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47
246. 썰매 타기 >
기상 변화. 정확히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오후부터 예정되어 있던 촬영이 모두 취소되었다. 태주는 촬영 일정이 밀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예정된 촬영을 마치면 다음 주 월요일까지 촬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깔끔하게 이번 주 촬영 분량을 끝냈으면 했는데, 쉽지 않네. 그나저나 눈이 이렇게 오는데, 눈썰매장에 갈 수 있을까?’
쉬는 날에 눈썰매장에 다시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하늘에 시커멓게 자리 잡은 먹구름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 앞을 가리는 눈송이는 굵었고 내리는 양도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매니저님.”
견우가 건네는 패딩을 입던 그는 눈이 문제가 아니라, 눈썰매장에 아이를 데려갈 수단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실종자를 찾으러 간 쿠첼루스와 영화 촬영장에 사람들을 도우러 간 2호가 차를 모두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남은 차는 견우가 모는 밴뿐인데, 그건 쓰기 힘들었다. 사적인 외출에 쓸 생각이 없을뿐더러, 주말에 견우가 서울에 가야 해서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었다.
“매니저님 이따 저 펜션에 내려 주시고 바로 출발하세요.”
“아닙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눈 쌓이기 전에 출발하세요.”
“하지만….”
“저 차 없어서, 아마 주말 내내 펜션에 있을 거예요. 남진 형네 차도 있으니까, 급하면 부탁할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알겠습니다.”
핸드폰은 꼭 켜 놓을 것, 외출할 때 미리 연락할 것, 등등. 눈에 젖을세라 패딩 모자를 깊게 눌러 씌운 태주를 분장실로 이끌면서 견우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는 자신의 모습에 같이 돌아가던 미나와 다른 스태프 한 명이 놀라는 걸 알았지만, 잔소리를 멈출 수 없었다. 2호, 하다못해 쿠첼루스라도 펜션에 같이 있었다면 걱정을 덜 할 텐데, 주말 내내 태주 혼자 있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촬영이 취소되어서 태주 일행이 분장실로 돌아가고 있을 때, 분장실에 남은 사람들 역시 촬영 취소 소식을 받았다.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분주히 뒷정리를 시작했다. 월요일까지 분장실을 비워 둬야 해서 스태프들은 잊은 물건이 없는지 두 번 세 번 확인하느라 바빴다.
따뜻한 텐트 안에서 더미와 뒹굴던 태산이 눈에 급하게 움직이는 누나들이 들어왔다. 뒹굴던 자세 그대로 그 모습을 보던 태산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태주였다. 누나들이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태주가 오고 있기 때문인 게 분명했다.
“태사니 이디 와. 이꺼 하자.”
“냐아앙.”
“차카지. 이꺼 하고 태쭈 보더 가자.”
“냐앙.”
태산이는 텐트 한구석에 풀어 놓은 리드 줄을 집어 들었다. 직접 매어 준 적은 없지만, 태주가 매어 주는 걸 여러 번 봐서 방법은 잘 알고 있었다. 하네스 등 쪽 둥근 고리에 리드 줄을 연결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틱, 틱. 투박한 손길에 리드 줄에 달린 갈고리 버튼이 자꾸 미끄러졌다. 조심조심, 살살. 버튼을 꾹 누른 손을 옮기는 태산이 동작이 조심스러웠다
집중하느라 파란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앙다문 입술은 톡 튀어나왔지만, 온 정신이 버튼을 누르고 있는 손끝에 쏠려 있어서 표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달칵.
“앙. 대따.”
“냐아앙!”
“꺄하하하.”
태산이 두 팔을 높이 들고 성공을 외쳤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낸 아이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태산이 새로운 일을 찾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휙휙 둘러보자, 옷걸이 한구석에 아침에 입고 온 옷이 걸려 있었다.
“어머! 산이 옷 입혀줄까?”
“아앙. 사니가 하께.”
“혼자 입을 수 있어?”
“앙!”
슬리퍼도 신지 않고 패딩을 가지러 나온 아이를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안아 들었다. 옷과 아이를 한 번에 안아서 텐트에 내려 준 그녀가 도와주냐고 물었지만, 태산이가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 할 수 있었다. 태산이 왼팔부터 차근차근 패딩에 끼워 넣었다.
태주 일행이 분장실에 도착한 것은 아이가 혼자서 부츠까지 신었을 때였다.
“다녀왔어요.”
“태주!”
“엇차. 우리 산이 형 많이 기다렸어?”
“아이, 타가.”
“미안. 차가웠어?”
“꺄하하.”
겉옷 위에 쌓인 눈을 털어 내며 분장실 안으로 들어서던 일행을 아이가 반겼다. 안아 달라 두 팔을 높이 들고 반기는 모습에 태주가 바로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품에 안긴 아이의 파란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기다리는 동안 텐트 안에서 신나게 뒹굴었는지 아이 머리가 까치집이었다. 태주는 익숙한 손길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이마에 닿은 손길이 차가웠는지, 맑게 웃은 아이가 어깨를 움츠렸다.
“두 사람.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한데, 빨리 정리하고 가자.”
“하하하. 알았어요. 산아. 태산이랑 잠깐만 기다려, 알았지?”
“앙, 아라떠.”
스태프들이 정리한 분장실을 확인하던 미나가 태주를 재촉했다. 아이와 다정하게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날씨가 심상치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촬영지에서 출발할 때부터 내리던 눈은 이젠 앞이 안 보일 지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 쌓여서 이동이 힘들어지기 전에 일행은 최대한 서둘러서 촬영장을 벗어나기로 했다.
*
펜션 거실 소파에 앉은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의 눈에는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는 눈도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벽난로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미동도 않는 아이만 줄곧 보고 있었다.
분장실에서 다정했던 태주와 태산이의 사이는 팬션에 돌아온 후엔 사뭇 달라져 있었다.
태산이는 오랜만에 태주와 둘만 같이 있게 된 것을 기뻐했다. 주말 내내 태주를 혼자서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싱글벙글했었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잠시였다. 태주가 미안한 얼굴로 눈썰매장에 데려가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꺼내서였다. 쿠첼루스와 2호가 차를 전부 타고 가 버려서, 두 사람이 눈썰매장에 갈 방법이 없었다. 태주에게 눈썰매 타는 모습을 자랑하려던 태산이 계획이 시작도 하기 전에 망가져 버렸다.
“산아, 형한테 얼굴 안 보여 줄 거야?”
“….”
“다음 주에 작은 형아들 오면 눈썰매장에 가자. 응?”
“….”
태주가 얼굴을 보려고 몸을 떼어 내려 하자, 목에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절대 얼굴을 들려 하지 않는 아이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몇 시간 째 눈이 멎지 않는 데다가 기온이 낮아서 아직 낮인데도 길이 얼고 있었다. 만약 내일도 이런 상태라면, 차를 렌트하러 가는 일도 쉽지 않아 보였다.
-철컥.
“태주야, 저녁 어떻게 할래?”
계속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인 태산이 등을 쓰다듬으면서 달래고 있을 때였다. 별채에 머무는 이남진이 둘이 있는 본채로 건너왔다.
“뭐야? 왜 그러고 있어? 애기 어디 아파?”
“아뇨. 아픈 건 아니고요. 제가 약속을 어겨서 그래요.”
“네가? 무슨 약속을 어겼는데 그래?”
“원래는 내일 눈썰매장에 데려가기로 했었거든요. 그게 힘들 것 같다고 했더니, 실망했나 봐요.”
아이는 눈썰매 타는 게 재밌었는지, 요 며칠 사이 여러 번 그 얘기를 꺼냈었다. 이남진이 보기에 태주는 아이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서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낼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왜 눈썰매장에 안 데려가겠다는 건지 의아했다.
자신의 의문을 읽었는지, 태주가 곧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펜션에 아무도 없네?”
“네. 저랑 산이, 태산이뿐이에요.”
“일이 이렇게 겹칠 수도 있나?”
“왜요?”
“아니, 우리 매니저도 휴가 줬거든. 촬영 취소됐다고 하길래. 고향 집 가서 쉬다 오라고 보냈지. 여기서 한 시간 거리거든. 부르면 오긴 할 테지만….”
이남진 역시 태주와 마찬가지였다. 급하면 태주 쪽 차를 빌려 탈생각에 매니저에게 휴가를 준 상태였다. 두 사람의 난처한 눈빛이 마주쳤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이남진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더니, 소파 한구석에 앉아서 열심히 손을 놀렸다. 그는 휙휙 빠른 속도로 스크롤을 올리면서 무언갈 검색했다.
“차는 빌리기 어려울 것 같은데…. 렌트 카 회사가 전부 시내에 있다.”
“역시 그렇죠?”
“어. 그건 그런데, 여기서 얼음 축제하는 곳이 멀지 않은가 봐. 걸어서 이십 분? 그 정도네.”
“얼음 축제는 다음 주부터인데요. 동생들이 축제 시기에 맞춰서 오기로 했거든요.”
“축제 전이라도 스케이트랑 얼음 썰매는 빌릴 수 있다는데? 대여소만 먼저 연대.”
정식으로 얼음 축제가 열리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방문객들의 이른 발걸음은 이미 축제가 열리는 유원지 호숫가로 향하고 있었다. 얼음 조각이나 빙벽 같은 전시물은 볼 수 없지만, 스케이트와 썰매를 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축제 전에 찾아오는 방문객을 위해 대여소는 지난 주말부터 문을 연 상태였다.
“민속놀이나 빙어 낚시 같은 건 못 하겠지만, 애기 좋아하는 썰매는 탈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요?”
“어. 좀 멀긴 한데, 산책로 따라서 가면 되는 거라. 헤매진 않겠다.”
“산아, 들었어? 내일 얼음 썰매 타러 갈까?”
“…어듬 떨매?”
태주는 이남진이 얼음 축제 설명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태산이 몸이 움찔움찔하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마 호랑이 몸이었으면, 귀를 쫑긋거렸을 것이다. 이야기에 조금씩 반응을 보이던 아이가 고개를 들게 된 것은 이남진이 얼음 썰매를 타는 아이들 사진을 보여 주었을 때였다.
“내일 썰매 타러 갈까?”
“앙!”
“하하하. 이제야, 우리 산이 같네.”
눈썰매는 아니지만, 썰매를 타러 간다는 소식에 마음이 풀린 것 같았다. 집에 온 뒤로 줄곧 매달려 있더니, 그제야 그의 품에서 내려갔다.
“애기는 애교도 귀엽더니, 토라지는 것도 귀엽네.”
“네?”
“하하하. 그냥, 귀엽다고.”
이남진은 진심으로 태산이가 귀여웠다. 다른 아이들은 토라졌을 때 이불 속에 숨거나 방에 혼자 들어가거나 하는데, 아이는 달랐다. 제 형에게 토라지긴 했지만, 떨어지긴 싫은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이 형 품 안에 숨어서 토라졌다고 시위하는 행동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아이의 그런 토라진 모습은 절로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날 저녁은 태산이가 좋아하는 고기 요리가 식탁 가득 차려졌다.
*
태주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태산이 옷매무새를 꼼꼼히 확인했다. 도톰한 마스크를 씌우고 털모자에 달린 버클도 턱밑으로 잘 잠갔다. 점퍼 안쪽에 붙인 핫 팩이 따뜻한지 손도 대어보고 마지막으로 보온 마법이 걸린 팔찌도 확인했다.
“답답하면 내려 달라고 해. 알았지?”
“앙! 아라떠. 빠리 가자.”
“냐아앙.”
“어휴. 그래. 가자.”
한 번 더 꼼꼼하게 확인하려 했지만, 그만 출발해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여러 번 확인을 받은 태산이는 물론이고 패딩 차림의 더미 녀석도 어서 가자고 성화였다. 태주는 아이를 들어 유아 왜건의 좌석에 태우고 안전띠를 매 주었다. 앞쪽 빈 곳에 더미 녀석도 태운 뒤, 유아 왜건의 손잡이를 잡았다. 썰매를 타러 갈 시간이었다.
일행은 눈 내리는 산책로를 유아 왜건을 끌고 통과했다. 그렇게 도착한 유원지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금요일 오전이라 그런 건지, 눈이 많이 내려서 그런 건지, 드문드문 보이는 관광객을 제외하면 빙판 위는 텅텅 비어 있었다.
“태주, 저꺼 떨매야?”
“응. 크지? 저건 가족 썰매야.”
“애기야. 삼촌이랑 저 큰 썰매 탈까?”
“앙!”
태주는 아이를 내려 주고 그대로 손을 잡고 대여소로 향하는 이남진을 보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그는 태산이 재롱에 푹 빠진 모양이었다. 태주 자신보다 더 앞서서 아이를 챙기고 있었다.
이남진과 태산이가 대여소에서 파란색의 커다란 가족 썰매를 고르는 걸 지켜보던 태주가 스케이트 가방을 열었다. 오래전 태산이가 정원에 겨울을 불러왔을 때 썼던 스케이트였다.
‘스케이트는 진짜 오랜만이네.’
체험 돔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건 실패했지만,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았다. 눈이 많이 내려서 시야가 가리는 게 조금 불편했지만, 이 넓은 공간을 독차지 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츠츠츠츠츳.
-끼익!
“태주야. 너도 타.”
“앙! 태쭈, 타.”
태주가 스케이트를 신은 뒤 유아 웨건 방풍 커버를 정돈하고 있을 때였다. 그새 태산이와 이남진이 좌석이 꽤 넓은 썰매를 빌려서 다가왔다.
“하하하. 제가 밀게요. 스케이트도 신었거든요.”
“그럼 네가 먼저 밀어. 이따 교대하자.”
“네. 앞자리에 태산이 태워도 괜찮죠?”
“앙. 태사니 타.”
더미, 태산이, 이남진이 쪼르륵 순서대로 썰매에 탔다. 태주는 이남진이 태산이 몸을 당겨 품에 잘 안은 걸 확인한 뒤 힘껏 썰매를 밀었다. 금속 프레임으로 된 썰매라서 무게가 좀 나갔지만, 생각보다 잘 밀렸다. 얼음 위에 태산이가 탄 썰매가 죽죽 금을 그으며 지나갔다.
“꺄하하하.”
“냐아앙.”
“산아, 입에 눈 들어온다. 마스크 잘 써야지.”
“아앙. 태쭈 빠리 가자. 빠리.”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고 웃고 하느라 기껏 씌워 뒀던 마스크가 턱까지 내려왔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벗겨진 마스크 때문에 눈송이가 입안으로 날아 들어오는데도 태산이는 연신 크게 웃고 있었다. 즐거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썰매를 밀기를 한참, 슬슬 다리가 당기기 시작한 태주가 일행에게 잠시 쉬자고 제안했다.
“따뜻한 허브 티 드실래요? 커피랑 우유도 있어요.”
“왜건이 꽤 크더라니, 많이도 챙겨왔다.”
“하하하. 하나둘 챙기다 보면 이렇게 되더라고요. 여기요, 토스트도 드세요. 아직 따뜻해요. 산이는 치즈 볼 줄까?”
“앙.”
대형 골프 우산 밑으로 일행을 불러 모은 태주는 각자에게 어울리는 따뜻한 음료와 간식을 챙겨주었다. 그와 이남진은 커피와 토스트, 태산이는 우유와 치즈 볼, 더미 녀석은 육포. 눈 내리는 호숫가 우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간식을 먹는 세 사람 사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사니가 떨매 미께.”
“아니야, 삼촌이 밀게. 애기가 타.”
“아앙. 사니가 미꺼야.”
간식을 먹은 뒤 이남진이 자연스럽게 태산이가 탄 썰매를 밀어 주면서 태주는 자유롭게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다. 자꾸 눈 속을 파고 들려는 더미를 안아 들고 빙판을 가르는 그의 귀에 태산이와 이남진이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빨리빨리 가자고 외치더니, 그새 썰매를 멈추고 서로 밀겠다 실랑이하고 있었다. 이남진이 썰매를 미는 속도가 태산이의 성에 차지 않은 것 같았다. 운동화를 신고 미는 것과 스케이트를 신고 미는 속도는 다를 수밖에 없는데, 태산이는 그게 답답한 모양이었다.
보나 마나 이남진이 아이 고집에 질 게 뻔했지만, 태주는 잠시 멈춰서 둘이 어떤 결론을 내는지 보기로 했다. 예상대로 이남진이 실랑이에서 밀렸다. 그는 쪼그려 앉아서 아이 신발에 끼운 아이젠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내키지 않는 얼굴로 썰매에 탔다.
“애기야 한 바퀴만 미는 거야, 알았지?”
“앙. 아라떠.”
제 키와 비슷한 높이의 썰매 손잡이를 잡는 태산이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태주는 순간 등골을 타고 오르는 한기를 느꼈다. 그는 저런 미소를 예전에 몇 번이나 봤었다. 정원에서 열기구를 시험해 볼 때, 제피르와 눈을 맞추던 희의 얼굴에서였다.
‘말, 말려야 하나? 위험할 것 같은데.’
말릴까 말까, 태주의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태산이가 썰매를 출발시켰다. 처음에는 가볍게 밀던 아이가, 점점 속도를 내는 게 보였다. 썰매가 생각보다 잘 밀려서 해 볼 만하다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태주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제라도 개구쟁이를 말릴 생각이었다.
-촤아아아악!
“어, 어어! 애기야!”
“꺄하하.”
“우와아악! 애기야!”
“꺄하하하.”
조금 늦은 것 같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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