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287
287. 내레이션 녹음 >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녹음은 회귀 전엔 해 본 적 없던 작업이었다.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에 삽입되는 대사를 녹음한 적은 많았지만, 직접 출연하지 않은 영상, 그것도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녹음한 적은 없었다.
“다큐멘터리는 처음이시라고요?”
“네. 영화나 드라마 후시 녹음은 꽤 해 봤지만,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은 처음이에요.”
“…네.”
지난 미팅에서도 물었던 질문을 다시 묻는 PD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미 사전 미팅에서 목소리 톤도 확인하고 대사를 읽는 속도도 맞춰 보며 확인을 마친 상태였는데도, PD의 표정은 어두웠다. 더불어 그의 실력이 의심스럽다는 태도 역시 그대로였다.
태주는 그녀의 그런 태도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설득하거나 자신하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 전문 성우와 달리 절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그가 내레이터로 나선 불안감 때문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어서였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지. 결과로 말하면 되니까.’
태주는 처음 하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작업을 위해서 꽤 많이 준비했다. 첫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작업을 잘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무엇보다 다큐멘터리가 담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시청자들에게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다.
그래서 해외 유명 다큐멘터리뿐 아니라 국내의 유명한 역사 다큐멘터리 작품들을 찾아보고,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에 필요한 발성 트레이닝도 받았다. 나아가 그는 회귀 전 내레이션 분량이 많은 영화를 찍은 경험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연기한 경험을 되새기면서 연습도 여러 번 했다.
“후우. 시간은 여유 있으니까,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얘기하세요. 무리하게 진행할 필요 없어요. 아셨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할게요. 준비하세요.”
“네.”
태주는 녹음실로 들어가기 전에 견우의 표정을 살폈다. PD의 자신을 미덥지 않게 여기는 태도가 고지식하고 성실한 그의 매니저의 성질을 건드릴 것 같아서였다.
‘아! 열 받으셨다.’
예상대로였다. 처음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녹음의 경험을 다시 물을 때부터 좋지 않았던 표정이, 좀 전 PD의 말에 완전히 구겨져 버렸다. 경력이 부족하니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게 당연했는데, 그것도 견우는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사실 사전에 필요한 확인을 끝낸 상태라, 지금 PD의 태도는 과민 반응이 맞았다. 다만 태주는 견우와 다르게 연출 책임자인 그녀의 태도를 이해하고 있었다. PD는 의도적으로 불편한 상황을 만든 게 아니라, 그저 다큐멘터리의 내용에 의욕이 과해진 것뿐이었다.
‘뭐, PD님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매니저님은 내가 의심받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걸 테지.’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잘해 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겨 버렸다. 자신을 항상 최고로 여기는 견우가 불쾌해하는 상황을 바꿔야 했다. 녹음실 안 마이크가 설치된 테이블 위에 대본을 올려놓던 태주는 새삼 의욕이 생기는 기분을 느꼈다.
[N:나가사키 항에서 30분,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군함도로 잘 알려진 하시마 섬이었다. 군함도, 하시마 섬은 일본에선 2015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유산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하시마 섬은 가슴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섬입니다.] [N:해저 1,000m, 섭씨 40도를 웃도는 해저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감당해야 했던 조선인 징용자들은 이곳을 지옥 섬이라 불렀습니다.] [N:혹독한 곳으로 악명 높았던 해저 탄광. 이 탄광에 유독 조선인들이 많이 배치되었습니다.]녹음실 밖, 이미 확인에 확인을 거듭해 놓고도 불안해서 다시 확인하던 PD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영상에 걸맞은 목소리 톤과 대사 속도를 주문하고 그 결과를 확인도 했었지만, 그녀는 사실 오늘 녹음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실제 녹음에 들어가면 상황이 바뀌는 걸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었다.
‘발음이 깔끔해. 전달력은 말할 것도 없고, 목소리에 집중시키는 힘이 있어.’
다큐멘터리를 자주 맡았던 PD는 평소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메신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시청자에게 전달할 내용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메신저, 즉 내레이터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당황할 만큼 태주의 내레이션은 정확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피디님.”
“아! 난 요구할 거 없어.”
“ 예?”
“지금 톤이 딱 좋아. 굳이 다른 톤으로 실험할 필요 없어. 영상이랑 싱크 맞으면 이대로 쭉 가자.”
“헐….”
경력이 긴 성우와 하는 녹음 중에도 영상에 걸맞은 톤을 요구하고 바꿔 가면서 녹음하는 일은 있다. 그런데 오늘은 배우가 내레이터인데도 PD는 다른 톤의 녹음을 더 요구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와 몇 번 작업해 본 조연출은 갑자기 여유로워진 상황에 얼떨떨했다.
조연출은 옆자리에서 커피를 들이켜는 PD가 만화에 나오는 도플갱어가 아닌가 의심했다. 그는 이 깐깐한 PD가 관광청 홍보 다큐멘터리를 녹음할 때 내레이터로 온 아이돌이 안쓰러울 정도로 닦달했던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PD 본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태도가 달랐다.
“뭐 해? 태주 씨 기다리시잖아. 빨리 다음 대사로 안 넘어가?”
“아! 네, 네.”
프롤로그 녹음이 시작되고 얼마 후 바뀐 스튜디오 분위기는 견우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는 좀 전까지 못 미더운 표정으로 태주를 보던 PD의 태도에 여유가 깃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견우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배우가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리라 믿고 있었다.
‘근처에 태주 씨가 좋아하는 레몬 타르트를 팔던 곳이 있었는데…. 이런 분위기면 다녀와도 되겠어.’
견우는 실내를 한 번 둘러 본 뒤 조용히 스튜디오를 나섰다. 녹음 시작 몇 분 만에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인 자신의 배우를 위한 달콤한 간식을 사 오기 위해서였다.
*
이틀로 나눠서 진행하기로 했던 녹음을 하루 만에 끝내는 기염을 토한 태주였지만, 스튜디오를 나서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답답하고 억울한 분위기에 주차장으로 향하는 내내 말도 붙이기 쉽지 않았다.
견우는 간식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밝았던 표정이 바뀐 이유를 고민해 봤다. PD의 태도는 녹음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고, 작업 역시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딱히 태주의 기분이 상할 만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태주 씨, 무슨 일입니까?”
“으음. 매니저님 지금 우 팀장님 회사에 계세요?”
“계실 겁니다.”
“그럼 회사에 잠시 들렀다 가요. 가서 얘기할게요.”
“알겠습니다.”
내레이션 대본을 봤을 때도 참담하다고 느꼈었는데, 영상을 보자 당시의 참혹함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실제로 강제 노역과 수탈에 시달린 당사자가 비통한 심정을 말하는 장면들은 태주의 기분을 무겁게 만들었다.
백미러로 견우가 표정을 살피는 걸 알았지만, 태주는 시트에 기대서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괜히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했지만, 당장은 시간이 필요했다.
-끼이익!
“도착했습니다. 바로 올라가시겠습니까?”
“네. 가요.”
스튜디오가 먼 곳이 아니라서 다행히 퇴근 시간 전에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회사까지 오는 잠깐 사이 생각을 정리한 그는, 한결 편한 표정으로 견우의 뒤를 따랐다.
“어서 오세요, 이 배우님. 녹음은 잘하셨어요?”
“네, 잘 끝났어요.”
“호호호. 그러실 줄 알았어요.”
“아! 하하하.”
녹음을 잘 마치고 왔다는 태주의 대답에 우 팀장은 당연한 결과라는 눈빛을 보냈다. 태주는 그녀의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눈빛에 웃음이 나왔다. 그 팀원에 그 팀장이었다. 스튜디오에서 견우가 그러더니, 우 팀장 역시 자신을 단단히 믿고 있었다.
사실 내레이션 녹음은 그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준비를 많이 하기도 했지만, 대사에 메시지를 담고 전달하는 일 자체가 배우인 그에게는 무척 익숙한 일이어서였다. 그런 그에게 내레이션으로 영상을 풍성하게 만들 거나, 프로그램의 목적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어려울 리 없었다.
“우 팀장님.”
“네.”
“러닝 개런티요. 기부하고 싶어요.”
“잠시만요.”
기부. 공인 아닌 공인인 연예인에게 좋은 기삿거리였지만, 우 팀장은 태주의 의견에 바로 찬성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주의 이번 영화 역시 전작인 로 손익 분기점을 가뿐하게 넘긴 이제영 감독의 영화였다. 음악 영화라는 한계가 있는 장르 영화로 그런 성적을 낸 이제영 감독의 작품이니, 의 성적도 기대를 걸어 볼 만했다.
‘그렇다 해도 손익 분기점이 350만이라 만만치 않지. 게다가 이 배우님은 수익 지분도 얼마 안 받기로 해서….’
드라마 쪽에선 이미 몸값을 확실하게 올려 둔 상태였지만, 영화 쪽에선 아직이었다. 물론 지금도 같은 연령대 배우나 아이돌 출신 배우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출연료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녀가 보기엔 더 받아야 마땅했다.
이번 영화의 출연료도 마찬가지였다. 태주가 출연을 너무 바라서 몸값을 높게 부르지 못했었다. 그 대신 수익 지분 계약을 하긴 했지만, 그것도 다른 주연급 배우보다 낮은 비율이었다. 드라마 쪽에선 백지 수표를 줘서라도 출연시키려 하는 것과는 다른 대우였다.
그런 생각에 태주의 출연료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러닝 개런티 기부를 말리려던 우 팀장은, 눈을 빛내며 기대하는 태주 때문에 하려던 말을 삼키고 다른 화제를 꺼내야 했다.
“이 배우님 차라리 일정 금액을 기부하시는 게 어떠세요?”
“그것도 할 건데요. 이번엔 홍보에 도움이 됐으면 해서요.”
“지금까지 밝히지 않고 기부를 해 오셨잖아요. 이번 일로 지금까지 기부하신 것도 밝혀질 텐데요.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이번 영화는 정말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하거든요.”
“알았어요. 내일 회의해 보고 알려 드릴게요.”
우 팀장은 회의 결과가 나오면 알려 준다는 말로 태주를 돌려보냈다. 이미 수익 일부를 기부 중인데, 무슨 기부를 더 하나. 지금껏 조용히 묻어 둔 얘기를 꺼낼 만한 이유가 있나, 등등. 하고 싶은 얘기는 많았지만, 온종일 녹음하고 온 피곤한 배우를 잡아 둘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이야, 정말.”
그녀의 배우는 재계약 전에도 후에도 참 변함이 없었다. 그 나이의 연예인 같은 허세도 없었고 가식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정한 것은 반드시 이뤄야 했다. 그게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어도 한 번 정하고 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만 했다.
우 팀장은 회의는 아직이었지만, 이미 결과가 나온 것처럼 우선 처리해야 할 일의 목록을 작성했다. 나쁜 일도 아니고 기부하는 일을 반대할 리 없으니, 아마 회의는 기부 건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보는 방법을 고민하는 시간이 될 터였다. 그 준비가 필요했다.
*
우 팀장이 다음날 오전 회의에 기부 건을 올릴 준비를 하는 동안 태주는 마트에서 초콜릿 맛과 요거트 맛의 아이스크림을 카트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 년 내내 여름 날씨인 호박 섬으로 가져갈 물건이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도 샀으니 초콜릿은 사지 말자. 요새 초콜릿을 너무 많이 줬어.’
드르륵드르륵. 카트를 밀고 가는 그의 사방에서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색 패딩에 모자도 써서 턱만 겨우 보이는데도 마트 안의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점점 늘어나는 인파에 몇 가지 더 살 게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고 계산대 쪽으로 움직였다. 사람이 더 몰려서 사고라도 나면, 연말이라 안 그래도 바쁜 홍보팀이 자신을 욕할지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수고하세요.”
계산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가면서 태주는 2호의 부재가 아쉬워했다. 2호가 같이 있을 때는 사람이 많은 마트 같은 장소에서도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는데, 오늘은 전혀 아니었다. 아이스크림을 골라서 계산하는 잠깐 사이에도 수십 명의 사람이 주변으로 몰려서 그의 사진을 찍었었다.
-부르릉!
“휴우. 몸이 다 뻐근하네.”
마트 주차장을 벗어나자, 긴장이 풀렸다. 십 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사람이 몰려서 긴장했더니 몸이 굳는 것 같았다. 2호의 경호에 익숙해진 나머지 본인이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조심성 없이 다녔다. 태주는 뻣뻣한 어깨를 주무르며 부주의한 자신을 반성했다.
*
-덥석!
“태쭈. 사니 아이수크딤.”
“곧 자야 하는데….”
“아앙. 주떼요.”
“큭! 알았어, 알았어 . 그만 타고 올라.”
아이스크림을 보면 달라고 할 것 같아서 조용히 움직였는데, 어느새 나타난 태산이가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태주는 아이 몸으로 고양이처럼 자신을 타고 오르는 꼬맹이를 받쳐 주면서 남은 아이스크림을 챙겨 넣었다.
“쿠첼은? 같이 저녁 먹었어?”
“아앙.”
“아직 실험장에서 안 왔어?”
“앙.”
쿠첼루스는 언제 찾아냈는지 호박 섬 인근의 무인도를 찾아내서 마법 실험장을 차렸다. 그리고 때때로 그곳에서 실험에 빠져 호박 섬으로 건너오는 것을 잊곤 했다. 무리하지 않게 말리고 싶은데, 쿠첼루스가 너무 즐거워해서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산이 오늘 뭐 하고 놀았어?”
“콩 머거떠.”
“마법 콩 먹고 바다에서 놀았어?”
“앙.”
태주는 녹음하느라 혼자 둔 아이를 내내 걱정했는데, 아이는 바닷속 탐험을 하며 잘 논 모양이었다. 그는 오후 시간을 즐겁게 보낸 아이를 대견하다 칭찬했지만, 속으론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휴. 처음엔 안 그랬는데, 이젠 떼어 놓고 다니면 내가 불안하니, 원.’
태산이는 자라면서 점차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에 익숙해 지고 있었는데, 그는 반대였다. 점점 아이를 떼어 놓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반려동물이나 아이와 떨어지기 힘들어하는 보호자가 있다더니, 그게 딱 그의 얘기였다. 앞으로 아이를 학교랑 학원 보내고 가끔은 캠프 같은 곳에도 보내야 할 텐데, 괜찮을지 걱정이었다.
물론 걱정의 대상은 그 자신이었다. 앞으로도 이 상태라면 아이를 보내 놓고 뒤따라가서 잘하고 있는지 지켜볼 것 같아서였다.
“태쭈, 아이수크딤.”
“숟가락 꺼내 줄게. 잠깐만.”
태주는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보채는 아이에게 숟가락을 꺼내 쥐여 주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