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55
254. 편지 >
태주는 얼마 전처럼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김은혜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한동안 다가오진 않고 멀리서 보며 실실 웃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촬영장 안에 이상한 기류가 돌아서 불편했는데, 그 정점 중 한 사람이 오고 있었다.
떨어진 곳에서 이상하게 웃으면서 한껏 불편하게 만들더니, 오늘은 그 웃음의 이유를 말하려는 듯했다.
“호호호. 얘, 너 진짜 소문보다 더하다.”
“네?”
“촬영장 장악이 대단하다는 소문 말이야. 와전된 건 줄 알았는데, 축소된 거였어. 진짜 엄청나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제가 뭘 어쨌다고….”
“에이. 다 알아. 네가 김정훈 감독 날렸다며?”
“네?”
태주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김정훈 감독을 날리다니? 어디로? 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자신이 영화를 찍으면 천만, 드라마를 찍으면 시청률 50%를 기록하는 먼치킨이 아닌 이상에야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자신이 그런 상대라면 굳이 감독을 날리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무엇인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작품이 산처럼 들어올 텐데.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니까. 얌전한 사람이 화내면 무섭다더니, 화 한 번 내고 모가지 하나를 날려 버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어떻게 감독님을 그렇게 해요?”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내가 어디 가서 네가 그랬다고 소문을 내겠니?”
“….”
충분히 소문을 내고 다닐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할 마음은 없었다.
“혹시 요즘 촬영장 분위기가 어색했던 게….”
“어색은 뭐가 어색이야? 다 네 눈치 보는 거였지. 평소 감독 말을 얌전히 들어주던 배우가 딱 한 번 화를 냈는데, 그 며칠 뒤에 감독의 다음 시즌 연출 계약이 해지됐잖아.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상황이지.”
“헐. 전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요.”
“했든 안 했든 무슨 상관이야? 눈앞에 떡하니 이런 결과가 있는데. 그걸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너한테 잘못 보이면 이렇게 되겠구나, 하고 다들 겁먹은 거지.”
이렇게. 김은혜는 목을 긋는 동작을 해 보이며 키득거렸다. 태주의 억울한 반응으로 요 며칠 촬영장에 돌던 소문이 모두 헛소리인 것을 알았지만, 그녀는 놀리는 걸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촬영인데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않겠는가. 물론 당사자는 꽤 괴로운 것 같았지만 말이다.
태주는 김은혜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어색하다고 느꼈던 점들의 이상함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배우들이 거리를 두었던 것은 주연 배우라서 어렵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보고 겁을 먹은 것이었다.
“누나. 혹시 요즘 제 소문 이상하게 돌고 있어요?”
“응? 몰랐어?”
“제가 어디서 소문을 들어요? 촬영 끝나면 집에 가기 바쁜데요.”
“호호호. 하긴 산이 성화가 대단하긴 하더라.”
“아무리 따라오고 싶어도 안 돼요. 여긴 인간적으로 너무 추워서요.”
추워서 안 된다는 태주의 말에 수긍한 미나가 천천히 그녀가 들었던 소문을 풀어 놓았다.
김은혜에게 들었던 것과 그다지 차이는 없었다. 아니 좀 더 과장이 섞여 있었다. ‘이태주 배경이 엄청나다.’, ‘이태주가 김정훈 감독을 날렸다.’, ‘마음에 안 드는 상대는 배우, 감독 가리지 않고 조용히 하차시킨다.’ 등등. 그의 예상을 넘어서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분장실 앞에서 감독님이랑 조감독님이 한참 서 있는 모습을 누가 봤나 보더라고.”
“네?”
“네 분장실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네가 문을 안 열어 주고 버텨서 그런 줄로 알더라고. 그리고 뭐라더라? 네가 콘티를 바꿔 달라고 했다고 하던데?”
“제가요? 아니, 무슨 그런 오해를….”
“우리야 내막을 알지만, 사람들이야 보이는 대로 믿는 거지.”
잠가 본 적 없는 분장실 문을 안 열어 주고 버텼다니 억울했다. 게다가 감독님들이 분장실 문 앞에서 망설였다는 사실은 그 역시 지금 알았다. 태주는 억울했지만, 그런 오해를 풀기 위해, 어디서부터 누구에게 해명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촬영 콘티를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니? 자신은 작품 선택에 관해서는 자신하는 편이었다. 주변 상황이 문제가 되어서 고생한 적은 있었지만, 작품 자체는 모두 괜찮았었다. 그건 회귀 전에도 후에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분장실에서 나눈 짧은 대화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김정훈 감독은 이후 콘티대로 연출을 진행했다. 아마 사람들이 콘티가 바뀌었다고 느끼는 것은 김정훈 감독이 기존 콘티대로 제대로 연출을 하면서 생긴 오해 같았다.
“전 진짜로 세자 캐릭터에 관해서 간단하게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예요.”
“알아. 매니저님한테 전부 들었어.”
“그런데 대체 왜 그런 소문이….”
“내가 보기엔 조감독님 때문인 것 같은데?”
“조감독님! 확실히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어요.”
“보일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이상해 보여.”
김정훈 감독이 기존 콘티대로 촬영하겠다고 말했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적인 문제라서 그렇게 쉽게 낫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 김정훈 감독을 조감독이 자주 뜯어말리는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그 행동이 오해를 키운 것 같았다.
‘답답하네. 그렇다고 김정훈 감독님이 상담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밝힐 수도 없고.’
김정훈 감독은 보기보다 단호하고 행동력이 있었다.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자마자, 상담을 받았다. 그리고 병원에서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강박증을 겪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김정훈 감독은 감정과 이성을 조절해서 균형을 맞추는 데 문제가 생긴 상태였다.
첫 상담 후, 그는 제작사 대표에게 다시 한번 시즌 2 연출을 맡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태주에게도 미안하다며 연락했었다. 당시 그는 시즌 1 연출이 끝나면 치료와 회복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털어놓으며, 조감독을 도와 달라 부탁했었다.
‘가족이라곤 아버지랑 나, 둘뿐인데, 내가 아프면 큰일 나요. 연출 계약을 해지한 건 그래서예요. 이미 동료들한테 큰 폐를 끼친 상태인데, 다시 폐를 끼칠 순 없어서요. 미안해요, 태주 씨. 태주 씨한텐 여러 가지로 미안한 일뿐이네요. 그래도 혹시라도 나중에 우창이가 연출을 맡게 되면, 잘 부탁해요. 실력도 좋고 성격도 나하고 달라서 괜찮거든요.’
기존 콘티로 촬영하는 것이든, 시즌 2 연출 계약을 해지한 것이든 모두 김정훈 감독 본인의 의지였다. 태주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저 계기였다. 언제고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 김정훈 감독이 알아서 정리했을 일이었다.
“조감독님이 너만 보면 무슨 사신 보듯 하면서 피하잖아. 그러니까, 소문이 잦아들질 않지.”
“제가 뭘 했다고요. 조감독님이랑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데….”
“괜찮아. 덕분에 함부로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매니저님도 그래서 두고 보는 중이시잖아.”
함부로 하는 사람은커녕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거리감을 좁히기 쉽지 않은 주연 배우였는데, 지금은 거의 절벽 위의 꽃 신세였다. 보기만 할 뿐 누구도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태주는 분장실에서 대화할 때 담담하게 대화하지 말고 화를 낼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만약 그랬다면, 깔끔하게 정리되었을지도 몰랐다. 조감독이 자신을 보고 빙 둘러서 피해 가는 일도 없었을지 몰랐다.
“조금만 참아. 여기 촬영 끝나면 한 달은 촬영 없으니까.”
“휴우. 그래야죠.”
겨울 촬영이 끝나면 주연급 조연인 이남진, 김은혜 같은 배우의 촬영은 대부분 끝난다. 태주의 촬영도 마찬가지였다. 고궁 신만 남기고 모든 촬영이 끝이었다. 고궁 신은 겨울 촬영이 끝나고 한 달 후, 봄꽃이 필 때쯤이라서 미나의 말대로 한 달은 촬영이 없었다.
태주는 어서 겨울 촬영이 끝나길 바랐다.
*
태주의 겨울 촬영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것은 집에서 기다리는 태산이도 마찬가지였다. 민속촌에서 촬영할 때만 해도 괜찮았다. 이르든 늦든 촬영이 끝나면 바로 태주가 집으로 왔고, 쿠첼루스와 둘이 마중을 나가기도 했었다. 한 번은 촬영이 일찍 끝난 태주랑 같이 민속촌에서 놀기도 했었다.
하지만 촬영 장소가 바뀐 뒤로는 같이 있는 시간이 확 줄었다. 태주는 그를 촬영장에도 데려가 주지 않았고, 집에도 늦게 왔다. 쿠첼루스는 너무 추워서 그런다고 했지만, 추위를 많이 타지 않는 태산이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태산, 사냥 놀이할까요?”
“냥.”
“그럼 숨바꼭질할까요?”
“냥.”
“이런.”
전원주택의 대문이 보이는 켓 타워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는 태산이 때문에 쿠첼루스의 애가 탔다. 태산이는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온종일 켓 타워에서 꼼짝 안 하고 있었다. 아침에 태주를 따라 주차장까지 갔다가 2호 손에 들려서 돌아온 뒤로 계속 이 상태였다.
“음. 태산이를 두고 가다니. 태주 씨가 나빴군요.”
“냐냐앙. 냐앙.”
“태산이는 태주 씨 일할 때도 얌전히 기다릴 수 있는데 말이죠. 그렇지요?”
“냐아앙.”
“흠. 이렇게 할까요? 태주 씨한테 편지를 쓰는 겁니다. 태산이도 같이 가고 싶다고요.”
편지? 태산이의 눈에 물음표가 떴다. 지금까지 편지를 써 본 적은 없었다. 감사 카드를 적어 본 적은 한 번 있었지만, 편지는 처음이었다.
“편지에 같이 가고 싶다, 같이 못 가서 서운했다고 적는 겁니다.”
“냐앙.”
“이리 내려오세요. 쿠첼이 맛있는 초코케이크를 준비해 뒀답니다. 그거 먹고 힘내서 편지 쓸까요?”
“냐앙.”
쿠첼루스는 캣 타워에서 품으로 뛰어드는 태산이를 안전하게 받아 안았다. 자신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뛰어드는 기세가 대단했지만, 흔들림 없이 받아 안았다. 이미 이런 상황,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태산이를 받아안는 일은 익숙할 대로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초코케이크 먼저 먹을까요?”
“앙!”
“하하하.”
품에 안긴 채로 아이 모습으로 바뀌는 바람에 잠시 휘청거렸지만, 쿠첼루스는 곧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초코케이크가 기대되는지 태산이가 그의 목을 감고 얼굴을 비볐기 때문이었다. 아이 모습으로 하는 고양이 같은 행동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초코케이크 두 조각과 우유 한잔을 마신 태산이는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크레용을 꺼내서 편지를 적었다.
촬영을 마치고 두 시간 가까이 차를 달려서 돌아온 집에서 태주는 불안한 마음을 갖고 문을 열었지만, 곧 안심했다. 현관문 앞에서 네 발을 모으고 앉아서 자신을 기다리는 태산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억지로 돌려보내서 원망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마중 나올 정도로 기분이 풀렸다니, 다행이었다.
“태산이, 형 기다렸어?”
“냐앙.”
“미안, 너무 늦었지?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 사냥 놀이했어?”
“커흠! 태주 씨.”
“어? 헉!”
마중 나온 태산이를 안아 들고 일과를 물으며 안으로 들어오던 태주가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쿠첼루스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가 뾰로통하니 입이 나온 태산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태주는 슬쩍 제 품에 안은 흰 녀석을 내려다봤다.
이 못된 더미 녀석. 대체 왜 이리 생긴 것도 하는 짓도 똑같은 거야. 소환하고 행동 방식을 입력하는 게 태산이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가끔 이렇게 태산이와 더미를 착각할 때마다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오늘처럼 태산이가 삐진 날은 더 그랬다.
“흥!”
“하, 하하. 더, 더미였네.”
“크흡. 태주 씨 우선 옷을 갈아입고 오시지요.”
“그, 그럴게요.”
쿠첼루스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고맙게 받은 태주는 바로 옷을 갈아입으러 올라갔다. 태주가 급하게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왔을 때, 태산이 입술은 여전히 오리 입술이었다. 그를 보고 반가워하며 쪼르르 달려오던 평소와 달랐다.
태주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살짝 긴장하며 태산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아이 몸을 들어서 안으려 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아이가 그의 손길을 밀어내며 안기길 거부했다.
“어? 산아?”
“흥!”
-탕탕!
그뿐 아니었다. 유리로 된 티 테이블 위를 큰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티 테이블 위에 놓은 편지를 보라는 신호였지만, 태주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손길을 밀어내는 아이 모습에 머릿속도 복잡하고 섭섭함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금방 안기는 걸 싫어하게 된다더니…. 품에 안을 기회는 금방 사라지니, 기회 있을 때 많이 안아 주라는 선생님 말씀이 틀린 거 하나 없었어.’
태산이는 자신의 편지는 보지도 않고 딴짓만 하는 태주가 답답했다. 그런 태산이를 쿠첼루스가 도와줬다. 그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태주의 어깨를 건드려 시선을 돌린 뒤, 티 테이블에 놓인 하얀 종이를 보게 했다.
“아! 그림인가요?”
-도리도리.
“하, 하, 하. 펼쳐 보시죠.”
“어휴. 산이가 그림 주려고 했는데, 형이 그걸 몰랐네.”
그럼 그렇지 내가 태산이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내 손길을 피할 리가. 하얀 종이를 펼치는 태주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이는 자신의 손길을 거부한 게 아니라, 그림을 먼저 보여 주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다.
어떤 그림이려나? 곱게 접힌 종이를 펼치는 태주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실제론 귀퉁이도 맞지 않고, 초콜릿으로 보이는 자국이 이곳 저곳에 나 있는 종이였지만, 귀염둥이 태산이가 준 것이라 그런지 마냥 좋았다. 그래서 그는 옆에선 쿠첼루스가 기대하는 얼굴로 웃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 그림이 아니네? 태주 나빴어? 어?”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은 종이는 그림이 아니었다. 태산이가 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태주 나빴어. 산이 혼자 집에 있었어. 산이 태주랑 말 안 할 거야.’
몇 줄 되지 않는 편지였지만, 내용은 그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태주는 아래쪽에 남은 내용을 더 보는 게 두려워졌다.
‘초코케이크 맛있지. 꼬꼬도 맛있지. 꼬꼬 좋아.’
“응?”
‘태주 좋아. 산이랑 꼬꼬 먹자. 썰매 타러 가자.’
-펄럭.
스케치북 편지지에 적힌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뒷면에 다른 내용이 적혀 있나 싶어서 뒤집어 봤지만, 앞면에 적힌 게 전부였다. 혼자 두었다고 탓하던 시작은 같이 놀러 가자는 얘기로 끝났다. 태주는 짧은 편지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 봤다. 첫 문장은 여전히 그의 속을 찌르는 듯했다.
‘말할 때는 혀짧은 발음을 하더니, 편지는 뭐 이리 또박또박 잘 썼어?’
쿠첼루스가 삼 년 넘게 아이의 글쓰기를 봐주는 건 알았지만, 발음과 다르게 이렇게 잘 쓸 줄은 몰랐다. 글자 크기는 들쭉날쭉했지만, 철자를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덕분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태주는 편지를 티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아이를 들어 품으로 끌어왔다. 태산이는 다행히 이번엔 손을 밀어내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였다. 그는 마주 안은 아이의 등을 받쳐 주면서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산이 정말로 형이랑 말 안 할 거야?”
“….”
“오늘만 안 할 거야, 아니면 내일도 안 할 거야?”
“!”
고개를 끄덕거려서 대답하던 태산이의 눈이 커졌다. 고개를 젓거나 끄떡여서 대답하고 있었는데, 그 두 가지 동작으로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받아서였다. 태산이 고개가 휙휙 돌아갔다.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다다다다.
태주는 제 품에서 빠져 나가 복도를 달려가 버린 태산이를 보고 조금 실망했다. 평소에 워낙 대답을 잘하는 아이라 슬픈 목소리로 물으면 엉겁결에 대답하지 않을까, 했던 노림수가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숨을 시간을 충분히 줬다고 판단한 그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다다다다 뛰어오는 소리가 나더니 아이가 거실로 돌아왔다. 곤란하면 어딘가에 숨어서 그가 찾아 주길 기다리는 버릇대로 숨은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왔다.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하하하. 산이, 우리 꼬맹이. 네가 형 비타민이다.”
복도 끝 가족실에 둔 스케치북과 크레용을 양손에 나눠 든 태산이가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 상태 그대로 양팔을 벌려 안아 달라는 아이를 태주가 들어 무릎 위에 앉혀 줬다.
그렇게 밤이 깊어 아이가 졸려 할 때까지 둘은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태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산이는 색색의 크레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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