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71
271. 시선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태주는 아침에 듣지 못한 얘기를 견우에게 물었다. 화제의 주인공이 주인공이라 상관하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없었지만, 같은 영화에 출연하는 출연자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일이 그렇게 된 겁니다.”
“최나라 씨만 안됐네요.”
최나라가 안됐다고 여기는 것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피해자였다. 욕심을 부린 PD가 떠넘긴 잘못의 대가를 힘없는 배우가 치르게 되어 버렸다.
“회사에선 어떻게 할 계획이에요?”
“만약 최나라 씨가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면, 이 작가님과 오해를 푼 뒤 최대한 조용히 묻는 방법을 쓸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요?”
“그때도 이 작가님에 대한 대응은 그대로일 겁니다. 대신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미디어를 활용할 겁니다.”
“최나라 씨랑 같이 출연했던 배우들은요? 마지막 화도 방송했으니, 지금 한참 인터뷰로 바쁠 때인데 아무 말도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태주는 최나라가 출연했던 드라마의 주연 배우들을 떠올려 봤다. 둘 다 대형 기획사 소속은 아니었다. 아니, 두 사람이 대형 기획사 소속이었더라도 이런 일에 나서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들이 소속된 회사든 본인이든 드라마 작가나 PD와 문제를 일으키느니, 그냥 침묵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사과도 못 받겠네. 하긴 사과할 인물들이었다면,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하지도 않았겠지.’
견우가 얘기한 두 가지 상황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대가 제법 인기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오해만 풀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 불합리하게도 느껴졌다.
“매니저님 만약 최나라 씨랑 같이 영화를 찍게 되면요. 촬영 끝난 뒤에 예능 좀 잡아 주세요. 최나라 씨랑 같이 나갈 만한 프로로요.”
“태주 씨?”
“어차피 홍보도 해야 하잖아요.”
“…제 선에서 결정할 만한 일이 아니군요. 최나라 씨 출연이 결정되면, 우 팀장님과 논의해 보겠습니다.”
“네. 우 팀장님한테 제가 최나라 씨를 도울 의사가 있다고 전해 주세요.”
영화의 홍보 방향은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다. 영화의 내용이 대본과 달라지는 일도 왕왕 있었고, 개봉할 때쯤의 사회 분위기에 맞춰 홍보 방향을 달리하는 일도 많아서였다.
그래서 지금은 가장 기본적인 홍보만 하는 중이었다. 영화 촬영 중이라는 기사를 내보내고, 촬영 현장의 스틸 컷을 공개하거나, 출연자들의 SNS에 영화 소식을 노출하는 정도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홍보 방향이 정해지지 않았어도 누구나 아는 사실은 있었다. 예능이나 인터뷰에 태주와 지환, 둘이 같이 나가게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최나라 한 명 동석시키는 것은 무리한 일은 아니었다.
‘얼마 만이지? 제대 후 처음 나가는 예능에 같이 나가는 정도면 도움이 되겠지.’
제대 후에도 를 찍은 뒤에도 예능 섭외는 많이 들어 왔었다. 작품을 연이어 하느라 예능에 출연할 짬이 나지 않았지만, 영화 촬영이 끝난 뒤에는 아니었다. 시즌 2의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몇 달의 여유가 있었다.
그사이 홍보도 할 겸 예능에 출연하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덤으로 억울한 사람도 조금 도와주고.
아이와 장난을 치면서 집으로 들어가는 태주를 보는 견우의 표정이 복잡했다. 그는 태주가 최나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그녀를 불편해하고 최대한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나라가 같은 소속사여서 예의를 갖춰 대하는 것일 뿐, 만약 다른 소속사였다면 아는 척도 안 했을 게 뻔했다. 그런 그가 자진해서 예능에 동반 출연하겠다는 얘기를 한 것은 예상 밖이었다.
어쩌면 회사의 대응책을 너무 간략하게 태주에게 알려 줘서 그러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는 회사의 대응책을 자세하게 알려 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최나라의 매니저인 형식의 스마트폰이 고장 나서 수리를 맡길 예정이고, 그 스마트폰을 수리한 수리 기사가 우연히 발견한 녹취본을 평소 자주 이용하는 커뮤니티에 올리는 일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방식으로 박 PD를 압박할 생각이었고, 그런 작업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작업을 통해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현장에서 스태프로 일했던 한 관계자가 박 PD의 독단적인 행동을 묵인한 일을 SNS에 양심 고백할 예정이었다.
-촬영 현장, 한국 PD 협회의 권고에도 PD 횡포 여전해.
-도 넘은 PD 갑질, 폭언과 욕설에 제보자 색출하겠다는 협박까지.
견우는 오후에 올라온 기사를 본 뒤, 회사에서 이미 압박 작업을 시작했다는 걸 눈치챘다. 기사들은 얼핏 보면 최나라의 드라마와는 전혀 관계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기사의 댓글 곳곳에 어느 PD인지 알 수 있는 힌트가 들어 있었다.
회사에서 제일 독한 두 사람이 벼르고 있었다. 최나라의 영화 출연이 성사되든 취소되든 이런 압박은 한동안 이어질 것이다. 아니, 사건이 물밑으로 가라앉아도 아마 압박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걸 태주 씨한테 알릴 순 없지.’
태주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은 회사의 임원들이 방송국 관계자를 만나서 사과와 인터뷰 기사 삭제를 요청했다는 정도였다. 태주가 오해하는 것은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일은 배우에게 알리기 힘들었다.
*
촬영 중간 세트를 정비하는 사이 의자에 앉은 태주에게 작은 손이 내밀어 졌다. 태주는 찡그리지 않도록 미간에 힘을 줘 펴면서 작은 손 밑에 손바닥을 펼쳤다.
-톡. 톡.
“꺄하.”
“크흠. 고마워 , 산아.”
“앙. 머얼. 태쭈 마니 머거.”
맡은 임무를 다시 훌륭하게 완수한 태산이가 미나를 돌아봤다. 미나는 그런 아이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다. 웃는 얼굴과 잘했다는 칭찬도 잊지 않았다.
“우리 산이 너무 잘했어. 최고야.”
“꺄하.”
“태주야 뭐 하니? 어서 먹어. 산이가 챙겨 준 건데, 안 먹으려고?”
“먹어야죠.”
“호호호.”
홍삼이 들어 있다는 조그만 젤리 봉지를 까던 태주는 목까지 올라온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남에게 보이기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자신을 걱정해서 아이에게 부탁한 미나나 그런 미나의 부탁을 열심히 들어주는 아이를 탓할 순 없었다. 그는 그저 안경 쓴 펭귄 젤리 영양제 통이 어서 비워지길 바라기만 했다.
“하나는 산이 먹자. 이리 와.”
“앙.”
태주는 젤리 하나를 아이 입에 넣어준 뒤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산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에 관해 나름대로 고심한 뒤 얻은 결론을 실행 중이었다. 그는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아이를 무척 대견하게 여기고 있었다.
“산아 부채에 색칠 많이 했어?”
“아앙. 하나 해떠.”
“벌써 하나를 다 했어? 대단한데.”
“꺄하하.”
태주는 자신의 의자 옆에 펼쳐져 있는 접이식 의자세트 위를 보며 물었다. 일체형의 테이블 위엔 크레용과 책, 물병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모두 그의 촬영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아이가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오늘은 테이블 위에 평소와 다른 물건이 추가되었다. 동물 캐릭터가 선으로 그려진 흰색 부채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흰색의 부채는 색연필이나 크레용 등으로 자유롭게 색칠할 수 있는 것으로, 완성하면 사람들에게 선물할 물건이었다.
“부채 전부 칠하고 나서 선물할 거야? 아니면 하나씩 칠하면서 선물할 거야?”
“앙?”
“하하하.”
태주의 질문을 받은 아이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는 당황한 아이의 표정에 웃고 말았다. 열심히 부채를 칠하긴 했는데, 완성된 부채를 어떻게 선물할지는 고민해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형은 호랑이 부채 할래. 산이 색칠 다 하면 형 선물해 줄래?”
“뭐야? 벌써 고르는 거야? 그럼 누나는 강아지 부채 할래.”
“앙. 아라떠.”
“고양이 그림이 귀엽군요. 저는 산이가 고양이 부채를 선물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앙.”
테이블 위에 올려진 부채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몇 개 되지 않는 부채의 주인이 되려면 눈치가 빨라야 했다. 평소엔 대화에 끼지 않고 떨어져서 구경만 하던 견우가 재빠르게 나서서 하나를 차지했다.
태산이가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부채를 하나씩 사람들에게 들어 보였다. 주인을 찾아주려는 동작에 주변의 어른들이 너도나도 나서며 아이의 기를 살려 주었다.
태주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뜨거운 햇볕을 그대로 맞으며 돌아다니는 아이를 스튜디오 안에 잡아 둘 생각에 준비해 준 도구들이었는데,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그는 아이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 주고 세트로 향했다. 정비를 끝낸 스태프들이 세트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오늘의 마지막 촬영을 할 차례였다.
촬영을 마친 태주 일행이 주차장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일행의 제일 앞에서 가던 2호가 멈춰서 표가 나지 않게 주변을 둘러봤다. 태주를 주시하는 시선이 늘어나 있었다.
트리즈도 제작사도 태주의 위치가 노출되지 않게 조심하고 있었지만, 모든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그의 스케줄을 알아내서 따라오는 팬도 있었고, 그만 쫓아다니는 파파라치도 있었다.
하지만 새로 생긴 시선의 주인은 그런 부류들과 달랐다. 그들에게선 태주를 향한 질척거리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관찰하는 시선이었다.
“호야, 짐 싣는 거 도와줄까?”
“괜찮습니다. 먼저 밴에 타십시오.”
“제가 도울 테니, 이호 씨 말대로 먼저 타십시오.”
“네. 산아 차 타자.”
“앙.”
오늘도 밴에 실을 짐이 상당했다. 갈아입을 옷이 든 가방 외에도 음료수와 간식이 든 쿨러 백, 태산이의 책과 장난감 등이 든 가방, 접이식 의자 세트 등. 부피도 크고 무거운 짐이 가득했다.
태주를 말리고 견우와 같이 짐을 전부 실은 2호가 보조석에 앉았다. 그는 뒷좌석의 두 사람이 제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뒤 견우에게 출발하자는 신호를 주었다. 그때까지 2호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늘어난 시선을 알아차렸다는 티는 전혀 내지 않았다.
“회사에 잠시 들렀다 가시지요. 팀장님이 대본을 추려 두었습니다.”
“아! 슬슬 대본을 확인할 때가 되긴 했네요. 많이 들어왔어요?”
“제법 많이 들어왔습니다.”
“어떤 걸 골라 두셨을지, 궁금하네요.”
“아직 촬영이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보십시오. 아마 제작까지 여유가 꽤 있는 것들로 추려 두셨을 겁니다.”
영화 촬영도 중반을 넘어선 상태였다. 조금 이르긴 했지만, 슬슬 차기작을 골라야 할 시기였다. 영화는 최나라의 일 이후론 별다른 문제가 없으니, 촬영 기간을 넘기진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여유가 있을 때 차기작을 정해 두면 회사에서 보조를 맞추기 편해진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회사와 그, 둘 모두에게 무척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흐음. 매니저님.”
“예.”
“영화 촬영 끝나면 자리 좀 마련해 주세요. 차기작 선택도 좋지만,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크랭크 업 하는 대로 약속을 잡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정확하게 무슨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태주도 견우도 알고 있었다. 재계약. 전속 계약 종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지만, 태주는 재계약 건을 최대한 빨리 처리할 생각이었다. 계약을 질질 끌면서 몸값을 올릴 생각도 계약 조건을 후려칠 마음도 없었다.
그는 따로 마음에 둔 기획사도 없었고, 현재 소속된 트리즈의 일 처리에도 만족하고 있었다. 또 같이 일하는 견우, 미나와도 호흡이 잘 맞았다. 태주는 편하고 좋은 사람들을 두고 굳이 낯선 환경과 스태프를 만나 적응하는 번거로운 짓을 할 의향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태산이가 저렇게 좋아하니, 당분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건 무리지. 뭐, 애초에 옮길 마음도 없었지만.’
주차장에서 기다리다 우 팀장님이 추려 놓은 대본만 받아갈 생각이었던 태주였지만, 그는 밴이 멈추자 안전띠를 풀고 내릴 준비를 했다. 회사에 들르는 것을 알아챈 꼬맹이 녀석이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어서였다.
태주는 대본이 든 박스를 챙기면서 태산이를 찾았다. 아이가 돌아다니는 위치에선 어김없이 웃음이 터져서 어디 있는지 알기 쉬웠다. 사람들이 웃는 이유는 태산이가 나눠 주는 물건의 정체 때문인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릴 때 젤리 통을 품에 안고 놓지 않더니, 그새 그걸 나눠 준 모양이었다.
“산아 돌아가자. 인사하고 와.”
“앙. 아라떠.”
아이 고개가 대표실이 있는 방향으로 자꾸 향하는 게 최 대표님을 찾는 것 같았지만, 그만 돌아가야 했다. 오늘은 운이 안 좋았다. 회사에 도착하기 직전에 최 대표님이 자리를 뜨는 바람에,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젤리를 나눠 줄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태주와 태산이가 트리즈에서 시간을 보는 사이, 2호는 쿠첼루스에게 연락을 취했다. 태주를 지켜보는 시선 중 익숙한 사람이 포함된 듯해서였다.
-심부름센터 남 실장에게 태주 씨 주변을 살피라고 의뢰함. 남 실장 연락처 010-****- 1234. 자세한 의뢰 내용은 보안 메일로.
역시 2호의 예상대로 태주를 지켜보는 시선 중 하나는 그에게도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다. 쿠첼루스가 자주 사용하는 심부름센터의 직원이었다. 한동안 해외에서 할 일이 있다더니, 태주의 일을 2호 외의 다른 방향으로도 보고를 받으려고 의뢰한 듯했다.
‘한쪽은 쿠첼루스가 쓰는 사람들이고 그럼 다른 쪽은 어디 소속이지?’
새로 늘어난 시선은 둘이었다. 숫자가 적은 쪽은 태주의 신상에 일이 생기면 바로 쿠첼루스에게 연락하려고 대기 중인 그룹이었다. 원거리에서 지켜보는 쪽은 그들보다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그룹으로, 이런 일이 상당히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그 그룹 역시 심부름센터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적의는 없었지만, 어쩐지 무척 거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