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81
281. 다큐멘터리 >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물론이지요, 이 배우님. 저희도 잘 부탁드려요.”
트리즈와의 재계약 과정은 아주 원활했다. 미리 견우에게 약속을 잡아 달라 얘기를 해 두었고, 대략적인 그의 요구 사항도 전해 두었었다. 재계약은 까다롭지 않은 그의 요구를 트리즈가 대부분 수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배우님, 잠시 제 자리로 같이 가세요. 챙겨 놓은 대본 드릴게요. 일정 얘기도 하고요.”
“네. 산아, 여기 있을래?”
“앙. 사니 여기 이뜨께.”
“그래.”
입 주변이 초콜릿 범벅인 태산이와 최 대표가 잡아 주는 육포를 씹느라 그는 돌아보지도 않는 더미를 확인하고 태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용건이 남은 우 팀장과 견우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 팀장의 자리로 옮긴 태주는 오늘도 대본으로 가득 찬 상자를 책상 옆에 놓아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한동안 대본을 챙기러 들르지 않았다지만, 상자 크기가 너무 커서였다. 우 팀장과 견우가 깐깐하게 선별을 해 둔 대본이었는데도, 그 양이 만만치 않았다.
상자 안의 대본 중에서 그가 출연할 수 있는 작품은 휴식기 없이 빠듯하게 들어간다고 해도 연간 세 작품이 최대였다. 그런데 쌓인 대본은 얼핏 봐도 수십 개였다. 늘어난 대본 수만큼 업계에서의 입지가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이젠 큰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겠다.’
태주의 그런 생각은 대본들을 확인한 뒤에 더 굳어졌다. 그에게 들어온 대본의 질이 좋아진 이유도 있었지만, 대본의 삼 분의 일 이상이 그가 회귀 전에 봤던 것이어서였다.
회귀 전 이 시기에 태주는 첫 번째 천만 영화를 준비 중이었다. 조연으로 출연했던 영화였다. 그 영화 이후로 그에게 들어오는 대본의 양이 무섭게 늘었었다. 그 대본들이 상자에 들어있었다. 그가 선택했던 작품도, 선택하지 않았던 작품도 모두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의 성패와 그 이유가 모두 태주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이 작품 끝낸 뒤부터 인지도 올리려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고르지 않아도 됐었지.’
“그 대본이 마음에 드세요?”
“이 배우님?”
“아! 괜찮아 보여요.”
“그렇죠?”
태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본을 내려놓았다. 그는 우 팀장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 손을 저어 괜찮다고 알렸다.
괜찮을 뿐일까, 우 팀장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대본을 선별하던 중 내용이나 조건이 가장 괜찮은 걸 골라 제일 위에 놓았는데, 그걸 태주가 정신없이 살피는 모습이 기분 나쁠 리 없었다.
“대본은 천천히 살펴보세요. 그리고 재계약 기사는 바로 내보낼까요?”
“그렇게 해 주세요.”
“알았어요. 많이 귀찮으셨어요?”
“조금이요.”
“호호호.”
우 팀장은 태주의 업무용 번호로 쉴새 없이 연락이 온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태주에겐 미안한 얼굴을 했지만, 속으로는 그를 귀찮게 만든 사람들에게 약간의 감사를 표했다.
재계약을 자신하긴 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수십억 계약금에 10:1의 정산 비율 등, 비정상적인 조건의 제안 같은, 도저히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 들어올 수도 있었다. 태주에게는 그럴 가치가 충분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의 성화에 태주가 이른 시점에 재계약을 해 주었다. 평소라면 태주를 귀찮게 한 사람들을 그녀가 가진 연예계 인물 리스트에 마이너스 점수로 적었을 테지만, 이번엔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이 배우님, 이쪽은 말씀하셨던 예능 목록이에요.”
“…많네요.”
“네. 그 전에 이 배우님, 최나라 배우님하고 하신 촬영은 어떠셨어요?”
“…으음. 나쁘지 않았어요. 연기 준비도 잘해 왔고요.”
“그러셨나요? 그래도 예능은 혼자 출연할 만한 것으로 찾아보세요.”
우 팀장은 태주와 같이 예능에 출연하는 게 최나라에게도 좋고, 회사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내키지는 않았다. 영화 홍보를 위해서도 마찬가지, 가능한 방송 시간이 짧은 토크쇼 정도에 출연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만약 최나라가 차기작 오디션에 붙기만 한다면, 둘을 예능에 같이 내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배우님은 허당 기가 있고, 최 배우님은 백지 같지. 지환이는 너무 어리고. 셋을 같이 내보내는 건 아무래도 불안해.’
우 팀장의 불안과 상관없이 태주는 예능 목록을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영화는 후반 작업이 이제 시작되었고, 뉴플릭스 드라마의 공개가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그는 한동안 영화, 드라마와 관련한 스케줄이 없었다. 더불어 연말 시상식에 참석할 일도 없었다.
‘식당인가? 카페도 있고. 전에 했던 포차랑 비슷한 것도 있네.’
“흐음.”
“마음에 드는 게 없으세요?”
“네. 솔직히 다 비슷비슷해서요. 음식점 차려서 장사하는 게 유행인가 봐요. 이거랑 이거도 식당이고, 이것도 상담소 있는 것만 빼면 비슷하고요.”
“아무래도 성공 사례가 있으니까요.”
태주는 예능 목록에서 고를 만한 게 별로 없었다. 영화 홍보는 아직 이르기 때문에 단발성 촬영이 아닌, 시즌제 예능 출연을 생각했었는데, 그에게 온 섭외 대부분이 예전에 출연했던 것과 비슷했다.
그가 목록을 보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봤는지, 우 팀장이 다른 문서 하나를 건넸다.
“이거 한번 보실래요?”
“뭐예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네. 강제 징용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건하고 다른 건이에요.”
세계 각지에서 동물 보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동물과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 얘기하는 다큐멘터리였다. 그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맡아 달라는 섭외였다. 태주는 다큐멘터리 기획서를 찬찬히 살펴봤다.
보통 자연 다큐멘터리는 출연자 없이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촬영하는 반면 이 다큐멘터리는 출연자를 섭외해 동물 보호 운동가들과 같이 활동하는 걸 촬영하는 방식이었다.
“저는 내레이션이에요? 출연자가 아니라요?”
“출연하고 싶으세요?”
“네. 출연자가 정해진 게 아니면, 출연하고 싶어요. 물론 내레이션만 하는 것도 괜찮고요.”
“촬영이 쉽지 않을 텐데요. 기간도 2주 이상 걸리고요.”
“괜찮아요.”
“….”
우 팀장은 귀에 꽂히는 기대하는 듯한 밝은 목소리에 설득을 포기했다. 그녀의 배우는 이미 그 다큐멘터리에 꽂혔는지, 기획서를 대본 상자 위에 얹고 있었다. 그녀는 태주를 설득하는 대신 다큐멘터리 제작진에서 출연자를 이미 모두 정해 두었길 바랐다.
*
태주는 낯선 언어가 사방에서 들리는 복잡한 공항을 헤치면서 일행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는 두리번두리번 공항을 구경하는 태산이 모자를 잘 눌러 씌운 뒤, 견우의 뒤를 따라 복잡한 건물 안을 벗어났다.
“코끼디 어디떠?”
“여기 말고 코끼리 공원에 있지.”
“공언? 태쭈, 공언 언제 가?”
“형이 예약 확인해 보고 나서 가자.”
“아앙. 코끼디.”
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코끼리가 사는 곳이라고 설명했더니, 아이가 도착하자마자 코끼리를 찾고 있었다. 아무리 코끼리가 많은 곳이라지만, 국제공항 앞에 코끼리가 서 있을 리 없었다. 태주는 아이를 달래며 견우의 뒤를 따랐다.
“일정은 며칠 뒤부터 시작되니, 코끼리를 보러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코끼디!”
“흠. 우선 숙소에 짐을 부린 다음에 정하죠.”
“하하하. 그러십시오.”
렌트한 차를 찾은 일행은 예약해둔 프라이빗 풀빌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도중 태주는 이국적인 풍경을 구경하느라 창에 달라붙은 아이의 몸을 잡아 주면서 고집부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마 한국에 있는 누군가는 그 의견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그는 이번 일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우 팀장은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출연자를 섭외해 두었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가 태주의 출연 여부를 묻자 마자 바로 조건을 협의에 들어갔다.
협의 후 우 팀장은 개인 스태프 동원은 최소한으로 해야 하고, 현지 사정에 따라 일정이 길어질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예능에서 하는 보여 주기식 동물 보호 체험이 아니라며 촬영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런 얘기들론 출연을 고집하는 태주를 말릴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에 꽂힌 태주를 말리지 못한 우 팀장은 아예 그것을 기회로 삼기로 했다. 그녀는 다큐멘터리 일정 전후에 현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고, 아주 쉽게 두 건의 일을 찾을 수 있었다. 잡지사의 해외 패션 화보 건과 태주가 홍보하는 브랜드의 F/W 화보 촬영 건이었다.
“여기 괜찮네요. 매니저님, 어떠세요?”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래도….”
“에이. 괜찮아요, 매니저님. 휴가다 생각하고 즐기세요.”
“알겠습니다.”
태주가 예약한 숙소는 입이 떡 벌어지는 곳이었다. 현대적인 디자인의 2층 건물, 건물과 비슷한 크기의 대형 풀, 야외 식사 공간과 바비큐 시설 등이 있었다.
견우는 항공권뿐 아니라 이런 비싼 숙소의 숙박비까지 전부 태주가 사비로 결제하는 마음에 걸렸다지만, 더 말을 보태진 않았다. 대신 그는 체크인을 위해 리셉션 데스크로 가는 태주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에효. 반은 가족 여행이라서 그런 건데, 매니저님이 신경이 많이 쓰이시나 보네.’
화보 촬영에 섭외된 연예인은 일반적으로 두셋의 스태프를 동행한다. 그리고 섭외한 곳에서 숙소 및 항공권을 마련해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만 태주의 경우 2호와 쿠첼루스, 태산이와 더미까지 화보 촬영과 관계없는 인원이 여럿 끼어 있었다. 게다가 태주 일행은 화보 촬영 날짜보다 이틀 먼저 태국에 온 상태였다.
“화보는 사흘 뒤에나 찍겠죠?”
“아마 나흘 뒤에 찍을 겁니다. 보통 첫날은 에디터님이 촬영 현장을 보러 다니십니다.”
“그럼, 화보 촬영 전까진 푹 쉬기로 해요. 점심시간이 벌써 지났네요. 옷 좀 갈아입고 뭐라도 먹으러 가요.”
“예.”
견우와 얘기를 마친 태주가 1층 커다란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분 안 되는 잠깐 사이 태산이 녀석과 더미가 방을 고른 모양이었다. 좀 전까지 두다다 뛰어다니던 녀석들이 한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산이 이 방이 마음에 들어?”
“앙.”
“그래 그럼 여기로 하자.”
태산이가 고른 방은 정원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전면 창이 있는 방이었다. 전면 창을 통해 두 녀석이 자유롭게 정원에 다닐 생각으로 고른 것 같았다. 풀 쪽이 아닌 게 조금 아쉬웠지만, 그는 태산이가 고른 방을 쓰기로 했다. 장난꾸러기 두 녀석을 지켜보려면 이쪽이 나아 보여서였다.
식사를 마친 태주 일행이 자리 잡고 앉은 곳은 강가의 카페였다. 넓은 덱 위에 야외 테이블을 여러 개 늘어놓은 카페는 더미를 데리고 있는 일행도 무리 없이 차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태쭈, 코끼디 언제 가?”
“오늘은 말고, 내일 갈 수 있어.”
“내일?”
“응. 내일 가자.”
“아라떠.”
코끼리를 볼 수 있는 곳은 여러 곳이었다. 동물원도 있었고 코끼리에 타고 트래킹을 하는 코스도 있었지만, 태주는 그런 곳에 태산이를 데려갈 마음이 없었다. 아무리 아이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본체는 동물이었다. 학대와 노역에 시달리는 코끼리를 보여 주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보호소의 코끼리를 보여 주는 것도 사실은 좀 그렇지만….’
코끼리 보호소는 화보 촬영 일정 뒤로 잡힌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들르기로 한 곳이었다. 그곳 역시 힘든 일을 겪고 보호소로 온 코끼리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곳의 코끼리보다는 나은 환경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태주는 코끼리를 기대하는 태산이가 내일 보게 될 현실에 너무 큰 충격을 받지 않길 바랐다.
*
코끼리 보호소에 방문하는 일행의 숫자가 줄어 있었다. 쿠첼루스는 코끼리보다 사원에 관심이 가는지, 아침 일찍 사원을 구경하러 나갔고, 견우는 태주의 스케줄 확인 등의 일로 호텔에 남게 되었다.
“태주, 코끼디 커?”
“아주 크지. 산이 전에 푸른 사자 봤었지? 그만큼 커.”
“그더쿠나. 사니가 이기지?”
“응?”
“사니가 코끼디 이기지?”
“글쎄다? 아마 코끼리가 이기지 않을까? 코끼리는 사자도 이기니까.”
코끼리랑 호랑이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태산이는 호랑이가 이긴다는 답을 바라는 것 같았지만, 태주는 아이에게 바라는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어미 코끼리가 코로 사자를 후려치는 장면을 봤었다. 아마 호랑이가 상대라도 결과는 비슷할 듯 했다.
“산아, 코끼리랑 싸우면 안 돼. 알았지?”
“….”
“형이랑 약속하자. 코끼리랑 싸우지 않기로, 응?”
“코끼리랑 안 싸우면 형이 산이 소원 들어줄게.”
“앙. 사니 코끼디랑 앙 싸우께.”
태주는 이번 공원 방문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그는 코끼리 떼에 둘러싸이는 상상을 하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쩌면 본체는 호랑이인 녀석을 데려가는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도 몰랐다. 그나마 미리 약속을 받아서 다행이었다.
다큐멘터리 출연이 확정된 후에 미리 자료를 보며 공부를 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현실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부러진 다리를 치료받지 못해서 절뚝거리는 코끼리, 강한 조명을 받으며 쇼를 하다 눈이 먼 코끼리, 어미를 잃고 혼자 남은 새끼 코끼리 등. 보호소 안의 코끼리들이 겪은 힘든 일들이 코끼리 몸에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 있었다.
“태쭈….”
태주는 제 바지를 붙잡은 아이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낸 뒤, 품에 안았다. 코끼리랑 한판 붙을 듯 기세등등하게 입장했던 태산이는 이곳에 없었다. 그저 예상치 못한 현실에 놀라 보호자에게 안긴 아이만이 있었다.
“태쭈, 코끼디 아파?”
“아픈 코끼리도 있고, 안 아픈 코끼리도 있고.”
“태주, 이꺼.”
“응? 헛! 산이, 너! 누가 보면 어쩌려고.”
“괜찮습니다. 제가 가렸습니다.”
태주는 갑자기 아이가 목줄에서 물건을 꺼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방문객들의 시선이 코끼리에 가 있고, 2호가 순식간에 태산이를 가려 주어서 다행이었다. 비어 있던 아이 손에 마술처럼 자루가 생겨나는 모습을 보였다면, 소동이 일었을지도 몰랐다.
안도의 숨을 내쉰 그가 아이에게 주의 줄 생각에 입을 열려던 때였다. 그보다 먼저 아이 손이 움직이더니, 자루에 담긴 물건을 꺼냈다.
“펫 치료제?”
“앙. 태쭈 이꺼 코끼디 주자.”
“…그래. 그러자. 이따가 코끼리 밥 만들기 할 때 넣어 주자.”
태주는 전원주택 수납장에 잘 챙겨둔 펫 치료제가 왜 목줄에 들어 있었는지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펫 치료제를 밥에 섞을 방법을 고민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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