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5
24. 우수상
영화 버스킹의 야외 촬영 일정이 시작되었다. 우선 서울에서 거리공연을 시작해 부산까지 여러 군데에서 촬영을 진행한다. 침대에 누운 채로 일정표를 확인한 후 태주는 느긋하게 일어났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목을 풀었다. 이후 촬영에서 직접 노래를 불러야 했기 때문에 목 관리에 신경 쓰고 있었다.
샤워하기 전에 잠든 태산이에게 살살 빗질을 해주었다. 날이 더워져 털갈이하는지 털이 뭉텅뭉텅 빠지고 있었다. 태산이는 빗질이 기분 좋은지 작게 갸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빗질을 마친 태주가 태산이 아침을 챙겨두고 씻으러 들어갔다.
“좋은 아침이에요, 매니저님.”
태주가 태산이가 든 이동 장을 들고 탔다. 밴에 타자마자 냉장고에 태산이 이유식을 챙겨 넣었다. 버스킹 촬영을 시작한 후로 태주의 밴은 항상 짐이 가득했다. 게다가 촬영이 길어질수록 차 안의 물건이 늘어나고 있었다. 태주의 차에는 태산이 짐도 있어서 더 복잡했다. 7인승 밴을 혼자 써도 이런데, 그룹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의 차는 어떨지 상상이 안 됐다.
*
태주는 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가능하면 촬영장에 대기하려 했다. 영화 제작 과정을 지켜보는 걸 즐기기도 했고 여러 감정이 오가는 걸 관찰하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장면을 목격하고 싶은 건 절대 아니었다.
태주의 앞에서 현장 세팅을 돕던 스태프가 쓰러졌다. 태주는 날이 더워 일사병에라도 걸린 줄 알았다. 급하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자, 더운 날씨와 어울리지 않게 몸이 무척 차가웠다. 입술은 파랗다 못해 검게 보일 지경이었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매니저님, 119요.”
태주가 옆에 서 있던 견우에게 구급차 호출을 부탁하고 볕이 닿지 않는 곳으로 쓰러진 스태프를 옮겼다. 몸을 죄는 것들을 느슨하게 한 후에 감독님을 찾았다. 정한선 감독도 소식을 들었는지 태주가 있는 방향으로 급하게 오고 있었다.
“태주야, 어떻게 된 거냐?”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여기 스태프 분이 저쪽으로 짐을 하나 옮겼거든요. 저기 박스요. 그거 옮기고 다시 돌아가던 중에 이 앞에서 그냥 쓰러졌어요.”
“대체 무슨 일이야? 아니 그보다 얘는 어느 팀 애야? 못 보던 앤데. 이런 애가 있었어?”
쓰러진 스태프는 정한선이 처음 보는 스태프였다. 그런 정한선에게 조감독이 다가와 사정을 설명했다. 쓰러진 사람은 원래 스태프가 아니고, 오늘 하루만 일당을 받고 촬영에 나오기로 했다는 설명이었다.
“아. 얘가 그럼 조감독 네가 말했던 걔야? 인건비 떼여서 굶어 죽게 생겼다던?”
“네, 걔예요. 사정이 딱해서 불렀는데 큰일이네요.”
구급차가 촬영현장으로 들어오고 쓰러진 스태프와 안면이 있는 조감독님이 구급차에 함께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촬영장이 어수선했지만, 사람들은 금세 분위기를 수습하고 세팅을 이어갔다.
*
분장을 마친 태주가 사람들이 다니는 길 한쪽에 서서 공연을 시작했다. 촬영 스태프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낡은 크로스 백을 발치에 두고 기타 케이스를 열어 앞에 내려둔 태주가 자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기타연주에 실려 거리에 퍼졌다. 태주는 실제 버스킹을 하듯이 이어서 곡을 노래하고 연주했다. 정한선은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다양한 각도에서 태주의 버스킹을 촬영했다.
버스킹을 촬영하기 전에 정한선과 태주는 여러 차례 만나서 얘기를 나눴다. 영화 대본이나 캐릭터의 이해 같은 것에 관한 얘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태주의 노래에 반한 정한선이 시간이 날 때마다 불러내서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었다.
덕분에 기존에 삽입곡들과는 조금 다른 노래들이 영화에 삽입되게 되었다. 다분히 태주의 취향인 곡들이 들어갔다. 그리고 버스킹하는 장면에 좀 더 많은 카메라를 동원하기로 했다.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라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하기로 한 것이다.
“감독님, 아까 그 사람은 어떻데요?”
분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은 태주가 정한선에게 물었다. 정한선은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태주에게 소식을 알려줬다. 가장 먼저 쓰러진 스태프를 발견했던 게 태주이니 궁금할 만도 했다.
“영양실조라는데. 영양실조에 빈혈.”
“네? 영양실조요?”
“우리 조감독이 굶어 죽게 생겼다고 일 좀 주자고 해서 데려오라 했었거든. 그런데 그게 말 그대로였네. 아이고야. 요즘도 이런 일이 있나.”
“그러게요. 전 영양실조는 다이어트 하는 사람들만 걸리는 줄 알았는데요.”
아직 이십 대로 보이는 청년이 영양실조로 쓰러지다니 대체 무슨 사연인지 궁금했다.
“우리 현장 오기 전에, 몇 달간 다른 현장에서 일한 인건비를 떼였나 보더라고. 아직 어려 보이던데 안쓰러워서 원.”
영화판에서는 흔한 이야기였다. 영화가 좋아서 자기 몸 축나는 줄도 모르고 일하는 이들을 이용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태주는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무명기간이 없었고, 처음부터 소속사에 들어가서 매니저의 케어를 받았다. 덕분에 그런 스태프와 같은 일을 겪지는 않았지만 듣거나 본 경우는 많았다.
“회복되면 다시 부르실 건가요?”
“로케 따라 다니기 쉽겠어? 우선 쉬어야지.”
정한선도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태주 역시 마찬가지,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이라 도울 방법이 없었다. 그저 한국 영화 촬영 환경이 좀 나아져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없기를 바랐다.
*
끼루루루룩.
우편배달부가 다시 정원을 방문했다. 지난 방문 후 한참이나 지났기 때문에 무척 반가웠다.
“안녕. 편지를 가져왔어?”
“안녕하신가. 편지를 가져왔다네. 정원사 협회에서 보내는 것이지.”
“희 기다렸어. 열어 볼까?”
“응. 희 먼저 열어봐. 우편배달부 씨 바쁘신가요?”
“바쁘지 않다네. 아마 내일은 바쁠 테지만. 지금은 괜찮다네.”
“그럼 차를 대접할게요.”
태주는 새로 꾸민 정원에 들른 첫 번째 방문자가 반가웠다. 물론 실제 방문자와는 조금 달랐지만. 오두막 앞 화단 사이에 놓인 티 테이블로 펠리컨 우편배달부를 안내했다.
“태주!!! 우수상이야.”
“뭐라고?”
“하하하하.”
티세트를 챙기러 오두막에 들어가던 태주가 희의 외침에 놀라서 빠르게 뛰어왔다. 희가 보고 있는 편지에 이벤트 입상 결과가 나와 있었다.
[친애하는 정원사님.달 사탕 씨앗 키우기 우수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정원사님의 달 사탕 나무는 우수한 성적으로 심사를 통과하였습니다. 다섯 가지 색의 달 사탕 나무 열매가 맺히도록 키워낸 정원사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우수상 수상을 축하드리며 아래와 같은 상품을 보내드립니다.
은색 상자x 1. DP 1500.
“태주, 태주. 오늘은 파티야.”
“와! 우수상이라니, 난 참가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하하하.”
펠리컨 우편배달부가 그런 둘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희 관리자 아가씨. 우편배달부가 오늘 배달하는 편지는 단 두 통뿐 이라네. 대상과 우수상 편지라네.”
“와. 너무 고마워. 이건 정말 좋은 편지야.”
태주는 기쁜 마음에 차를 내오는 것도 잊고 말았다. 우편배달부가 흠흠 기침을 하며 일깨워 주고 나서야 깨닫고 부랴부랴 준비해서 대접했다.
“오호. 정원사 씨 차 우리는 솜씨가 아주 훌륭하네. 만월의 밤에는 차를 우리지 않는 게 좋겠네.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이를 만나게 될지 모르네.”
“골치 아픈 이?”
“차를 아주 좋아하는 신사라네. 그는 방문자지. 만월의 밤에 주로 달의 문을 열고 다니지. 좋은 차향을 쫓아 이곳저곳 정원을 방문한다네.”
“와, 달의 문이 뭐야?”
관리자인 희도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았다. 태주도 궁금증이 일어 우편배달부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달의 문은 특별한 일족이 만월의 밤에 열 수 있는 이동 통로라네. 정원과 정원을 이어주지.”
“헐. 달의 문을 통하면 다른 정원에 갈 수 있다고요?”
“다른 정원사의 허락이 없다면 불가능하지. 하지만 차를 좋아하는 신사는 가능하다네, 정원사의 허락이 없이도 방문할 수 있다네.”
희와 태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태주는 기회가 된다면 다른 사람의 정원을 한번 보고 싶었다. 어디에 있는지, 누구의 정원인지 전혀 모르니 허락을 받을 수 없겠지만, 만약 차를 좋아하는 신사가 다른 정원사에게 허락을 받아다 준다면 방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정원사 씨 차를 좋아하는 신사는 정말 골치 아픈 이라네. 그들은 장난을 아주 좋아하지. 그들은 정원사 씨가 향기 좋은 차를 내어줄 때까지 장난을 걸 거라네. 다음 만월이 뜰 때까지 정원에서 머무르면서 말이네.”
“와. 혹시 그들이 다른 정원사에게 방문 허락을 받아 줄 수 있을까요?”
“그들이라면 가능하지. 하지만 그들은 아주 골치 아픈 장난꾸러기 일족이라네.”
희와 태주의 귀에는 펠리컨 우편배달부의 경고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상상만 하던 다른 정원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속으로 다음 만월에 꼭 차를 우려야겠다, 다짐하는 태주였다.
우편배달부는 그런 그들의 속내를 짐작했지만, 말을 아꼈다. 차를 좋아하는 신사에게 시달린 정원사가 얼마나 많은지 이 신입 정원사는 모른다. 겪어봐야 깨달을 일이었다.
“정원이 아름다워졌네. 정원사 씨도 희 관리자 아가씨도 신경을 많이 쓴 걸 알 수 있다네.”
“응. 희랑 태주랑 난쟁이들이 같이 꾸몄어.”
“난쟁이들은 훌륭한 장인이라네.”
우편배달부의 칭찬이 기뻤는지 희가 사르륵 날아올라 빛나는 가루를 뿌려 주었다. 우편배달부는 커다란 부리로 끼루루룩 소리를 내더니 정중한 말투로 감사를 전했다. 희는 부끄러웠는지 태주의 등 뒤로 날아와 숨었다.
*
우편배달부가 돌아간 후, 희와 태주는 처음 보는 은색 상자를 열기로 했다. 지난번에 금색 상자에서 얻은 ‘태양의 조각이 깃든 기타’는 정말 잘 사용하고 있었다.
상점에는 붉은 상자만 팔기 때문에 이런 상자는 열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아마 이벤트 같은 특별한 기회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 같았다.
“태주, 빨리빨리.”
“응. 이제 열게.”
생명의 무게는 모두 같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저울 한쪽에 올려놓으면 반대쪽에 올린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태주는 빛이 사라지고 나온 아이템의 설명을 읽고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정원에서 본 것들은 현실적이지 않았었다. 물론 이 생명의 저울 역시 신비한 물건이 맞았다. 하지만 이 저울의 설명은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달랐다.
“희, 이건 쓰지 말자. 혹시 상점에 팔 수 없나?”
“태주.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아니라. 이걸 쓸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야. 이걸 써야 하는 상황이라는 건 누군가가 생명이 위험하다는 얘기니까.”
“으응. 그럼 이건 희가 보관할게.”
“희. 그냥 상점에 팔자.”
태주가 여러 번 희에게 상점에 팔자고 얘기했지만, 희가 거절했다. 희는 어쩐지 이 저울이 꼭 필요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정원의 물품 중 정원사에게 필요 없는 것은 없었다. 특히 은색 상자 같은 얻기 힘든 상자에서 보상으로 나온 것은 언젠가 정원사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에 주어지는 것이었다.
태주는 희의 거절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강제로 뺏거나 하지는 않았다. 희가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울의 설명이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생명을 대신 내어줄 수 있는 상대라. 가족을 제외하면 희와 태산이 정도인가.’
태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태우와 어머니, 태산이와 희까지가 그가 대신 희생할 수 있는 범위였다. 단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태산이나 희와는 달랐다.
‘하필이면 저런 게 나와서. 그냥 DP나 많이 줄 것이지.’
쯧, 하고 혀를 찬 태주는 희에게 보관만 하고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자신이 희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괜찮았지만, 희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생각만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실랑이는 끝났다. 하지만 불편한 심기가 채 가라앉지 않았다. 희가 태주의 눈치를 슬슬 보는 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냐아아웅.”
우편배달부가 오기 전부터 사라졌던 태산과 단단이 돌아왔다. 최근 두 녀석은 미로 탐사에 푹 빠져있었다. 태주의 허리 높이인 미로는 네발짐승인 둘에게 재밌는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희의 말에 따르면 누가 먼저 연못이나 분수에 도착하는지 길 찾기 시합을 한다고 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희는 참가할 수 없는 내기였다.
태산이와 함께 온 단단이 태주에게 흰 깃털을 건네주었다. 태주는 우편배달부의 깃털을 물어왔나 생각했지만, 희가 전해 준 말로는 이번에도 트리하우스에서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 트리하우스는 오두막과 제법 떨어진 곳에 있으니, 아마 우편배달부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도 모르게 다녀간 날개 달린 방문자가 있는 것 같았다. 태주는 전에 했던 혹시 천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다시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