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33
32. 서울로 가는 길
태주는 오랜만에 대본이 아닌 다른 책을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낯선 책이 들린 것을 본 미나가 궁금했는지 슬쩍 다가가서 훔쳐 보았다.
‘월간 정원? 여름꽃으로 만드는 부케? 얜 대체 뭘 보는 거야?’
“이런 걸 왜 보고 있어? 누구 결혼해?”
“험. 아니요. 그냥 좀 선물하려고요.”
버스킹은 로드무비라 숙소가 계속 바뀌고 있었다. 혼자서 방을 쓸 때는 괜찮았지만, 다른 사람과 같이 쓸 때는 정원에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며칠 전에도 숙소를 매니저님과 같이 쓰게 되어서 정원에 들어가지 못했었다. 가능하면 정원에 빠지지 않고 들리려 했지만, 부득이하게 들리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었다.
그런 날은 희가 혼자서 정원을 지킨다. 희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태주는 미안한 마음에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다. 현실의 물건은 가져갈 수 없으니, 꽃다발을 만들어서 선물할 생각이었다.
“난 해바라기 부케가 예쁘더라.”
“네?”
“해바라기 부케가 참 예쁘다고. 그냥 그렇다고.”
“어, 네.”
현실에서도 부케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미나 누나가 눈꼬리를 접으면서 부드럽게 하는 말을 흘려넘기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태주는 자신이 정원에 들어가 있는 동안 현실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혹시 유령처럼 스르르 사라지는 게 아닐까 의심을 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하루는 핸드폰으로 촬영을 켜놓은 채 정원에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정원에 있는 동안 태주의 몸은 잠을 자는 모습 그대로 현실에 남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품에 안고 있던 태산이도 마찬가지였다.
정원에서 보내는 48시간 동안 현실은 깊은 잠을 자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희의 설명에 따르면 실체가 아닌 마법으로 만들어진 가짜가 태주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혹시 누군가 현실의 가짜 몸을 건드리거나, 잠을 깨우면 정원에서 강제로 귀환하게 된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갑자기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지.’
그 설명을 들은 이후로 정원에는 다른 사람이 방해하지 않는 시간에, 혼자 있는 경우에만 들어가기로 했다. 지난 선율 1차 리딩의 경우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들어가야 할 때도 생기겠지만, 최대한 주의하기로 다짐했다.
*
정원은 곳곳에 야생화가 피어있었다. 온실 앞쪽에 옮겨 심은 것 외에도 여러 곳에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수풀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태산이와 단단 때문에 굳이 뽑아내지 않았더니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오늘 태주는 텃밭 작물만 수확한 후에, 바로 정원의 곳곳을 돌면서 꽃을 따왔다. 현실에서 마음먹은 대로 희에게 꽃다발을 만들어 선물할 생각이었다.
‘내가 그렇게 손재주가 없는 줄 처음 알았어. 아니 좀 조짐이 있긴 했지만. 그 정도로 못 할 줄은 몰랐지.’
태주는 악기를 잘 다룬다. 피아노, 기타, 바이올린 등. 악보도 잘 외우고 연주기법이 화려한 곡들도 문제없이 쳤다. 그래서 손재주가 필요한 일들을 잘할 거로 생각했다.
전혀 아니었다.
미나의 은근한 요구에 맞춰서 꽃다발 만들기에 도전했다가, 한참 동안 고생했다. 꽃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생길 정도로 엉망인 손재주에 미나조차 그냥 주문해서 선물하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결국, 꽃다발 만들기는 포기하고, 망가진 꽃들은 잘 말려서 향 주머니를 만들기로 했다.
태주는 예쁜 컵을 하나 깨끗하게 씻어서 꽃을 꽂기 시작했다. 태주의 손재주로 제대로 된 꽃다발을 만드는 것은 힘들었다. 대신 예쁜 컵에 꽃을 꽂아 리본으로 장식하고 선물하기로 했다.
희가 좋아하는 연한 분홍색과 흰색을 적절히 섞어서 컵에 꽂았다. 붉은색 리본으로 나비를 묶고 작은 카드에 글을 썼다.
“아. 얼굴 빨개진 거 같아.”
태주는 자신이 써놓은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희에게’라는 카드의 첫 문장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희는 평소 반짝인다는 칭찬을 좋아했다. 날개도 반짝거리지만, 희가 하는 행동들이 사랑스러워서 반짝인다고 생각하는 태주였다. 하지만, 그 말을 카드에 적어놓자, 너무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희가 좋아할 걸 생각하고, 꿋꿋하게 카드에 감사인사를 적었다. 카드를 적고 나자 두 시간짜리 대본을 낭독한 것처럼 지쳤지만, 기분은 뿌듯했다.
태주는 꽃이 가득 꽂힌 컵을 들고 중앙의 큰 나무로 향했다. 그는 곁으로 다가온 희에게 공중 계단을 희의 집 앞으로 옮겨달라 부탁했다.
“태주, 그건 뭐야?”
희는 태주의 손에 들린 것이 궁금했는지 이쪽저쪽으로 날면서 구경하고 있었다. 희에게 선물하려 가져온 꽃다발과 카드였지만, 막상 전하려니 부끄러워져 태주는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흠흠. 이거 희에게 줄게.”
“와아. 선물이야?”
“으응.”
“고마워, 태주.”
태주는 꽃다발을 희의 집안에 넣어주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어쩐지 열이 올라 발그레해진 얼굴을 보여주기 창피했다.
‘대체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거야.’
요정의 집안에 희의 날개 가루가 퍼지고 있었다. 덕분에 온 집안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희는 태주가 꽃과 함께 주고 간 카드를 펼쳐놓고 그 위에 누워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희 반짝반짝해? 이히히. 좋아.”
희가 카드 위를 요리조리 구른 탓에 반짝거리는 날개 가루가 카드에 묻었다. 그 모습을 본 희의 기분이 더 좋아졌다. 큰 나무에 놓인 요정의 집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빛이 반짝거렸다.
*
바이올린 수업을 위해 서울로 가는 중이었다. 바이올린 수업은 4개월째 듣고 있었다. 워낙 유명한 선생님이라 시간을 바꾸기 쉽지 않아, 지방에서 촬영하는 중에도 서울로 올라가서 수업을 들었다.
영화 선율에서 연주하는 곡들은 하나같이 쉬운 곡이 없었다. 고전 중에서도 꽤 난도 높은 곡들이었다. 비발디, 바흐, 파가니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고전 곡들도 있었고, 크라이슬러나 타레가의 곡도 있었다.
수업을 받으러 서울에 다녀올 때는, 견우나 형식 한 명과 움직였다. 가끔 서울에 볼일이 생기는 사람을 태워주기도 했다. 오늘은 정한선이 서울에 일이 있어서 같이 타고 가고 있었다.
“아이고. 살겠다. 왜 이렇게 더워.”
“정말 너무 더워요.”
“옛날엔 선풍기도 없이 여름을 났는데, 지금은 에어컨 없는 곳은 들어가기도 싫다.”
“하하.”
로드무비를 기획하고 촬영하는 감독의 입에서 엄살 섞인 말이 나왔다. 한낮의 땡볕 속에서도 촬영을 준비하고 스태프들 상태를 확인하던 사람이 정한선이었다. 그의 너스레에 태주가 웃음을 지었다.
정한선은 태주의 밴에 설치된 숨숨집을 들여다보며 장난을 걸고 있었다. 그가 흔드는 끈을 잡으려 태산이 냥냥 펀치를 하고 있었다. 태산이는 숨숨집 안에서 나오진 않고 앞발만 빠르게 휘두르고 있었다.
‘풉. 거북이 등껍질도 아니고, 그냥 나와서 잡지.’
“서울엔 무슨 일로 가세요, 감독님?”
“내가 후원하는 극단 하나 있다고 얘기했지?”
“청년 극단 청송이요?”
“그래, 그거. 그 애들이 예전에 올린 무대 내용 각색해서, 미튜브에 드라마로 올리고 싶다고 해서 봐주러 간다.”
정한선은 여러 가지 활동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었다. 매년 드라마나 영화도 빼놓지 않고 출연하고, 휴식기에는 독립 영화 촬영도 한다. 또 청년 극단을 후원하기도 하고, 여유가 있을 때는 청소년을 위한 무료 연기 강좌를 열기도 한다. 자기 일에 열정적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도 주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감독님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니세요?”
“무리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애들 봐주면서 내가 배우는 게 오히려 더 많아.”
“대단하세요.”
“대단하긴. 그냥 여유 있는 사람이 나서는 거지. 그리고 젊은 애들이 노력하는 게 아주 기특해.”
극단 애들을 생각하는지 정한선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런 정한선을 보는 태주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나이가 많든 적든 자기 일에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은 아름답다. 태주의 눈에 비친 정한선은 한여름 땡볕에 검게 그을렸지만, 그 모습조차도 아름답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태주 너도 나중에 여유 생기면 연극 한번 해 봐라. 영화랑은 다른 재미가 있어. 관객하고 소통하면서 공연하는 것도 꽤 괜찮아.”
“네. 기회가 생기면 해볼게요.”
연기 선생님이었던 박재성의 영향인지 태주도 연극을 좋아한다. 회귀 전엔 여유가 없어서 무대에 서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기회가 되면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휴게소에서 뭐 좀 먹고 갈까요?”
“커피나 한 잔 마시자.”
“네.”
태산이를 데리고 다니게 된 이후로 휴게소를 자주 들렀다. 중간중간 볼일도 보게 하고, 새로운 곳의 냄새도 맡을 수 있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견우나 형식도 태산이를 배려해서인지 이동할 때 휴게소를 들르는 시간도 고려해주고 있었다.
휴게소는 꽤 한가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정한선과 태주는 휴게소 건물 밖에 마련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이고. 덥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안에 못 들어가서.”
“에잉. 죄송하라고 한 말 아닌데. 네가 사과하니까, 내가 못돼먹은 것 같잖냐.”
“큭. 죄송, 아니. 아이참.”
정한선도 그렇고 트리즈의 배우들은 태주를 놀리는 걸 좋아했다. 가끔 불러내서 밥을 사주면서도 꼭 장난을 치곤 했다. 태주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나 얼굴이 붉어지면 그걸 가지고 또 한참을 놀려댔다.
형식이 사 온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고 있을 때였다. 옆 테이블에 앉은 아이가 태산이가 마음에 드는지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퍼서 주려 하고 있었다.
태주는 아이를 말리려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힘겹게 아이스크림을 뜨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이꺼 머거.”
‘윽. 귀엽다.’
태산이는 처음 먹는 아이스크림이 낯선지 잠깐 킁킁댔다. 그렇게 아이스크림 냄새를 조금 맡더니, 냄새가 마음에 들었는지 크게 입을 벌려 한입에 덥썩 물어버렸다.
숟가락에 든 아이스크림이 아닌, 다른 손에 든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헉.”
“으에에엥.”
“죄송합니다. 애기야 미안해. 형이 다시 사줄게.”
순식간에 아이스크림을 빼앗긴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태주도 울고 싶어지는 것 같았다. 태산인 난감해하는 태주나 우는 아이와 상관없이, 챱챱 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먹기 바빴다.
“푸하하.”
“크크크.”
젊은 아기 부모는 처음엔 황당해하다, 곧 웃음을 터뜨렸다. 태주는 미안하고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눈치 빠르게 형식이 아이스크림을 다시 사다 주어서 다행이었다. 우는 아기를 달래 다시 아이스크림을 쥐여 준 후에도, 태주는 여러 번 사과했다. 그런 태주를 아기 부모가 괜찮다며 말렸다.
아이스크림을 받아든 아기는 이번에 뺏기지 않으려는 듯, 태산이를 등지고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태산이는 아이스크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기에게 몸을 비비며 갖은 애교를 떨었다.
‘아이고, 태산아.’
태주가 아이스크림을 뺏어 먹지 못하게 태산이를 안아 들었다. 태산이 내려달라고 뒷발로 태주를 찼지만, 단호하게 차까지 안고 갔다.
*
바이올린 수업을 받고 오랜만에 집에 들렀다. 새벽에 다시 내려가야 해서 머물 시간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넷이 모이자 할 얘기가 많았다.
태주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태산이가 저지른 만행을 얘기해줬다. 태우는 연우와 마트에서 응모한 추첨권으로 상품을 받았다며 자랑을 했다. 태산이 육포를 상품으로 받은 식품 건조기로 만들었다며 잊지 말고 챙겨가라 신신당부했다.
가끔 시간이 날 때 둘이 만드는 동영상을 보곤 했지만, 실제로 어떻게 생활하는지 곁에서 볼 수 없어 걱정이 많았다. 게다가 지방 촬영이 이어져,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르는 일도 쉽지 않아지자, 더 걱정되었었다. 그런데 둘은 꽤 잘 지내고 있었던 것 같다. 얘기하는 중간중간 서로 눈도 맞추고 웃기도 하는 걸 보니 한시름 덜어도 될 것 같았다.
태주가 촬영 때문에 새벽에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얘기하자, 태우와 연우가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했다. 밑반찬도 챙기고, 미리 만들어 두었던 간식들도 챙겨주었다.
“형. 갈비찜 양념 재워놨는데, 가지고 가서 먹어.”
“응?”
“형 갈비찜 좋아하잖아.”
“더운데 뭐하러 그런 걸 했어.”
“미튜브 촬영하면서 한 거예요. 그 영상 찍는 김에 많이 만들었어요.”
태주가 요리를 못 하지만, 갈비찜이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는 것은 안다. 들어가는 재료가 많아 조리 시간이 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갈비찜이 한여름에 하기 힘든 음식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갈비찜을 좋아하니 둘이 일부러 준비해둔 것 같았다. 그리곤 쑥스러워 촬영 때문에 만들었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물론 촬영도 했겠지만, 갈비찜이 저렇게 큰 통에 가득가득 들어있는 이유가 그것만은 아닐 터였다. 슬쩍 봐도 갈비찜은 스태프들과 나눠 먹어도 충분할 정도로 양이 많았다.
“잘 먹을게. 형이 촬영하느라, 너희 신경도 못 써줬는데. 고맙다.”
“헤. 뭘. 연우가 거의 다 했어. 나는 그냥 조금 도왔어.”
“아니에요. 태우랑 다 같이했어요.”
서로에게 공을 돌리는 두 사람 모두에게 고맙다 얘기했다. 태주는 아직 어린 둘의 마음 씀씀이가 예뻤다.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무신경했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조금 들었다. 앞으론 잘하자고 몰래 반성하는 태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