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317
318. 태주의 닮은꼴 >
김광효는 털털하게 웃으면서 소파에 앉았다. 사실 털털한 웃음은 짧게 맛본 배역의 아쉬움을 갑추기 위한 포장일 뿐이었다. 그 증거로 그의 손은 태주의 손에서 뺏어 테이블 위에 놓은 대본 위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소문이 한참은 부족해.”
“네?”
“내가 들은 건 또래 중에서 연기를 제일 괜찮게 한다는 얘기가 다였거든. 감독님도 그렇게 말했고. 그래서 그게 단 줄 알았지.”
“타고난 거야. 아마 너 스스로는 잘 못 느낄 거야.”
겨우 한 줄의 대사로 김광효가 무얼 봤는지 태주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김광효는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연기 실력이나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니 김광효가 자신을 그저 아주 잠깐, 현재 활영 중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짧게 상대해 본 거로 어떻다 평가해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그는 진지하게 배우라는 직업에, 연기자라는 그의 천직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고작 스물일곱. 어디서 누구에게 연기를 배웠다는 소문도 없는, 말 그대로 천연의 배우가 제 나이보다 더 오래 연기한 나와 대뜸 합을 맞추다니.’
연기는 혼자하는 게 아니라 같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김광효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 못 했었다. 대본이 닳고 닳을 정도로 연습해서 자다가도 툭 치면 대사를 뱉을 정도가 되었는데도 활영장에서 합을 못 맞춘다고 욕을 먹기 일쑤였다.
그러나 머쓱한 얼굴로 저를 보는 이 젊은 배우는 달랐다. 자연스럽게 상대를 받쳐 주면서 합을 맞췄다. 처음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연기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상대가 분명 더 노련하고 경력도 긴 배우라는 걸 알면서도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얼글은 분명 이십 댄데, 이상하게 동갑내기처럼 느껴지네.’
게다가 태주는 무명 기간도 없었고, 단역이나 조연으로 출연한 적도 매우 적은 성공 가도를 밟아 온 배우답지 않게 겉멋 들린 구석이 없었다. 제가 연기를 잘한다는 걸 알 텐데도 대본에 충실하게 연기했다. 어린 나이에 인기를 얻은 스타들이 하는 실수가 없었다.
박대성 감독이 괜히 한창석 감독의 심술을 감수하면서 캐스팅한 게 아니었다. 짧은 대화 몇 줄 맞춘 게 다였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함께 할 활영이 기대되는 배우였다.
“언제 퇴원해?”
“일주일 정도 더 있어야 한대요.”
“생각보다 빠르네.”
“네. 상처 부위에 감염도 없고, 후유증도 없어서요.”
“그래도 가능하면 활영 순서는 제작사 말대로 뒤로 미뤄. 당장은 몰라도 시간이 지나서 후유증이 나타날 수도 있는 거니까. 배우는 몸이 재산이야. 조심해.”
“그렇게 할게요.”
김광효의 당부를 들은 태주의 얼굴에 감추지 못한 미소가 드러 났다. 김광효에게서 익숙한 선배의 느낌이 나서였다. 병문안이 가능해진 뒤 그를 만나러 온 배우들은 모두 배우는 몸이 재산이라는 말을 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똑같이 말했다.
“웃기는. 난 이만 간다. 몸조리 잘하고. 다음에 보자.”
“살펴 가세요, 선배님.”
“선배라…. 그래. 쉬어. 간다.”
“예.”
김광효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선배라 부르는 태주에게 한 손을 들어 보인 뒤 병실을 나섰다. 연기가 좋아서 수십 년을 해 온 그였지만, 최근에는 조금 배우로서의 삶에 회의적이었다.
현장에 가도 자신이 선배라 부를 사람은 이제 몇 명 없었다. 오히려 감독이든 누구든 자신을 선배라 부르는 상황이었다. 나아가 태주 또래의 배우들은 자신을 모두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거리를 뒀다. 연출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지시하거나 요구하는 걸 다들 어려워했다.
그래서 이젠 현장에서 더 배울 게 없다는 느낌이었다. 더는 이곳에서 성장할 방법이 없다고 그렇게 느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다음 활영은 좀 다를 것 같았다.
‘선한 얼굴에 악랄한 역할을 제대로 해낼까 싶었는데, 기우였어. 재밌는 녀석이야. 해외로 나가는 건 좀 미뤄도 되겠어.’
김광효가 다음 활영을 기대하면서 돌아간 것과 마찬가지로 태주 역시 다음 활영이 기대되었다. 김광효와는 다르지만, 수십 년 연기 외길을 걸어온 사람이라면 꽤 많았다. 그가 소속된 트리즈의 김윤선 역시 그런 배우였다.
물론 선이 굵고 거친 인상과 지우기 힘든 존재감을 가진 김윤선과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도 못 알아차릴 것 같은 평범한 인상의 김광효는 결이 다른 배우였지만,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은 상당히 비슷했다.
두 사람은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해서 십 년 무명 시절을 보내고 단역, 조연, 주연의 수순을 밟으며 성장했다. 이제는 해외 영화제에 자주 초청받고 상도 여러 개 받은 유명 배우였지만, 그런 것에 상관없이 배역이 마음에 들면 신인 감독의 영화에 조연으로도 출연한다.
“두 분 모두 나랑은 전혀 다른 타입이지. 그래서 더 재밌고.”
그래서 더 활영이 기대되었다. 회귀 전에는 연이 없던 김윤선과도 호흡을 맞춰 봤었다. 신나게 상대를 자기 페이스대로 몰아치는 체력이 꽤 필요한 활영이었지만, 김윤선과의 활영은 무척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스타일인 김광효와는 또 어떤 활영을 하게 될지 기대됐다.
*
태주가 견우와의 미팅에 이어 대본 분석으로 바빠 신경을 못 쓰는 사이 그의 스마트폰에는 꽤 많은 문자가 쌓이고 있었다. 베이커리, 아이스크림 전문점, 프랜차이즈 치킨 매장, 대형 마트까지. 작게는 몇만 원, 크게는 이삼십만 원의 결제 문자가 쌓이고 있었다.
“산아. 이제 그만 사자.”
“앙?”
“그 초콜릿 세트는 내려놓자”, 응?”
“이꺼, 마시떠.”
“맛있긴 하지만, 이미 많이 골랐장아. 봐 봐. 이렇게 많은 걸 누가 다 먹어?”
“앙, 사니가.”
당찬 꼬맹이의 대답에 연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베이커리에서 컵케이크와 초콜릿 케이크를 살 때도 자신이 먹을 거라며 사들이더니, 마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차 트렁크는 오는 길에 들른 치킨 매장과 아이스크림 전문점 같은 곳에서 사들인 것들로 다른 물건을 넣을 자리도 없는데 꼬맹이는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는 것 같았다.
“마트에는 원래 음료수만 사러 온 거잖아. 착하지? 초콜릿은 내려놓자.”
“아앙. 그덤 칭구 꺼.”
“친구 거는 여기 많이 있잖아.”
“갠차나. 사니 카두 이떠.”
“…태주 형 카드겠지.”
초콜릿 세트를 내려놓으라고 몇 번이나 들었지만, 태산이는 초콜릿 세트를 내려놓지 않았다. 연우가 가리킨 카트에 간식이 가득했지만, 태산이는 카트 하나 분량의 간식이 많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주와 과일 상자를 선물할 때는 차 트렁크에 과일 상자를 몇 번씩이나 채웠었다. 다원 보육원에 간식을 가져다줄 때는 트렁크뿐 아니라 뒷좌석까지 가득 채워서 갔었다. 활영장에 간식을 사서 갈 때는 태주의 차와 미나 누나의 차에도 가득 싣고 갔었다. 저 정도로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손이 크니.”
“태쭈!”
“하긴. 네가 보고 배울 사람이 태주 형밖에 없구나.”
“앙.”
“에효. 모르겠다. 산이 네 마음대로 해. 남으면 두고 먹지 뭐.”
자포자기 비슷한 연우의 허락을 받은 태산이는 본격적으로 마트를 누볐다. 태산이는 과자가 쌓인 카트가 아닌 새로운 카트를 연우에게 밀게 한 뒤 식품 매장 안의 고기 요리를 전부 담았다.
닭 강정, 닭 꼬치, 훈제 치킨, 핫윙, 치킨커틀릿 같은 치킨 시리즈를 담은 뒤엔 좋아하는 훈제 오리고기와 바비큐 폭립 등을 카트에 담았다. 어려서부터 수년간 마트를 다니며 쌓은 태산이의 쇼핑 내공이 발휘되었다.
‘완전히 태주 형이랑 똑같이 행동하네.’
연우는 고양이로 위장한 모습의 태산이와는 몇 년간 같이 지냈지만, 아이 모습의 태산이와는 같이 지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기까지 같이 살기에 집이 좁다 여긴 태주가 곧바로 살 곳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태주가 여유 있을 때 같이 놀러 오거나 여행을 가는 정도로는 아이의 성향을 모두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잠시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 준 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이는 태주의 닮은꼴이었다. 어디서든 시선을 끄는 것도 같았고, 일행을 이끌면서 시원스레 결정을 내리는 모습도 똑같았다. 아이는 외모뿐 아니라 말투, 행동, 성향까지 태주를 당아 있었다.
“이꺼 예쁘지?”
“예쁘긴 한데, 좀 비싸….”
“이꺼 하자.”
“….”
태주를 닮은 점은 방문 선물을 사러 간 매장에서 아주 잘 드러났다. 이번에 가고 언제 다시 갈지도 모르는 곳에 가면서도 꼭 선물을 사서 가야 한다는 아이의 고집에 들른 매장에서 연우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아이가 고르는 물건 대부분이 매장에서 제일 비싸거나 한정 상품이어서였다.
‘차라리 일 년 치 학원 수강비가 더 살 것 같아.’
댄스 학원은 가끔 몸 풀러 가는 정도로만 다닐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시간 날 때마다 다녀야 할 것 같았다. 연우는 직수입 한정 수량의 커피 머신과 토스터 세트를 챙기면서 그렇게 다짐했다.
그렇게 길고 당황스러운 쇼핑 시간이 지난 뒤 도착한 학원에서 그는 다시 한번 태산이가 태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느꼈다. 태산이는 자신이 사 온 간식을 학원에 있는 모두에게 나눠 주었다. 단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꼼꼼하게 한 명씩 챙겼다.
♪나는 용맹한 호랑이. 어흥. 어흥. 동물의 왕.♪
“나는 욘맹하 호당이. 어흥. 어흥. 동무데 왕.”
꼬맹이가 이 사람 저 사람 살갑게 인사하고 챙긴 결과일까, 댄스 학원 안에 동요가 울리게 되었다. 팝핀이 특기인 사람도, 크럼프가 특기인 사람도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동요에 맞춰서 어흥, 어흥 호랑이 흉내를 내고 있었다.
같은 성별이나 비슷비슷한 나이끼리 모여서 연습하던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서 어울리는 광경은 연우가 댄스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이를 배려해서 맞춰 주는 것일 테지만, 그것만으로도 무척 대단한 일이었다.
‘누가 태주 형 동생 아니랄까 봐. 정말 대단하다.’
연우는 제일 앞줄 가운데에서 두 팔로 덮치는 동작을 하는 조그만 아이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기자기한 동물 그림 셔츠를 입은 일곱 살 아이가 스튜디오 안의 분위기를 제가 바라는 대로 바꾸었다. 덩치는 작지만 큰 존재감으로 형, 누나들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
태주는 면회 시간이 끝나기 전, 아슬아슬한 시간에 병실로 돌아온 아이를 반겼다. 댄스 학원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는지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는 아이의 얼굴이 산뜻했다.
“태쭈, 이꺼.”
“응? 뭐야? 케이크야?”
“앙! 사니 턴물이야.”
“형 주는 거야?”
“앙.”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외출했다 돌아오면서 형 선물을 다 사 오고.”
우리 산이 다 컸네, 다 컸어. 태주는 조그만 케이크 상자를 손에 올려놓고 감탄을 연발했다. 그가 좋아하는 홍차 시폰 케이크나 레몬 타르트 같은 게 아닌, 태산이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였지만, 그게 어딘가. 케이크의 종류보다는 놀러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자신을 떠올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기록, 기록. 달력에 적어 놔야지.”
태주는 대본을 보느라 내내 내버려 뒀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이런 날은 기록해서 매년 추억해야 했다. 들뜬 얼굴로 스마트폰의 캘린더 앱을 켜 스티커까지 붙여 가며 기록한 뒤였다. 스마트폰 화면 하단에 읽지 않은 문자가 쌓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뭐지?”
문자 앱은 안전 안내 문자나 카드 결제 내역을 확인할 때만 사용하는 앱이라 평소 확인을 잘 안 해서 자주 쌓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눈에 띌 정도로 앱 위에 써진 숫자가 컸다.
“헐! 이게 다 얼마야?”
대부분이 한 시간 남짓 사이에 쓰인 카드 결제 금액은 태주의 눈이 동그래지기 충분할 정도였다. 대체 학원 수강생이 몇 명이길래, 그가 촬영장에 간식을 사서 갈 때만금 나온 것인지 의아했다.
“산아. 어라! 얘 어디 갔어?”
카드도 되찾고 뭘 얼마나 샀는지 물어볼 생각으로 태산이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2호의 팔에 매달려서 장난을 치던 아이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산아, 호야?”
“이쪽입니다. 가족실에 있습니다.”
“거긴 뭐하러 갔어?”
태주가 입원한 특실은 환자가 머무는 병실 외에도 가족실, 회의실, 거실, 주방 등으로 공간이 나뉘어 있었다. 그중 거실이나 회의실은 병문안 온 사람이나 회사 사람들을 맞이할 때 사용하곤 했지만, 가족실온 아니었다. 태산이는 그와 같이 자고, 2호는 거실에서 경호를 서기 때문에 가족실은 창고처럼 쓰는 곳이었다.
“산이 옷 가지러 왔어?”
“…음.”
꼬맹이가 씻고 갈아입을 꼿은 그의 병실에도 많았지만, 가끔 제 마음에 드는 못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아이라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가족실 안에 들어가서 본 것은 예상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캐리어를 열어 놓고 옷을 헤집고 있는 아이를 상상했는데,가족실 안에는 아이의 모습이 없었다. 대신 그에게 무척 익숙한 하얀 고양이가 있었다.
♪나는 용맹한 호랑이. 어흥. 어흥. 동물의 왕.♪
-나는 욘맹하 호당이. 어흥. 어흥. 동무데 왕.
통통한 앞발로 2호의 태블릿 화면을 터치해서 영상을 돌려보는.
“냥냐냥, 냐냥.”
“:…”
“…오늘 댄스 학원에서 활영한 영상을 모니터하는 중입니다.”
“….”
태주는 너무 의외의 광경에 카드 결제에 관한 것은 물어볼 생각도 못 하고 자동카메라를 켜서 그 장면을 활영했다. 혹시라도 태산이의 모니터링을 방해할까 자동카메라의 시동어는 속으로 읊었다. 그렇게 그는 한참 동안 소리 없이 귀여운 펫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