기가 잠시 어수선해졌었지만, 금세 다시 돌아왔다. 정신없던 사람이 간 후엔 느긋한 시간이 이어졌다. 천천히 음식을 먹으면서 근황을 얘기하고 식탁에 매달리는 더미와 밤이를 말리기도 하면서 편한 시간을 보냈다.
*
캘리포니아에 있는 거대한 저택의 한 침실은 바깥과 다르게 무척 어두침침했다. 침실 안은 약한 조명 하나만 남기고 모두 꺼 둔 상태였고 창은 빛이 들어오지 않게 커튼으로 모두 가려진 상태였다. 미약한 빛만 남아 겨우 사물의 형태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방안은 어두웠다.
-쨍그랑! 쨍그랑!
“빌어먹을! 이태주! 죽여 버릴 거야!”
이태주와 얘기를 나눴던 호텔 휴게실에서 깨어났을 때보단 많이 진정된 상태였지만, 여전히 박재우는 분노를 잠재우지 못하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분노를 삭이더라도 거울이나 유리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다시 살아날 게 뻔했다.
“크윽! 젠장!”
어떤 방법으로도 얼굴에 찍힌 낙인을 지울 수 없었다. 뺨에 새겨진 ‘봉인’ 두 글자가 끔찍했다. 통증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낙인이 찍히던 순간의 무력감과 모멸감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그는 사건 직후 다른 사람들의 반응으로 이 글자가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지만, 신경을 끊을 수는 없었다. 유일하게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이라 무시할 수만 있다면 전과 다름없이 생활할 수 있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시스템.”
-…….
“인벤토리.”
-…….
“젠장.”
침실 소파에 몸을 묻은 박재우는 어둠 속에서 수도 없이 시스템 창을 호출하고 있었다. 벌써 며칠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시스템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써 온 신체 일부처럼 느껴지던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오류가 생겨서 가장 강력한 기능인 기억 조작은 쓸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남은 몇 가지 기능은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특히 인벤토리와 그 안에 담아 둔 아이템은 아주 유용하게 쓰던 것이었다. 그 외에 자막 기능과 시스템 로그 역시 잘 쓰던 기능이었다.
-똑똑똑!
“재우 괜찮아? 닥터 한을 부를까?”
“…후우. 마크. 오늘은 그만 돌아가.”
“재우?”
“닥터 한을 부를 필욘 없어. 내일부턴 일정대로 움직일게,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알았어.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
박재우는 며칠 동안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했던 것과 다른 태도를 마크에겐 보였다. 마크는 수년간 성실하게 그의 곁을 지켜 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크는 다른 사람과 다른 대접을 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절대 나를 배신할 수 없는 인물이지.’
시스템이 먹통이 되기 전에 조작 능력을 써서 조작하기도 했고, 그가 가진 아이템과 능력으로 마크를 완벽한 아군으로 만들어 둔 상태였다. 만약 그가 누군가를 해치라고 명령해도 마크는 아무 의심 없이 최선을 다해서 그의 명령을 따를 것이었다.
문밖에서 노크하던 마크가 멀어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박재우는 마크에게 말하느라 세웠던 몸을 다시 소파에 묻었다. 스케줄을 몇 개 펑크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분노 때문에 어떤 일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스케줄을 소화하게 얘기한 지금도 그는 이태주를 향한 분노를 뿜어내는 중이었다.
박재우는 며칠 동안 침실 안에서 이태주에게 분노하는 한편 자신이 가진 것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가 시스템을 사용해 자신의 위치를 바꾼 시기부터 얻은 것들이 무사한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그가 가진 것 중엔 정상적으로 얻은 것 외에 기억을 조작해서 차지한 것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회귀 전의 정보를 이용하거나 남의 행운을 가로채는 방법으로 얻을 수 있었지만, 몇 가지는 그 방법으론 무리였다. 자격 심사를 보는 몇몇 브랜드나 전용기, 와이너리나 프라이빗 비치 같은 부동산은 모두 능력을 사용해서 얻은 것이었다.
“다행히 무사하군.”
며칠 동안 그가 만들어 둔 인맥이나 자산을 살폈지만,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부자들과 유명인들은 여전히 호의적이었고, 강탈하다시피 했던 부동산이나 자산 역시 그대로 그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모든 걸 확인한 박재우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가 가진 것 중의 일부만을 동원해도 이태주 같은 미약한 존재는 흔적도 없이 짓뭉갤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이태주의 정체 때문이었다.
‘정체를 파악하기 전까진 조심할 필요가 있어. 그 도장 같은 게 더 있을 수도 있으니까. 거기다 그 애새끼랑 경호원의 능력도 범상치 않았고.’
-으드득!
박재우는 이를 악물었다. 탄탄대로였던 그의 배우 인생에 이태주라는 암초가 박힌 상황을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게 참기 힘들었다. 잘난척 진정한 실력으로 자리를 지키라느니 떠들던 이태주를 무너뜨려야지 그의 분노가 사라질 것 같았다. 박재우는 이태주의 정체를 샅샅이 밝힌 후 그가 느꼈던 것들을 그대로 갚아 주겠다 결심했다.
*
파주 헤이리에 자리 잡은 액션 스쿨은 꽤 오랜만에 들르는 곳이었다. 회귀 전에는 영화 촬영 준비 때문에 여러 번 왔었지만, 회귀 후에는 딱히 들를 일이 없었다.
회귀 후 그가 맡았던 배역 중 액션이 필요했던 건 사극 뿐이었다. 액션이 필요한 작품이었지만, 사실 에서는 승마와 국궁 실력이 더 중요했었다.
오늘 그가 들른 액션 스쿨은 용좌에서 무술 감독을 맡았던 정대현 감독이 설립한 곳이었다. 정대현 감독의 유명세는 이미 한국을 넘어선 상태라 실제로 이곳에서 그의 수업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태주가 예전 이곳에서 수업을 받았을 때도 정대현 감독이 아닌 그의 제자에게 수업을 받았었다.
“안녕하세요, 최 팀장님.”
“안녕하세요, 태주 씨. 오랜만이에요.”
“삼 년 만인가요? 잘 지내셨죠?”
“잘 지냈어요. 들어오세요.”
“네.”
액션 스쿨 입구에서 그를 반겨 준 것은 용좌에서 정대현 감독의 소개로 국궁 자세를 봐줬던 최 팀장이었다. 무술 감독답게 여러 가지 무술을 익히고 있는 최 팀장은 특히 국궁과 택견 같은 전통 무예 쪽에 조예가 깊었다.
“대본 확인해 보니까, 태주 씨 배역에는 특별한 액션이 필요하지는 않더라고요.”
“맞아요. 일단은 세자 역할이라 보호 대상이라서요. 다른 배역에 비해 액션 비중이 적은 편이에요.”
“사실 거의 없다시피 하죠. 검은 허공에 휘두르면서 활을 쏘라고 명령하는 장면이랑 쫓아오는 괴물을 떨쳐 내는 장면에서만 휘두르던데요.”
“네. 감독님도 검은 자세랑 기본 동작만 잘 익히라고 하시더라고요.”
“활은 꾸준히 연습하셨어요?”
“음. 감각을 잊지 않을 정도로는요.”
활은 정원의 활터에서 자세나 쏘는 동작을 잊지 않을 정도로만 연습했었다. 그래도 김은지 작가에게 대본을 받은 뒤로는 꽤 열심히 연습해서 제법 그럴듯하게 쏠 수 있었다.
“운동하는 사람이 별로 없네요.”
“다들 액션 스쿨에서 제작하는 영화에 출연 중이라서요.”
“혹시 정대현 감독님도 출연하세요?”
“투톱 중의 한 명이에요.”
“그래서….”
태주는 최 팀장이 얘기하는 영화가 무슨 영화인지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액션 스쿨의 배우들을 위한 작품이었다. 그는 안타까운 표정이 들키지 않게 최 팀장에게서 바로 고개를 돌렸다.
정대현 감독이 출연하는 두 번째 영화는 그의 십수 년 만의 연기 복귀작이었다. 해외 유명 액션 영화 못지않은 액션을 선보인 영화였지만, 평범한 스토리에 부족한 연기력으로 혹평을 받은, 누적 관객 수 만 명을 겨우 넘기는 작품이었다.
‘2주 만에 스크린에서 내려오는데.’
액션이 호평을 받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너무 처참한 성적이었다. 영화는 손익 분기점도 넘기지 못하고 예정보다 일찍 스크린에서 내려와야 했다.
‘어쩔 수 없지. 액션 빼고 다 이상했으니.’
“안녕하세요!”
태주가 부디 정대현 감독이 영화의 성적에 좌절하지 않기를 빌고 있을 때였다. 한 무리의 젊은 배우들이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다.
“태주 씨, 잠시만요. 저쪽 팀 훈련 좀 봐주고 올게요.”
“네. 그러세요.”
새로 들어온 인물들은 모두 태주와 비슷한 또래 같았다. 이십 대 초반에서 후반 사이로 꽤 많은 숫자였다.
“영화 에 출연하는 배우들이라고 합니다.”
“요?”
“네. 박태경 감독의 입니다.”
견우의 말을 들은 태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대현 감독의 영화처럼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아니 잊지 못하는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박태경 감독. 800만 관객을 기록한 히트작 한 편을 낸 후로 꾸준히 영화를 찍는 사람이었지만, 태주는 절대 같이 작업할 마음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비슷비슷한 영화를 찍으며 자기 복제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작업 스타일을 혐오하기 때문이었다.
800만 영화감독이라는 자부심이 컸던 그는 계속 저조한 성적만 기록하는 영화 때문에 무리수를 뒀었다. 자극적인 영상을 찍기 위해 배우들과 협의하지 않은 장면을 요구하고, 촬영 현장에서 안전 테스트도 거치지 않은 스턴트를 요구했었다.
‘저 사람들 가운데서 한 명이 죽는다는 건가? 누구였지?’
근 이십 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참 동안 고민해 봤지만, 사망자의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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