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53
252. 불신 >
김정훈 감독이 사과한 후에 이어진 촬영은 태주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진혁과 이남진에게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많은 샷을 찍을 줄은 몰랐다. 마치 지금까지는 카메라 테스트였던 양 복귀한 김정훈 감독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디테일하게 샷을 나눠서 찍었다.
태주는 이렇게 여러 번 찍을 것, 굳이 카메라를 여러 대 동원할 필요가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물론 여러 각도에서 찍어 두는 게 편집에 유리할 테지만,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에겐 상당한 부담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실은 그다지 괜찮지 않았다. 태주는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된 이래로 같은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찍을 뿐 아니라, 상반된 상황을 설명하며 다른 감정으로 연기하길 요구받고 있었다. 그 때문에 김정훈 감독이 머릿속에 어떤 장면을 그리고 있는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좀 더 감정을 절제하면서, 분노를 누르면서 다시 한번.’
‘폭발하듯이. 상대에게 감정을 쏟아붓듯이.’
‘온몸으로, 당장에라도 찢어 죽이고 싶다는 느낌이 나게.’
‘경멸하는 감정을 안으로 갈무리하면서, 눈빛만 드러나게.’
‘동작을 간결하게, 과한 건 모두 빼고.’
‘이번엔 좀 더 호쾌하게, 아니 단호하게.’
촬영이 계속될수록 태주에게 하는 요구가 다양해졌다. NG를 거의 내지 않는 편이라서 예정된 촬영 시간을 넘기는 일은 없었지만, 촬영의 밀도로만 따지면, 다른 배우와 비교하기 힘들었다. 덕분에 태주는 촬영이 끝나면 100m 달리기를 전력으로 한 것만큼 지치곤 했다.
연기하는 태주는 피로가 늘어 가는 반면, 촬영하는 김정훈 감독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가 넘쳤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배우가 요구하면 척척 연기를 해내니,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같은 장면을 연기하더라도 다양한 그림이 될 수 있게, 눈빛이든 손끝의 움직임이든 변화를 주는 태도는 그의 마음에 꼭 들었다. 게다가 이해력도 순발력도 좋아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원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태주는 연출가가 바라는 이상적인 배우였다.
“피곤하게도 산다.”
“…연출가가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그런다고 그걸 다 맞춰 주는 사람이 어딨어? 뭐, 실제론 맞춰 주고 싶어도 맞춰 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특히 네 나이대에서는 그럴 능력이 있는 배우가 별로 없는 게 현실이지.”
“찾아보면 꽤 있을걸요?”
“있기야 하겠지. 그런데 외형적인 부분까지 모든 조건을 다 충족할 만한 배우는 많지 않잖아.”
태주는 곁에 붙은 김은혜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말에 타박이 섞여 있긴 했지만, 자신을 칭찬하는 얘기가 대부분이라서 맞장구치기도 난감했다.
“테이크가 쌓일수록, 디렉션이 자세할수록 좋은 연기를 보이는 배우가 있지.”
“있죠.”
“그래. 이남진 씨가 딱 그런 배우야. 리허설도 본촬영처럼 하고 같은 컷을 최소 네다섯 번씩 찍어야 하지. 김정훈 감독님 연출 스타일하고 궁합이 잘 맞아.
“그렇죠. 촬영하면 할수록 점점 나아지니. 사실 남진 형은 드라마보단 영화에 더 잘 어울리는 편이에요.”
“뭐, 그건 알아서 하라 하고. 그런데 너는 애초부터 준수한 연기를 보이는 편인데, 지금처럼 테스트하듯 여러 번씩 찍어 가면서 촬영할 필욘 없잖아?”
태주는 그제야 김은혜가 옆으로 와서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김은혜의 연기 스타일은 이남진과 달랐다, 어떤 면에서는 태주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배역에 관해 많이 연구하고 준비해서 본촬영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타입. 그와 꽤 비슷했다.
김은혜는 특히 그런 경향이 강한 편이었다. 첫 번째 테이크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대부분 그때의 연기가 제일 좋았다. 그 때문에 그녀가 촬영할 때는 리허설도 최소한으로 하고 가끔은 생략하기도 했다. 반복 촬영도 많이 하지 않았다.
“후우. 미안해요.”
“네가 미안할 건 없지. 촬영 시간을 넘기는 것도 아니고, 연기를 못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절대로 쓰지 않을 것 같은 컷들은 거절하라는 거야. 아무리 봐도 이 상황에서 세자가 이러지는 않겠다 싶은 장면들 말이야.”
“….”
“소문이 전부 맞는 건 아니구나. 넌 소문보다 연기를 더 잘해. 김정훈 감독이 미쳐 날, 크흠. 정신을 놓, 에이! 좋다고 이것저것 다 시도해 볼 만큼 말이지. 그런데 소문보다 촬영장에서 존재감은 적다? 일부러 눈치 보는 거면 그럴 필요 없어.”
“눈치 보는 건 아니고요. 김정훈 감독님이 그리는 작품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 않아서 그래요.”
태주는 캐스팅이 늦기도 했지만, 이 작품의 대본을 늦게 받은 편이기도 했다. 게다가 촬영 전에 김정훈 감독이나 김은지 작가와 작품에 관해 깊게 얘기를 나눠 본 적도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런 좀비가 나오는 작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첫 주의 촬영과 다르게 그에게 요구하는 게 많아져서 더 그랬다. 가끔은 자신이 연기하는 세자가 마치 이중인격 캐릭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배우들 준비해 주세요.”
대화는 촬영을 알리는 스태프의 호출에 끝났다. 태주는 눈앞의 촬영에 집중하느라 김은혜의 말에 관해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말을 무시할 생각도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김정훈 감독의 연출에는 감독판이라도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찍을 필요 없는 컷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태주는 촬영에 꽤 긴 시간을 들여야 했다. 여러 명이 동시에 촬영할 때는 괜찮았지만, 태주만 촬영하는 장면에선 여지없이 김정훈 감독의 집착이 발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 태주는 촬영 시간이 허락되는 한감독의 요구를 맞춰 주었다. 분명 과한 면이 있긴 했지만, 그의 판단으론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요구여서였다.
*
김정훈 감독이 아버지를 찾은 뒤의 촬영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모습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스태프들은 이미 그런 그의 스타일에 익숙한 듯했지만, 그와 처음 같이 작업하는 배우와 외주 제작사팀은 그의 스타일에 맞추기 위해 꽤 고생하고 있었다.
게다가 김정훈 감독도 김지은 작가만큼이나 의상이나 소품 등에 예민해서 그 기준에 맞추기 쉽지 않았다. 특히 의상, 소품, 세트를 맡은 미술팀과 분장팀의 고생이 심했다. 세트 디자인 자체가 쉽지 않은 것들이라, 준비에 시간도 품도 많이 들었다. 이번 작품은 세트 디자인 자체가 쉽지 않은 것들이라, 준비에 특히 시간과 품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세트 담당 이상으로 고생하는 팀이 또 있었다. 개인 스태프가 없는 배우들과 수십 명의 보조 출연자들의 의상과 분장을 손 봐 주는 분장팀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촬영장이 돌아가는 내내 새벽부터 나와서 사람들의 분장을 도와야 해서 고생이 말도 못 했다.
“쯧쯧쯧. 저러다 누구 하나 잡겠다.”
“확실히 미술팀 일이 지나치게 많네요.”
“어. 물 마실 새도 없이 움직이더라.”
“음.”
‘누나네 팀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작품 장르가 사극이라서 의상은 물론이고 가발과 수염을 착용해야 했다. 거기에 좀비물이라는 특성 때문에 좀비 분장을 해야 했고, 블러드 캡슐 같은 것들도 준비해야 해서 다른 작품보다 일이 배는 많았다. 분장팀은 쉴 틈 없이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분장을 고쳐 주고 확인해야 했다.
미나는 소속이나 활동 분야는 다르지만, 같은 직업군이라서 그런지 프로덕션 미술팀, 특히 분장팀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미나나 미나의 팀원 역시 바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출연 분량이 가장 많은 태주라 그녀들의 작업량도 그들 못지않았다.
“그런데 여긴 추워도 너무 춥다.”
“정말 춥네요. 눈은 안 와서 다행이긴 한데, 줄곧 영하라….”
“민속촌에서 촬영할 때 좋았는데.”
“제일 편하긴 했죠.”
안동에서 촬영을 마친 뒤에는 장소를 이곳저곳 옮겨 가면서 촬영해야 했다. 그중 민속촌에서 촬영할 때는 숙소도 음식도 모두 최상이었었다. 민속촌과 태주의 전원주택의 거리가 가까워서였다. 해나가 준비해 준 음식과 미리 주문해 둔 각종 음식을 편한 장소에서 쉬면서 즐겼었다.
하지만 현재 촬영장을 차린 포천은 그렇지않았다. 서울보다도 10도 이상 낮은 기온에, 촬영 세트도 계곡이나 산 중턱 같은 외진 곳이었다. 분장실 건물도 없이 컨테이너와 천막을 설치해서 사용중이었는데, 촬영 지역 자체가 추운 지방이라 실내, 실외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오늘 촬영은 무리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다치지 않게 조심해. 양말 하나 더 신을래?”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 태주야, 발목 한번 움직여 봐. 많이 달려야 하는데, 신발 헐렁거리면 다친다.”
“괜찮아요. 딱 맞아요.”
태주는 미나의 말에 따라 발목을 까딱여 보이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오늘 촬영할 장면이 산비탈을 수레와 말을 끌고 달려 올라가는 장면이라서 미나의 걱정이 심했다. 날씨라도 따뜻하면 좋은데, 오늘 역시 최고 기온이 영하 2도였다.
“리허설한다. 어휴. 보기만 해도 춥네.”
“괴물 역할은 그냥 봐도 힘들어 보이네요.”
“그러니까. 이 엄동설한에 저 밑에 누워서 기다리라니. 난 절대 못 하겠다.”
비탈길을 벗어난 바위를 가리키며 미나가 진저리쳤다. 의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천 쪼가리 같은 것을 걸치고 그늘진 바위 밑에 누우라니, 끔찍했다. 출연료라도 많이 받으면 모를까, 최저 시급을 받으면서 할 마음은 절대 들지 않았다.
괴물 역할의 보조 출연자들이 조감독님의 설명을 듣고 위치를 확인하는 걸 보던 미나가 ‘그나마 피난민이 나은가?’하고 중얼거리는 말이 들렸지만, 태주는 피난민 역할이나 괴물 역할이나 별 차이 없다고 생각했다.
맨땅에 누워 기다리는 괴물보다 나아 보이긴 했지만, 이 추위에 비탈을 뛰어 올라가고, 잡을 것도 없는 수레에서 떨어지지 않게 버티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든 일이었다. 그나마 피난민 쪽은 단역 배우라 출연료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촬영 난도는 비슷해 보였다.
*
리허설이 끝나고 본촬영이 시작되었다. 아직 해가 쨍쨍한 한낮인데도 손발이 꽁꽁 얼 정도로 날이 추웠다. 추운 날씨에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얇은 옷을 입은 괴물 역할의 보조 출연자뿐 아니라, 주·조연, 단역 가리지 않고 촬영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은 같았다.
“슛 들어갑니다. 배우분들 준비해 주세요.”
“네.”
태주는 귀에 대고 있던 핫 팩을 주머니에 넣은 뒤 패딩을 벗었다.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서면서 이번 촬영을 같이할 단역 배우들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넸다. 이들과는 앞으로 며칠 더 같이 촬영해야 했다. 피난 신을 찍은 뒤에, 괴물들의 공격에 함께 맞서 싸워야 했다. 가능한 좋은 분위기로 촬영하고 싶었다.
-카메라.
-레디, 액션!
평범한 촬영 시작 신호가 들리고 배우들이 저마다의 연기를 시작했다. 첫 촬영은 비탈을 오르는 피난민 행렬을 전체적으로 조명하는 신이었다. 말을 타고 비탈을 오르는 세자, 그의 말의 고삐를 잡고 오르는 무장 그리고 수레에 타고 걷는 수많은 피난민을 먼 곳에 설치된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었다.
-컷! 뒤따르는 피난민들 움직임이 너무 가볍습니다. 조바심 나는 연기를 하는 건 알겠는데, 지금 등짐을 가득 지고 있잖습니까?
롱 샷이 아니었으면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을 실수였다. 물론 김정훈 감독이 예민한 편이기도 했다. 워낙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 촬영이라서 그런지, 이후에도 촬영은 여러 번 NG가 났다. 대부분 피난민 역할을 맡은 단역들의 자잘한 실수가 원인이었다.
갈대숲에서 촬영하던 때와는 백팔십도 다른 모습이었지만, 스태프나 배우 모두 이제는 그게 원래 김정훈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태주는 롱 샷에서까지 디테일을 요구하는 김정훈 감독의 완벽주의자 성향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감독이 바라는 대로 반복해서 연기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지적당했던 실수를 반복해서 촬영이 다시 끊기게 한 단역 배우가 주변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 그는 분장한 땟국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얼굴을 붉힌 채 사방을 향해 사과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후우. 괜찮아. 너는?”
“말 타고 올라가는 장면이라서요.”
“그건 뭐 쉽나? 네가 말을 잘 다뤄서 그런 거지. 그나저나 이거 이대로…. 에구구. 몸이 다 얼었네.”
방향을 바꿔 내려가는 수레를 보던 중견 배우가 말을 그만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태주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장면에서 힘을 다 빼면, 정작 중요한 괴물에게 쫓기는 장면은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그런 말을 삼켰을 것이다.
배우들도 수고스러웠지만, 수레가 지나간 자리의 흔적을 지우는 스태프들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 배우도 스태프도 모두 고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태주는 여기까진 허용 범위라고 여겼다. 한번 만들어진 작품을 다시 되돌린 순 없었다. 그러니 좋은 그림을 위해 여러 번 반복하는, 이런 촬영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지. 후우! 경력이 짧은 감독도 아닌데, 답답하네. 아직도 감독이 원하는 그림이 뭔지 모르겠어.’
태주는 애초부터 김정훈 감독에 대한 신뢰가 그다지 크지 않았었다. 그런데 최근엔 그 경향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괜찮은 장면을 찍은 후에도 계속해서 재촬영을 요구하고, 계속해서 다른 모습을 요구하는 감독 때문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감독이 본인의 판단을 믿지 못 한다는 느낌을 계속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괴물들의 습격을 피해서 도망치는 장면을 찍으면서 최고치에 달했다. 분명 태주가 판단했던 피난 장면은, 고난을 겪으며 국본이라는 자리에 걸맞은 신념을 다지는 장면이었다. 대사 역시 그런 대사였다.
‘나는 관문을 닫고 도성에 숨은 저들과 다르다. 나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관리와도 다르다. 나는 버리지 않는다. 지킬 것이다.’
하지만 김정훈 감독은 그에게 피난민들을 버리고 갈까, 고민하는 장면을 연기해 달라고 요구했다.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괴물 때문에 수레에 탄 노약자들을 두고 먼저 달아날까 고민하는 장면을 연기해 달라고 요구했다.
“후우! 의상 점검 좀 받을게요. 너무 많이 달렸는지 신발이 헐렁해졌네요.”
“태주 씨 지금 촬영 시간이….”
“매니저님. 저 분장실로 갈게요.”
“네. 가시죠.”
현장에서 감독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나서 대화를 시도하는 게 태주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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