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8
27. 쌓이는 스케쥴
태주는 버스킹 촬영장으로 가기 전에 회사에 들렀다. 우 팀장님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가자 힐링 인터뷰 출연연장 계약서와 ost 기획안, 화보촬영 제안서, 오디션 관련 문서가 앞에 놓였다.
“와. 이게 다 뭐예요?”
“연장 계약은 아시죠? 그건 확인만 하시고요. 버스킹 제작하시면서 부르시는 곡들을 묶어서 ost 앨범을 내자시더라고요.”
“정 감독님이요?”
“네. 노래가 너무 아깝다고 하시던데요.”
태주는 ost 앨범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봤다. 버스킹의 ost 앨범은 리메이크 앨범이 될 게 분명했다. 태주는 영화에서 6곡의 곡을 부르고 연주한다.
“그럼 제가 몇 곡 불러요?”
“감독님이야 6곡 다 넣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저희가 보기엔 한 곡이나 두 곡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버스킹에 나오는 노랜 이미 다른 가수들이 리메이크로 불렀던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이걸 다시 부른다고 듣는 사람이 있을 거 같진 않은데요.”
태주는 이 작업이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독립 영화가 잘 되어 국제 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상업영화로 다시 만들어지는 일도 제법 있지만, 버스킹은 그럴 것 같진 않았다.
태주가 버스킹을 선택한 건 로드무비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태주는 부산으로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도중에 겪는 사건들 그 속에서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연기하고 싶었다.
“흠.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요?”
“다른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냥 리메이크 앨범과 별 차이 없을 ost 앨범을 내는 게 별로 끌리지 않아서요.”
“다른 이유는 뭔가요?”
“사실 ost 앨범을 낸다면 전 ‘선율’의 앨범을 내고 싶어요.”
“아! 선율도 음악 영화죠. 리메이크곡에 바이올린 연주. 좋네요. 둘 다 참가하죠.”
“네?”
“둘 다 앨범이 제작되면 참가하는 거로 하죠. 이태주 배우님, 이런 경험이 쌓여서 모두 배우님의 자산이 되는 거예요. ost 두 군데 다 참여한다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닌데요. 그냥 하세요.”
결국, 두 영화 모두 ost 앨범을 제작하면 참여하기로 결정됐다.
화보촬영은 처음 시작하는 광고로는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다. 국산 고가 브랜드 슈트의 화보였다.
“이 화보는 진혁 배우님하고 같이 하시게 될 거에요. 진혁 배우님이 몇 년째 전속으로 활동하시는 브랜든데, F/W 시즌에 서브브랜드를 런칭할 예정이에요. 이번 화보는 진혁 배우님과 같이 찍지만, 서브브랜드는 이태주 배우님이 메인이세요.”
“좋네요. 아직 데뷔 1년 차인데 이 정도 조건이라니. 마음에 들어요.”
슈트 광고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태주는 어린 나이와는 맞지 않게 고풍스러운 것들이 취향이었다. 슈트도 클래식한 스타일을 좋아해서 진혁이 광고하는 슈트도 몇 벌 가지고 있었다. 물론 돌아오기 전에. 태산이와 같이 산 이후로 슈트 차림을 하고 외출할 수 없어 아쉬워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도깨비 무사]“윽. 이건 내년 1월에 바로 들어가네요.”
“반 사전 제작이고, 16부작 미니로 3월, 월화에 이미 편성까지 받은 작품이에요.”
“잠시만요. 시놉시스 먼저 볼게요.”
도깨비 무사는 인간에게 반한 도깨비 무사가 왕의 부름도 거절하고 인간계에 머물다 벌을 받게 되면서 겪는 일이 주요 내용이었다. 시간이 흘러 도깨비 무사는 벌이 끝나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지만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의 환생을 따라 그 주위를 계속 맴돌며 그녀를 지킨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인간계의 환란을 예고한 도깨비 왕은 비록 귀환 명령을 거부한 무사지만 걱정이 되어 그를 찾으러 내려온다. 하지만 몰라보게 변한 인간계에 적응을 못 하고 온갖 말썽을 일으킨다. 도깨비 무사의 집에 얹혀살면서 돌아가자고 떼를 쓰고 여주를 곤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태주에게 오디션 제의가 온 것은 도깨비 왕의 역할이다. 젊고 아름답고 끝 모를 능력을 지닌 신비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었다.
“좋네요. 이 도깨비 왕 역. 덕분에 휴가가 사라지겠어요.”
“오디션부터 보셔야죠.”
“이 배역은 제 거예요. 이미 제 눈에 띄었으니까요.”
태주가 자만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깨비 왕은 수백 년을 살았지만,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같은 나잇대 아역 중에서 태주를 연기력이나 외모로 앞설 배우는 없었다.
“좋아요. 분량은 많지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매화 출연할 거라고 하더군요.”
“주연은 누가 맡을지 정해졌어요?”
“남주는 주지헌 씨가 할 것 같고요. 여주는 아직 미정이예요.”
“주지헌 선배면 괜찮네요. 액션도 가능하고. 모델 출신이라 저랑 키 차이도 안 나겠네요.”
주지헌은 모델 출신으로 최근 몇 년간은 영화에 주로 출연을 했었다. 로맨스 장르에 약하다는 평이 많지만, 도깨비 무사는 액션신도 많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버스킹 촬영장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네, 영화 촬영 외적인 일이라 다행이었지만, 좀 안타까운 일이 많았어요.”
“다음 주부터는 지방 촬영이 이어지니 조심하세요. 작은 일이라고 넘기지 마시고, 신경 쓰이시는 일 있으면 바로 상의하세요. 그리고 지방 촬영부터는 로드 매니저 최형식 씨가 합류할 거예요.”
“로드 매니저요? 매니저님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요.”
솔직히 아직 신인인 태주에게 이만큼의 인원을 붙여주는 것은 낭비였다. 밴도 그렇고 전속 코디네이터에 매니저만 둘이 붙었다. 총괄하는 우 팀장님까지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이 붙을 정도로 수입을 얻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음 주부터는 지방하고 서울을 오가셔야 하죠. 화보에 녹음, 힐링 인터뷰 촬영도 있고, 미디어 인터뷰도 슬슬 시작할 거예요.”
“바빠지겠네요.”
“그리고 이건 좀 이태주 배우님 허락이 필요한 부분인데요. 아시다시피 트리즈에 신인은 배우님뿐이세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지 모르겠다. 평소 우 팀장님이라면 그냥 이런 게 있으니 하는 게 어떻냐고 바로 물으실 텐데 이상했다.
“최근에는 영화 하시는 분들도 예능에 자주 출연하시는 추세세요. 다음 영화 들어가기 전에 몇 주 예능 촬영하시면서 휴식기를 보내시죠. 우리 회사 배우님들도 마찬가지세요. 예능 출연을 원하시는 분들이 좀 계세요. 그때 이태주 배우님도 같이 하시길 바라세요.”
“저를요?”
“네.”
“저 예능 못하는데요. 전에 보셨잖아요, ‘소소한 동네 여행’.”
그 어리바리한 모습을 좋아한다고 전하기 민망했다. 그래도 자기가 맡은 배우인데 어리바리한 모습이 매력 포인트예요라고 말하는 게 쉽지 않았다. 외모만 보면 전혀 그럴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촬영분을 보니 허술한 면이 꽤 많았다.
‘연기 관련해서 말할 때는 똑 부러진 사람이 어쩜 예능에선 그렇게 어설픈지.’
“그럼 웃겨야 하는 그런 예능은 걸러 주세요. 선배님들하고 같이 나가는 거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럼 출연 전에 어떤 예능인지 알려드릴게요. 하지만 아무리 선배 배우의 요청이라도 무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마음에 안 드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태주 생각에 혼자서 예능에 나가서 헤매는 것보다 이렇게 누군가의 서브로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서브로 나가면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속셈이었다. 젊고 잘생긴 청년이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는 중년 아저씨들의 짓궂은 속내를 너무 쉽게 본 판단이었다.
*
똑똑똑.
“들어오세요.”
우 팀장과 태주, 견우가 있던 회의실에 손님이 들어왔다. 김윤선 배우와 그 매니저 그리고 대표님이었다.
“냐아앙.”
태산이까지. 여러 명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김윤선의 매니저는 곤란한 표정을 한 채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회의실 문을 닫고 자리에 와서 앉았다.
“무슨 일이세요?”
우 팀장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김윤선이 테이블에 책을 한 권 올려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선율]“아! 마에스트로!”
태주가 김윤선을 보면서 마에스트로라 외치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김윤선을 쳐다봤다. 김윤선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옆자리의 매니저가 이마를 짚는 것이 보였다.
“이 마에스트로 역이 딱 맘에 들었어.”
“아니, 형님. 어제까지는 ‘공정거래’가 마음에 드신다고 하셨잖아요.”
“아니. 지금은 이게 딱 좋아.”
“아오! 형님!”
마음에 드는 배역은 조건 따지지 않고 참여한다는 소문대로 김윤선은 주변과 상관없이 선율의 촬영에 들어갈 생각 같았다.
짝짝!
대표님이 가벼운 박수로 회의실의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리고 좌중을 한번 둘러보더니 말을 꺼냈다.
“이렇게 돼서 이번 영화 ‘선율’에 우리 회사 배우 두 분이 들어가게 됐습니다. 앞으로 ‘선율’에 대한 지원 방향을 조정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숨죽이고 대표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선율에 투자할 생각입니다. 배급사도 찾아주고, 우리 배우가 최고의 환경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최대한 지원할 생각입니다.”
“아니, 대표님. 투자는 경영지원 부서랑 얘기를.”
“괜찮아요. 제 개인 투자로 갈 생각입니다.”
“개인 투자요?”
“네.”
대표가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덕분에 선율에 관한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태주는 그저 자신이 맡은 배역을 열심히 연기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그건 김윤선도 마찬가지였는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태주는 촬영장으로 가는 와중에 대표님에 관해 견우에게 물었다.
“매니저님 우리 대표님이요. 개인 투자로 선율에 투자하셔도 되나요? 저야 선율이 투자를 받아서 좋지만, 대표님이 손해 보시면 안 되잖아요.”
“괜찮습니다. 대표님 돈 많습니다.”
“네?”
“하하. 선운 제철이라고 아십니까?”
태주는 언젠가 들어봤던 회사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운수업도 같이 하는 꽤 큰 회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대표님 선운 제철 삼남이십니다.”
“네?”
“쉽게 말해 재벌 3세이십니다. 전혀 관계없는 업계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와. 전혀 그렇게 안 보이셨어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체계를 가지게 된 것은 그렇게 오래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제대로 된 계약서도 쓰지 않고 주먹구구식 운영을 하는 곳이 태반이었다. 그 와중에도 공정한 계약서를 쓰고 연예인을 마구잡이로 들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오해하실까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대표님이 트리즈를 세우실 때 선운에서 투자를 받으신 건 아닙니다. 대표님이 미국에서 유학하실 때 버신 돈으로 차리셨습니다. 투자의 귀재십니다.”
“와! 저는 매일 태산이랑 놀고 계신 모습만 봐서 전혀 예상 못 했어요.”
“큭큭. 대표님 아이 태어나기 전까지 고양이를 키우셨습니다. 지금은 아이 때문에 못 키우시지만요.”
대표님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키우던 고양이를 자주 회사에 데려왔었다는 얘기도 전해 주었다. 어쩐지 매번 태산이를 굉장히 반긴다고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집사의 욕구를 채우는 중이었던 것 같았다.
“김윤선 선배님이 마에스트로 역을 맡아주신다면 정말 최고의 캐스팅이에요. 혹시 러닝개런티로 계약서를 수정할 수 없을까요?”
“러닝개런티로요?”
“네. 전 이 영화가 엄청 잘 될 것 같거든요. 감독님도 대본도 최고인데, 이제는 김윤선 선배님도 출연하시니까요.”
“알겠습니다. 계약서 수정을 거절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대표님이 나서셨으니 배급사도 괜찮은 곳으로 찾아주실 겁니다.”
다행이었다. 버스킹의 촬영도 삼 분의 일이 지나는 시점이었다. 두 달 뒤 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갑작스럽게 바뀐 마에스트로 역이었지만 사실 이성군 보다는 김윤선이 더 배역에 잘 어울렸다.
마에스트로 역을 맡기로 했던 이성군은 현재 나이 마흔다섯으로 육십 대의 마에스트로 역을 맡기에는 너무 젊었다. 게다가 지적이고 곱상한 외모라 가족을 모두 잃고 세월의 풍파에 지친 마에스트로 역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연기력으로 커버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이성군 형님이 기분 나빠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음. 이건 아까 보셨던 박 실장님한테는 비밀입니다. 이성군 배우님이 선율대본을 김윤선 배우님께 건네셨습니다.”
“네? 이성군 형님이 직접이요?”
“네. 아마 마에스트로 역에 김윤선 배우님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신이 버스킹을 촬영하는 동안 선율을 위해서 이성군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 같다.
“김윤선 배우님 영화가 엎어지면서 일정이 비게 되신 걸 들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김윤선 선배님은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일정이 비었어요?”
“1차 리딩까지 갔었는데, 투자자들이 어깃장을 놨습니다. 대본 수정을 바랐더군요. 김윤선 배우님 비중을 높이자는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엎어져요?”
천만 배우인 김윤선의 비중을 높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태주가 상황을 이해 못 하자 견우가 한숨을 내쉬면서 사정을 설명했다.
“김혜숙 선생님이 주연이시고, 김윤선 배우님이 조연이신데. 손을 본 대본에선 김혜숙 선생님 분량이 거의 다 넘어왔습니다.”
“주연배우 분량을 줄였어요?”
“네, 김혜숙 선생님은 그냥 하시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김윤선 배우님이 불같이 화를 내셔서요. 아시다시피 여배우가 원톱인 영화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쯧. 못난 사람들이네요. 김혜숙 선생님 연기를 보면 그분이 왜 주연감인지 바로 알 텐데 말이죠.”
“김윤선 배우님이 왜 그 영화를 선택하셨는지 이해를 못 한 거죠. 대본도 괜찮았지만, 무엇보다 김혜숙 선생님과 같이 연기해보고 싶으셔서 선택하신 거였습니다.”
김혜숙은 이미 칠십이 훌쩍 넘은 배우였다. 회귀 전 태주가 데뷔했을 때는 은퇴하신 후였다. 태주도 기회가 된다면 같이 연기하고 싶은 배우로 꼽는 분이었다.
“이번 영화가 은퇴작이 될 거란 얘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본을 그렇게 난도질을 해놓았으니 이런 사달이 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저희야 김윤선 선배님이 오시니 좋은데. 김혜숙 선생님께는 죄송한 일이네요.”
“영화가 엎어지는 일이야 비일비재한 일입니다만, 은퇴작으로 생각하신 작품에서 이런 일을 당하셨으니 상심이 크실 겁니다.”
돈과 관련된 일이니 성공 가능성 큰 곳에 배팅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수십 년을 연기만 해온 배우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다니.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비정한 연예계의 모습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입맛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