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3
2. 정원
오두막에서 알을 품고 시간을 보내길 한참, 딸기가 다 자랐다는 알람이 울렸다. 상점에서 산 태블릿에는 농작물이나 물품의 제작이 완료되면 알려주는 기능이 있었다.
책을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면 태블릿으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실로 가져가서도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 그런지 상당히 비쌌다. 물론 그 효용성을 생각하면 그 가격도 당연하다 생각되었다.
밭에는 딸기나무가 한가득 자라 있었다. 겨우 16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딸기나무는 성인 남성 키만큼 크게 자라 있었다. 맺혀 있는 알맹이의 크기도 예상 밖으로 아주 컸다.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더 컸다. 사과보다 큰 딸기가 나무에 주렁주렁 맺혀 있었다.
상점에서 딸기 포장 박스 한 묶음을 사서 수확을 시작했다. 딸기가 어찌나 큰지 한 박스에 열 개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한 나무에 스무 개 남짓의 딸기가 맺히니, 전부 수확하면 40박스 정도가 생길 것 같았다. 씨앗 값과 포장 값, 수수료 15%를 제해도 340 DP 정도의 이익이 생겼다.
“와아! 딸기 농사만 지어도 충분히 부자 되겠다.”
딸기를 다 포장한 후에도 여러 개가 남았다. 태주는 사과만 한 딸기를 우물에서 길은 물로 씻은 후 크게 베어 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새콤달콤한 맛이 환상적이었다. 딸기는 지금까지 태주가 먹었던 어떤 과일보다 달고 상큼했다. 태주는 게눈 감추듯 빠른 속도로 딸기를 하나 다 먹어 치웠다. 그리고 바로 하나를 더 씻어서 먹기 시작했다.
“아. 이거 태우도 좀 줘야겠다. 현실로 가져가려면 얼마를 내야 하지?”
태주는 현실로 물건을 가져가려면 우편함을 건설해야 한다는 설명이 떠올라 바로 우편함을 설치했다.
[전송물품: 딸기 한 상자.수수료: 15 DP.
전송하시겠습니까? Yes / No]
“이 ‘Yes/No’ 고르는 것만 보면 트라우마 생길 것 같아. ‘네/아니요’로 바꿀 수 없나.”
회귀 당하던 때가 생각나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현실로 물건을 보내는 수수료는 판매가격과 같았다. 15 DP를 내고 딸기 한 박스를 현실로 보냈다.
딸기 맛에 반한 태주는 상점에서 다시 딸기 씨앗 한 자루를 사서 밭에 심어두고 시간을 보냈다. 상점에서 구매한 매끈한 피부 크림을 바르고 잠을 자기도 했고, 무지개 씨앗에 물을 한 번 더 주기도 했다.
아직도 꿈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정원이 마음에 꼭 들었다. 48시간이라는 체류 가능 시간을 꽉 채울 생각으로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돌아오기 전까지 숨 쉴 틈 없는 일정을 소화했기 때문인지, 누구 하나 재촉하는 이 없는 이 순간이 기꺼웠다.
[기억 소환권(책)오래전 읽었던 책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지금 기억 소환권을 사용하세요.
당신이 잊고 있던 책의 기억을 소환해드립니다.
주의: 기억 소환권(책)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내용을 기록할 빈 책이 필요합니다.]
상점을 이리저리 살피던 중에 재밌는 아이템을 발견했다. 기억 속에 남은 책이나 음악, 영상을 재현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감명 깊게 읽었던 책들이 생각났다. 개중에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책도 있었다. 음악 역시 빈 악보와 녹음할 물건이 있다면, 재현이 가능했다. 빈 책을 몇 권 산 태주는 상점을 계속 둘러보았다.
상점 안에는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태주는 언젠가 들렀던 엔틱 카페에서 봤던 축음기를 골랐다. 빈 레코드도 몇 개 구매했다. 이 축음기를 태블릿과 연동시키면 현실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게 정말 게임이 아니면 좋겠다.”
지금 겪는 것들이 모두 현실이라는 감각이 있었지만, 태주는 확신할 수 없었다. 꿈에서 깨고 나면 다시 이 정원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시간이 다 되었다. 딸기를 한 번 더 수확했고, 비료를 뿌리라는 얘기에 꽤 비싼 비료를 밭에 뿌려두고 현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사실 준비는 별것 아니었다. 현실로 가져갈 물건들은 이미 우편함을 통해 모두 전송했다. 우편함에는 입금 기능도 있어서, 현금을 바로 계좌에 넣을 수 있었다. 고급 슈트와 딸기, 매매 계약서 등을 모두 보내고 나니 챙길 물건은 태블릿 하나뿐이었다.
태주는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난 뒤 천천히 입구로 걸어갔다. 환영 플랜카드 건너편 허공은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은 하늘에 떠 있는 섬이라는 설정 같았다. 태주가 플랜카드 밑을 지나 밖으로 한 걸음 내딛자 익숙한 메시지 창이 생겨났다.
[정원을 나가시겠습니까? 네 / 아니요]“풋. 그새 한글로 바뀌었네.”
기분 좋은 변화에 ‘네’를 선택했다.
*
12시 반.
잠들기 전에 봤던 시계는 11시 20분이었다. 정원에서 48시간 가까이 지냈는데, 현실에서는 정말로 1시간 만이 지나있었다.
“남들보다 더 긴 시간을 사는 건가. 노화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남들보다 빨리 늙는 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정원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내던 현실 시간으로 한 시간을 보낸 것과 같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공부나 연습을 정원에서 해도 되겠는데. 최대 48배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건가.”
이전에도 연기 연습은 충분히 하는 편이었다. 유능한 매니저인 운석 형이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도록 일정을 조정해 주었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최고의 배우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연기 연습에 매진했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을 자고 일어난 게 분명했다, 잠들기 전 느껴지던 감기의 열감이 그대로였다. 태주는 일어나기 귀찮아 뭉기적거렸다.
띵동.
“누구지?”
아직 동생 태우가 돌아올 시간은 아니었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이 돌아오려면 한참이 남았다.
태주가 인터폰으로 방문자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자 커다란 박스를 여러 개 든 택배 기사가 들어왔다.
“어휴. 무겁네요. 여기 박스 세 개요.”
“아! 네, 감사합니다.”
보낸 사람이 정원사 협회로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정원에서 전송한 물품인 것 같았다. 예상대로 딸기와 슈트, 문서가 든 박스였다. 택배로 오다니 묘하게 현실적이었다.
태주는 슈트와 서류를 잘 챙긴 뒤에 딸기 박스를 주방에 가져다 두었다. 사과만 한 딸기라 설명하기 좀 난감했지만, 맛이 너무 좋아서 가족들도 맛보길 바랐다. 특히 과자보다 과일을 더 좋아하는 태우에게는 꼭 주고 싶었다.
두 살 아래의 동생 태우는 태주와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이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인 사내 녀석에게 가정적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태우에게 가정적이라는 말은 가장 적절한 말이었다.
부모님은 태주 형제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이미 사실상 이혼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각자 따로 방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주말이나 휴가도 각자 보냈다. 집안을 돌보지 않는 부모님 덕에 태주 형제는 스스로 돌보는 것이 익숙했다.
태주는 부모님 대신 태우를 돌보려고 했지만, 처참한 가사능력에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다 타버린 오븐과 망가진 식기 세척기를 교체한 후 태우가 나서서 가사를 맡았다.
“아! 기술 탭에서 요리 기술을 배울까? 이제 태우도 고2가 될 텐데 영양식이라도 챙겨 줘야지.”
태주가 한창 꿈에 젖어 요리왕이 되었을 때, 보충수업을 마친 태우가 집에 돌아왔다.
“형. 이 식탁 위에 박스 뭐야?”
“딸기.”
“무슨 딸기같이 무르기 쉬운 과일을 인터넷으로 사. 마트에서 사면 되지.”
“이거 슈퍼딸기야. 쉽게 못 구해.”
박스를 열어 커다란 딸기를 꺼내 보여주었다. 달콤한 냄새가 주방에 가득 퍼졌다.
꿀꺽.
태우의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과일 귀신. 밥보다 과자보다 과일을 좋아하는 태우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먹어봐. 이거 진짜 맛있어.”
“엄마, 아빠 오시면 같이 먹자.”
“그냥 먹어. 밤늦게 오실 텐데. 두 개만 남겨두고 너 다 먹어.”
흐르는 물에 딸기를 씻어 건네주자, 태우가 조심스럽게 베어 먹었다.
“흡.”
“맛있지?”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생각보다 훨씬 맛있나 보다. 태주는 상상했던 반응 그대로를 보여주는 태우 덕에 한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회귀에 정원에 알지 못할 일들이 이어져 피로했던 정신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오기 전에 태우를 만나건 수개월 전이었다. 톱배우로 꼽히는 태주와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태우는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으면 만나기 쉽지 않았다. 특히 태우가 가정을 이룬 후에는 더 그랬다. 제수씨와 조카의 사정도 있어서 일정을 맞추기 힘들었다.
“진짜 맛있다. 나 이렇게 큰 딸기 처음 봐. 이렇게 맛있는 딸기도 처음 먹어보고.”
“아끼지 말고 다 먹어. 다 먹으면 또 주문할게.”
딸기로 배를 채운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봤다.
“형. 30일 저녁에 시간 있어?”
“왜?”
“연예대상 시상식 표 있는데 보러 가자고.”
“연예대상이면 희극인인가.”
“헐. 희극인? 누가 개그맨을 그렇게 불러.”
태우는 코미디언을 좋아했다. 또래의 친구들이 아이돌이나 배우를 좋아하는 것과 다르게 코미디언의 팬이었다. 소극장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팬카페 활동도 했다. 특히 여성 코미디언 박경진의 열렬한 팬이었다. 잘 먹는 모습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며 태주가 편식할 때마다 들먹였다.
“박경진도 나와?”
“나오긴 할 것 같은데. 아마 상은 못 받을 거야.”
“재밌겠네.”
좋은 분위기였다. 껄끄러운 주제를 꺼내기엔 맞지 않았지만, 얼마 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미리 말하는 게 나을 터였다.
“아버지랑 어머니 이혼 생각하고 계신 거 알지?”
“어.”
태우가 상처받지 않도록, 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꺼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형 이름으로 계약한 집이 있어. 만약 부모님 이혼하시면 형이랑 같이 살자.”
“집? 형이 돈이 어디 있어서 집을 계약해?”
“어쩌다 보니 생겼어. 그것보다 어떻게 할래? 형이랑 같이 살래?”
대답이 없었다. 진작 부모님에 대한 기대를 접은 자신과 다르게 태우는 여전히 부모님의 사이가 좋아질 거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 태주가 보기엔 전혀 가망 없는 일이었다.
새해가 밝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의 혼외자가 찾아왔다. 태우와 동갑인 생일이 겨우 한 달 차이 나는 사내아이였다. 아버진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후엔 그 아이를 옆에 끼고 살았다. 태우에겐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살가운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고, 결국 이혼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 와중 쌓인 분노를 모두 태우에게 풀었던 일을 태주는 알지 못했다. 태주는 아르바이트와 원룸 계약 등 입학 준비로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태주가 밖으로 돌던 시기 어머니, 아버지 모두 태우의 양육을 거절한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집에 찾아온 애를 키우고 있어서 거절했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닮은 태우를 예전부터 못마땅해했었다. 나중에 태주가 사실을 알고 대학교 근처에 얻은 원룸으로 데려올 때까지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상처 입고 주눅 든 태우가 정상적으로 생활하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태주는 이기적인 부모님의 성향을 알고 있으면서도 태우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자신을 욕하고 후회했다. 다행히 예전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생겼다.
“학교랑 좀 멀지만, 지하철로 한 번에 갈 수 있으니까. 전학은 안 해도 괜찮을 거야. 뭐하면 전학해도 괜찮고.”
“어딘데?”
“마포.”
“별로 안 머네. 알았어. 엄마랑 아빠 정말로 이혼하시면 그렇게 할게.”
“그래.”
태우도 알고 있었다. 이미 부모님의 이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다른 가족처럼 화목하게 지낼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을 잘 알지만 어쩌면 하고 기대하고는 했다.
방학하면 다른 평범한 집처럼 가족이 같이 여행을 가거나 외식을 하게 되지 않을까. 부모님과 진로나 성적에 관해 같이 고민하고 얘기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곤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절 일어나지 않았다.
태주의 경우 학부모 면담은커녕, 입학할 학교와 학부도 모두 혼자서 결정해야 했었다. 아마 자신도 그렇게 하게 될 것이었다.
“내일 마포 집에 한 번 가보자. 쇼핑도 좀 하고.”
알았다고 대답하는 태우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실제론 두 살 어린 동생이지만, 서른아홉까지 살다 돌아온 태주에게 열일곱 살 태우는 동생보다는 아들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