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56
255. 사고 >
태산이의 편지를 받은 뒤 태주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다른 아이의 몇 배로 활동적이고 낯가림도 없는 아이를 혼자 두지 않기로 했다.
사실 추운 곳이긴 했지만, 마법 아이템을 착용한 아이에겐 추위가 그다지 문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불안해서 그랬을 뿐이었다. 촬영장의 분위기도 편하지 않았고.
“태주 씨, 호랑 같이 가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그냥 저 혼자 가도 충분한데.”
“힘쓰는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어차피 오늘은 오전 촬영만 있어서, 금방 끝나요. 내일은 쉬는 날이고요.”
“날이 많이 풀리긴 했지만, 그쪽은 여전히 추워서 걱정입니다.”
겨우 이틀 곁을 비우는 건데 쿠첼루스의 걱정이 컸다. 회귀 전에 오랫동안 혼자 생활했던 태주로선 주변 사람들의 이런 걱정이 이해하기 조금 힘들었다. 회귀 전 그는 도우미를 고용하긴 했었지만, 십수 년을 혼자서 별 탈 없이 지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느라 제대로 식사를 못 하는 쿠첼루스가 더 걱정이었다. 사실 추위에 약한 것도 태산이보단 사막 왕국 출신인 그가 더 심했다. 게다가 그는 연구인지 조사인지에 빠져서 잠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자주 잊어버렸다.
“식사 잘 챙기시고요. 박태경 감독이 그냥 설원 위에서 촬영하면 바로 돌아오세요.”
“알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쿠첼루스와 2호가 박태경 감독의 촬영장으로 떠나는 걸 태주와 태산이 배웅했다. 태주는 여전히 그의 일도 아닌 일에 나서서 고생하는 쿠첼루스에게 미안했다. 한편으론 되먹지 못한 감독 때문에 괜히 다른 사람만 고생이라고 속으로 분노했다.
그에 비하면 김정훈 감독은 양반이었다. 민폐를 끼친 건 양쪽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최소한 한쪽은 사과도 하고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태주는 김정훈 감독의 바람대로 다음 시즌은 조감독님이 감독이 되길 빌어 주었다. 그리 가능성은 크지 않았지만.
“우리도 갈까?”
“앙!”
“냐앙!”
목에 보온 마법이 걸린 빨간색 목도리를 한 태산이와 빨간색 반다나를 맨 더미가 같이 대답했다. 태주는 더미 녀석은 소환을 해제하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걸 참느라 애를 썼다.
태산이 녀석이 굳이 데려가지 않아도 되는 더미를 데려가는 이유가 있었다. 아이는 더미를 꼭 제 부하처럼 부려 댔다. 가끔 둘이 경쟁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태주에게 같이 장난치는 장난꾸러기 동료였다. 가끔은 뭔가를 조를 때 동원하기도 했다.
‘두 녀석이 같이 매달리면서 조르면 당해 낼 수가 없으니.’
태주는 그새 더미에게 간식을 먹이는 태산이를 말리면서 주차장을 향했다. 오늘은 견우가 데리러 오지 않고 직접 차를 몰고 가기로 했다. 태주는 태산이를 안아서 유아용 카시트에 태우면서 아이가 새삼 많이 자란 것을 실감했다.
처음에는 유아용 시트도 좀 큰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딱 적당했다. 이런 성장세라면 지금 쓰는 카시트는 올해까지만 쓰고 내년에는 주니어용 카시트를 사용해도 될 것 같았다.
그는 작아지는 아이 물품이 반가우면서도 조금 아쉬웠다.
*
‘또 저렇게 티나게 피하다니.’
태주는 차에서 내린 그를 보자마자 뒤로 돌아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조감독의 이상한 태도에 고개를 저었다. 김정훈 감독의 소식이 전해진 후로 며칠이나 지났지만, 촬영장은 여전했다. 자신을 보면 슬금슬금 피하는 조감독도 그대로였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그대로였다.
그는 답 없는 상황에 나오려는 한숨을 누르며 분장실로 향했다.
“가자, 산아. 태산이 줄 잘 잡아.”
“앙.”
아이 짐이 가득 든 가방을 메고 유아 왜건을 끄는 태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 손을 잡고 떠난 그를 두고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그의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사실 그가 미나에게 들었던 소문은 잦아든 지 좀 되었다. 김정훈 감독의 무리한 연기 주문이 줄고, 태주와 연기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목격되면서 자연스레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그 자리를 태주의 연기력에 대한 감탄과 질시가 차지했다.
‘연기 괴물’, ‘연기 자판기’.
태주에게 새로 붙은 별명이었다. 누가 처음 그렇게 불렀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촬영장에서 태주의 연기를 본 누구도 그런 별명을 붙이는 일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김정훈 감독의 불안한 심리의 발로였지만, 결과적으론 태주의 연기력을 검증받은 상황이었다. 태주에겐 불편하고 답답한 일이었지만, 뛰어난 외모에 가려졌던 연기력이 재조명받은 기회였다.
촬영장 안의 다른 사람들과 교류가 없는 태주가 정보를 얻을 곳은 스타일리스트인 미나와 매니저인 견우뿐이었다. 그중 미나는 꽤 정보에 빠른 사람이었다. 그녀의 정보는 정확성은 견우만 못했지만, 양이나 속도는 다른 누구보다 월등했다.
그녀가 정보를 물어 오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담당 배우에 관한 얘기는 거의 흘리지 않는 견우와 다르게 미나는 별것 아닌 태주의 정보를 대가로 여러 소문을 물어 오곤 했다. 오늘 역시 그렇게 가져온 따끈한 정보를 태주에게 들려줬다.
“에이, 말도 안 돼요.”
“아니야. 예전에도 너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래도 영화감독으로서의 입지가 있는데, 갑자기 드라마 연출을 맡을 리가요.”
“김정훈 감독님은 영화감독 아니시니? 그분도 드라마는 이게 처음이시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조감독님을 추천하셨다는 얘기도 있었잖아요.”
태주의 말에 미나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거울을 통해 태주의 눈을 바라봤다. 얘가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싶어서였다. 다행히 진심은 아닌듯했다.
“조감독님 경력도 십 년이 넘는다고 들었어요. 슬슬 입봉하실 때잖아요.”
“이 작품으론 무리지.”
“역시 그런가요?”
“당연하지. 8편짜리 한 시즌에 상업 영화 두세 편은 찍을 만큼의 자본이 들어가는 작품이야. 그런 작품 연출을 입봉 감독에게 맡길 제작사가 있겠니? 투자자들도 난리 날걸?”
“음.”
조감독님이 시즌 2 연출을 맡는 일은 아무리 김정훈 감독이 추천하고 제작사에서 바라도 뉴플릭스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미나의 말대로 상업 영화 제작비 이상을 투자한 그들이 조감독님에게 연출을 맡길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의 모든 감독이 작품 활동 중이어서 도저히 맡을 사람이 없지 않은 한 말이다.
그래도 미나가 언급한 감독의 이름은 정말로 예상 밖이었다. 절대로 자신과 작품 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기던 감독이었기 때문이었다.
“너 혹시 에 캐스팅하려고 언론 플레이한 걸 아직도 안 좋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때 그건 제작사에서 한 짓이었다며.”
“그 일은 정말 신경 안 써요. 그냥 한창석 감독님이 드라마 연출을 맡는다는 게 안 믿어져서 그래요.”
“하긴 이런 얘길 바로 믿을 사람이 없긴 하겠다. 그분이 제작비가 모자라서 영화를 못 찍는 분도 아니고.”
한창석 감독이 같이 영화를 찍자고 나서면 거절할 제작사나 배우가 있을 리 없었다. 데뷔작부터 화제를 몰고 다녔던 그는 찍는 영화마다 손익 분기점을 가볍게 넘기는 감독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우수한 성적으로.
그래서 태주는 더 믿기 힘들었다.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세간에 이름 높은 영화감독이 대체 왜 드라마의 연출을 맡는단 말인지. 이런 일은 회귀 전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가 아는 한창석 감독은 쭉 영화감독으로 활동했었다.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한창석 감독님이 너랑 꼭 작품을 하고 싶다고 했다더라. 술자리에서도 몇 번이나 그런 얘기를 했었대.”
“….”
그 말은 한창석 감독이 드라마 연출을 맡는다는 말보다 더 안 믿어졌다. 회귀 전엔 자신만 보면 혀를 차던 사람인데, 그럴 리가.
게다가 한창석 감독은 그 박재우를 보고 자신이 바라는 것 이상을 보여 줄 배우라고 극찬했던 사람이었다. 시나리오도 잘 쓰고 연출도 잘하는 감독이었지만, 사람 보는 눈은 별로였다.
자신이 들은 소문을 한참 얘기했지만, 태주의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 거둬지지 않았다. 그런 눈빛에 어쩐지 오기가 생긴 미나는 한창석 감독에 관해 들은 것을 모두 꺼내 놓았다. 술자리에서 태주의 연기를 칭찬했다, 태주의 소개를 배우 누구에게 부탁했다, 등등. 태주와 미나의 이상한 대치는 견우가 촬영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서 올 테야.”
“토틸토틸 알바믈 주어서 올 테야.”
촬영하는 동안 왜건에서 한잠 잔 태산이의 노랫소리가 기운찼다. 태주는 태산이가 부르기 시작한 산토끼 노래를 같이 부르며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실외에 둔 왜건 안에서 잤지만, 감기 기운은 없어 보였다. 노래까지 부르면서 더미를 태운 왜건을 미는 모습이, 체력도 가득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산이는 만화 노래 안 부르네?”
“TV를 거의 안 봐서요. 만화 노래는 아는 게 없어요.”
“그거 괜찮네. 우리 조카는 맨날 전화해서 만화 캐릭터 장난감이랑 스티커 사 달라고 난리인데.”
“하하하.”
태산이는 만화 캐릭터 장난감이나 스티커 같은 것엔 전혀 관심 없었다. 호랑이 모습일 때도 아이 모습일 때도 몸으로 하는 놀이를 좋아해서, 평소에는 공놀이나 잡기 놀이, 숨바꼭질 등을 하면서 놀았다.
그렇다고 장난감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장난감은 어디서 나는지 모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회사로 오는 것들 대부분은 기부하는 중인데도 매일 늘어나고 있었다. 그것도 지나치게 고급스러워서 정말 아이가 가지고 놀아도 괜찮은지 걱정스러운 것으로.
“태주 씨, 집에 들어가시면 꼭 문자주십시오.”
“알았어요.”
“무슨 일 있으시면 바로 연락하시고요.”
“네, 그럴게요.”
“매니저님 그만하고 가요, 좀. 태주가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요.”
태주의 차에 태산이 왜건과 짐까지 모두 실어 준 뒤에도 견우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출퇴근 길을 같이 하지 못하는 게 마음이 쓰이는지, 연신 태주에게 연락하라 당부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편에서 미나의 짜증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타일리스트 팀을 먼저 보낸 미나는 견우와 회사로 같이 가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견우의 잔소리에 태주보다 먼저 질린 표정이었다.
“큼.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태주 씨도 산책은 조금만 하고 바로 돌아가십시오.”
“아, 좀! 그만 가요, 좀!”
“하하하. 어서 가세요. 산아, 인사.”
“안냐.”
“응. 산이 안녕.”
태주는 먼저 출발하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준 뒤, 아이 손을 잡았다. 촬영 내내 왜건에서 잔 아이라 차에 타기 전에 산책을 먼저 하기로 했다. 집까지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라 그 전에 아이의 흥미를 채워 주어야 했다.
“태산이 리드 줄 산이가 잡을래? 아니면 형이 잡을까?”
“사니.”
“응, 안 놓치게 꼭 잡아. 가자.”
“앙.”
태주는 출발하기 전 태산이와 더미의 보온 마법 물품이 잘 채워졌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둘 다 얌전히 묶고 있었다.
촬영장이 자리한 곳은 여름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었다. 날이 추운 걸 빼면 태산이와 산책을 즐기기에 부족하지 않은 장소였다. 오늘 두 사람이 산책할 코스는 촬영 세트를 펼친 산 중턱이 아닌, 그 아래쪽의 산책길이었다.
“토틸토틸 알바믈 주어서 올 테야.”
“킥. 산아, 집에 가는 길에 군밤 사 갈까?”
“궁밤?”
“응, 알밤을 불에 구운 거야. 맛있어.”
“앙.”
평소 잘 가지 않던 주차장 뒤쪽을 돌고 온 둘이 주차장을 통과해 반대쪽으로 가려 할 때였다. 태산이가 열심히 노래하는 밤나무를 정원에 심어 볼까 고민하는 태주의 옆구리에 손길이 느껴졌다. 콕콕 찌르는 느낌에 내려다보자 태산이가 한쪽을 가리켰다.
“신발? 사람?”
촬영장으로 올라가는 길옆 쪽에 작업화가 보였다. 태주는 깜짝 놀라서 태산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좀 전에 분장실에서 내려올 때는 보지 못했으니, 쓰러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쓰러진 사람은 촬영장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미술팀 중 세트를 담당하는 외주 제작팀의 스태프였다. 정식으로 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오며 가며 눈인사 정도는 나눈 적 있는 사람이었다.
“괜찮으세요?”
태주는 스태프가 쓰러지면서 어딜 부딪혔을지 몰라서 몸은 건드리지 않고 가볍게 뺨을 두드리며 의식이 있는지 확인했다. 스태프는 추운 곳에 쓰러져 있던 탓인지 피부는 차갑고 입술은 검보라색이었다.
“상, 자.”
“상자요? 저기요? 이런!”
“….”
“태쭈, 저꺼.”
스태프는 상자라는 단어만 겨우 뱉고 다시 기절해 버렸다. 태주는 119에 신고해서 구급차를 부른 뒤, 남자가 얘기한 상자를 열어 봤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옮기는 중이었길래 자기 몸보다 더 먼저 챙기는지 의아했다.
-탁!
“미친.”
남자가 옮기던 허술해 보이는 상자 안에는 고급스러운 보관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도자기가 들어 있었다. 우아하고 매끄러웠을 병목이 똑하고 부러진 채로 말이다.
가짜인가? 태주는 순간 자신이 본 도자기가 가짜였으면 하고 바랐다. 대체 이걸 왜 미술팀의 스태프가 옮기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보험은 들어두었는지, 책임 소재는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 태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깨져 떠?”
“후우. 응.”
태주의 어깨너머로 상자를 봤는지 태산이가 깨졌냐고 물었다. 태주는 주머니 속의 핫팩을 기절한 남자의 가슴 부위에 올려두고, 몸을 조이는 것들을 풀어 주었다. 그러면서 아이의 질문에 한숨 섞인 답을 뱉었다.
“태쭈 사니가 도아주까?”
“응? 그럼, 산이가 여기서 이 아저씨 좀 봐줘. 형이 차에서 담요랑 핫팩이랑 챙겨 올게.”
“앙.”
태주가 차로 달려간 사이 태산이가 상자를 열어봤다. 상자를 열고 하나를 더 열자, 하얀 도자기가 보였다. 도자기는 아까 봤던 그대로였다. 태산이 눈이 반짝였다. 좋은 게 떠올라서였다.
-탁탁탁.
“산아, 잘 지켜봤어?”
“앙.”
“그래. 잘했어.”
급한 마음에 달려서 돌아온 태주가 기절한 스태프 몸 위에 담요를 덮어 주고, 견우와 조감독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급차에 그가 같이 타고 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아이랑 고양이를 데리고 있다는 문제도 있었지만, 그가 가면 기자들 눈에 띌 것 같아서였다. 척 봐도 과로 혹은 수면 부족인 스태프였다. 절대로 좋은 기사가 나올 리 없었다.
“태쭈, 이꺼 주까?”
“응? 산아 이걸 어떻게….”
“꺄하.”
‘꺄하는 무슨 꺄하야. 이 꼬맹아.’
정원 침실의 서랍장에 넣어 둔 ‘복원 주문서’가 왜 태산이 손에 들려 있는지 설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말썽쟁이 녀석이 그의 물건을 숨기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것보단 이걸 현실까지 가져오고, 거기다 여기까지 챙겨 온 걸 자신이 전혀 몰랐다는 사실에 얼떨떨했다.
“어휴. 부탁해.”
“자, 바다.”
“….”
“태쭈 고맙뜹니다, 해야지.”
“고맙습니다.”
-뿌득!
태주는 복원 주문서 뭉치에서 딱 한 장만 꺼내 주는 태산이의 모습에 이를 갈았다. 여러 장이 돌돌 말린 뭉치에서 주문서를 한 장만 풀어내는 손길이 익숙했다. 보아하니 이미 여러 번 써 본 모양이었다.
그의 것을 가져가서 제 것처럼 생색내는 꼬맹이의 모습이 어이없었지만, 그는 곧바로 물건을 사용했다. 사용하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며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 해떠?”
“응. 그런데 산아 그 주문, 그새 넣었니?”
“앙. 사니 꺼.”
복원 주문서를 되찾으려는 그의 마음을 알았을까, 꼬맹이 녀석이 그새 복원 주문서를 목줄에 넣어 버렸다. 태주는 절대 돌려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일단은 포기하기로 했다. 태산이 일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였다.
“조감독님! 이쪽이에요.”
태주는 주차장으로 이어진 비탈을 급하게 달려 내려오는 조감독을 불렀다. 그를 부르면서 이 정도 활약이면, 다음 시즌은 출연료를 두 배로 받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256화.
태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연신 스크롤을 내리고 있었다.
“대체 소고기를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양념에 재라는 거야, 그냥 볶으라는 거야?”
“태쭈, 왜에?”
“아니야, 산아. 배고파?”
“갠차나. 태쭈 천처니 해.”
“응. 알았어.”
태주가 정원에 다녀오는 시간도 바꿔가면서 새벽같이 일어나 주방에서 움직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새해 아침에 가족에게 따뜻한 떡국을 대접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단지 떡국을 끓이는 방법이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요리 초보인 태주는 어떤 게 맞는 방법인지 구분할수 없었다. 국거리 고기의 밑 준비하는 방법부터 고르기 어려웠다.
‘여기는 물에 씻어서 키친타월로 닦으라고 하고, 여기는 찬물에 물을 갈아주면서 30분 동안 핏기를 빼 주라고 하고. 대체 뭐가 맞는 거야?’
그 외에도 많았다. 고기를 양념에 재워두라는 것도 있었고, 참기름에 소금, 후추를 뿌리며 볶으라는 것도 있었다. 너무 많은 선택지에 겪어 본 적 없는 선택 장애까지 겪고 있었다.
“찬물에 행군 다음에 물에 넣고 핏기를 빼낸 뒤 키친타월로 닦는 거야. 그다음은 거기까지 한 다음에 다시 생각하자.”
태주는 두부만 한 소고기 덩어리를 흐르는 물에 여러 번 씻었다. 그리고 그대로 찬물을 담은 보울에 담갔다. 태블릿의 알람을 30분 뒤에 울리도록 맞춘 뒤, 보울을 내려놨다. 고기의 핏물이 빠지는 동안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산아, 형 좀 도와줘.”
“앙.”
“여기 이 떡들 사이에서 갈색만 골라내는 거야.”
“이꺼?”
“응, 그거. 산이 흰색 떡은 싫지? 갈색만 골라서 끓여 먹자.”
대여섯 봉지 정도 되는 떡국떡을 넓은 쟁반에 가득 부은 뒤, 태주와 태산이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태주는 동도 트지 않은 새벽부터 이런 황당한 일을 하는 자신이 좀 우스웠다. 어차피 색만 다르고 맛은 같은 떡인데, 굳이 이렇게 많이 사서 고르는 게 웃겼다.
“태쭈, 이꺼 쪼코리야?”
“그, 아니. 초콜릿 맛은 안 날걸?”
태주의 대답이 끝나자 갈색의 떡국떡을 입에 넣으려던 태산이의 손이 멎었다. 이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콜릿도 아닌데, 이걸 왜 고르지? 하는 얼굴이었다.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먹을 수 있어.”
“아앙?”
“산아, 떡국 안 먹으면 계속 다섯 살이래.”
“앙?”
“진짜야. 떡국을 먹어야지 크는 거야.”
떡을 쥔 태산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에라도 떡을 모두 먹어 치울 듯 뜨거운 눈빛은 덤이었다. 태주는 오색 떡 무더기를 슬쩍 태산이 앞으로 밀어줬다.
떡국을 먹건 안 먹건 생일이 지나면 나이를 먹지만,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절대 떡 고르기가 귀찮아서는 아니었다.
태주와 태산이가 쟁반 앞에 붙어 앉아 갈색 떡을 바쁘게 골라낼 때, 둘만큼이나 바쁜 대상이 있었다. 태산이가 소환해 둔 더미였다. 더미는 주방 조리대 위에 올려진 보울을 들여다보며 작은 머리를 팽팽 돌리고 있었다.
“냐아아아.”
‘킁킁! 소고기다.’, ‘누가 고기를 물에 빠뜨렸나?’, ‘산이를 부를까?’, ‘잡을 수 있나?’ 등등. 더미는 처음 접한 난감한 상황, 맛있는 고기가 물에 빠진 상황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휙휙!
“냐아앙.”
더미가 앞발을 보울 위로 휘둘렀다. 고기가 크긴 하지만, 힘이 센 편이라 앞발로 건져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휙!
-첨벙!
성공! 날쎈 앞발질에 커다란 고기가 딸려 나왔다. 사냥에 성공해서 흥분한 더미가 발톱에 꿰인 무거운 고기를 싱크대 위에 패대기쳤다. 앞발로 몇 번 더 후려갈겨 확인 사살한 더미가 태산이를 찾았다. 업적을 자랑할 생각이었다.
“냐아앙.”
“저디가. 사니 바빠.”
“냥.”
“잠깐. 너 발 왜 젖었어?”
태주는 태산이와 실랑이하다 그 옆에 그대로 앉아서 발을 핥는 더미의 행동을 의아해했다. 정원에 나가지도 않은 녀석이 발을 어디서 적셔와서 핥는 건지. 보울의 고기를 건졌을 것이라곤 짐작 못 한 태주는 티슈로 앞발의 물기를 짜준 뒤, 다시 떡을 골랐다.
“다 됐다. 산이가 도와줘서 금방 끝났네. 산이 수고했어. ”
“꺄하하.”
“이제 이걸로 형이 떡국 맛있게 끓여줄게. 조그만 기다려, 알았지?”
“앙. 아라떠.”
떡을 찬물에 씻어서 불게끔 담가놓고, 고기 육수를 내자. 머릿속으로 다음 순서를 되뇌며 주방으로 간 태주가 ‘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핏물이 빠지게 담가둔 고기가 조리대 위에서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윽! 이놈의 똥고양, 흠흠. 어이구.”
그는 새해 아침부터 큰 소리를 내기 뭐해서 급하게 입을 막았다. 그렇지만 기가 막혀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어이구 소리까진 막지 못했다.
이런 짓을 한 범인이 누군지는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조리대 위에 드문드문 보이는 물 자국을 낸 범인과 좀 전 다리가 젖어서 거실로 온 더미가 동일 인물일 게 분명했다.
“어휴, 정말이지.”
태주는 작게 한숨을 쉰 뒤 고기를 집어 들었다. 그는 고기를 담글 보울에 물을 받던 동작을 멈췄다. 곧 일곱 시였다. 다시 30분간 핏물을 빼기에는 시간이 모자랄 듯했다.
“이렇게 큰 고기도 찬물에 행구고 키친타월로 물기를 닦아도 되나?”
고기가 좀 크긴 하지만 될 것도 같았다. 스테이크는 이것보다 큰 것도 그냥 굽는데, 그냥 끓인다고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진 않았다. 태주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요리에 재주는 없었지만, 맛있는 것을 찾아 먹은 것은 꽤 오래였다. 그러니 그냥 끓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부글부글.
“거품은 언제까지 나는 거지?”
설마 한 시간 반, 육수를 내는 내내 냄비 옆에 붙어서 거품을 걷어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게다가 조심조심 떠서 버린다고 버렸는데, 이미 냄비의 물이 삼 분의 이로 줄어든 상태였다. 이 추세라면 육수를 내기는커녕 냄비가 텅텅 빌 것 같았다.
“태주 씨? 요리하십니까?”
“쿠첼, 일어났어요? 떡국 끓여요.”
“떡국이요?”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맛있게 끓여드릴게요.”
“네.”
쿠첼루스는 시계를 확인했다. 8시. 그렇게 배가 고픈 건 아니니, 기다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침이 좀 늦어질 듯했지만, 태주가 직접 요리를 하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한두 시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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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태주가 했지만, 마무리는 2호가 한 떡국이 식탁에 차려졌다. 태주는 마무리까지 전부 하길 바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걷어내고 걷어내도 계속 생기는 거품과 졸아들어 냄비 바닥에 깔린 육수 때문에 패닉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요리조리 팔을 움직이며 떡국의 사진을 찍는 쿠첼루스. 먹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같이 식탁에 둘러앉은 2호. 포크와 숟가락을 양손에 하나씩 나눠 쥔 태산이. 새해 첫날 아침 태주의 식탁이 북적거렸다.
“잘 먹겠습니다.”
“짤 머게뜹니다.”
갈색의 색다른 떡국은 특이한 생김새와 다르게 꽤 괜찮은 맛이었다. 떡의 색깔 때문인지 태산이도 거부감 없이 잘 먹었다. 사실 태산이의 그릇엔 떡이 몇 개 없었다. 잘게 자른 소고기와 계란이 가득한 그릇 안에 떡은 나이와 같은 숫자인 여섯 개만 들어있었다.
“다 머거따. 사니 이제 여텃 짤이야.”
“킥. 응. 산이 이제 여섯 살이야.”
진작부터 여섯 살이었지만…. 태주는 아이의 착각이 귀여워서 그건 말해 주지 않기로 했다.
“여섯 살 산아, 새해 인사할까?”
“인타?”
“응. 여기 카메라 보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 봐. 그거 하면 형이 세뱃돈 줄게.”
“세배똥?”
“풉. 아니, 세배똥이 아니고 세뱃돈.”
“태주 씨 세뱃돈은 아직 이르지, 아! 하하하.”
쿠첼루스는 아직 설날도 아니고 세배도 하지 않았는데, 세뱃돈을 준다는 태주를 말리려다 말았다. 태주가 꺼내든 것이 동그란 동전 초콜릿이었기 때문이었다. 금화 모양의 초콜릿을 언제 사둔 것인지 작은 자루를 열어서, 이게 세뱃돈이라며 아이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산이 형 촬영할 때 하는 것처럼 해 볼까?”
“앙?”
“형이 ‘레디, 액션!’ 할게. 그거 하면 산이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거야 알았지?”
“앙, 아라떠.”
태주는 본인의 새해 인사를 SNS에 올릴 때 태산이의 새해 인사도 같이 올릴 계획이었다. 연예 활동도 하지 않는 아이에게 매번 선물을 보내주는 팬들에게 감사 인사 겸 안부를 전할 생각이었다.
“레디, 액션!”
“앙! 새해 봉 마니 바드떼요.”
“오케이, 컷!”
“꺄하.”
그를 흉내 낸 게 재밌었는지,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거실에 퍼졌다. 웃는 모습까지 찍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로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태주가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은 채 소파로 다가갔다. 이번엔 그의 새해 인사를 녹화할 차례였다.
“산이 너무 잘했어. 자, 이건 세뱃돈.”
“앙, 세배똥!”
“킥킥. 아이, 우리 산이 발음이 진짜….”
“아앙.”
“하하하. 여기, 산아 여기 잡고 벗기면 돼.”
자루에서 꺼낸 동전 초콜릿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 아이를 무릎에 앉힌 태주가 껍질 벗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최근 아이는 남이 해주는 것보다 스스로 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세수도 옷 갈아입기도 혼자 하길 바랐다. 그는 그게 조금 아쉬웠지만, 한편으론 대견해하며 응원하고 있었다.
“태주 씨. 준비되셨습니까?”
“응. 됐어, 호야.”
“시작하겠습니다.”
태주는 손으로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긴 뒤, 준비됐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2호가 든 폰에서 녹화 시작을 알리는 삐 소리가 났다. 태주는 밝게 웃는 얼굴을 카메라로 향한 뒤 준비한 인사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지난 한 해 여러분 덕분에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고 지지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작품 활동을 이어 올 수 있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새해 인사를 올린 뒤, 태주와 태산이는 낮잠을 자기로 했다. 떡국을 만들기 위해 너무 이른 시간에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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