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336
외전. 가족 완>
우리 집 아이 01
태주는 여러 번 읽고 메모를 추가하느라 부피가 두 배로 늘어난 대본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곧 회사로 출발해야 하는 태산이가 이 층에서 부스럭거리기만 할 뿐 내려오지 않아서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층으로 올라가면서 태산이를 불렀다.
“산아. 거기서 뭐 해?”
“방 꾸며.”
“방….”
전원주택에 있는 방, 위층 데뷔 조 숙소 그리고 이곳의 방까지 태산이의 방은 세 개였다. 그리고 그 세 개 모두 창고에 가까웠다. 숙소의 방은 전원주택의 가족실처럼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곳으로 꾸몄다고 들었지만, 그곳에서 무언가를 하는 건 본 적 없었다.
“내 방 말고. 여기. 도도 방이야.”
“응?”
“도도가 쓸 방 꾸미는 중이야.”
태주는 예상 밖의 장소에서 머리만 내밀고 태산이가 하는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도의 변신 마법 성공이 머지않았다는 얘기를 하긴 했지만, 도도의 방을 태산이가 꾸며 주려 할 줄은 짐작 못 해서였다.
‘전원주택에서 물건을 가져왔나 보네….’
지난 주말은 오랜만에 태주의 촬영도 없고, 태산이의 트레이닝도 없는 주말이었다. 덕분에 주말을 전원주택에서 보냈는데, 거기서 물건을 챙겨 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수긍했지만, 태산이가 챙겨 왔을 법한 게 어떤 건지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워낙 많은 물건을 선물 받고 또 태산이 녀석이 그 모르게 많은 물건을 모아 놔서였다.
태주는 도도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약간 두려운 마음을 품고 안으로 들어갔다. 태산이의 취향이라기 부르기 힘든 취향은 미로같이 물건을 쌓아 두는 것이었다. 도도가 쓸 방도 비슷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음. 자전거?”
“응. 이거 도도 줄 거야.”
“산이 네가 아끼던 거잖아.”
“이젠 너무 작아서 못 타니까.”
제가 아끼던 것을 선물하려는 마음은 고마웠지만, 기왕이면 자전거는 일 층 창고에 넣었으면 좋을 뻔했다.
태산이가 대여섯 살이었을 때 타던 자전거는 세 살 아이로 변신하는 도도가 타기에 컸다. 게다가 이곳은 단지 안 도로로 차가 다니는 곳이라, 어린아이가 자전거를 타기 힘들었다.
“착하네. 우리 산이. 이건? 이것도 네가 아끼던 거잖아.”
“그것도 도도 줄 거야.”
“진짜로? 이건 도도가 정말 좋아하겠다.”
“응.”
사용 감이 가득한 어린이 이젤은 공방에 주문 제작한 것으로 사용한 원목도 튼튼하고 색이 고운 것이라 태산이가 아주 아끼는 물건이었다. 어릴 적엔 전원주택 정원에 꺼내 놓고 그림을 그리거나 방에 그림을 장식해 둘 때도 썼었다. 이제는 몸이 커져서 쓰지 못하는 물건이었지만, 여전히 아끼는 것이었다.
‘세상에! 우리 태산이가 언제 이렇게 컸지.’
태주는 제가 아끼는 물건들로만 도도의 방을 채우는 태산이가 너무 대견했다. 분명 태산이에게는 이런 물건보다 훨씬 좋은 것들이 많았다. 보석으로 장식된 오르골도 여러 개 있었고, 비싼 블록 장난감이나 미니카 세트도 여러 개였다.
그러나 태산이는 그런 것들보다 자기가 사용하며 제일 좋았던 것들로, 소중한 추억이 깃든 물건들로 도도의 방을 꾸미고 있었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예뻤다.
‘조금 어수선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아이 침대는 서재를 치우고 둘 생각이었으니.’
태산이도 도도도 정원을 방문하려면 같이 자야 하니 그의 침대에서 잘 게 뻔했다. 굳이 잠잘 일 없는 방에 침대를 둘 필요는 없어 보였다. 사실은 도도의 방에 침대를 둘 공간이 없었다. 자전거와 이젤 외에도 그사이 얼마나 많은 물건을 가져다 두었는지 도도 방에는 빈 곳이 거의 없었다.
태주는 일 층의 그의 방과 연결된 서재 정리를 서둘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 층의 가족실은 반드시 그가 꾸미겠다고도 다짐했다. 태산이의 마음이 고마운 것은 둘째 치고 발 디딜 곳 없이 물건을 늘어놓으며 꾸미는 것은 그의 취향과 너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월말 평가를 거치면서 데뷔 조 멤버가 전원 뽑힌 것은 좋았지만, 일정이 너무 타이트해서 직원들은 숨통이 턱턱 막히는 중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새로 론칭할 그룹을 전담할 팀의 인원을 보충할 거라던 대표와 인사 담당자의 확답이 어서 이뤄지는 것뿐이었다.
“어으! 피곤해!”
“괜찮으세요?”
“아니. 죽을 것 같아.”
“그래도 성과는 있으셨나 봐요?”
“아아. 괜찮은 팀이랑 계약하기로 했어.”
피곤한 얼굴로 앓는 소리를 낸 팀장이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업계에서 톱 티어로 분류되는 스타일리스트와 미팅한 결과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었다.
“데뷔 스토리 찍을 촬영팀하고는 사인만 하면 되고, 전속 예능 기획팀하고는 다음 주에 미팅이고.”
“휘유! 전속 예능팀 정말로 계약해요?”
“하지.”
“이번에는 정말 투자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에스텔라도 많이 했어. 걔네 지난 활동 곡 의상값이 뮤직비디오 제작비만큼 든 거 알아?”
“알죠.”
삼 년 전에 데뷔한 걸 그룹 에스텔라의 1집 반응은 그저 그랬다. 중간중간 발표한 싱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2집에서는 심기일전한다는 생각으로 최상급 작곡가들의 곡을 받고 의상도 명품으로 쫙 뽑았었다.
그러고 나서도 최고 성적이 53위였으니, 새로 론칭하는 보이 그룹으로 투자를 돌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용케 계약하기로 했네요?”
“처음엔 일이 너무 바빠서 안 된다고 하더니, 멤버에 이태주 씨 동생이 있다고 하니까 반응하더라고.”
이태주가 자기 스태프들과 소속사 직원들에게 잘하는 것은 이미 업계에 유명했다. 특히 데뷔 초기부터 같이 일한 스타일리스트와 매니저에게 하는 대우는 예전부터 소문이 많았다.
경조사에 거금을 턱턱 내주었다거나 스타일리스트 사무실을 차려 준 일도 유명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그들을 파트너로 존중하고 대우하는 이태주의 태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 콧대 높은 스타일리스트가 이태주의 동생 산이가 포함된 그룹이라는 말에 호감을 드러냈다.
“산이 진짜 대박이네요. 전에 곡 수집할 때도 그랬잖아요. 이름 있는 작곡가들은 신인한테 곡 잘 안 주는데 산이 이름 듣고 허락했었잖아요.”
“그러니까. 만약 이번에 성적이 안 좋으면 정말로 회사 탓이야. 이만큼 좋은 조건에서 시작하는 그룹은 없으니까.”
“그건 그렇죠. 이제 겨우 데뷔 조 멤버로 확정된 시기라 데뷔할지 말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광고 섭외가 들어올 정도니까요.”
“아아. 그 광고? 대단하지. 그 건도 이번에 계약하는 스타일리스트 팀에서 맡기로 했어.”
태산이의 이름값은 회사에 들어오기 전부터 높았다. 본인이 가진 화제성도 큰 데다 가진 재능도 대단해서였다. 그런 태산이었지만, 현대 무용을 전공하게 되면서 업계에선 연예계 활동을 하지 않을 거로 판단해 섭외 순위에서 뺐었다.
하지만 태산이가 아이돌 연습생이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국내 소속이 애매해 형인 태주의 소속사 트리즈를 통하고 아는 사람을 통해 건너 건너 섭외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태산이의 밝고 건강한 이미지가 필요한 광고 대행사의 연락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팀장님 이따가 회의 들어가시죠?”
“어.”
“그럼. 인력 충원 언제 되는지 좀 물어봐 주시면 안 돼요?”
“물어볼게. 그건 나도 진짜 궁금하거든.”
“하하하. 부탁드려요.”
중소 기획사라서 직원 한 명당 일당백을 해야 하는 상황은 팀장에게도 직원에게도 익숙했다. 그래도 새로운 그룹을 론칭하려면 인원 충원이 꼭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에스텔라나 곧 미니 앨범으로 활동을 재개할 선배 그룹인 P1K4의 스태프 중에서 사람을 빼 와야 했다.
인력 부족을 고민하던 팀장은 회의에 들어간 뒤에도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여러 명이 모여 있었지만,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서였다.
“후우. 조금 참신한 콘셉트 없나?”
“요정이니 뭐니 하는 것도 초능력자도 이젠 많이 식상하죠?”
“그렇지. 워낙 많이들 했으니까. 누구였지? 음악이라는 세상을 항해하는 항해사라며 나왔던 애들.”
“에잇 소울즈요.”
“그래, 에잇 소울즈. 그런 것도 괜찮지.”
신인이었을 적 연말 무대에서 선배 그룹의 히트곡을 커버한 무대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었다. 앨범 퀄리티도 괜찮았고, 멤버들의 실력도 괜찮았다.
항해사라는 콘셉트는 간단했지만, 에잇 소울즈는 그걸 쭉 밀고 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앨범이 나올 때는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다거나 해외에서 공연할 때는 신항로 항해를 나간다는 식이었다.
새로 론칭할 그룹에게도 그런 콘셉트가 필요했다. 이번 회의의 주제는 그것이었다. 데뷔 콘셉트 혹은 세계관.
“마법 세계와의 접촉은 어때요?”
“마법 세계? 마법 학교 같은 거?”
“네. 특별한 물건을 얻으면서 마법 세계의 문을 여는 거죠. 거기서 배운 마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도 구하고 하는….”
“마법 세계관…. 괜찮네. 멤버 별로 스토리도 넣을 수 있고.”
“그렇죠? 마법 세계 괜찮죠?”
마법 세계관은 괜찮았다. 이미 여러 아이돌 그룹이 사용하긴 했지만, 아직 시도되지 않은 콘셉트도 많이 남아 있었다. 좀 더 생각하고 고민하다 보면 일곱 명의 멤버 별로 잘 어울리는 콘셉트를 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돌들이 내세우는 세계관이나 콘셉트가 유치하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아이돌에겐 꽤 중요한 요소였다. 괜찮은 세계관을 하나 만들어 두면 활동기의 무대 배경이나 뮤직비디오 기획 등을 어떻게 할지 정하기 쉬워서였다.
“우선 대표님한테 보고해 보고, 괜찮다고 하시면 멤버별 특기랑 성격 분석한 거 참고해서 세계관은 좀 더 세밀하게 다듬어 보자고.”
“네.”
“팀장님. 아이들 뮤직비디오에 이태주 씨 출연하면 시선이 너무 그쪽으로 쏠릴까요?”
“그렇게 되겠지.”
“그래도 화제는 되겠죠?”
“당연하지.”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뉴스가 되는 사람이 이태주였다. 당연히 화제가 되고도 남았다. 만약 그를 뮤직비디오에 출연시킨다면 화제성은 충분히 확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시작부터 끝판왕을 등장시켰다고 업계에 부러움 섞인 악평이 퍼질 수도 있었다.
“이태주 씨 왕 전문이잖아요. 마법 세계관으로 하면 이태주 씨가 마법 왕으로 출연하면 어떨까 해서요.”
“마법 왕? 멋지긴 하겠네.”
“그죠? 아아. 보고 싶다.”
“세계관 정해지고 콘셉트 나오는 거 봐서, 김 대리가 뮤직비디오 기획안 만들어 봐.”
“네!”
태주에게 뮤직비디오 출연 의사를 타진해 보지 않았지만,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도 태주가 뮤직비디오에 출연을 거절할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몇 개월 되지 않았지만, 회사 사람 모두 동생에 대한 이태주의 넘치는 애정을 겪을 만큼 겪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된 후로도 여유만 있으면 직접 동생을 데리러 오는 사람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아끼는 동생의 데뷔 곡 뮤직비디오였다. 출연을 승낙할 게 당연했다.
“자, 그럼 다음은 뭐였지?”
“중요한 건 아니에요. 데뷔 조 건강 검진 일정하고….”
태산이와 데뷔 조의 데뷔 일정은 촉박하긴 했지만,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
정원 입구를 통과하는 태주의 발걸음이 힘찼다. 이번 방문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도의 취향 파악. 현실에서 도도를 맞이하려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음식 취향이나 좋아하는 놀이 같은 거라면 잘 아는데.’
설탕보다 꿀을 넣은 음식을 더 좋아하고, 태산이 만큼은 아니었지만, 채소보다 고기를 더 좋아했다. 놀이는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마법 카펫이나 어린이 자동차 같은 걸 타고 노는 걸 더 재밌어했다.
갓난아기 때부터 돌봐 와서 도도에 관한 것은 박사나 다름없게 되었지만, 아이 방 인테리어는 또 다른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그의 오두막에서 같이 생활해서 도도의 방을 꾸며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취향을 잘 파악해 두어야 했다.
도도가 오랫동안 바라던 현실 방문이었다. 최대한 좋은 첫인상을 남겨 주고 싶었다.
“오늘도 우리 도도가 일 등이네.”
“뺘아아!”
“하하하. 고마워, 마중 나와 줘서.”
“뺘아아아.”
“아칸이 왔다고? 무슨 일이지?”
아칸서스나 모린의 할아버지는 항상 그가 현실에 있는 날에 방문했다. 특히 아칸서스는 도도에게 과격한 장난을 치다 몇 번 태주에게 걸려서 혼난 뒤로는 언제나 그가 없을 때만 골라서 왔었다. 그랬던 아칸서스가 방문 일을 바꿔서 온 걸 보면 그에게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뺘뺘아.”
“응? 왜 웃어, 도도야? 도도는 아칸이 왜 왔는지 아는구나 그렇지?”
“뺘아아.”
“안 알려 줄 거야?”
몸에 비해 큰 머리를 끄덕거리는 도도를 간지럽혀봤지만, 웃음소리만 커질 뿐 이유는 듣지 못했다. 한참 동안 간지럼을 태우던 태주는 휘청휘청 위태롭게 마법 카펫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즈음 손을 뗐다.
“뺘아!”
“미안, 미안. 도도가 너무 귀여워서 그랬어.”
“뺘아아.”
태주는 신경질을 부리듯 빽 소리를 질렀다가도 사과하자 바로 용서해 주는 도도가 귀여워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짧은 다리를 쭉 펴고 철퍼덕 앉아 있던 도도를 품으로 데려왔다.
정원이 확장된 후로 입구에서 오두막까지의 길이 두 배로 길어졌다. 그러나 도도와 보내는 다정한 시간이 너무 좋아서일까. 그렇게 길어진 거리가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짧게 느껴졌다.
“여! 정원사 어서 와.”
“아칸. 어쩐 일이에요?”
“뭐가 그렇게 급해. 우선 앉아 봐.”
“네.”
오두막 앞에서 마법 카펫에서 내린 태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도도가 말한 아칸서스만이 아니어서였다. 오두막 앞에는 희와 제피르, 단단과 해나, 모린과 모린의 할아버지까지 정원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뛰쳐나간 태산이를 제외한 정원 식구와 준 정원 식구가 모두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히히. 태주 기다렸어.”
“냐아앙!”
“깜짝이야! 태산이 너 여기 있었어?”
“호호호. 정원사 씨 도착하기 직전에 왔어. 다들 모여 있으니 궁금했나 보더라고.”
그가 오두막 앞 테이블에 앉기 무섭게 정원 안을 순찰하러 갔다고 생각했던 태산이가 테이블 밑에서 튀어나왔다. 정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감지할 수 있는 태산이 녀석이 그를 놀라게 할 마음에 숨어 있었다.
“자. 정원사 이거 먼저 마셔.”
“뭐예요?”
“진정 효과가 있는 차야.”
“…고마워요.”
태주는 아칸서스가 건네는 차를 떨떠름한 얼굴로 마셨다. 대체 얼마나 놀랄 만한 일을 꾸몄길래, 이런 차를 마시게 하는 것인지. 장난기 많은 아칸서스의 성격을 잘 아는 그는 슬그머니 불안감이 들었다.
“꼬맹아.”
“뺘아!”
아칸서스의 부름에 도도가 테이블 위, 정확히 태주의 앞으로 날아와 내려앉았다. 도도는 그렇게 앉은 채 고개를 들고 반짝반짝 기대하는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뭐야? 도도 뭐 하려고 그러는 거야?”
“뺘아.”
“숫자 센다, 꼬맹아. 셋! 둘! 하나!”
“뺘아!”
-펑!
태주는 처음엔 이게 뭐 하는 것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펑 소리와 솜사탕 같은 연기가 퍼지자 이내 기대하는 얼굴이 되었다. 모린의 할아버지가 개조한 변신 마법의 아기자기한 효과가 테이블 위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태주!”
“아! 성공했구나!”
“응!”
“하하하! 잘했어, 도도야. 너무 잘했어.”
어깨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카락, 보드랍고 통통한 뺨, 반짝이는 금색 눈. 몇 년이나 마법의 기초를 닦으면서 노력한 결실이 눈앞에 있었다. 태주는 도도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크게 환호했다.
우리 집 아이 02
“해나, 봤어요? 도도가 성공했어요.”
“호호호. 사실 우린 어제 봤어. 알려 주고 싶은 걸 참느라 고생했다고.”
“크큭! 정원사, 우리가 왜 이렇게 모여 있었겠어?”
“아이, 진짜. 귀띔이라도 해 주시지. 너무 놀랐잖아요.”
“이히히. 태주 놀랐어?”
희의 질문에 많이 놀랐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태주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그의 놀라는 모습을 보려고 모여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걸렸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오늘이었군요.”
“정원사 씨 울어?”
“안 울어요. 그냥 울컥한 거예요. 너무 기뻐서.”
“호호호.”
태주는 저를 향해 안아 달라고 손을 내미는 도도의 바람대로 작은 몸을 품에 안았다. 두 팔로 덥석 그의 목을 도도가 감싸자, 유아 의류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과 함께 달콤한 꿀 냄새가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 옷은?”
“해나가 선물해 줬어.”
“거기 백호가 가지고 있는 것하고 같은 마법이 걸린 옷이야. 현실이랑 꿈의 정원 양쪽에서 써도 되고, 몸에 맞게 크기도 바뀌는.”
“고마워요, 해나.”
“호호호. 축하할 일이잖아. 당연한 거지.”
그는 도도가 변신 마법에 성공하면 현실로 데려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쓸 물건들을 구매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흥분이 가라앉으면 양쪽에서 쓸 물건들도 떠올렸을 게 분명했지만, 그 전에 해나가 그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채워 주었다.
“냐아아.”
“태산이도 궁금해?”
“냐아아.”
“이리 올라와.”
태주는 그가 앉은 의자에 앞발을 짚은 태산이에게 허벅지를 두드려 보였다.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는 게 변신에 성공한 도도 모습이 궁금한 것 같았다.
“이히히. 제피르. 제피르는 여기야.”
“히이잉.
“어머나! 너무 보기 좋은걸.”
“모린은? 모린은 어디 앉아?”
“이리 와. 여기 옆에 앉자.”
희는 태주의 품에 태산이와 도도가 안기자, 바로 태주의 머리 위쪽으로 움직인 뒤 제피르를 불렀다. 두 아이의 자리가 태주의 품인 것처럼 제피르에게도 지정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희에게도 지정석이 있었다. 태주의 옷깃을 쥘 수 있는 어깨가 그녀의 자리였다.
잠시 후, 태주는 태산이와 도도를 품에 안고, 머리에는 제피르를, 어깨에는 희를 앉힌 모습이 되었다.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품과 어깨, 머리를 내어 준 뒤 미소 짓는 그는 해나의 말대로 무척 보기 좋았다.
“부럽, 크흡! 자, 이거 받아.”
“선물이에요?”
“어. 아버지랑 내가 준비한 거야.”
“고마워요.”
아칸서스는 자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모린까지 태주의 옆으로 가서 앉자, 꽤 부러운 기분이 되었다. 확 도도랑 모린이를 데리고 튈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든 그였지만, 후환이 두려워 얌전히 준비한 선물은 건넸다.
“이건?”
“펫 전용 기술석이야. 변신 기술이 새겨진 거지.”
“헐! 이걸 대체 왜?”
“커흠! 정원사님의 세계는 마법 사용에 제한이 큰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준비했습니다.”
“이런! 죄송해요. 탓하려고 했던 건 절대 아니에요. 너무 뜻밖의 선물이라 놀라서 그랬어요.”
펫 전용 변신 기술석. 모린의 할아버지는 드래곤은 마법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강조했었다. 도도가 마법을 배우기 전에 변신 아이템이나 기술석을 써도 괜찮지 않냐고 했던 아칸서스를 타박하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펫 전용 변신 기술석을 선물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반지?”
“아아. 이 펜던트와 한 쌍이야. 펜던트는 꼬맹이 주고, 반지는 정원사가 가져. 반지를 끼면 펜던트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어. 자세한 거는 메모를 보라고.”
“고마워요.”
“됐어. 그보다, 꼬맹이 채워 주기 전에 펜던트 한 번 열어 봐.”
겉면에 화려한 드래곤 조각이 새겨진 은색 펜던트는 안쪽에 사진을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아칸서스는 겸연쩍은 얼굴로 펜던트를 열어 보라 재촉했다.
“아! 그림이네요.”
“현실이랑 꿈의 정원 양쪽에서 쓸 건데 사진을 넣을 수는 없잖아. 아니, 그거보다. 그 그림 괜찮아?”
“그림 엄청 잘 그리셨네요. 진짜 보기 좋아요.”
“아니, 내 말은….”
“도도한테 너무 잘 어울리겠어요.”
아칸서스의 말을 끊고 태주는 도도의 목에 펜던트를 걸어 주었다. 그는 아칸서스가 펜던트 안의 초상화 때문에 그의 눈치를 보는 게 싫었다. 아칸서스와 다나, 모린 그리고 모린의 할아버지 역시 도도의 가족이었다. 펜던트에 초상화를 넣은 정도로 그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펜던트 겉면의 조각은 우리 아버지 모습이야.”
“와! 어쩐지 멋있다 했어요.”
“크흐흠!”
“이건 다나 씨의 인간 모습인가요?”
“어. 예쁘지?”
“네. 굉장한 미인이세요.”
초상화 속 다나의 인간 모습은 할리우드의 배우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창백해 보이는 흰 피부에 긴 은발은 우아했고, 여러 가지 색이 섞인 눈동자에 붉은 입술은 고혹적이었다.
괜히 아칸서스가 그녀에게 쩔쩔매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작은 초상화로도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다나 씨가 부인이라면, 누구라도 아칸서스처럼 굴게 될 게 뻔했다.
‘우와! 전에 다나 씨가 자기보다 해나가 훨씬 더 아름답다고 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다나 씨보다 더 아름답다는 해나는 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거야?’
태주는 해나를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접어 두었던 궁금증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걸 느꼈다. 해나는 꿈의 정원에서는 항상 닭과 비슷한 새 모습을 하고 지냈다. 그 모습으로도 섬세한 디저트 데코레이션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려서 못 느꼈는데, 그녀는 수인이었다. 인간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는.
해나는 인기가 너무 많아서 사람들을 피하려고 은신과 잠입 기술을 익혔다고 들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얘기였다. 새 모습의 해나를 보면서도 이종족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어려워하면서 잘 보이려고 노력했었다.
“이거! 이거는 모린이 선물이야. 받아 도도야.”
“고마워.”
“히히. 어서 풀어 봐.”
“응.”
태주가 해나의 인간 모습을 궁금해하는 도중에도 선물 증정은 이어졌다. 해나의 옷, 아칸서스의 마법 물품과 기술석, 마지막으로 모린의 두툼한 책 등. 도도의 변신 마법 성공을 축하하는 물건이 쌓이고 있었다.
“모린!”
“왜?”
“이놈 자식, 그건 언제 챙겼어?”
“어제저녁에.”
“누가 그거 물었어? 금고에 넣어 둔 걸 왜 네가 갖고 있냐는 거잖아.”
“도도 주려고.”
“크아아! 이놈 자식!”
태주는 발작할 것처럼 괴성을 지르는 아칸서스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도도가 받은 책은 아무래도 모린이 아칸서스 몰래 슬쩍해 온 것인 모양이었다. 어쩐지 아이가 가지고 있기에는 책이 지나치게 고급스럽고 화려했다.
“어휴, 진짜. 이게 어떤 건데.”
“애가 장난칠 수도 있지. 뭘 그리 화를 내냐.”
“아버지! 아버지가 매일 오냐오냐하니까, 날이 갈수록 모린이 장난이 심해지잖아요.”
“내가 언제? 오냐오냐는 네가 했지.”
태주는 똑같아 보이는 두 사람이 싸우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모린과 도도를 애지중지하는지는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금고 터는 걸 장난이라고 치부한 순간부터 두 사람 모두 오냐오냐한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로를 탓할 이유가 없었다.
“미안하다, 꼬맹아. 이건 줄 수 없어. 이건 스펠 북이라고 하는 건데, 페이지마다 마법이 저장된 거거든. 위험해서 안 돼. 대신 이걸 주마.”
“뭐야?”
“그림자 숨기 마법이 각인된 팔찌다. 하루에 한 번 그림자 속으로 숨을 수 있는 물건이야.”
“고마워.”
태주는 역시 책을 돌려주길 잘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성격은 허술했지만, 아칸서스는 마법의 대가였다. 그런 그의 마법이 가득 들어 있는 책이라니. 아이가 가지고 놀기에는 위험해도 너무 위험했다.
“쳇!”
“쳇은 무슨 쳇이야.”
“흥! 자, 도도야. 이거 받아. 모린이 아끼는 거야.”
“인형이야?”
“아니, 부하야.”
모린이 스펠 북 대신 선물한 것은 병장기를 든 수인 인형이었다. 전부 12개로 한 뼘 크기의 인형은 금방이라도 전투에 돌입할 것처럼 용맹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얘네를 시켜서 적을 무찌를 수 있어.”
“적?”
“응. 작지만, 전투 부대야. 정찰이랑 전투도 할 수 있어.”
“우와! 멋지다.”
모린의 새로운 선물은 마법이 걸린 인형인 것 같았다. 태주는 도도가 인형 세트를 들고 흔드는 사이 아칸서스를 돌아봤다. 위험한 마법이 걸려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반응을 살핀 것이었지만, 흐뭇한 얼굴이라서 안심했다. 이번엔 제대로 된 선물인 모양이었다.
그날 태주는 꿈의 정원을 얻은 후로 처음으로 텃밭을 방치하고 정원 식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
맛있는 요리, 흥겨운 음악, 상냥한 친구들. 도도의 변신 마법의 성공을 축하하던 지난 꿈의 정원 방문은 기념할 만큼 즐거웠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도도를 현실로 데리고 온 날 역시 잊지 않고 꼭 기억해야 하는 날이었다.
옆구리에 붙은 태산이와 그의 가슴 위에서 잠든 도도를 확인한 뒤 태주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원 입구를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깨어 있었는데, 차원을 넘어오는 동안 잠에든 모양이었다.
“도도, 천사님. 안녕?”
“태주…. 하암.”
“조금 더 잘래?”
“하암.”
-똑똑똑!
뒤척이는 도도를 깨울 요량으로 말을 걸고 1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의 방문을 일정한 속도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들어와, 호야.”
“네.”
2호였다. 그의 방 안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져서 이른 새벽부터 찾아온 것 같았다.
“도도야, 아가. 인사해. 호야.”
“안녕.”
“안녕하십니까.”
“호야, 전에 얘기했었지? 도도야. 변신 마법에 성공했어.”
“축하합니다.”
그의 짐작이 맞았나 보다. 2호는 다른 건 확인하지 않고 태주의 품 안의 도도만 확인하고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도도 역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던 걸 멈추고 2호를 쳐다보기 바빴다. 서로 얘기로만 듣던 상대를 처음 보는 게 신기한 것 같았다.
“냐아앙.”
“킥. 더 잘 거야? 일어나야지.”
“냐아앙.”
“아하하. 귀여워라.”
깨울 생각으로 가슴을 긁어 주었는데, 태산이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몸을 틀어 등을 만져 달라며 내밀고 있었다. 태주는 귀여운 잠꾸러기가 바라는 대로 손가락을 세워 등을 쓱쓱 긁어 주었다.
기상 시간에 2호가 찾아오는 해프닝이 벌어진 뒤 태주는 은근히 쿠첼루스의 방문을 기대했다. 그가 도도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헉! 해츨링?”
그리고 쿠첼루스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놀란 얼굴을 보여 주었다. 덤으로 도도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보는 능력까지 보여 주었다.
“변신 마법에 성공한 겁니까?”
“네, 어제 성공해서 데려왔어요. 도도야 쿠첼루스야, 인사할까?”
“응. 쿠첼루스 안녕.”
“하하하. 반갑습니다.”
쿠첼루스는 태주의 품에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아이의 금색 눈을 향해 부드럽게 눈가를 접으며 미소 지었다. 마법의 종족인 드래곤이라지만, 아직 어린 아기인 도도가 태주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몇 년간이나 마법을 공부했었다. 그 노력과 마음이 너무 기특했다.
‘깜짝이야. 벌써 한참 전 일인데도 아직도 이러네.’
언젠가 마법 연구에 홀딱 빠졌던 쿠첼루스가 연구에 성공했다며 돌아왔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마법을 연구한 건지 모르겠지만, 일 년이 넘도록 침식을 잊고 매달리더니, 대단한 성과를 얻어서 돌아왔다.
정확하게 무슨 마법을 연구했다고 설명을 듣지 못했지만, 쿠첼루스의 얼굴을 보고 태주는 대략 어떤 마법을 연구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동안 마법. 연구에 성공한 쿠첼루스가 열 살 이상 어려 보이는 모습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이십 대로 보이는 젊어진 쿠첼루스의 모습에 무척 놀랐었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특히 눈꼬리를 접고 다정하게 웃을 때면 순식간에 변하는 분위기에 더 그랬다.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 풀어지는 순간의 차이는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다.
“오후에 호박 섬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쿠첼 혹시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셨어요?”
“아니요. 이도 군이 사용할 만한 마법 물품을 챙겨 오려고 합니다. 이렇게 귀여우니 미리미리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력한 거로 골라 오겠습니다.”
“아, 하하하. 쿠첼. 그러지 마시고 대마법 주문서 먼저 살펴보세요.”
“아! 그겁니까?”
동안 마법이라는 엄청난 마법에 성공했지만, 쿠첼루스의 마법에 대한 열정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간 무슨 문제 때문인지 풀리지 않았던 마법의 실마리를 잡았다며, 더 파고들고 있었다. 기껏 젊어진 몸이 아까울 정도로 연구실에서만 살았다.
그런 그에게 대마법 주문서라는 보기 힘든 마법 주문서는 아주아주 매력적인 샘플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한 아침 식탁을 외면하고 어서 달라며 그를 재촉할 정도로.
“식사 먼저 해요. 해나가 엄청 신경 써서 해 준 메뉴에요.”
“그, 그렇지요. 식사 먼저 하는 게 맞지요.”
“내일까지 촬영 쉬니까, 천천히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아공간에서 키즈체어를 꺼내 식탁 한쪽에 내려놓은 뒤 도도를 앉히면서 태주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대마법 주문서를 사용해서 도도의 신분을 만드는 일은 조금 늦춰도 괜찮았다. 꿈의 정원에서 도도를 위해 사 온 옷과 가구, 장난감 등으로 방을 꾸며 주고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정도 시간은 금세 지나갈 게 분명해서였다.
우리 집 아이 03
해나가 준비해 준 음식은 쿠첼루스의 급한 마음을 다독여 주고도 남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는 대마법 주문서를 확인하고 싶어 하던 게 언제인 양 맛있는 요리를 흡입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에 지지 않을 정도로 작은 도도도 열심히 포크를 놀렸다. 드래곤일 때 먹는 것과 인간 아이의 모습일 때 먹는 음식의 맛이 다른 듯,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산아. 숙소 올라갈 때 과일 상자 가지고 가.”
“응.”
“봐서 어떤 과일을 제일 잘 먹는지 형한테 알려 줘.”
“다 잘 먹어. 과일이 다 맛있어서 형들이 살찔 것 같다고 했어.”
“조금 쪄도 되겠던데. 내가 보기엔 다들 너무 말랐어.”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태주도 데뷔 조 멤버들의 사정을 고려해서 과일을 고르고 있었다. 다이어트로 고생하는 걸 알아서 수분 함량이 높고 칼로리가 낮은 과일들로만 골라서 상자를 채워 주고 있었다.
“도도 이제 다 먹었어?”
“응. 다 먹었어.”
“그래? 그럼 이리 와봐. 현실에선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 줄게.”
“응.”
식탁 위의 고기 요리를 초토화시킨 태산이, 도도를 의자에서 들어 올렸다. 현실 생활 선배로서 후배인 도도에게 알려 줄 게 있는 모양이었다.
태주는 둘이 햇볕이 잘 드는 거실 러그 위로 가는 걸 본 뒤 쿠첼루스에게 대마법 주문서를 건넸다. 도도를 그의 아이로 입양하고 등록과 사람들의 인식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주문서였다.
“가능하면 쓰고 싶지 않은데 말이죠.”
“그럼 제가 처리해 드릴까요?”
“네?”
“남미나 동유럽, 혹은 북아프리카에서 입양한 거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아, 아니에요.”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눈에 불을 켜고 제안하는 쿠첼루스의 제안을 거절한 뒤 태주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주문서를 사용하는 것이나 쿠첼루스에게 조작을 부탁하는 것이나 비슷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지만, 부탁하는 것보다 안전한 선택은 대주문서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해킹 실력도 사람을 다루는 실력도 무서울 정도로 뛰어난 쿠첼루스에게 부탁하면 그의 말대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런 불법적인 일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가능하면 쿠첼루스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쩝!
“그렇군요.”
그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하는 쿠첼루스의 모습에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자신했다.
“쿠첼 집에 계속 계실 거예요?”
“네. 이걸 살펴봐야 해서….”
“그럼 오후에 도도랑 저한테 환상 마법을 걸어 주실래요? 쇼핑을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커피 타 드릴게요. 천천히 보세요.”
대마법 주문서를 살피느라 바쁜 쿠첼루스에게서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태주는 정성스레 커피를 뽑았다. 그리고 달콤한 후식을 사랑하는 두 아이를 위해서 아이스 초콜릿 두 잔도 준비했다.
*
트리즈의 매니지먼트 총괄 본부장을 맡은 우 이사는 자신의 주변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최 대표 때문에 오르는 짜증을 힘겹게 참았다. 태산이가 다른 기획사에 아이돌 연습생으로 들어간 뒤로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서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 한 대만 때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절대 익숙해지지 않았다. 최 대표의 저 쳇바퀴 도는 것 같은 행동은 매번 볼 때마다 짜증이 났다. 그리고 대체 왜 대표실을 두고 매번 자기 주변을 도는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우 이사는 알아?”
“저도 몰라요.”
“혹시 우리랑 계약 파기하고 산이 있는 회사로 옮기려고 그러나?”
“이 배우님이 그럴 분은 아니시잖아요.”
“그건 그렇지.”
작은 약속 하나도 반드시 지키려고 하는 태주였다. 그런 그가 트리즈와 한 계약을 엎고 태산이의 기획사로 갈 가능성은 전혀 없는 데도 불안함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평소 다른 배우랑 다르게 과일을 가져다주거나 간식을 가져다주느라 자주 회사에 들르는 태주가 꼭 알려야 할 일이 있다면서 약속을 잡았다. 최 대표와 우 이사, 홍보팀의 김도진 부장까지 회사에서 중책을 맡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뭔가 중대 발표할 사항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수 팀을 하나 만들 걸 그랬어.”
“쯧! 아이돌 기획사 안 좋아하시잖아요.”
“안 좋아하지. 애들한테 그게 무슨 못 할 짓인지. 안 그래?”
“그건 그렇죠.”
“혹시 우리 산이도 그런 대우를 받았나? 그래서 이 배우가 산이를 데리고 오려는 건가?”
“그건 아닐걸요. 만약 그랬다면 이 배우님이 거길 그냥 두실 리 없잖아요.”
최 대표는 아이돌 기획사의 운영 방식을 무척 싫어했다. 아티스트로서 대우하는 게 아니라 상품으로 만드는 그들의 방식을 잔인하다고 여겨서였다. 연예인이 상품이 맞긴 하지만, 인성을 마모시키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꼭 그렇게까지 비난하고 모욕을 주면서 키울 필요 없잖아.”
“그런 방식이 관리하기 편하니까요.”
“자기들 관리하기 편하자고 한창 자라는 애들을 정신병 걸릴 때까지 갈구는 게 잘하는 건 아니지.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관리를 잘해야 제대로 된 매니지먼트지.”
“맞아요. 그래서 우리는 배우 전문이죠.”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아이돌 기획사에선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트레이닝이라는 명목하에 쥐잡듯이 잡는다.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야 관리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없는 트집도 잡아서 모욕을 주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대형 기획사들도 마찬가지, 트레이닝 혹은 관리라는 핑계로 연습생이 물 한 모금 마시는 것까지도 기록하게 한다. 멋모르는 어린 연습생들은 그런 비인간적인 대우도 참으면서 데뷔를 꿈꾼다.
‘그런 주제에 스트레스 관리는 해 주지도 않지. 빌어먹을 인간들.’
최 대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육성 방식이었다. 그래서 태산이가 아이돌이 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그의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태주의 중대 발표가 있을 거라는 얘기에 그 걱정은 최대치로 높아졌다.
“그럼 혹시 겨, 겨, 결혼 발표?”
“…에이, 설마요.”
“아니, 이제 나이도 찰 만큼 찼잖아. 우리 이 배우가 뭐가 부족해? 충분히 연애하고 결혼하고 할 때잖아?”
“이 배우님은 촬영이랑 산이 뒷바라지에 바빠서 연애하실 시간도 없을걸요?”
그것보다 그의 옆에 서려는 용감한 여성이 없었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할 때 몇 명의 여성이랑 만났지만 길게 가지 못했다. 분명히 연상인데도 자신보다 더 어려 보이는 태주를 여성들이 감당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거기에 태주의 화려한 비주얼 때문에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스트레스까지 받았다고.
“연애나 결혼은 아닐 거예요.”
“그럼 대체 뭘까?”
‘진짜로 산이를 데려오시려는 건가?’
가능성 없는 얘기이긴 했지만, 그간 겪은 태주의 팔불출이라면 아주 아니라고도 하기 힘들었다.
*
최 대표와 우 이사가 태주와의 약속에 골머리를 앓는 중인 트리즈와 다르게 외출 준비를 서두르는 태주와 도도의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찰칵! 찰칵!
“아이, 귀여워라.”
“히히.”
태주는 직접 고른 밀짚모자를 쓴 도도의 귀여운 모습을 쉴새 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회사에 다녀온 뒤에 SNS에 공개할 사진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붉은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정수리가 뾰족한 밀짚모자를 쓴 도도는 만화에 나오는 꼬마 마녀처럼 귀여워서 찍지 않을 수 없었다.
“펜던트는 착용했고. 오늘은 누구 데려갈 거야?”
“으음.”
‘크으! 심각한 표정도 귀엽네.’
도도는 외출할 때마다 모린이 선물한 전사 인형 중 하나를 가져갔다. 작고 가벼운 크로스 백에 인형을 넣어서 매고 다녔다.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인형한테 설명하기도 하고, 밖을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이거.”
“도끼 전사 바루?”
“응. 오늘은 바루랑 갈래.”
“그래. 가방에 넣자.”
“응!”
인형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곰 수인 인형 바루는 도도의 가방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가방 밖으로 머리가 삐죽 나왔는데, 도도는 그게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작은 손으로 바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뭐라고 뭐라고 작게 속삭였다.
태주는 도도가 인형과 대화하는 동안 기다리면서 짐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어린아이랑 외출하는 것이라서인지 챙길 게 제법 많았다. 마실 것과 간식, 갈아입힐 옷과 수건, 얇은 담요와 베개 대용 인형 등. 태산이가 어릴 적에 챙기던 것과 비슷했다.
“태주.”
“얘기 다 했어?”
“응.”
“그럼, 출발할까?”
“응!”
*
태주와 도도가 트리즈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최 대표와 모인 사람들의 긴장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였다. 그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이슈를 떠올리고 있었다. 태주의 공개 연애 발표, 광고 계약 취소, 매니지먼트 계약 해지 혹은 은퇴 선언 등등.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먹구름이 낀 듯한 트리즈로 도도의 손을 잡은 태주가 들어왔다.
“헉! 아이?”
“이 배우님?”
2호가 사무실 문을 연 순간부터 집중되었던 시선은 한쪽 팔을 높이 들어 태주의 손을 잡고 도도가 들어섰을 때는 폭력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렬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에 누구보다 익숙한 태주가 잠시 움찔할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태주, 도도 인사해?”
“응.”
“안녕, 나는 도도야.”
-쪽! 쪽! 쪽!
예상하지 못한 아이의 등장에 얼어붙었던 사람들 사이로 앓는 소리가 났다. 자기소개에 뒤로 왼손 쪽, 오른손 쪽, 양손 쪽의 삼단 손 키스가 이어져서였다.
“세상에! 도도, 아가야. 그런 인사는 어디서 배웠어?”
“산이! 이렇게 하는 거랬어.”
“아, 하하하. 맞아. 어린아이는 그렇게 인사하는 거야.”
“도도 잘했어?”
“잘했어, 엄청.”
태주는 기분 좋게 히히 웃는 도도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다. 정말 잘했다. 놀라서 튀어나올 것 같았던 사람들 눈이 작은 재롱에 호의적으로 변한 것을 보면 잘하고도 남았다.
며칠 전부터 시간이 나면 태산이와 붙어 있더니, 여러 가지 동작을 배운 듯했다. 손 키스 외에 또 무엇을 배웠는지 궁금했다.
“들어가시죠.”
“고마워.”
2호가 열어 주는 대표실 문을 열자, 그 안에 미어캣처럼 목을 빼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태주가 미리 와 달라고 부탁했던 회사 임원들과 그의 오랜 파트너 매니저 견우였다.
“어머나!”
“크윽! 아기라니!”
“어서 오세요, 태주 씨.”
“안녕하세요. 다들 모여 주셨네요. 바쁘셨을 텐데, 고마워요.”
도도를 소파 쪽으로 데려가며 태주는 모인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 먼저 했다. 연예 기획사의 업무는 일 년 내내 바빴다. 특히 트리즈처럼 활동하는 배우가 많은 회사는 배우 한 명의 프로모션이 끝나면 다른 배우의 프로모션이 시작되곤 해서 연초부터 연말까지 일정이 가득했다.
“아니에요. 이 배우님 일인데요. 당연히 모여야죠.”
“아웅.”
“옳지, 다 올라갔다.”
우 이사가 태주의 감사 인사에 화답하는 사이, 사람들은 소파에 혼자 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도도를 훔쳐봤다. 아이가 소파 위에 엎드리듯 상체를 걸치고 한쪽 다리를 올린 뒤 몸을 끌어올린 뒤, 반 바퀴 돌아 바로 앉는 과정을 보느라 태주의 인사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도도야, 바루 가방 밖으로 나왔네. 다시 넣어 줄까?”
“응!”
혼자서도 높은 소파에 올라가 자리를 잡은 도도였지만, 움직이느라 인형이 빠져나오는 건 막지 못했다. 태주는 뒤로 휙 돌아간 가방의 위치를 다시 돌려주고 바루도 잘 넣어 주었다.
‘아이고, 귀여워라. 어쩜 이렇게 태산이랑 다를까.’
태산이와 도도, 둘은 비슷한 나이의 아이 모습으로 변한 것 빼고는 성향이 너무 달랐다. 동물 모습일 때도 아이 모습일 때도 무척 달라서 그는 매일 새로운 기분이었다.
호랑이 모습이든 위장한 고양이 모습이든 독립적인 성향의 태산이는 혼자서 온 정원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가 아이 모습으로 변하면 태주의 도움을 받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태주가 안고 다니는 거나, 음식을 먹여 주는 것을 당당하게 받아들였다.
반면 도도는 정반대였다. 드래곤일 때의 도도는 놀 때도 태주의 주변에서 놀았고, 잘 때는 그의 가슴에 딱 붙어서 잠들었다. 그러나 아이 모습으로 변하면 태도가 바뀌었다. 사용할 물건이나 장난감도 직접 고르고, 안겨서 다니는 것보다 직접 걸어 다니는 걸 더 좋아했다.
“이 배우, 이 아이는?”
“이도, 도도예요. 제 아이.”
“으음!”
“헉!”
자기 아이라는 태주의 짧은 설명이 끝나자, 대표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바뀌었다. 아이의 귀여운 행동에 웃던 것은 모두 잊은 듯, 저마다 심각하고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개중에는 너무 놀라서 입만 벌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태주?”
“응? 아아! 놀라서 그러는 거야. 도도처럼 귀여운 아이가 내 아이라니까, 다들 부러워하는 거야. 그렇죠, 대표님?”
“이 배우, 이 배우는 내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세상에나!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난 어디서 천사님이 날아왔나 고민하는 중이었다니까.”
“맞아요.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아이고! 전부 다 예쁘네.”
“히히히. 태주, 도도 예쁘대.”
한국어도 잘한다며, 최 대표가 칭찬 거리를 하나 더 찾아서 칭찬하는 동안 대표실 분위기가 정돈되었다. 경솔하게 감정을 드러내서 아이를 상처 입힐 뻔한 어른들은 현실적인 얘기는 천천히 고민해도 괜찮다는 태도로 도도 칭찬 퍼레이드를 시작했다.
“모자도 귀엽고, 인형도 멋지고, 목걸이도 멋지네.”
“도도 모자야. 얘는 바루. 목걸이 이렇게 열 수 있어.”
“오! 진짜로 열리나?”
“응!”
달칵 소리를 내면서 열린 펜던트는 뜻밖의 정적을 가져왔다. 특히 독특한 조각이 새겨진 펜던트라 가볍게 칭찬했던 최 대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이 그림은…. 혹시 가족….”
“아칸이랑 모린, 다나야.”
“아!”
“꿈에서 만나.”
“아가야…. 대표님이 미안하구나. 크흡!”
순식간에 오해가 퍼졌다.
우리 집 아이 04
적막이 내려앉은 대표실 안에 간간이 울먹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태주는 당황했다. 도도의 말은 꿈의 정원에 가면 아칸서스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였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게다가 설명한다고 믿을 사람도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 배우님. 오늘 아이를 데려오신 건 혹시….”
“네. 같이 다닐 거에요. 예전에 산이 데리고 다녔던 것처럼요.”
“아!”
“오늘은 오후에 아이용 태블릿을 사러 갈 거거든요. 도도가 뭐든 직접 고르는 걸 좋아해서요.”
“그래서 오늘…. 알겠어요.”
태주는 대마법 주문서를 사용한 뒤 만들어진 도도의 신분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걸 우 이사에게 건넸다. 앞으로 그가 도도와 같이 쇼핑을 가거나 촬영장에 다니면 기자들이 따라붙을 터였다.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회사에 알려 두려는 생각이었다.
태산이가 처음 아이로 변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기자들이 확인도 안 하고 멋대로 기사를 썼던 일이. 당시에도 정정 기사를 내게 하고 몇 명은 법적 조치를 하기도 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주 씨. 사실 아닌 말은 한 줄도 쓰지 못하게 할 테니까요.”
“당연하지. 어딜 감히 우리 아이한테.”
“고마워요, 부장님. 대표님도요.”
“이 배우는 걱정하지 말고 아이랑 행복하게 지낼 일만 생각해요.”
“네, 그럴게요.”
풀지 못한 오해는 그대로 남겨 두기로 했다. 어쩐지 다들 의욕에 넘치고 있어서 말을 꺼내면 안 될 것 같았다.
“태주. 도도 치즈.”
“잠깐만. 이거 먼저 마시고 있어. 금방 까 줄게.”
“응.”
어린이 음료의 뚜껑을 열어서 건넨 뒤, 길쭉한 치즈의 포장을 벗겼다. 진공 포장된 치즈는 스스로 하는 걸 좋아하는 도도가 아무리 노력해도 열 수 없었다. 덕분에 태주는 도도가 간식을 찾을 때 은근히 치즈 간식을 권하고 있었다.
도도는 태주가 건넨 음료수를 바루에게 먼저 먹이는 시늉을 했다. 인형 부하들하고 같이 다니게 된 뒤로는 먹을 게 생기면 꼬박꼬박 부하에게도 먹여 주고 있었다.
“다 먹었어? 이제 도도 먹을게.”
원색의 동물 캐릭터가 그려진 아이 음료는 아주 약한 과일 맛이 나는 거라 향이 진한 차를 좋아하는 태주의 취향은 아니었는데, 아직 아이인 도도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밥을 먹을 때도 물 대신 마시려고 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이 배우 산이는 잘 지내요?”
“응!”
“응? 산이 형, 아니. 아가, 산이 삼촌이 잘 지낸다고? 어떻게 잘 지냈어?”
“이렇게. 꺄하하 웃었어.”
“하하하. 산이가 그렇게 웃었어? 그럼 잘 지내는 게 맞네.”
허리에 손을 얹고 꺄하하 태산이의 웃음소리를 흉내 내는 도도를 보는 최 대표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반짝거리는 황금색 눈을 곧게 맞추며 또박또박 대답하는 아이는 보고 있으면 절로 흐뭇해졌다. 지나치게 화려한 외양만 아니었으면 당장 데려다가 배우를 시켜 보고 싶을 정도였다.
“도도야, 간식 먹자.”
“응.”
태주는 도도에게 윗부분과 날카로운 모서리를 잘라 낸 스트링 치즈를 쥐여 주었다. 그는 매번 아이 간식을 주기 전 가위로 진공 포장의 뾰족한 테두리를 둥글게 잘라 냈다. 가위를 가방에 챙겨 넣던 그는 속으로 생산 과정에서 포장지를 둥근 모양으로 하면 좋겠다고 불평했다.
사실 테두리를 정리하는 게 번거롭긴 해도 바루 먼저 먹이고 제 입에 하얀 치즈를 쏙 넣는 도도를 보는 건 꽤 즐거워서 나쁘진 않았다.
-똑. 똑. 또도도독!
트리즈의 직원들과 태주가 스트링 치즈에 이어 동그란 곡물 쿠키까지 냠냠 먹어 치우는 아이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도중이었다. 조금 방정맞은 노크 소리가 나더니, 익숙한 얼굴이 대표실 안으로 쓰윽 들어왔다.
“태주 왔다면서요?”
“네, 여기 계세요. 그러고 계시지 마시고 들어오세요.”
“실례할게요.”
익숙한 얼굴은 태주가 데뷔하기 전부터 트리즈에 소속되어 있던 선배 배우 진혁이었다. 그는 허락을 듣자마자 활짝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태주야. 오랜만.”
“이 주 전에도 봤잖아요.”
“야, 야. 우리 사이에 이 주면 오랜만…, 누구?”
한껏 반가운 척하면서 태주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던 진혁의 눈길이 도도를 향한 순간 멈추었다. 대표실에 있어선 안 되는 생물을 보고 놀라서 굳은 것이었다. 다리 위에 귀여운 프린팅의 손수건을 펼쳐 놓고 커다란 쿠키를 양손으로 잡고 먹는 여자아이는 아무리 봐도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흐흠! 도도야, 도도는 누구 아이?”
“태주 아이.”
“옳지. 우리 도도 똑똑하다.”
“헐! 진짜로? 진짜로 네 딸이야?”
“아니요. 아들인데요.”
아들이라는 태주의 대답이 나온 뒤로 대표실 곳곳에서 켈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처음 태주가 도도를 자기 아이라고 소개했을 때만큼 사람들의 얼굴에 놀란 감정이 드러났다. 다들 도도를 여자아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남자애구나. 애 머리 때문에 여자앤 줄 알았네.”
“머리 자르기 싫다고 해서요.”
“그럴 수도 있지. 지금 머리도 잘 어울려. 그나저나 너 언제 시간 되냐?”
“왜요?”
“시간 나면 집에 와서 우리 애들이랑 좀 놀아 줘.”
진혁의 권유를 들은 태주는 싫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순수하지 않은 목적이라는 걸 너무 잘 알아서였다.
“진혁 형님 초대할 게스트가 그렇게 없어요?”
“아니, 사람이야 많지. 근데 우리 애들 기준에 맞는 사람이 별로 없어.”
“아!”
“그래. 우림이, 아림이 그 애들이 사람 얼굴을 좀 밝혀야지.”
사정은 알겠지만, 역시 내키지 않았다. 단순히 진혁의 쌍둥이 딸인 우림이, 아림이와 시간을 보내 달라는 것이라면 흔쾌히 승낙했겠지만, 방송에 출연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형님은 언제까지 그 프로 찍을 거예요? 벌써 일 년 넘게 찍지 않았어요?”
“나도 슬슬 그만하고 싶은데, 애들이 너무 좋아해서 어쩔 수가 없어.”
조작 논란, 악의적인 편집 논란으로 대부분 사라졌던 관찰 예능이 몇 년 전부터 다시 유행이었다. 그중에서도 연예인과 그들의 아이가 나오는 관찰 예능이 인기였다. 진혁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그중에서도 원조 격인 아이와 아빠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예능이었다.
“이 주에 한 번 하는 촬영을 애들이 얼마나 기다리는지 몰라. 다음 촬영에는 어디 가자고 자기들끼리 계획도 세운다.”
“우림이랑 아림이가 이제 네 살이지 않아요?”
“맞아. 얼마나 당찬지 내가 당해 낼 수가 없다.”
“대단하네요.”
“그런 것보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관심 가져 주고 하는 게 좋은가 보더라고. 그래서 한동안은 계속 찍을 생각이야.”
그러니 집에 오라며 진혁이 한 번 더 권유했지만, 태주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찍는 영화 스케줄이 빡빡한 편은 아니지만, 태산이 데뷔도 챙기고 현실 방문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은 도도를 돌보려면, 다른 스케줄은 줄이는 게 나았다.
“아가. 몇 살이야?”
“도도는 세 살이야.”
“그래, 도도야. 누나들이랑 놀고 싶지 않아?”
“누나?”
“응. 우림이, 아림이라고 쌍둥이거든. 누나들하고 놀래?”
공략 대상을 자신에게서 아이로 바꾼 진혁을 향해 태주가 흉흉한 눈길을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그에게는 한창 활동적인 쌍둥이를 얌전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단 몇 시간뿐인 여유라도 말이다.
“놀래!”
“하하하. 그래, 그래. 착하다. 삼촌이 맛있는 거 해 줄게. 꼭 놀러 와.”
“응!”
태주의 영화 휴차일에 새로운 스케줄이 생겼다.
*
“산아. 너무 높게 뛰지 말고 가볍게 뛰어, 가볍게.”
“네.”
데뷔곡과 후속곡이 정해진 뒤로 태산이와 데뷔 조는 매일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던 레슨도 정말 필요한 것 한두 가지로 줄이고 데뷔곡과 후속곡의 안무 연습과 노래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따 상담 있는 거 알지? 씻고 가야 하니까. 딱 한 번만 더 하고 쉬자.”
“네.”
“산이는 아까 말 한대로 가볍게 뛰고. 우진이랑 영호는 박자 잘 맞추고, 스텝 주의하고. 따, 따, 따, 따, 따, 따. 봤지? 고개랑 손이랑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거야.”
“네.”
레슨을 줄이고 연습을 늘린 일 외에도 데뷔 조는 할 일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일로는 데뷔 싱글과 후속 곡 공개되고 두 달 뒤에 발표할 EP 앨범 준비가 있었고, 그 외에는 이미지 메이킹을 맡은 클리닉 원장님과의 상담이나 활동 의상 피팅 등이 있었다.
“오늘은 무슨 상담이에요?”
“클리닉이요. 대화랑 산이는 아직 미성년이라서 주로 PT 관련 상담을 받아요. 둘은 아직 성장이 끝난 게 아니라서요. 다른 애들은 거기에서 식단 관리나 피부 관리법 같은 걸 상담하고요. 오늘은 아마 저도 PT 상담을 받을 것 같아요.”
데뷔 조 멤버의 안무 연습이 끝난 뒤였다. 안무 연습실 안에 설치한 카메라를 회수하러 들어온 촬영 팀과 짧은 인터뷰가 있었다. 오늘의 인터뷰 대상은 동생들 먼저 씻게 들여보내고 연습실을 정리하던 노아였다.
“이 영상은 언제 공개해요?”
“저희도 정확히는 몰라요. 저희는 촬영만 하니까요. 그래도 대충 예상하자면, 1집 앨범 활동 끝나고 2집 준비하는 사이 조금씩 공개하지 않을까 해요.”
“아아!”
이제 겨우 데뷔곡 녹음만 마친 상태였다. 뮤직비디오 촬영은커녕 앨범 재킷 촬영도 아직이었다. 아니, 데뷔곡에 어울리는 의상이 이제야 하나씩 완성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영상을 쉬지 않고 촬영하길래 데뷔 전에 공개할 생각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었다. 혹시 모를 휴식기를 위해서 미리미리 준비하는 영상으로, 데뷔 후에 천천히 공개할 영상이었다.
“영호랑 현민이는?”
“단백질 드링크요.”
“매니저 형한테 또 잡혔어?”
“네. 그 형들은 그거 진짜 싫어하나 봐요. 난 먹을 만하던데.”
“곧 내려오겠네. 잠깐 기다리자.”
아이돌의 활동은 사실 1년 내내라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앨범 활동이 끝나면 바로 다음 앨범의 녹음과 안무 연습이 이어진다. 그렇게 앨범을 준비하는 도중에 예능이나 화보, 스포츠 행사 같은 곳에 얼굴을 비치면서 인지도를 끌어올린다.
그렇게 쉴 새 없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비활동기에 몸을 최대한 만들어 두어야 했다. 활동을 시작하면 많은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체력을 유지할 정도의 음식만 먹을 수 있었다. 잘 시간도 부족하고, 몇 시간씩 차로 이동해야 했다. 활동 전에 미리미리 운동하면서 체력을 키워 둬야 버틸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데뷔 조 멤버들이 1층 로비에서 매니저에게 붙잡혀 단백질 드링크를 마시고 있을 영호와 현민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선배 그룹 에스텔라의 리더가 주차장과 이어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한창 바쁘겠다. 오늘은 어디 가니?”
“클리닉에 상담받으러 가요.”
“…그래. 잘 다녀와.”
“네.”
연습생 기간이 긴 노아는 에스텔라 멤버들하고 안면이 있었다. 노아가 작곡한 노래 중 한 곡이 그녀들의 앨범에 실리기도 해서 사실 안면이 있다는 말보다 더 친숙한 사이였지만, 같은 회사 선배 그룹이라도 필요 이상으로 친하게 굴지 말라고 여러 번 주의를 들어서 조심하고 있었다.
“크아앙!”
“아하하. 그게 뭐야. 하나도 안 무섭잖아.”
“진짜 안 무서워?”
“어. 너 그러다 현민이 형한테 마법 뺏기겠다.”
“안 되는데. 재민 형 진짜 안 무서워? 나 호랑인데.”
노아는 동생들이 마법 세계관에서 맡은 역할로 떠드는 걸 흘려들으며 짧게 인사만 나누고 사라진 에스텔라의 리더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힘없이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는 아마 이대로 매니지먼트 팀장님을 찾아갈 것이다. 다음 앨범 제작이나 활동은 언제 할 수 있는지 묻기 위해서.
‘실패할 생각은 없지만, 만약 실패하더라도 저러지 말자. 매일 저렇게 축 처진 채로 다니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사라질 거 같아.’
회사에선 에스텔라의 정규 2집에 정말 많은 힘을 쏟았었다. 데뷔 앨범도 신경을 많이 썼었지만, 당시에는 대진표가 너무 좋지 않았었다. 데뷔 이후 활동 2주 차부터 순차적으로 대형 걸 그룹들이 모두 컴백해서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일도 쉽지 않았었다.
‘음방도 1분이나 줄어 버렸지.’
대형 걸 그룹의 컴백 스테이지를 위해서 어렵게 잡은 음방 무대 시간도 3분에서 2분으로 줄어드는 수모도 겪었었다.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분량을 모두 뺏기고 겨우겨우 화면에 얼굴만 비치는 정도였다.
다행히 회사에서도 1집의 실패를 그녀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었다.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고.
덕분에 2집에서는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투자했었다. 모든 인맥을 동원해 A급 작곡가의 곡을 받아 오고, 안무가도 대형 기획사와 계약해서 활동하던 사람으로 구하고. 그렇게 했는데도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었다.
“어흥!”
“우왁! 깜짝이야!”
“놀랐지? 내가 산이보다 호랑이 소리 더 잘 내지 않냐?”
“아니야. 내가 더 잘해.”
“산아, 형이랑 역할 바꿀까?”
언제 내려왔는지, 현민이 태산이가 맡은 변신 마법의 호랑이 소리를 내면서 놀리고 있었다. 그런 현민에게 싫다고 소리치며 엉겨 붙어서 장난치는 태산이를 본 뒤 노아는 우리 팀은 절대로 분위기가 축 처지진 않겠구나 생각했다.
언제 어디서든 힘이 넘치는 태산이와 만만치 않은 대화 그리고 은근히 두 사람과 죽이 잘 맞는 재민과 우진까지 있어서 데뷔 조는 항상 시끌시끌했다. 나아가 아이들은 매니저 형이 양 떼를 몰 듯이 몰아서 엘리베이터에 태워야 할 정도로 힘이 넘치고 텐션이 높았다.
“호랑이 소리는 녹음한 거 쓸걸. 너희가 직접 소리 낼 일은 없을 텐데….”
“진짜? 나 연습 많이 했는데.”
“나도. 내가 호랑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몇 편을 봤게.”
“산이 너는 뭐하러 그걸 연습해. 그리고 현민이 너는 다큐멘터리 보는 게 취미잖아. 어디서 생색을.”
노아는 쓸데없는 곳에 힘을 쏟은 두 사람을 한심하다는 감정을 듬뿍 담아서 쳐다봤다. 그러나 속으로는 두 사람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견 장난스러울지 몰라도 두 사람이 작은 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세심하게 데뷔 준비 중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물론 나머지 멤버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모두 노래나 안무 연습 외에도 비주얼 디렉터가 권하는 콘셉트를 소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지금 만나러 가는 클리닉의 원장님이 짜준 식단이나 PT 프로그램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우리 애들 같은 좋은 애들이랑 데뷔하면서 실패를 걱정하다니. 멍청한 짓이야.’
흐뭇한 얼굴로 매니저 형을 도와서 아이들을 몰던 노아는 속으로 약한 생각을 했던 걸 반성했다.
우리 집 아이 05
태주는 촬영 중간 시간을 내서 촬영장 인근을 도도와 산책하고 있었다. 작은 양동이를 들고 도도가 주워 오는 낙엽을 담고 있었다. 진혁의 쌍둥이 딸에게 줄 카드를 만드는 데 쓸 낙엽을 모으는 중이었는데, 아직 단풍이 많이 지는 계절이 아니라서 그런지 별로 수확이 좋지 않았다.
“태주. 이거.”
“예쁘다. 여기에 담아.”
“응. 몇 개야?”
“하나, 둘, 셋…. 여섯 개네. 네 개만 더 찾을까?”
“응.”
아직 늦여름의 더위가 남은 시기였지만, 숲속 산책길이라 그런지 바람이 찼다. 태주는 양동이에 매달려 안을 구경하는 도도의 모자 끈을 턱밑으로 모아 리본으로 묶어 주었다.
“손잡을까?”
“응.”
작은 손이 시릴까 싶어서 도도의 손을 잡았던 태주는 따끈따끈한 체온에 헛웃음을 삼켰다. 인간 아이 모습으로 바뀌었어도 원체 몸에 열이 많아서 추위를 타는 법이 없는 아이인데, 매번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보온에 신경을 썼다.
“도도 안 추워?”
“안 추워. 재밌어.”
“그래. 그럼 조금 더 걸을까?”
“응.”
도도는 드래곤일 때는 다리가 짧고 몸에 비례해 상대적으로 머리가 커서 잘 뛰지 못했었다. 날아다니거나 알일 때부터 타고 다니던 마법 카펫을 즐겨 탔었는데, 인간 아이로 변한 뒤엔 아주 활동적이 되었다.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진 않았지만, 쪼르르 쪼르르 작은 몸으로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태주 오늘 만두 먹어?”
“…만두 또 먹고 싶어?”
“응! 맛있어.”
“그래. 만두 먹자.”
벌써 며칠째 저녁으로 만두를 먹는 것인지. 태주는 슬슬 물리는 감이 있었지만, 순순히 만두를 먹자고 대답했다.
처음 도도가 제 얼굴만 한 왕만두를 호호 불면서 먹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왕만두를 많이 먹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로 돼지고기 육즙이 가득한 왕만두로 일주일째 저녁 식사를 대신 할 줄은 예상 못 했다.
‘태산이도 그렇더니, 도도도 취향이 참 확고하네.’
치킨과 고기 왕만두. 소나무 같은 취향의 두 아이 덕에 꼬박꼬박 단백질을 섭취하는 태주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도도 위장한 모습은 뭐지?’
예전에 상상했던 대로 이구아나나 앵무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궁금증을 풀자고 모험을 할 마음은 없었다. 특히 요새처럼 지방 촬영이 많아서 모터홈에서 묵기도 하는 때에는 말이다.
“이렇게 낙엽을 종이 위에 놓고 그 위를 롤러로 칠하는 거야.”
“이렇게?”
“옳지. 잘하네. 다 칠하고 나서 이렇게 낙엽을 떼면, 종이에 낙엽 모양이 생겼지?”
“와아! 또! 또 할래.”
왕만두 저녁을 먹은 뒤 시작한 카드 만들기의 결과물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울긋불긋 아이 손도장이 몇 개 찍히긴 했지만, 빠진 곳 없이 꼼꼼하게 칠해졌다. 태주는 메시지를 적기 위해 비워 두었던 카드의 가운데에 초대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적었다.
“도도야. 여기에 이름 적어 볼래?”
“도도 이름?”
“응, 도도 이름. 이거 쥐고 있어.”
“응.”
굵은 크레용을 쥔 아이 손을 태주의 손이 감쌌다. 그는 손가락 몇 개로 모두 감싸지는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도도’라고 적었다.
“됐다.”
“히히히. 태주 이게 도도 이름이야?”
“응. 마음에 들어?”
“응!”
카드도 만들었고, 방문 선물은 서울로 돌아간 뒤 캔디 샵이나 완구 백화점에 들러서 쌍둥이의 취향에 맞는 거로 고르면 될 것 같았다. 덤으로 도도 취향의 장난감도 고르고.
*
“어서 와, 태주야. 도도도 어서 와.”
“안녕하세요.”
“이거! 이거 선물!”
“선물 사 왔어? 그냥 오라니까.”
진혁은 태주 옆에 작은 쇼핑 백을 들고 서 있는 도도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내 기다리던 반가운 손님이 드디어 도착했다. 아침부터 지나치게 활기찬 쌍둥이들과 씨름을 이어 갔던 그는 구세주의 등장이 무척 반가웠다.
“누나 준다고 우리 도도가 들고 왔어요.”
“이야! 도도 대단하네.”
“아빠! 아빠 누구야?”
“누구야?”
진혁의 몸 뒤에는 똑같은 동물 그림이 그려진 실내복을 입은 쌍둥이가 있었다. 두 사람은 앞을 가린 제 아빠의 다리를 피해 앞으로 나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맨발로 현관을 밟지 못하게 진혁이 온몸으로 막고 있어서였다.
“태주 삼촌이잖아. 너희가 좋아하는 잘생긴 삼촌.”
“태주 삼촌?”
“삼촌!”
“하하하. 안녕, 얘들아.”
“쌍둥이. 동생한테도 인사해야지.”
동생? 동생이 놀러 왔다는 소리에 쌍둥이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이 커졌다. 왕자님처럼 잘생긴 삼촌이 왔다는 소식보다 동생이 왔다는 소식이 더 반가운 모양이었다.
“우리 동생이야?”
“아빠 우리 동생 생겼어?”
“아니. 삼촌 아들.”
“왜? 우리 동생 갖고 싶은데.”
“맞아. 우리 동생 갖고 싶어.”
진혁은 소란스럽게 떠들며 입구를 막고 있는 쌍둥이를 돌려세웠다. 쌍둥이의 소란에 기껏 초대한 손님이 아직 현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휴일을 기꺼이 내준 태주와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니, 미안할 예정이었다. 이런 소란은 겨우 시작에 불과해서였다.
“동생이다! 이름이 뭐야? 나는 우림이야. 진우림.”
“나는 아람이.”
“나는 도도야.”
카메라 밖에서 태주 아들의 등장에 잠시 소요가 있었지만, 물러나 있던 견우가 나서서 무어라 짧게 얘기하자 금세 조용해졌다. 태주는 그런 견우에게 슬며시 미소 지어 준 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 들었다.
“이건 우림이, 아림이 선물.”
“우아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빠!”
“알았어. 아빠가 열어 줄게.”
커다란 상자 두 개를 각자 하나씩 받은 쌍둥이가 제 아빠를 찾았다.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싸진 선물 상자는 아이들이 뜯기에는 만만치 않은 물건이었다.
“주방 놀이 세트네.”
“네. 이건 싱크대, 이건 주방 도구에요. 도도가 골랐어요. 요새 주방에 관심이 많거든요.”
“아빠, 빨리.”
“기다려 봐. 이거 조립해야 하는 건데?”
“제가 할게요.”
오븐에 가스레인지, 싱크대까지 있는 주방 놀이 세트는 사이즈가 꽤 컸다. 원목 장난감이라 경첩도 달고 나사도 조이고 해야 하는 물건이라 태주가 나섰지만, 진혁의 만류에 다시 앉아야 했다. 그를 말린 진혁은 희희낙락해서 어딘가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삼촌, 삼촌. 케이크 열어 주세요.”
“우림이 점심 먹었어?”
“아니.”
“그럼 케이크는 점심 먹고 먹자.”
“지금 먹고 싶은데.”
진혁이 사라지기 무섭게 꼬마 아가씨들이 그가 선물로 가져온 케이크를 들고 왔다. 태주는 그런 아이들의 입에 비타민 젤리 하나씩을 넣어 주며 달랬다. 그도 아이를 키운 지 이미 십 년이 넘는 베테랑이었다. 밥을 먹이기 전에 달콤한 간식을 먹게 둘 생각은 없었다.
“도도랑 같이 만든 감사 카드 볼 사람?”
“나!”
“나, 나.”
지난밤 낙엽을 이용해서 만든 카드를 꺼내 아이들과 보고 있을 때였다. 어딘가로 사라졌던 진혁이 공구 가방을 들고 돌아왔다.
“쌍둥이, 너희 또 뭐 먹어?”
“이거예요. 무가당 비타민 젤리.”
“아아. 이따 밥 먹어야 하니까, 더 주진 마.”
“네. 그런데 무슨 공구가 그렇게 많아요?”
“흐흐흐.”
진혁은 홈쇼핑으로 드릴과 공구 세트, 전기톱 세트를 샀지만, 전혀 쓸 곳이 없었다. 원래는 반려동물의 집을 직접 만들어 줄 생각으로 산 것이었는데, 쌍둥이가 생긴 뒤로 시간이 나지 않아서, 기성품을 사서 쓰는 중이었다.
“보석이는요?”
“우리 마님이 데려갔지. 쌍둥이에 보석이까지 혼자 못 봐.”
아이들 셋이 장난감 상자 앞에 모여서 가지고 놀 걸 고르는 걸 확인한 태주는 전동 드릴로 드르륵 나사를 조이는 진혁의 옆에서 나무를 잡아 주었다. 그러는 한편 보이지 않는 진혁이 입양한 강아지를 찾았지만, 형수가 데리고 갔다는 말만 들었다.
“도도야, 이거 예쁘지? 이거 입어.”
“응. 알았어.”
오늘도 양 갈래로 머리를 묶고 와서일까, 쌍둥이는 도도에게 자기들이 아끼는 레이스가 겹겹이 겹쳐진 공주님 스커트를 입혔다. 두 아이도 왕관과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소꿉놀이라도 할 생각인지 앞에 티 세트와 장난감 케이크 등을 잔뜩 늘어놓은 채였다.
“형님, 오늘 뭐 해요?”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아뇨. 그냥 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사실 진혁은 태주와 아이가 오면 같이 점심을 먹은 뒤, 쌍둥이가 가고 싶어 했던 아쿠아리움에 같이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태주의 얼굴을 본 뒤에 그 계획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도저히 태주의 얼굴을 드러낸 상태로 같이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예능 촬영을 오래 한 터라 쌍둥이한테 몰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운 상태였는데, 한창 화제가 되는 중인 태주와 그 입양아를 데리고 공개적인 곳을 가는 건 무리였다. 그냥 편하게 몇 시간 아이들을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근데 도도는 애가 엄청 얌전하네. 우리 쌍둥이들도 오늘은 얌전하고.”
“아! 아웃도어 파라서 그래요. 산이도 그렇더니 도도도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해요.”
“그래?”
“네. 어린이 전동차 있잖아요. 그거 모는 것도 좋아하고. 그냥 이곳저곳 헤집고 다니는 것도 좋아해요.”
집 안에서 노는 것도 싫어하진 않지만, 둘 다 꿈의 정원 출신이라서 그런지 밖에서 노는 걸 더 좋아했다. 촬영이 없는 날 본가에 들르거나 촬영장 인근의 공원 같은 곳에 데려가면, 지칠 때까지 뛰어놀았다.
“그러고 보니 산이 데뷔는 언제야?”
“얼마 안 남았어요.”
“도와줄 일 있으면 얘기해.”
“네, 그럴게요.”
진혁에게 대답한 것처럼 태산이의 데뷔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쪽 회사에서 트리즈로 뮤직비디오 출연 일정을 확인하는 연락이 왔었다. 미리 출연하겠다고 얘기해 두었으니, 휴일에 맞춰서 촬영하게 될 것이다.
“시간 진짜 빠르다. 산이가 딱 저만할 때부터 봤는데, 벌써 다 커서 데뷔한다고 하고.”
“아하하. 저도 볼 때마다 놀라요.”
지금도 귀엽지만, 태산이가 도도만 할 때는 정말 품 안에서 떼어 놓기 싫을 정도로 귀여웠다. 특히 혀짧은 소리로 이름을 부르면서 안아 달라고 팔을 벌리는 모습은 심장에 해로울 정도였다. 도도를 돌보면서 제일 아쉬운 점이 태산이가 그랬던 것처럼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 점일 만큼.
-삐삐삐!
“오븐 타이머 울리네. 나 주방에 가 볼게. 애들 좀 봐줘.”
“네.”
태주는 진혁이 놓고 간 공구들을 치우는 한편 아이들을 살폈다. 소꿉놀이는 그새 끝났는지 지금은 장난감 화장대를 펼쳐 놓고 이것저것 꺼내서 바르고 있었다.
“삼촌, 이거 열어 주세요.”
“삼촌, 우림이 여기 리본 묶어 주세요.”
“삼촌….”
놀이를 시작한 뒤로 태주의 위치만 확인할 뿐 부르지 않는 도도와 다르게 쌍둥이는 수시로 그에게 무언갈 부탁했다. 장난감 화장품의 뚜껑을 열어 달라, 뛰느라 풀린 옷의 리본을 묶어 달라 등등. 어른의 도움을 받는 게 당연하고 편한 모습이었다.
쌍둥이들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그는 도도도 무언가를 부탁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다르게 도도는 혼자서 하는 게 재밌는지 거울을 보면서 장난감 빗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말면서 놀고 있었다.
‘아이고! 내 천사님 고운 머리가 다 엉켰네.’
돌아앉아 거울을 보면서 혼자 노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품에 안고 직접 머리를 빗겨 주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다. 태주는 입맛을 다실 만큼 무척 아쉬웠지만,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억지로 끼어들어서 아이의 놀이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어서였다.
‘태주 씨…. 제발 표정 관리 좀.’
그러나 그가 현재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만큼은 아니었다. 아니면 촬영진이 프로라 너무 조용해서 촬영 중이라는 걸 잊은 것인지도 몰랐다.
도도를 바라보는 태주는 산책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찌나 애절하게 바라보는지 아이들을 촬영하던 사람들이 놀라서 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뭐 하냐? 점심 먹자.”
“네.”
“꺄아아! 해적이다.”
“이히히. 삼촌, 아림이 잡혔어요.”
“떨어진다. 바둥거리지 마.”
진혁은 아련한 표정으로 제 아이를 보는 태주에게 이상하다는 시선을 한 번 던진 뒤 쌍둥이를 옆구리에 끼웠다. 워낙 극성인 아이들이라서 한 번에 제압해서 주방으로 데리고 가야 밥을 먹이기 쉬워서였다.
“태주.”
“응. 아가. 안아 줄까?”
“아니. 손.”
“…그래.”
쌍둥이들처럼 들고 가는 건 아니더라도 품에 안고 갈 생각으로 팔을 벌렸던 태주는 얌전히 도도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아빠, 우림이 고기!”
“고기!”
“잠깐 기다려. 고기 아직 뜨거워. 식혀야 해.”
점심 식사 시간도 시끌벅적했다. 쌍둥이는 스파게티를 한입 가득 물고서도 바비큐 폭립을 잘라 달라고 성화였다. 제 앞에 놓인 치즈 감자 구이를 얌전히 먹고 있는 도도와는 상당히 달랐다.
“도도, 아가. 고기도 먹어. 맛있어.”
“응.”
칼집을 잔뜩 낸 감자 사이사이 녹은 치즈도 그 위에 뿌려진 베이컨과 옥수수도 마음에 드는지, 도도는 태주가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뼈를 발라 썰어 놓은 바비큐 폭립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대답만 알았다고 할 뿐 여전히 감자 사이의 녹은 치즈만 포크로 떠먹고 있었다.
“아빠, 고기.”
“알았어. 잠깐만.”
“형님 먼저 드세요. 쌍둥이는 제가 챙길게요.”
“고마워. 그런데 너 칼질 진짜 잘한다.”
“하하하.”
나이프 사용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해나가 주로 해 주는 음식이 서양식 메뉴인 이유도 있었고, 태산이와 도도의 몫까지 대신 자르다 보니 저절로 손에 익어 버렸다.
태주는 두 아이가 먹기 편하게 폭립의 뼈를 발라내느라 한 입도 제대로 먹지 못한 진혁을 대신해서 쌍둥이를 챙겼다. 그는 제 몫의 음식을 먹으면서도 능숙하게 아이들 접시에 고기를 공급했다. 태산이와 도도, 오랫동안 둘을 돌본 경험이 돋보였다.
“태주. 도도, 고기.”
“벌써 다 먹었어?”
“응. 도도 고기 다 먹었어.”
“아이, 착하다. 잠깐만 기다려. 금방 잘라 줄게.”
“응!”
도도의 접시에 고기를 채워 주면 바로 접시 위로 콕콕콕 포크가 움직였다. 태주는 쌍둥이와 도도에게 고기를 잘라 주느라 진혁이 그랬던 것처럼 본인 몫의 음식을 먹을 새가 없었다.
‘어떡해! 정말이지, 이게 뭐라고. 너무 귀엽잖아.’
그가 쌍둥이를 챙기기 시작한 뒤로 직전까지 치즈와 베이컨을 건져 먹기 바빠서 권해도 안 먹던 고기를, 접시에 놓아 주기 무섭게 게는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 게다가 고기를 다 먹은 뒤엔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쌍둥이를 한 번씩 돌아봤다.
또다시 순식간에 비워진 접시에 잘게 자른 고기를 놓아 주며 태주는 헤벌쭉 웃었다. 그가 쌍둥이를 챙겨 주는 걸 질투해서 경쟁하듯이 고기를 해치우는 도도가 귀여워서 어쩔 수 없었다.
‘태주 씨…. 방송 전에 편집본을 꼭 확인해야겠어.’
아무래도 자신의 배우는 예능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또 잊은 듯했다. 쌍둥이에게 뺏긴 태주의 관심을 돌리느라 애쓰는 도도 때문에 기쁜 것은 알겠지만, 너무 좋아하는 티가 났다. 침묵을 지키던 촬영진이 들썩거릴 만큼 말이다.
견우는 모니터에 비치는, 좋아서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 같은 태주를 본 뒤 일정에 편집실 방문을 끼워 넣었다. 영화 개봉까지는 시간이 있긴 했지만, 냉철하고 이성적인 에이전트 역할에 맞는 이미지를 지켜 주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우리 집 아이 06
며칠간 세트를 제작하고 소품을 배치하느라 진을 뺀 스태프들은 눈만 감으면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마무리 작업을 했다. 수차례 도안과 대조도 했고 안전 확인까지 끝났으니, 이 세트에서 곧 뮤직비디오 촬영을 진행할 것이었다.
“미술 감독님!”
“하암! 왜?”
“촬영까지 시간 좀 있어요. 미술팀 잠깐 쉬게 들여보내시죠.”
“알았어. 그럼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줘.”
“그럴게요.”
뮤직비디오의 총괄 감독을 맡은 영기는 세트 제작 현장에 남은 사람 중에서 꼭 필요한 인원 몇 명만 남기고 모두 돌려보냈다. 이번 촬영은 하루 이틀로 끝날 촬영이 아니었다. 여유 있을 때 스태프들을 쉬게끔 조치해 두어야 했다.
이번 뮤직비디오 촬영 건은 친구인 영화감독과 스튜디오를 세운 뒤로 수주한 제작 의뢰 중 최고 난도로 꼽힐 만한 건수였다. 물론 그들이 받은 의뢰 중 의뢰비도 제일 많고, 제작비도 최고로 많이 쓴 작품이었다.
‘게다가 무려 그 이태주가 출연하는 뮤직비디오이니. 제대로 찍지 않으면 두고두고 욕을 먹겠지.’
최상의 피사체. 그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 널리고 널렸다. 발로 찍어도 그림이 된다는 그런 인물을 두고 허술하게 촬영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만약 이태주로 어설픈 영상을 만들어 낸다면, 그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컥! 실물이다.’
그가 단편으로 이름을 알리고 CF 감독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을 때, 이태주는 이미 해외에서 영화를 찍고 있었다. 동양인이라는 점은 이태주가 해외에서 활동하는 데 장애물이 아니었다.
물론 그가 모르는 고생도 많았겠지만, 숨 막힐 정도로 완벽한 외모와 그 이상으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연기 실력으로 첫 영화부터 대박 행진을 이어 갔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네. 분장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아! 이번 의상이 확실히 그렇죠. 이리 오세요. 분장실로 안내해 드릴게요.”
“부탁드릴게요.”
이태주는 소문보다 더 매너가 좋은 것 같았다. 그가 딴생각하느라 바로 대답하지 못했는데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게다가 분장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해서 촬영장에 무려 세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태주, 산이는?”
“이따가 올 거야. 도도가 한잠 자고 일어나서 점심 먹을 때쯤?”
“진짜?”
“응. 진짜.”
최근 태산이는 뮤직비디오 촬영과 데뷔 준비로 바빠서 새벽에 귀가하기 일쑤였다. 어제도 새벽에 들어와서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도도는 꿈의 정원에서만 태산이를 보는 거로는 성에 차지 않는 듯, 현실에서 한동안 못 만나면 매번 이렇게 태산이를 찾았다.
“이태주 씨 분장실로 가셨어요?”
“어. 들어가셨어.”
“아까 들어오실 때 봤어요? 사람이 무슨 분위기가…. 휘유! 일행 이끌고 이태주 씨가 딱 들어오는데, 괜히 길을 비켜 드려야 할 것 같고 그랬다니까요.”
“그렇더라. 괜히 월드 스타, 월드 스타 하는 게 아니더라.”
열 명 남짓한 일행의 앞에서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그에게선 긴장이라던가 어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낯선 장소를 방문해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작업하는 것은 분명 이태주에게는 아주 평범한 일상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일상인 일이 남에게도 일상인 일은 아니었다. 모델, 가수, 배우, 전문직 종사자, 인플루언서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 유명인들과 같이 작업했던 감독이었지만, 그도 이 정도로 주변을 압도하는 사람을 본 적 없었다.
이태주는 뮤직비디오 기획, 촬영이라는 영기의 반복되는 일상에 끼어든 비일상이었다.
“은지 감독한테 연락해 봐. 그쪽 촬영 어떻게 됐는지.”
“좀 전에 확인했어요. 그쪽은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에이스가 있어서 제시간에 끝내고 옮겨 올 수 있다고 하시던대요.”
“다행이네. 그럼 이따가 도시락 올 때까지 너도 좀 쉬어. 내가 여기 볼 테니까.”
“저보다는 감독님이….”
“가 봐.”
한 시간만 자고 오겠다고 휴게실로 가는 조 감독을 배웅한 뒤 영기는 세트가 보이는 자리에서 스토리보드를 확인했다.
오늘 촬영할 장면은 이세계의 빛의 왕과 어둠의 왕, 두 가지 역할을 맡은 이태주와 멤버들이 특별한 물건을 통해서 연결되는 장면들이었다. 먼저 일곱 명의 멤버가 빛의 왕과 만나 힘을 얻는 과정을 찍은 뒤, 그중의 몇이 어둠의 왕에게 비밀스럽게 회유를 당하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유치하지만, 이런 게 또 재미지. 누가 배신자가 될지 힌트를 알아내는 것도 재밌고.’
이번 작업은 세트 제작이나 후반 작업량은 만만치 않게 많았지만, 제작비도 빵빵했고 촬영 기간 역시 다른 작품보다 여유 있었다. 중소 기획사에서 데뷔하는 신인인데 노래, 안무, 의상이 4대 기획사에서 데뷔하는 신인 이상이었다.
화려한 의상과 퍼포먼스의 아이돌 무대를 좋아하는 은지 감독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현대 편을 촬영하면서 얼마나 즐거워할지 상상이 갔다.
물론 마법 세계 쪽 촬영을 맡은 그 역시도 이번 촬영은 아주 흥미로웠다. 특히 이번 촬영에서 그가 기대하는 것은 히어로 영화에 버금가는 세계관과 이능을 갖게 되는 멤버와 그걸 유치하지 않게 연출할 수 있을 정도의 예산이었다.
-파라라락!
“뛰지 마십시오. 넘어집니다.”
“괜찮아. 도도 안 넘어져.”
재밌는 작업을 기대하며 흐뭇해하던 영기의 귀에 침착하게 아이를 말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아이에게 건네는 목소리라기엔 지나치게 낮고 서늘한 목소리라 그는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직접 만든 것 같은 바람개비를 든 아이를 붙잡은 남자가 있었다. 이태주 일행에 속해 있던 차가운 인상의 선글라스를 쓴 경호원이었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와 다르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이의 점퍼를 잠가 주고 있었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니, 한 바퀴만 돌아보는 겁니다.”
“알았어.”
“제 손을 잡으십시오.”
“응!”
영기는 아이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고 스토리보드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가 방해되지는 않을 거라더니, 그 말 그대로였다. 이태주가 신뢰한다는 경호원이 딱 붙어서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그는 이태주에 관한 소문이 대부분 사실이라는 것에 안심했다.
해외 스타들이 촬영장이나 시상식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이태주도 자기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연 수입이 몇십 억은 가볍게 넘는 인기 배우가 여건이 안 돼서 아이를 맡기지 않는 게 아니었다. 한순간도 아이를 떼어 놓기 싫을 만큼 아껴서 그렇다더니, 진짜로 그런 것 같았다.
*
태산이와 멤버들은 현대에서 마법 세계와 연결되는 물품을 얻는 장면들을 꼬박 이틀에 걸쳐서 찍었다. 멤버들은 골동품 상점이나 유물 전시회 같은 곳에서 기연을 얻는 장면을 찍었는데, 그중 태산이는 골동품 상점에서 오래된 펜던트를 얻어서 호랑이로 변신할 수 있게 된다는 설정이었다.
“하아암!”
“하암!”
현대에서 물품을 얻는 장면을 모두 찍은 멤버들은 이어지는 강행군에 피로가 몰려온 듯 쉴 새 없이 하품하고 있었다.
“하품만 하지 말고 좀 자.”
“졸려. 되게 졸린데, 잠이 안 와.”
“그게 뭐야.”
“지금 태주 형님 촬영 중이시지?”
“응.”
“으허허! 내가 태주 형님 촬영을 직접 본다니. 살아 있길 잘했어.”
연습생이 되기 전부터 태주의 팬이었던 대화는 다른 멤버들과 다르게 잘 수 없었다. 강행군 촬영에 지쳤는데도, 지금 가는 스튜디오에서 태주가 촬영 중이라는 생각만 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아. 이따가 실수하면 어떡하지? 형님이 실망하시면 안 되는데.”
“괜찮아. 태주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 그래?”
“응. 넌 그냥 열심히만 하면 돼. 나머지는 태주가 이끌어 주는 대로 따라가면 돼.”
“진짜 그렇게만 하면 될까?”
걱정하는 대화에게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여 준 태산이는 다시 머리를 시트에 댔다. 경력이 긴 배우인 태주가 오늘의 촬영 파트너였다. 연기의 연 자도 모르는 상대라도 태주라면 필요한 표정과 감정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 걱정은 접어 두어도 괜찮았다.
태산이의 예상대로 스튜디오에서 단독 컷을 찍는 중인 태주는 촬영 진은 아무 문제 없이 순조롭게 촬영 중이었다.
명불허전. 멤버들 위주로 편집되는 뮤직비디오라서 출연 분량이 적은 게 아쉬울 정도로 태주를 찍는 순간은 금방금방 지나갔다. 감독이 어떻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사전에 알려준 콘셉트를 완벽 그 이상으로 소화해 내고 있어서였다.
‘오히려 이태주 분량을 더 줄여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대로라면 같이 서는 장면에서 멤버들이 죽겠어. 이태주 미모가 다 한 뮤직비디오라는 소리를 들을 순 없지.’
촬영 전 영기가 느꼈던 태주를 촬영하면서 최상의 컷을 찍어야 한다는 압박은 최대한 분량을 줄이면서 욕먹지 않는 방향으로 편집해야겠다는 다짐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묘한 문양이 금색으로 수놓아진 화려하고 치렁치렁한 의상을 걸친 태주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그런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오케이, 컷! 나머지는 점심 먹고 합시다.”
촬영 대상이 십수 년의 경력을 가지고 해외에서도 활동하는 배우라서 촬영이 금방금방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었지만, 그보다도 더 빠르게 좋은 장면들이 쌓여 버렸다. 감독 영기는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단독 컷 촬영을 마무리했다. 남은 것은 멤버들과 같이 찍어야 하는 장면들이었다.
“아가, 도도야.”
“태주!”
단독 컷 촬영이 끝나자마자 태주는 세트를 벗어나며 도도를 찾았다. 넓은 스튜디오 뒤편 미나와 스타일리스트 팀이 자리 잡은 옆에 오래전 태산이를 촬영장에 데리고 다닐 때와 비슷하게 아이가 쉴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푹신푹신한 카펫을 깔고 그 위에 아이가 낮잠을 잘 수 있는 작은 텐트와 테이블을 설치한 곳에 그런 그를 반기는 아이가 있었다.
“이제 다 했어?”
“아직. 점심 먹고 또 해야 해.”
“점심? 그럼 산이 와?”
“응. 곧 올 거야.”
다른 장소에서 하는 촬영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지만, 진행이 늦어졌더라도 촬영을 중간에 멈추고 그가 있는 세트로 와야 했다.
영화 촬영 중인 그의 휴차일에 맞춘 일정이었다. 그가 아무리 태산이를 아끼고 도와줄 의사가 있더라도 그의 본업인 영화 촬영에 지장을 주면서까지 뮤직비디오를 찍고 있을 수는 없었다.
-드르르륵!
“점심 드시고 하세요.”
“감독님! 블랙 스쿼드 멤버 분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태주가 도도에게 한 말대로였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도시락 상자를 실은 스태프들이 카트를 밀면서 스튜디오로 들어올 때 그 뒤로 화려한 메이크업과 헤어를 한 상태의 태산이와 멤버들이 스튜디오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큰 소리로 인사하면서 들어오는 멤버들 사이에서 태산이를 발견한 도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폴짝폴짝 뛰었다. 태산이에게 제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행동이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미 태주가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도도 찾았다!”
“와아!”
태산이는 멤버를 이끌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시키는 매니저에게서 떨어져, 폴짝거리는 도도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 도도가 그렇게 뛰지 않아도 태산이는 언제 어디서든 태주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감각이 예리한 탓도 있었지만,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화려하게 꾸민 태주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할 방법이 없었다.
“던진다!”
“꺄아하하!”
“위험해, 얘들아.”
“또, 또 해 줘! 재밌어!”
태산이는 태주 근처에 오자마자 도도를 들어 공중으로 힘껏 던졌다 받았다. 둘의 과격한 놀이에 태주가 곁에서 말렸지만, 좋아하는 태산이를 만나 재밌는 놀이를 하는 도도의 흥분은 최고치였다. 태주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태산이와 도도가 던졌다 받았다 하는 위험한 놀이를 즐기고 진정된 뒤에야 태주는 오전 내내 기다렸던 그의 호랑이를 품에 안아 볼 수 있었다.
“나 왔어, 태주.”
“산아.”
태주는 평소 보던 모습과 다르게 화려한 의상과 메이크업을 한 태산이의 낯선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언제까지나 아이일 줄 알았던, 매일 품에 안고 다니던 그의 아이가 자라서 누구보다 멋진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촬영 잘했어?”
“응, 잘했어. 감독님이 칭찬 많이 했어.”
“그랬어?”
“응.”
“우리 산이 대단하네. 뮤직비디오 나오면 형이 제일 먼저 봐야겠다.”
아무리 화려하게 꾸미고 낯선 느낌을 주는 태산이었지만, 그런 태산이를 호들갑을 떨면서 칭찬하는 태주는 예전과 변한 게 없었다. 그의 눈엔 여전히 작고 사랑스러운 호랑이로 보여서였다.
점심 먹을 준비를 끝내고 그를 찾으러 나왔던 미나는 태주의 여전한 팔불출 행태에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자. 의상 벗고 밥 먹어야지.”
“네. 산아, 넌 어떻게 할래? 멤버들이랑 같이 먹을래?”
“잠깐만. 노아 형!”
태주를 잠시 기다리게 한 태산이는 리더인 노아를 부른 뒤, 태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를 향해 씨익 웃어 준 태산이는 도도를 품에서 내려 주고 태주의 곁에 붙어 섰다.
좋아하는 가족이랑 같이 밥을 먹을 생각에 신난 태산이가 일행의 등을 떠밀면서 분장실로 들어간 뒤였다. 스튜디오 곳곳에서 도시락 내용물을 본 사람들이 감탄을 터뜨렸다.
“우와! 이게 다 뭐야?”
“조감독아. 이 도시락 어디서 주문했어?”
“블랙 스쿼드 쪽에서 준비해 줬어요. 저희는 연락받고 옮기기만 해서 몰라요.”
“그거 블랙 스쿼드 멤버 산이 작은 형이 준비해 준 거예요. 작은 형이 푸드 코디네이터인가 그렇대요. 운영하는 미튜브 채널도 유명하다고 하더라고요.”
“헐! 진짜예요, 감독님? 그 집안은 뭐가 다른가? 어떻게 그렇게 한가락 하는 사람만 모여있대요?”
감독에게서 도시락의 출처에 관해 들은 스태프들은 너도나도 그런 것 같다며 동의했다. 태주부터 심상치 않더니, 다른 형제들도 모두 만만치 않았다. 연습생이 되고 몇 달 되지도 않아 데뷔를 앞둔 태산이도 그렇더니, 다른 동생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는 중이었다.
“먹기 아까울 정도네.”
“진짜 오랜만에 이렇게 고급스러운 도시락 먹어 봐요.”
“그러게요. 도시락 종류도 취향에 맞춰서 여러 가지로 준비해 주고. 신경 많이 쓴 게 보이네요.”
“재료도 좋은 거 썼나 봐요. 하나같이 신선해요.”
오늘 촬영장에서 나눠 준 도시락은 태산이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응원하기 위해 태우와 연우가 준비한 것이었다. 들러서 인사라도 할 법했지만, 두 사람은 혹시 촬영에 방해될까 봐 도시락만 전달하고 돌아가 버렸다.
어린아이 시절부터 십수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성장을 지켜봐 온 두 사람에게도 태산이는 소중했다. 태산이를 자식처럼 여기는 태주만큼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도 아이를 응원하고 아끼는 마음은 같았다.
우리 집 아이 07
보기 좋게 담긴 것 이상으로 맛도 좋은 도시락으로 스태프들이 배를 채우기 시작했을 때 태산이와 태주는 더럽히면 곤란한 의상을 벗어 두고 겨우 도시락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건 도도, 이건 산이.”
“산이 것도 챙겨 왔어요?”
“당연하지. 네가 여기 있는데, 산이가 다른 데 가서 먹을 리 없잖아.”
“맞아요.”
태주의 도시락이 다른 사람들 것과 똑같은 것과 다르게 도도와 태산이의 도시락은 다른 도시락과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도도의 것은 아기자기한 동물이 프린팅된 귀여운 도시락 용기였고, 태산이의 것은 밥 없이 고기만 가득했다. 그러나 제일 큰 차이점은 두 도시락 위에 카드가 붙어 있는 점이었다.
“태주 이거 읽어 줘.”
“어디 보자. 도도에게….”
카드에는 도시락에 맛있는 음식 많이 담았으니 잘 먹고, 나중에 집으로 놀러 오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태산이가 자랑하면서 보여 준 카드에는 태산이에 대한 믿음과 응원의 글이 적혀 있었다.
“우와! 사자다.”
“어머! 동물 캐릭터 도시락이네. 너무 귀엽다.”
“도도 거야.”
“호호호! 안 뺏어 먹을게. 이모도 이모 거 있어.”
강아지 모양으로 칼집을 낸 비엔나소시지, 사자 얼굴이 그려진 유부초밥, 김으로 줄무늬를 만든 얼룩말 치즈스틱, 병아리와 판다 모양 메추리알 등. 아이의 취향을 저격하는 도시락을 받은 도도는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좋아하는 고기가 가득한 도시락을 먹는 태산이 역시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산아. 그게 이번 의상이야?”
“응.”
“세상에…. 옆구리가 다 보이잖아!”
“위에 재킷 입는데?”
“그래도 춤추다 보면 다 보일 텐데, 이너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괜찮아.”
밥을 먹는 내내 옆구리가 깊게 파진 민소매 셔츠를 입은 태산이의 의상에 신경이 쓰였던 태주가 걱정을 늘어놓았다. 괜한 잔소리로 들릴까 봐 참으려고 했지만, 큰 동작을 하다 보면 옷 사이로 맨살이 다 보일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태주는 괜찮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는 태산이의 태도에 자신의 말에 힘을 실어 줄 동지를 찾아 분장실을 둘러봤다. 그러나 분장실 안에는 그의 편이 없었다.
“얘,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네?”
“너 블러드 워 찍을 때 생각 안 나?”
“크흠!”
“다른 것들은 어떻고? 네 화보 하나만 봐도 그런 소리는 못 하겠다.”
는 그가 뱀파이어 왕으로 나온 할리우드에서 찍은 액션 영화였다. 그 영화에서 태주는 의상을 잠그지 않고 걸치고만 있었다. 조각상 같은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며 퇴폐미와 섹시미를 뽐냈었다. 속편까지만 그가 나온다는 소리에 팬들의 항의가 빗발쳤을 정도였다.
“너도 나이를 먹긴 먹는구나.”
“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이 든 티가 난다. 아니, 보호자 티가 난다고 해야 하나?”
“그렇지만 의상이 너무….”
“정말이지. 저쪽에 걸린 네 의상이나 보고 얘기하지?”
어둠의 왕 역할은 태주의 예전 영화 의 캐릭터를 차용한 느낌이었다. 이너는 검은색 시스루 셔츠였고, 겉에 입는 가운은 잠글 수 있는 끈이 없는 스타일이었다. 대미는 셔츠 위에 착용하는 가죽 하네스 벨트였다.
대놓고 시선을 강탈하는 의상을 입는 태주가 옆구리가 조금 보인다고 누구를 걱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쪽 스타일리스트가 태산이 몸이 좋아서 일부러 노출시킬 생각으로 고른 의상 같은데 뭐라 하면 안 되지.”
“뭐라 할 생각 없었어요.”
“없기는. 너 이따 촬영장 가서 분위기 딱 잡고 노려보려고 그랬지?”
“노려보다뇨. 그냥 좀 잘하자고 쳐다보는 거죠.”
“쯧쯧! 안 볼 생각은 없나 보네.”
미나는 여전한 태주의 팔불출 같은 모습에 혀를 찼다. 이제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자중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의 팔불출 증상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오히려 아이가 생긴 뒤로 그 증세가 더 심해졌다. 얼마나 태산이와 도도를 아끼는지, 고슴도치도 태주 앞에선 명함을 내밀지 못할 것 같았다.
“우리 도도 다 먹었어?”
“응. 다 먹었어.”
“아이, 착하다. 이제 물 마시자.”
“주스 먹을래.”
“도도, 아가야. 지금은 물 마시고, 주스는 이따 후식 먹고 마시자. 응?”
도시락을 다 먹고 주스를 마시겠다는 아이를 달래서 물을 마시게 하는 걸 보면, 똑 부러지는 보호자 같다가도 금세 눈매가 풀어져서 아이를 보고 헤실거리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하여간 저 팔불출. 예전엔 그래도 때와 장소를 가리더니, 이젠 그런 것도 없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뒤에도 저런 변함없는 모습 덕에 편하게 같이 일하는 게 가능한 것이었지만, 가끔은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이어진 촬영에서 태주는 오전과 마찬가지로 베테랑 연기자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초보자인 블랙 스쿼드 멤버들을 이끌어 가면서 촬영을 이끌었다.
“대화,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반가워. 태산이 내려올 때 한 번쯤 내려오겠거니 했는데, 안 오더라.”
“죄, 죄송해요.”
“죄송하긴. 형이 대화를 그만큼 보고 싶었다는 얘기야.”
이번 태주의 촬영 상대는 대화였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태주는 마법진 그래픽이 들어갈 공간만큼 떨어진 장소에서 대화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번에 대화가 표현해야 하는 감정은 이세계의 존재를 만났다는 감격과 짙은 호기심이었다.
대화가 맡은 파트의 가사는 마법 같은 만남에 놀라고 네가 나의 반쪽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내용이었다. 가사 내용과 연관성은 적은 뮤직비디오 영상이긴 했지만, 태주는 대화로부터 비슷한 감정을 끌어내려 했다. 그의 팬이라서 그런지, 짧은 대화로 감격은 쉽게 끌어낼 수 있었다.
“지, 진짜 놀러 가도 돼요?”
“물론이지. 자, 대화야. 손 이렇게 내밀어 봐.”
“손이요?”
“응. 이렇게.”
“네.”
태주와 대화가 마주 서서 짧은 대화를 하는 장면도 맞닿을 것처럼 손을 뻗고 있는 지금도 모두 촬영 중이었다. 대화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지만, 직전에 카메라에 붉은 램프가 켜졌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아직 어색하고 연기에 자신 없다는 얘기를 들은 태주는 그것을 알려 주지 않았다.
‘괜찮게 나왔겠지?’
뮤직비디오 촬영은 영화나 드라마와 다르게 한 컷 한 컷이 무척 짧았다. 대사도 없었고, 연기 역시 다른 것보다 표현을 과장되게 했다. 그러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대화의 얼굴도 놀러 오라는 말에 기뻐하는 얼굴도 모두 괜찮게 나왔을 것이다.
이후의 촬영 역시 꽤 편하게 진행되었다. 중간에 대화가 카메라가 켜진 걸 알아차리고 잠깐 놀라긴 했지만, 촬영에 지장을 주진 않았다.
어차피 뮤직비디오에서 그와 멤버들이 만나는 장면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지금 촬영 중인 알현실 장면도 그보다는 멤버들이 춤추는 장면이 더 많이 쓰일 것이다.
“그렇게 좋니?”
“좋아요.”
“하긴. 아이가 똑똑하고 의젓하더라.”
“그렇죠?”
“그래.”
대화와 같이하는 촬영이 끝난 뒤, 태주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의 개인 스태프들이 기다리는 장소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메이크업을 수정받는 한편 낮잠에 빠진 아이를 돌봤다.
어른의 상체가 겨우 들어갈 만큼 작은 텐트 안으로 손을 뻗은 태주는 작은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넘겨 주고, 허리까지 내려간 담요를 가슴까지 잘 덮어 주었다. 그렇게 태주는 잠깐 주어진 정비 시간을 아이를 돌보는 데 썼다.
“기다리기 지루하고 불편할 텐데도, 떼도 안 쓰고 얼마나 기특해요.”
“그렇긴 하더라. 어린애가 심심할 텐데, 짜증도 안 부리고 얌전하긴 해.”
“그렇다니까요. 정말이지, 어느 집 아이가 이렇게 착한지. 천사가 따로 없다니까요.”
“그래, 그래. 도도는 천사야. 알겠으니까, 적당히 하고 촬영하자.”
“아하하. 네.”
사실 도도는 짜증을 부릴 새가 없었다. 촬영이 빨리빨리 끝나서 태주가 금방금방 곁으로 돌아와서도 그랬지만, 그것보다 화려한 옷에 멋진 왕관을 쓰고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는 태주가 신기해서 그걸 구경하느라 바빴다.
뮤직비디오 캐릭터에 맞게 글리터와 스톤으로 치장한 태주는 도도의 눈에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처럼 보였다. 그런 새롭고 신비한 모습을 태주가 사 준 어린이용 카메라에 담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다.
-컷!
“크흠! 이 배우님. 지금은 그렇게 흐뭇해하는 장면이 아니고….”
“아! 죄송합니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그렇게 사과하실 필요까지는….”
오전부터 이어진 촬영에서 한 번도 NG를 낸 적 없는 태주였는데, 태산이와 촬영을 시작하자마자 NG를 냈다.
영기는 콘티와 다른 장면에 컷은 외쳤지만, 태주에게 어떻게 해 달라는 요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태주가 재빠르게 그와 스태프에게 사과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태주의 관심이 단 한 톨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아서였다.
“죄송해요. 우리 산이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순간 촬영 중인 걸 잊었어요.”
“…그렇습니까?”
“태주, 나 잘했어?”
“너무 잘했어, 산아. 너무 잘해서 형이 깜짝 놀랐지 뭐야.”
“카하하.”
앞머리를 반만 내린 모습이 새롭다. 귀여운 것도 좋은데, 눈가에 아이라인을 그려서 강하게 보이는 것도 좋다. 위에서 보다가 고개를 드는 게 너무 멋있어서 순간 얼굴만 보고 있었다, 등등.
낯 뜨거워질 만큼 칭찬을 늘어놓은 태주로 인해 촬영이 늦어졌지만, 영기는 그 모습을 그냥 지켜봤다. 그는 내심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직전까지 고독한 얼굴로 알현실의 왕좌에 앉아 있던 사람과 눈앞의 팔불출이 동일인이 맞는가 의심스러워서였다.
“태주야, 그만 들어가자. 의상 갈아입어야지.”
“잠시만요. 조금만 더 보고 가요.”
이상한 부분에서 흥분한 누구 때문에 잠깐 늦춰졌지만, 나머지 촬영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NG가 나는 일도 없었고, 세트 안의 두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필요도 없었다. 눈빛만 보고도 손발이 척척 맞는 사람들이라, 그냥 찍기만 해도 될 정도였다.
미나의 재촉대로 다음 신을 위해 메이크업과 의상을 바꿔야 하는 태주였지만, 그는 스튜디오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세트 안에서 멤버들과 춤을 추는 태산이가 너무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서 눈을 뗄 수 없어서였다.
이번은 태주의 콩깍지도 팔불출도 아니었다. 쉴 새 없이 바뀌는 대형 가운데에서도 유려하게 춤을 추는 태산이가 사람의 시선을 뺏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멋있는 것이었다.
*
민수는 오랜만에 만나는 여동생이 자신과 얼굴을 마주하긴커녕 스마트폰 화면만 뚫어질 듯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용돈은 부족하지 않은지, 취업 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게 많은데도 잔소리로 들릴까 참고 있었는데, 여동생은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게 계속 딴짓만 하고 있었다.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웠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이었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워낙 몸이 약해 따끔하게 야단 한 번 치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큰 병을 앓은 뒤로 보통 사람보다 면역력이 약해져 지금까지도 잔병치레를 많이 하는 동생이었다. 스트레스라도 받아 건강을 해칠까, 가족들은 여전히 동생을 유리 인형 대하듯 대했다.
“샀다!”
“뭐를?”
“그런 게 있어. 미안, 오빠. 이게 지금 아니면 살 수가 없는 거라서 그랬어.”
“괜찮아. 음식 다 식었다. 데워 달라고 할까?”
“아니야. 그냥 먹자.”
민주는 일부러 맛있겠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음식을 접시에 덜었다. 괜히 오빠의 주의가 그녀가 산 물건으로 쏠리지 않게끔 목소리도 조금 키웠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좀 전에 산 티켓을 오빠나 부모님께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니, 부모님은 들켜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오빠는 아니었다. 착한 그녀의 오빠라면 그 티켓을 보고 죄책감에 시달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오빠. 그래도 꼭 한 번은 보고 싶었어.’
동생 사랑이 지극한 거로 유명한 이태주였다. 동생인 이산의 데뷔 쇼케이스에 그가 오지 않을 리 없었다. 취업 준비에 한창이어야 할 민주가 때늦은 아이돌 팬 시늉을 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어릴 적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이태주를 먼발치에서라도 좋으니 보고 싶었다.
물론 상대가 자신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은 가정을 파괴한 불쾌한 무리일 뿐이니까. 그래도 꼭 보고 싶었다.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자신을 구해 준 오빠인데 왜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되고 고맙다고 연락해선 안 되는지.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머리가 굵어질 때쯤에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자신의 이름이 유민주에서 이민주로 바뀌었는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왜 엄마의 성을 붙여서 불렀었는지.
“오빠 많이 먹어.”
“하하하. 그래. 너도 많이 먹어.”
민주는 미안한 마음을 담은 것처럼 음식을 가득 담은 접시를 오빠에게 건넸다. 오랜만의 휴일에 자신을 불러낸 걸 보니 또 여자 친구랑 헤어진 것 같은데, 위로는 못 해 줄망정 딴짓만 열심히 한 걸 만회할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오래가나 했더니, 커플링도 빼 버렸네.’
바람을 피우다 합친 부모님의 과거 때문인지, 그녀의 오빠는 결혼을 기피했다. 여자 친구와 잘 사귀다가도 결혼 얘기만 나오면 흐지부지하다 헤어지곤 했다. 직장도 괜찮고 성격도 좋은 사람이 그러는 게 안타깝긴 했지만, 민주 자신도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결혼 후에 배우자를 의심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원래 가정을 버리고 새 가정을 꾸렸기 때문이기도 했고, 주변에서 배우자의 외도로 이혼한 부모를 둔 친구도 많아서였다. 민주는 자신도 어머니나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너도 슬슬 독립해야지? 어떻게 할래? 오빠 집으로 들어올래?”
“그게 뭐야. 엄마 아빠 집에서 나와서 오빠 집으로 들어가면 그게 무슨 독립이야.”
“월세 내면서 살면 돈 모으기 힘들어. 안전 문제도 있고.”
“그래도 따로 알아볼래.”
제대 직후 독립한 민수는 그때부터 집에 잘 들르지 않았다. 동생인 자신과는 약속을 잡아서 이렇게 밖에서 만나곤 했지만, 부모님과는 명절이나 생일에만 만났다.
한때는 혼자만 나가서 사는 오빠가 부럽고 야속했었지만,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어린 자신에게는 줄곧 숨겼지만, 결합한 부모님이 돈 문제로 끊임없이 다투었다는 것을.
어머니와 합치기 전의 아버지는 자신의 월급을 대부분 본인을 위해서 썼다고 들었다. 전 부인이 능력도 좋고 수입도 훨씬 많아서 생활비만 약간 보탰었다고. 그러다 막대한 병원비에 한 가정의 생활비를 온전히 자신이 부담하게 되자, 그걸 못 견뎌 했다.
‘뭐, 돈 문제가 아니더라도 수시로 싸우지만.’
어릴 적에 꿈꾸던 화목한 집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다는 걸 민주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집 아이 08
블랙 스쿼드의 멤버들은 요 며칠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바쁘게 움직이다가도 문뜩문뜩 바라던 데뷔를 하게 된 게 기뻐서 웃음을 흘리곤 했다, 그러다가도 한 곳을 보면 지었던 미소를 지우고 흥분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숨 막혀 죽겠네.’
‘노아 형. 형이 리더니까, 어떻게 좀 해 봐요.’
‘그러지 마. 나도 산이는 무서워. 물릴 것 같단 말이야.’
‘안 물어요, 안 물어.’
‘아니야. 산이는 진짜로 물 것 같아.’
모두 며칠 동안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는지 팍팍 인상을 쓰고 다니는 막내 태산이 때문이었다. 몸이 아픈 건 아닌 것 같은데, 평소와 너무 다르게 태산이는 며칠간 저기압이었다. 언제나 파이팅이 넘쳐서 멤버들에게 기운을 나눠 주는 태산이가 말도 없이 폰만 들여다보니, 다들 걱정이었다.
“사, 산아. 초콜릿 줄까?”
“….”
“그럼 매니저 형한테 치킨 사 주라고 할까?”
“…배 안 고파.”
치킨을 거부하는 태산이의 태도에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식이 치킨인가 싶을 정도로 치킨을 입에 달고 살던 아이가 그걸 거절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어서였다.
“왜, 왜 그래? 긴장해서 그래?”
“아니.”
“그럼 어디 아파?”
“안 아파.”
안 아프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 대답을 하는 태산이의 표정은 몸이 아픈 사람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 하나 거슬리는 사람이 보이면 잡아서 물어뜯겠다는 맹수 같은 느낌이었다. 눈빛도 거친 게 입을 잘못 놀리면 잡아먹힐 것 같았다.
‘맨날 자기가 호랑이라고 그러더니, 진짜 맹수 같네.’
재민은 태산이 주위에서 떨어져 눈치만 보는 형들을 향해 과장되게 한숨을 쉬어 보였다. 자신에게도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평소에 그의 말을 잘 들어서 나서긴 했지만, 태산이 기분이 저조한 이유를 전혀 모르니 정말로 달래 줄 방법이 없었다.
“으아! 답답해 죽겠네. 진짜 왜 그래?”
“….”
“야! 대체 왜 그래?”
“태주가….”
“태주 형이 왜?”
“태주가 안 와.”
태산이에게 말을 걸고도 무사한 재민을 보고 용기를 얻은 것인지, 대화도 나섰다. 원래는 진짜 물 것처럼 흉흉한 태산이 곁으로 갈 마음이 없어서 노아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지만, 재민에게 제대로 대답하는 걸 보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태주 형 어디 갔어?”
“제주도 촬영.”
“진짜? 너 매일 아래층에 내려갔었잖아. 그럼 매일 집에 혼자 있었어?”
“응.”
태주의 제주도 지방 촬영은 원래 삼 일만 촬영하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기상 악화로 며칠이나 딜레이되면서 일정이 거의 일주일로 늘어나 버렸다.
하루 이틀은 태주와 떨어져 있어도 참을 수 있을 만큼 성장한 태산이였지만, 일주일은 무리였다. 꿈의 정원에도 가고 싶고, 희와 제피르, 해나와 단단도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가족이자 주인인 태주가 보고 싶었다. 조그만 도도도.
“그럼 태주 형 오늘 못 오셔?”
“몰라. 통화할 때 아침까지 촬영한댔어.”
“…헐.”
태산이의 말을 듣던 대화의 입이 벌어졌다. 얼마나 태주를 좋아하면, 혼자 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태산이가 일주일 가까이 빈집에서 기다렸을까. 숙소에도 방이 있으니 멤버들이랑 같이 지내면서 기다려도 됐을 텐데,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집에서 기다렸다는 게 애잔했다.
대화가 끝난 후 대기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태산이를 가만히 두자. 맡은 일을 미루거나 허투루 하지는 않았지만, 태산이는 어리광쟁이에 제 형 껌딱지였다. 태주가, 태주가를 입에 달고 사는 애였다. 괜히 어설프게 달랬다가 더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태주 형. 제발 빨리 오세요.’
태산이를 엄청 아끼는 태주니, 데뷔 쇼케이스 같은 큰일을 놓칠 리 없었다. 촬영지가 제주도에 촬영이 끝나지 않았더라도 중간에 억지로 시간을 내서라도 들를 사람이었다. 대화를 비롯해 태산이와 태주의 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한시라도 빨리 태주가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
대화의 예상대로 태주는 제주도에서 서울로 오는 중이었다. 촬영 도중 억지로 시간을 낸 것은 아니었다. 촬영 일정이 딜레이되자, 태산이 이상으로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면서 촬영진을 몰아쳤었다. 그리고 괴물 같은 속도로 그에게 주어진 분량의 촬영을 해치웠다.
“진정하십시오. 충분히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호 씨 말이 맞아. 좀 진정해, 태주야.”
“후우! 알았어요.”
“그러게 기념품점 가는 건 경호원들 시키라니까.”
“중요한 날이잖아요. 직접 사서 선물하고 싶었어요.”
태주가 바쁘게 움직이면서 사 온 기념품들은 사실 인터넷으로 주문해도 충분한 물건들이었다. 아니면 해외에서 시간이 없을 때 가끔 그랬던 것처럼 경호원에게 대신 사다 달라고 부탁해도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직접 기념품 가게에 들러서 물건을 고르고 포장해서 왔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이걸로 메이크업 먼저 지워. 상황이 이러니 여기서라도 해야겠다.”
“네.”
영화 촬영장에서 곧바로 출발한 참이었다. 찢어지고 검댕이 묻은 의상은 겨우겨우 갈아입었지만, 비슷한 메이크업은 그대로였다. 보는 사람이 많은 비행기 안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고 현장에서 바로 온 듯한 모습을 하고 태산이의 데뷔 쇼케이스 장소에 갈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 파트너로 일한 미나의 솜씨가 빛을 발했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오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태주의 모습은 싹 바뀌어 있었다. 테러리스트와의 긴 추적과 술래잡기에 신경이 곤두선 에이전트에서 단정하고 깔끔한 평소의 모습이 되었다.
“태주야, 옷 안 갈아입을래? 사진 많이 찍힐 텐데….”
“오늘은 주인공이 따로 있잖아요. 제가 돋보이면 안 되죠.”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해요.”
태산이의 데뷔 쇼케이스 현장에 기자들이나 업계 관계자가 많이 올 거라고 예상한 미나는 태주를 잘 차려 입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몰릴 걸 알면서도 돋보이면 안 된다고 태주가 반대해서였다.
동생인 태산이에게 가야 할 환호를 자신이 가로챌까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멋진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해서 담당 스타일리스트인 그녀는 내심 아쉬웠다.
“잘 자네.”
“많이 피곤했을 거예요.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촬영장 따라다니고 하느라.”
“기다렸을 산이한테 미안하긴 한데, 도도가 좋아하니까 너무 보기 좋더라.”
“하, 하하. 그게, 사실 저도 그랬어요.”
미나의 말대로 도도는 불편한 좌석에서도 달게 자고 있었다. 태주는 그런 아이의 고개를 쿠션으로 잘 받쳐 주었다. 그리고 가방 밖으로 삐져나오려고 하는 전사 인형과 막대 초콜릿을 다시 넣고 단단히 끈을 조였다. 작은 손으로 열심히 만든 막대 초콜릿을 떨어뜨려서 못 먹게 되면 너무 아까웠다.
기상 악화로 촬영 일정이 미뤄진 사이, 태주는 도도를 데리고 제주도 관광에 나섰다. 초콜릿 만들기 카페 같은 체험 카페도 다니고, 아쿠아리움과 로봇 공연장에도 갔었다. 대부분 실내에서 하는 활동이었지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선지 도도도 무척 좋아했었다.
‘도도는 괜찮은데, 태산이가 걱정이네.’
예전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를 빼면 이렇게 오래 떨어진 적은 없었다. 해외에서 촬영할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수업이 끝나면 2호나 경호원이 태산이를 촬영장으로 데려왔었다. 주말에 촬영이 있으면 그의 트레일러나 호텔에서 같이 지냈었다. 일 때문에 이런 적은 없었다.
‘앞으론 이런 일이 자주 있겠지?’
태산이가 호랑이에서 어린아이로 변했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고 각오했었다. 그래도 그런 시간이 더 나중에, 한참 후에나 올 줄 알았는데, 너무 빨랐다. 흐르는 시간도 아이의 성장도 막을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공항에서 대기하던 경호원들의 도움을 받아 태주는 예상보다 빠르게 태산이의 데뷔 쇼케이스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쇼케이스 시작까지 여유가 있었는데도 공연장은 이미 많은 인파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런 북적거림이 태산이의 성공적인 데뷔의 신호로 느껴져서 기뻤다.
“태주 씨 이쪽입니다.”
“어? 공연장으로 안 가요?”
태주는 대기실 방향으로 안내하는 견우를 따라가는 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공연 관람을 많이 한 그는 공연 전의 대기실이 얼마나 복잡하고 긴장에 휩싸여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가족이라지만, 일단은 외부인인 그는 그런 대기실을 방문해서 분위기를 흩트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런 사정은 견우도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했는데도 그를 대기실로 안내하고 있었다. 혹시 그런 사정을 모두 무시해야 할 정도로 태산이에게 큰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지 걱정이었다.
“태주!”
“산아?”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다. 대기실 문을 열자마자 그를 꽉 끌어안고 매달린 태산이 때문이었다. 그에게 안긴 도도까지 한 번에 끌어안고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는 태산이는 어디 아픈 곳 없이 건강했다. 오히려 힘 조절을 잊을 만큼 흥분해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
“엄청 많이 기다렸어.”
“미안. 우리 산이 기다리게 해서, 형이 미안해.”
“괜찮아. 이렇게 왔으니까.”
“착하다, 내 호랑이.”
태주는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은 태산이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억지로 팔을 빼냈다. 그는 천천히 등을 쓸어 주면서 다친 곳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그를 기다린 호랑이를 달랬다. 오랜만에 느끼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체온이었다. 달래서 떼어 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블랙 스쿼드의 스타일리스트들이 경악한 얼굴 그를 보고 있어서였다. 그들은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할 태산이의 몇 시간이나 공들인 머리와 메이크업, 의상이 엉망이 되어 가는 꼴에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내 호랑이. 오늘 멋진 모습 보여 줄 거지?”
“응.”
“형은 무대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이따 보자.”
“우으응. 알았어. 기다리고 있어.”
놓기 싫은 듯 대답은 이상하게 했지만, 태산이는 순순히 태주를 팔을 풀어 주었다. 태주는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지 못해서 태산이의 입술이 어렸을 때처럼 톡 튀어나온 걸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괜히 아는 척해서 겨우 진정된 아이가 다시 흥분하게 할 순 없었다.
“이거! 도도가 만들었어.”
“세상에! 아가, 산이 주려고 챙겨 온 거였어?”
“응!”
“내 거야?”
“응. 산이 선물이야.”
태주는 그가 태산이를 달래는 사이 도도의 움직임을 느꼈었다. 태산이의 품이 답답해서 꼼지락거린 줄 알았는데, 막대 초콜릿을 꺼내려고 그런 모양이었다.
아이 손바닥만 한 하트가 달린 막대 초콜릿은 도도가 초콜릿 만들기 카페에서 직접 만든 물건이었다. 먹지 않고 가방에 며칠이나 넣고 다니길래 아까워서 그런가 했는데, 실은 태산이에게 줄 선물이었다.
“고마워. 맛있겠다.”
“히히히.”
“같이 먹을까?”
“응!”
작은 초콜릿을 한 입씩 나눠 먹는 태산이와 도도를 이번에는 태주가 꽉 끌어안았다.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물건을 나누는 아이들이 자신의 아이라는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서, 스타일리스트들의 사정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
누군가에겐 깊은 감동을 남기고, 누군가에겐 식은땀 나는 상황을 남긴 해프닝이 있었지만, 블랙 스쿼드의 데뷔 쇼케이스는 다행히 제시간에 시작되었다.
쇼케이스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고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자, 관객석 곳곳에서 태산이와 노아의 이름이 들려 왔다. 아직은 블랙 스쿼드의 이름보다 데뷔 전에 광고에서 활약한 태산이와 선배 그룹의 노래를 피처링한 노아의 이름이 더 유명해서 당연한 현상이었다.
‘어딨지? 안 보여. 혹시 오늘 안 왔나?’
중소 기획사에서 데뷔하는 아이돌 그룹이었지만, 블랙 스쿼드는 미디어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이태주의 동생 이산의 존재는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런 미디어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으로 이어져, 4천 석 규모의 공연장을 꽉 채우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꽉 채운 공연장은 몇 년씩 데뷔를 준비한 멤버들과 그들을 지원한 회사에선 기뻐할 일이었지만, 다른 목적을 가진 민주에게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너무 시끄럽고 복잡해서 보고 싶었던 태주를 보긴커녕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도 힘들었다.
“꺄아아!”
“블랙 스쿼드! 블랙 스쿼드!”
민주가 태주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이, 무대 위에선 멤버 소개와 데뷔 싱글 소개 뒤로 사회자와 멤버 간의 짧은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멤버들은 노련한 사회자가 이끄는 대로 데뷔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점이나 재밌었던 일화를 얘기했다.
숙소를 옮기는 걸 쫓겨나는 거로 착각해서 울 뻔했던 일이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태주와 같이 연기하는데 심장이 떨려서 힘들었다는 고백 등으로 공연장에 웃음이 퍼졌다. 좋은 분위기는 데뷔 곡 공연이 펼쳐지자 정점에 올랐다.
“아! 찾았다.”
민주가 찾던 태주는 무대 바로 앞에 있었다. 미디어 전용석과 가까운 곳의 초대 손님들을 위한 좌석 가운데에 어린아이와 같이 있었다. 그는 아이가 무대가 안 보인다고 투정이라도 부린 건지, 두 팔로 높이 들어 올려 주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곳까지 데리고 다니네.’
민주는 아이를 입양했다는 뉴스를 봤었는데, 이런 장소에까지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자, 노란색 물건을 꼭 쥔 아이를 품에 다시 안은 태주가 뺨에 입을 맞추는 게 보였다.
기자가 그런 태주의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품 안의 아이가 너무 소중해서 기자를 신경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민주는 노래를 마친 멤버들이 무대 중앙에 모여서 팬들에게 응원을 부탁하는 도중에도, 곧 발매될 EP 앨범에 관해서 설명하는 도중에도 태주와 아이만 지켜봤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우리 집 아이 09
태주와 도도가 이동한 쇼케이스 초대 손님석엔 태우와 연우가 먼저 와 있었다. 다른 멤버들의 가족도 와 있을 테지만, 따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어서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쿠첼루스라면 알고 있을 테지만, 그는 일이 바빠서 올 수 없었다.
‘오늘도 계시네. 나중에 영상 부탁해야겠다.’
대신 쿠첼루스가 고용한 촬영 팀과 여러 번 봤던 사설 업체 사람들이 와 있었다. 쿠첼루스도 태산이 회사에 투자했다더니, 주최 측한테서 촬영 허가를 받은 모양이었다. 방송 촬영 장비를 갖춘 촬영 팀이 본격적인 자세로 태산이의 데뷔 쇼케이스를 촬영하고 있었다.
“두근두근하네. 우리 산이가 데뷔한다니.”
“어. 옛날 생각난다.”
“연우 너도 비슷한 나이에 데뷔했었지?”
“내가 산이보다 한 살 더 늦게 데뷔했어.”
태우는 네가 춤추는 모습도 멋있었다며 가볍게 연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태우는 진심이었다. 예전 영상에서도 춤추는 연우는 정말 멋있었다. 만약 과거에 좋은 회사를 만났다면 지금도 관련 업계에서 일하고 있을지도 몰랐는데, 운이 너무 나빴다.
자신을 위로하듯이 어깨를 두드리는 태우의 행동에 연우는 가볍게 웃고 말았다. 무대에 대한 아쉬움이 없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긴 힘들었지만, 운이 나쁘냐고 물으면 절대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좋다고는 말하기 힘든 경험이었지만, 그 경험이 있었기에 태주와 태우 형제를 만나고 가족이 될 수 있었다. 곁에서 힘이 되어 주는 두 사람과 만나지 못했다면, 삶을 이어 나갈 마음을 먹지도, 가정을 꾸릴 각오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 찍어도 될까?”
“원래는 금지인데, 이런 쇼케이스에선 슬쩍 봐줘. 팬들 사이에 입소문 나길 바라거든.”
“그래? 그럼 사진 좀 많이 찍어야겠다. 자두 엄마 보여 줘야지.”
“킥! 그래, 많이 찍어.”
연우는 아침까지 뱃속 아기 때문에 데뷔 쇼케이스에 같이 오지 못해서 아쉬워하던 제수씨를 떠올리고 키득거렸다. 본인 입으로 십 년 덕력이 어쩌고 할 정도로 아이돌을 좋아하는 제수씨가 현장에 얼마나 오고 싶어 했는지 잘 알아서였다.
“우와! 우리 산이 노래 너무 잘한다.”
“춤도 잘 춰. 산이랑 재민이라는 친구는 진짜 춤꾼이네. 둘 다 리듬을 가지고 노는 수준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멤버들 꽃다발도 준비할 걸 그랬다.”
“그러게. 다음에 음방 1위 하면 그땐 일곱 개 준비하자.”
“그러자. 괜히 미안하네.”
멤버 일곱 명 모두 너무 잘 해냈다. 저만큼 하려고 흘렸을 땀과 들인 시간을 생각하면 모두에게 꽃다발을 전달해도 부족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하기 힘들었다. 두 사람이 준비한 것은 태산이 전용으로 특별히 제작한 초콜릿 꽃다발뿐이었다.
태우와 연우가 블랙 스쿼드 멤버들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감탄하는 사이, 태주와 도도 역시 무대를 보고 감탄하고 있었다.
“태주, 태주. 도도 사진 찍고 싶어.”
“카메라 꺼내 줄게. 잠깐만.”
“응.”
노란색의 동글동글하고 단단한 어린이용 디지털카메라는 최근 도도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다. 산책하다가도 마음에 드는 걸 발견하면 곧잘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실력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초점이 맞지 않아 흔들리거나 너무 확대된 사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재밌어했다.
“우응.”
‘이런! 우리 도도한테 이곳은 너무 난도가 높네.’
키가 겨우 그의 허벅지 중간에 닿을락 말락 하는 도도에게 공연장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무리였다. 아무리 이상한 사진을 찍어도 재밌어하는 도도였지만, 찍고 싶은 태산이를 찍기는커녕 다른 사람들 몸통이나 다리만 찍는 것까지 좋아할 리 없었다.
“태주. 도도 산이 찍고 싶어.”
“안아 줄까?”
“응. 안아 줘.”
“읏차! 이러면 잘 보이지?”
“응!”
태주는 아이의 얼굴에 실망한 표정이 생기기 전에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큰 키의 그가 두 팔로 올려 주자, 사람들 사이로 도도의 몸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렇게 무대를 향해 아이를 들어 준 채로 한동안 기다려 준 태주는 곧 아이를 다시 품에 안았다. 뒷자리의 사람들의 시야를 너무 가린 것 같아서였다.
“많이 찍었어?”
“응, 많이 찍었어. 태주, 산이 멋있어. 다이노 같아.”
“하하하. 다이노 만큼 멋있었어?”
“응.”
다이노는 모린이 선물한 전사 인형들의 대장인 드래곤 인형이었다. 드래곤인 다이노 같다는 칭찬은 수년에 걸친 모린이 할아버지의 학습으로 드래곤을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고 알고 있는 도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크흠! 지상 최강의 생명체는 해나인데….’
드래곤을 한 손으로 제압하는 해나나 발차기 한 방으로 녹다운시키는 다나를 겪어 본 그는 동의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굳이 반박하진 않았다.
“블랙 스쿼드! 블랙 스쿼드!”
“우와! 다이노!”
“아하하. 왜 이리 귀여운 거야.”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 준 블랙 스쿼드에게 팬들이 환호를 보내는 것이 재밌어 보였나 보다. 태주의 품에 안긴 도도도 사람들을 따라서 소리를 질렀다. 다만 외친 것은 그룹 이름인 블랙 스쿼드도 태산이의 이름도 아니었다. 멋진 드래곤 다이노의 이름이었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도도 혼자만 이해할 수 있는 응원이었지만, 아이의 진심이 담긴 응원이었다. 무대 위에서 열정적으로 춤추는 태산이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태주, 산이 대장이야?”
“산이가 대장 같아?”
“응.”
“이건 비밀인데…. 산이는 대장보다 친구가 더 좋대. 그래서 대장 말고 친구 하는 중이래.”
“우아아!”
도도의 눈엔 제일 앞에서 춤을 추는 태산이가 대장처럼 보인 것 같았다. 블랙 스쿼드 일곱 명 모두 훌륭했지만, 사실은 그의 눈에도 태산이가 제일 잘 들어왔다. 아마 도도도 그도 강력한 가족 필터 혹은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듯했다.
-쪽!
태주는 그의 설명에 감탄한 듯 입술도 눈도 동그래진 도도의 뺨에 입을 맞췄다.
*
태주는 한 손으로는 경호원에게 맡겨 두었던 선물 바구니를 들고 남은 손으로 도도를 안고 있었다. 직접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하는 도도였지만, 공연장이 너무 복잡해서 어린아이가 걷기엔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도도는 연우와 태우, 두 동생이 만든 꽃다발을 대신 안고 있었다. 제 몸의 반만 한 꽃다발을 안고 걷는 것은 무리였다.
‘녀석들 참…. 같이 대기실로 가면 태산이가 좋아할 텐데.’
두 사람은 정신없이 바쁘고 복잡할 대기실에 방문해 혼란을 더하길 바라지 않았다. 태산이를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오늘은 태주에게 양보했다. 행사 마무리나 회식을 하려면 태산이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적을 것 같으니 자신들은 나중에 따로 시간을 잡겠다는 이유였다.
“아가, 안 무거워?”
“무거워.”
“호야. 도도 꽃다발 좀 받아 줄래?”
“아니야. 도도가 들 거야.”
둥근 금색 포장지가 반짝이는 초콜릿 꽃다발은 아이가 들고 있기 버거워 보였다. 괜히 들게 한 게 미안해져서 2호에게 대신 들게 할 생각이었는데, 도도가 거절했다. 힘든 것보다 태산이에게 직접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 큰 모양이었다.
“태주! 나 봤어? 멋있었어?”
“봤어. 무대 앞에서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전부 봤어. 산이가 제일 멋있었어. 그렇지, 아가?”
“응! 다이노 같았어.”
“킥! 나 다이노 같았어?”
“응!”
시간 날 때마다 도도와 놀아 주는 태산이도 다이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전사 인형 부대의 대장 드래곤, 도도가 인형 중에서 제일 아끼는 것이었다. 태산이는 드래곤보다는 백호, 예를 들면 호연 님 같은 백호가 더 세다고 생각했지만, 도도에겐 고맙다고 대답했다.
“이거! 도도가 들고 왔어!”
“초콜릿 꽃다발!”
“태우랑 연우가 보낸 거야. 카드도 있으니까 읽어 봐. 그리고 이건 형 거.”
“우와!”
연우와 태우처럼 태주도 초콜릿을 준비했다. 입에 달고 산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초콜릿을 좋아하는 아이여서 꽃바구니 대신 초콜릿 바구니를 준비했는데, 동생들도 같은 생각을 떠올린 것 같았다.
“키킥! 태주, 여기 밑에 봐 봐.”
“응? 아하하하. 나중에 결혼식 축가를 불러 달라고? 내가 해 주려고 했는데.”
“안돼. 태주는 태우 형 때 했잖아. 연우 형은 내가 해 줄 거야.”
“그래. 네가 축가 불러 줘. 연우도 좋아할 거야.”
“응.”
태주에게 전달을 부탁한 꽃다발에 꽂혀 있던 카드의 아래쪽엔 급하게 추가한 듯한 문장이 있었다. 눈에 익은 연우의 글씨체로 써진 문장은 태산이에게 노래 잘 부른다는 칭찬과 나중에 결혼식 할 때 축가를 불러 달라는 부탁이었다.
연우는 친구이자 형제인 태우가 결혼하고 아빠가 될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마음이 바뀐 모양이었다. 꽤 반가운 변화였다. 이미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기 힘들 만큼 안정적으로 바뀐 연우였지만, 더 많은 가족, 더 큰 울타리를 만드는 일은 대찬성이었다.
“산아! 넌 고기가 좋지? 생선보다 고기지?”
“야! 회가 어떻게 생선이야? 회는 그보다 훨씬….”
“뭐래? 회가 생선이지 그럼 뭐야. 지금 회식 메뉴 투표 중이거든. 넌 고기지?”
“회식?”
“어. 아까 얘기했잖아. 오늘은 회식하고 내일은 하루 휴식.”
회식과 휴식. 이제 데뷔한 아이돌에게는 사치로 들릴 만큼 듣기 좋은 말이었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 데뷔 쇼케이스를 위해 몇 달 동안 준비하느라 고생한 블랙 스쿼드 멤버들의 긴장도 풀어 주고, 앞으로 이어질 스케줄을 잘 소화하게끔 하기 위함이었다.
블랙 스쿼드 멤버들은 앞으로 몇 주간 새벽부터 일어나서 음악 방송에 출연해야 했다. 방송이 비는 사이 다른 스케줄도 다녀야 했고, 모든 스케줄이 끝나면 저녁에는 EP 앨범 발매 준비를 해야 했다.
‘괜찮네. 지금은 흥분해서 모르겠지만, 몇 달 동안이나 긴장하고 있었으니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을 거야. 이럴 때는 쉬게 해 줘야지.’
하루의 휴가는 모든 스트레스를 풀기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정도가 딱 좋았다. 블랙 스쿼드는 갓 데뷔한 신인이었다. 최대한 방송에 얼굴을 비치면서 인지도를 쌓아야 했다.
태산이 회사의 괜찮은 일 처리에 태주가 만족한 웃음을 짓고 있을 때였다. 쇼케이스 시작 전에 그랬던 것처럼 태산이가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팔로 끌어안고 매달렸다.
“난 고기! 그리고 태주!”
“야아. 태주 형 아침까지 촬영했다고 네가 그랬잖아.”
“그래도 안 돼. 태주랑 같이 있을 거야.”
“산아….”
태주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태산이가 못내 귀여웠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아이의 팔을 풀어내려 했다. 앞으로 몇 년간 같이 활동할 멤버, 스태프들과 처음 하는 회식이었다. 아무리 아이가 귀엽고 눈에 밟혀서 떼어 놓기 힘들더라도 이런 자리에는 참석시키는 게 옳았다.
“산아. 배고프지? 가서 고기 많이 먹고 와.”
“태주랑 같이 있을래.”
“착하지? 산아, 멤버들이랑….”
“아니.”
“아이고. 우리 산이 아직도 아기네. 이리 어려서 어쩌나….”
그가 팔을 풀려고 한 것을 알았을까. 태산이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회식에 보내야 하는데, 일주일 가까이 떨어져 있었던 게 상당한 충격이었는지 평소보다 어리광이 더 심했다. 태주는 그런 아이가 안타까웠다. 그래서였을까. 입으로는 회식을 가라고 얘기했지만, 몸은 반대로 아이를 마주 안고 있었다.
‘그냥 같이 가도 되는데…. 뒤, 뒤통수 따가워.’
대화는 대기실 안의 시선이 전부 태주 쪽으로 쏠리자 순간 오지랖을 부린 것을 후회했다. 팬으로서 좋아하는 태주 형의 이미지를 지켜 주었어야 했는데, 피곤할 것 같아서 촬영 얘기를 꺼냈다가 태주의 멋진 이미지만 깎아 먹었다.
이번 회식은 쇼케이스를 보러 온 멤버들의 보호자도 참석하는 회식이었다. 앞으로 몇 년간 같이 활동할 테니, 서로 안면을 익히라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기왕 하는 회식 멤버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고르라는 말에, 태산이한테 의견을 물었다가 태주가 팔불출이란 사실만 사람들에게 알려져 버렸다.
*
태주가 보호자까지 참석하는 회식이라는 것을 알고 민망해하는 사이, 태우와 연우는 복잡한 공연장을 힘겹게 벗어나고 있었다. 초반에 데뷔 쇼케이스 티켓을 삼천 석 판매했다가 팬들의 요청으로 천 석을 추가했다더니, 아주 복잡했다. 보안 요원들이 곳곳에서 통제하는 데도 공연장을 벗어나는 데 한참 걸릴 것 같았다.
“그냥 태주 형 따라서 대기실에 들를 걸 그랬나?”
“그러게. 그쪽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건 좀 편했겠지?”
“그렇겠지. 팬들하고 다른 통로를 이용할 테니까.”
“아이고!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태우는 연우와 붙다시피 해서 출구 방향으로 움직이다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고 말았다. 밖은 찬바람이 씽씽 부는 가을이었지만, 공연장 내부는 겉옷을 벗었는데도 이마에 땀이 흐를 정도로 더웠다. 그는 눈에 들어갈 것 같은 땀을 닦으려다 가까이 있던 여학생과 부딪혔다.
“네? 네, 네. 괘,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세요?”
“괜, 찮아요. 정말로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거라면 얘기하세요.”
“아니,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태우는 창백한 얼굴의 여학생이 무척 걱정되었지만, 다시 발을 떼었다. 처음 보는 데다 괜찮다고 계속 거절하는 상대를 위해서 출입구로 향하는 사람들의 흐름을 거스를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만약의 일이 발생하더라도 자신보다는 곳곳에 있는 보안 요원들이 더 잘 대처할 터였다.
민주는 자신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인 뒤 출입구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을 보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를 쫓아 온 것인지…. 말을 걸 생각도 없었고, 아는 척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사람들을 뚫고 태주의 동생을 쫓고 있었다.
‘미쳤어, 이민주. 정신 차려!’
태주와 아이를 지켜보던 중 옆 사람에게서 꽃다발을 건네받는 걸 목격했다. 좌석이 붙어 있어도 대화를 하지 않길래 처음에는 일행인지 몰랐었다. 그러다 꽃다발을 건넨 사람들이 태주와 포옹하고 아이와 장난을 치는 걸 보고 알아차렸다. 가끔 기사나 미튜브 영상에서 봤던 형제들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민주는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태주가 경호원들과 자리를 옮기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태주의 형제들 뒤를 따랐다. 어쩌면 그중 한 명이 친오빠 민수와 너무 비슷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얼굴도 분위기도 진짜 비슷했어. 그리고 나이도….’
“오지 말 걸 그랬어.”
다른 세상을 사는 듯한 태주를 봤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짙은 현실감과 죄책감이 민주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리 집 아이 10
태주는 대기실에서 촌극을 벌인 게 민망했지만, 오랜 배우 경력 덕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회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멤버들의 가족을 소개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민망하다고 그냥 넘기기에는 아까운 기회였다.
‘사실은 태산이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게 신경 쓰여서 혼자 보내기 싫었던 거지만. 겸사겸사 소개도 받고 괜찮았지.’
리더인 노아의 가족은 해외에 살고 있어서 소개받지 못했지만, 다른 멤버들의 가족은 전부 소개받았다. 멤버 가족끼리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단톡방도 만들었다.
회식에서 만난 멤버들 가족은 다행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적당히 욕심 있고 적당히 성공을 바라는. 멤버들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이라고 착각해서 허튼짓할 그런 사람들처럼 보이진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어, 호야.”
“짐은 제가 옮길 테니, 도도를 데리고 먼저 들어가십시오.”
“짐 내가 챙길게.”
“아닙니다. 보는 눈이 있을 수 있으니, 제가 하겠습니다.”
태주가 사는 아파트는 단지 내 지상으로 차가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키 큰 나무도 많고 건물이 떨어져 있지만, 아공간 사용은 조심하는 게 좋았다. 특히 평소처럼 주차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앞에서 내릴 때는 더 조심해야 했다.
“항상 고마워, 호야.”
“아닙니다.”
잠든 도도를 보듬어 안은 태주는 차 문을 열어 준 2호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제주도에서도 내내 그를 대신해서 도도를 돌봐 주었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엔 복잡한 쇼케이스 장소에서 그를 경호하고 운전까지 맡아서 해 주었다. 아무리 2호가 바라서 하는 일이라지만, 고맙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아암! 태주 나 졸려.”
“그래. 들어가자.”
고마운 마음에 2호가 주차장으로 가는 것을 지켜보려던 태주는 자는 시간을 넘겨 하품을 해 대는 호랑이 녀석 때문에 집으로 바로 들어가야 했다.
“하암. 졸려.”
“씻고 자야지.”
“으응.”
그는 은근슬쩍 바로 침실로 들어가려는 태산이를 달래서 이 층으로 올려 보냈다. 데뷔 쇼케이스에 이어서 회식까지 하느라 피곤한 것은 이해하지만, 침실로 그대로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꿈의 정원 방문을 위해선 같이 자야 하는데, 그뿐 아니라 어린 도도도 같이 자기 때문이었다.
“아이, 잘 자네.”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잠든 도도는 이대로 씻겨서 잠옷으로 갈아입혀도 깨지 않을 것 같았다. 제주도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서 낮잠을 자긴 했지만, 아직 어린 도도에겐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도, 도둑?”
방에 딸린 욕실에서 도도를 씻길 생각으로 문을 연 태주는 난장판인 침실에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매트리스와 침구들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소파와 탁자는 원래 자리에서 벗어난 위치에 나뒹굴고 있었다.
“이 장면 왠지 익숙한데…. 어디서 봤더라?”
도둑이 들었다고 보기에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방바닥에 신발 자국도 없었고 협탁이나 수납장 위의 값비싼 장식품도 그대로였다. 무엇보다 이런 장면을 언젠가 봤었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이 말썽쟁이가!”
“이잉.”
“아차! 괜찮아, 아가.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자.”
“….”
태주는 너덜너덜한 침구에 새겨진 발톱 자국을 보고 순식간에 범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혼자 둔 게 애틋해서 하루 종일 온통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난폭한 호랑이가 범인이었다.
‘딱 예전에 퇴원하고 돌아왔을 때의 모습이네.’
오래전 일이었지만, 워낙 안전한 곳에서 사는 태주라서 언제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었는지 기억해 내는 건 쉬웠다. 그가 이레귤러 박재우의 사주를 받은 전직 매니저에게 총격을 당해서 입원해 있던 기간 동안 태산이가 그의 침실을 이렇게 만들었었다.
퇴원한 그를 반기던 쿠첼루스가 침실 문을 연 뒤 경악했던 걸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났다. 그의 잘못도 아닌데, 연구에 바빠서 가구를 교체하는 걸 잊었다며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했었다.
방의 모습이 어떻든 잠든 아이를 씻기는 게 먼저였다. 태주는 엉망인 침실은 일단 그대로 두고 도도를 욕실로 데려갔다.
‘요새는 이 바닐라 향을 좋아했지?’
도도는 무척 피곤했는지, 씻기는 동안에도 보디로션을 발라 주는 동안에도 깨지 않았다. 태주는 수건으로 감싼 머리를 몇 번 문질러서 물기를 제거하고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태산이가 망가뜨린 그의 침대가 아닌, 서재를 치우고 들여놓은 아이 침대 위였다.
-바바바박!
“후우! 똥고양이 녀석.”
아이를 침대에 눕히기 무섭게 제가 해 놓은 짓을 아는 건지, 아니면 고양이 모습으로 못다 부린 어리광을 부리려는 건지, 일찌감치 본 모습으로 돌아온 태산이가 방문을 힘차게 긁어댔다.
“잡았다, 요놈!”
“냐앙!”
“냐앙은 무슨 냐앙이야? 네가 해 놓은 꼴 좀 봐.”
“냐냐냐냐!”
“이놈! 안 되겠다. 오늘은 혼이 나야겠어.”
태주는 잘 자는 도도를 한 번 확인한 뒤 태산이를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그는 혼을 내겠다는 말에도 기세등등한 태산이 몸통을 꽉 잡았다. 잠깐만 긴장을 풀어도 어딘가로 숨어 버리는 아이라 주의해야 했다.
그는 태산이의 화풀이 대상이 되지 않은 온전한 소파에 앉아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이놈!’을 시전했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직후 그는 여전히 반항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호랑이의 이마에 입술을 콕 찍었다.
-쪽!
“냐앙.”
“흐음. 반성하는 자세가 아니군. 더 혼나야겠어.”
-쪽! 쪽! 쪽!
“냐아아아.”
태주의 동작이 횟수를 더해 갈수록 태산이의 날카로운 기세가 누그러졌다. 하얀 꼬리는 살랑거리기 시작했고 바짝 곤두섰던 등 쪽 털도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반성했어?”
“냥!”
“안 했어?”
“냐앙.”
“크흠! 어쩔 수 없네. 더 혼나야겠다.”
모이를 쪼는 새처럼 태주의 입술이 태산이의 작은 이마로 여러 번 내려왔다. 그렇게 한참 동안 파란 눈이 만족으로 부드럽게 풀릴 때까지 애정을 표현한 그가 이내 소파에 등을 묻었다. 그는 눕듯이 기댄 편한 자세로 태산이를 안고 며칠간 혼자 둔 것을 사과했다.
기념비적인 데뷔 쇼케이스를 치른 날이었다. 침실이 엉망이 되었지만, 애초부터 혼을 낼 마음은 전혀 없었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었어. 나중에는 비도 억수같이 와서 도저히 촬영을 시작할 수가 없었어. 그래도 형이 우리 태산이 기다리지 않게 빨리 왔어야 했는데….”
태산이는 통통한 엉덩이와 등을 가볍게 쓸어 주고 토닥이는 손길에 혼자 기다리며 느꼈던 불안과 불만이 전부 사라진 모양이었다. 가슴팍 위에 누워 하품을 해 대는 하얀 몸이 흘러내리려고 했다.
“도도랑 같이 자고 있어. 저쪽 정리하고 올게.”
“냐아앙.”
태주는 잠든 도도의 담요를 살며시 들어 그 안으로 태산이를 넣어 주었다. 도도의 체구에 맞춘 어린이 침대였지만, 태산이가 같이 눕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킥! 백화점 갔을 때 생각나네.”
복원 주문서로 망가진 가구와 침구를 하나씩 원상태로 회복시키던 태주는 오래전 태산이와 백화점에 갔던 일을 떠올리고 키득거렸다.
그때도 이번과 비슷한 화풀이였지만, 당시에는 태산이가 본체였었다. 가구도 침구도 몇 년간 사용해서 슬슬 바꿀 시기도 되었었고, 어찌나 잘 망가뜨려 두었던지 복원 주문서로 회복시키는 것보다는 새로 사는 게 더 나았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여끼 카두!’
‘…산아?’
‘태쭈, 거뗭하디 마. 사니가 사 주께. 사니 카두 이떠.’
‘….’
같이 간 백화점에서 그는 태산이가 시원하게 카드를 긋는 걸 황당하게 봐야 했다. 아이 손에 들린 것은 연우와 댄스 학원을 방문할 때 쓰라고 줬던 그의 카드였다. 익숙하지 않은 입원에 차기작 대본 분석, 선배 배우의 방문 등이 계속되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돌려받는 걸 잊었었다.
그날 태산이의 쇼핑은 가구와 침구를 배달시킨 뒤로도 멈추지 않았었다. 꼬맹이는 그를 끌고 다니면서 백화점을 통째로 살 기세로 마음에 드는 것들을 사들였었다. 그는 다치고 걱정하게 한 게 미안해서 꼬맹이가 하자는 대로 했었다.
“하여간 누굴 닮아 그리 손이 큰지.”
아마 깜찍한 꼬맹이는 백 퍼센트 그를 닮아서 손이 큰 것일 것이다.
“냐아아.”
“쉬이, 더 자. 형이야.”
깊이 잠든 도도와 다르게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태산이는 침대로 옮기려 하자 칭얼칭얼 잠투정을 부렸다. 그는 축축 늘어지는 하얀 녀석을 다독여, 복원을 끝낸 침대에 눕혔다.
*
아이 모습의 도도와 태산이를 한 번에 안고 걷느라 걸음이 조심스러웠지만, 정원 입구를 통과하는 태주의 표정이 밝았다. 며칠간 도도랑만 통과하면서 느꼈던 허전함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품 안 가득 묵직한 무게와 온기가 안정감을 주었다.
“냐아앙!”
“하하하! 다녀와, 태산아. 밥 먹으러 오는 거 잊지 말고.”
“냐아아아.”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묵직했던 품 한쪽이 가벼워졌지만, 태주는 그런 것도 반가웠다. 태산이 없이 방문한 것은 겨우 일주일 남짓이었지만, 그는 그동안 이렇게 태산이에게 잔소리하고 걱정하고 하는 일상이 너무 그리웠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오후 늦게나 다시 볼 수 있겠네.”
길게 이어지는 태산이의 대답을 뒤로 그는 천천히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태산이가 그의 품을 박차던 반동으로 잠이 깰뻔한 도도의 등을 토닥여 다시 재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머나! 이게 정말 우리 산이야?”
“우와아! 멋있다.”
“정원사 씨. 뮤직비디오인가도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것도 보자고.”
“태주, 빨리. 희도 산이 보고 싶어.”
“하하하. 알았어.”
태주는 오두막에 들어서기 전에 상점에서 영상 저장용 디스크와 기억 소환권을 사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정원 일을 하기 전에 해나와 희한테 보여 줄 생각으로 사 왔는데, 정답이었다. 두 사람은 그가 불러낸 태산이의 데뷔 쇼케이스 기억을 무척 좋아했다.
“태블릿에 도도가 찍은 사진도 있어요. 보실래요?”
“뺘아아.”
“당연히 봐야지. 도도가 찍은 사진이라니, 정말 기대되는걸.”
“희도! 희도 사진 볼래.”
태주는 제가 찍은 사진을 화제로 올리자 흥분해서 퍼덕거리는 도도를 가볍게 공중에 띄워 주었다. 퍼덕퍼덕 힘찬 날갯짓에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태블릿 안에는 도도가 찍은 태산이 사진 중 괜찮은 것만 추린 폴더가 있었다. 데뷔 곡 뮤직비디오나 쇼케이스 영상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비록 상대가 가족인 해나와 희였지만, 그래도 성과를 더 자랑하고 싶고, 더 칭찬하게 하고 싶었다.
“희, 사진 다 보면 같이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같이 가 줄 수 있어?”
“응. 같이 가, 태주.”
“뺘아아.”
“물론 도도도 같이 가도 되지.”
해나가 수고한 태산이를 위한 특식을 만드는 사이 태주는 희와 도도를 데리고 야외 공연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야외 공연장은 꿈의 정원을 얻은 초기 그가 연기 연습할 공간을 물색할 때 희가 권해 준 곳이었다. 새로 짓거나 고치려면 희의 의견도 물어봐야 했다.
“공연장을 확장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확장?”
“응. 나한테는 이 정도면 충분한데, 태산이한테는 좁을 것 같아서. 여길 확장해도 괜찮을까?”
“응. 태주 하고 싶은 대로 해.”
“고마워.”
야외 공연장은 오두막, 창고, 온실 같은 초기 건물들이 리뉴얼 되는 동안에도 처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 혼자 연기 연습을 하면서 쓰기에 부족하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이곳에 소중한 추억이 남아 있어서였다.
과거의 어느 날, 꿈의 정원에 장난꾸러기가 겨울을 불러온 날에 희와 제피르, 태산이가 피라미드를 공략하고 콩 나무를 오르는 모험을 다녀왔었다. 그 모험에서 만난 거인에게 보상으로 과르네리를 받아 왔었다. 본인에게 주어진 소중한 기회를 그를 위해서 사용하면서….
‘여기서 과르네리로 첫 연주회를 했었지.’
온통 새하얀 눈이 쌓인 정원과 흥겨웠던 연주회 그리고 사랑스러운 작은 관객들. 눈 내리는 야외 공연장에서 펼쳐진 바이올린 연주회는 그가 꿈의 정원에서 쌓은 추억 중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행복한 추억이었다.
“태주, 희가 부탁이 있어.”
“응? 무슨 부탁이야?”
“확장하기 전에 바이올린 듣고 싶어.”
“알았어. 희, 확장하기 전에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자. 맛있는 음식도 준비하고, 모린이 가족도 초대하고. 어때?”
“좋아!”
태주의 대답이 작은 요정 아가씨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그의 머리 위로 반짝거리는 날개 가루가 쏟아졌다.
“하하하. 희, 어지러워. 너무 빨리 날지 마. 도도도.”
“이히히! 알았어, 태주.”
“뺘아아!”
태주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머리 위를 뱅글뱅글 나는 희와 그런 희를 쫓는 도도를 구경했다. 너무 빠른 속도로 돌다 다칠까 걱정되긴 했지만, 엎치락뒤치락 속도 경쟁을 하는 두 아이가 귀여웠다.
*
그날 저녁 태주는 오두막 거실에서 도도를 관객 삼아 바이올린을 연습했다. 야외 공연장을 확장하기 전에 손님을 초대해서 연주회를 하고 싶다는 얘기는 해나에게 전해 두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적당한 셋리스트와 연주 연습이었다.
-콰장창!
“깜짝이야! 무슨 일이지?”
“뺘아?”
“뭐가 깨진 같은데, 가 봐야 알겠다. 잠깐 주방에 다녀올게. 여기 있어, 도도야. ”
“뺘아.”
손 풀기 용으로 연주한 동요에 흥이 오른 도도가 짧은 앞발로 박수를 치는 것을 들으며 한창 연습할 때였다. 부엌에서 요란하게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내 티 세트! 대체 누가…, 태산이?”
“냐아앙.”
“네가 그랬어?”
“냐아아.”
“이놈. 이 말썽쟁이. 형이 아끼는 티 세트를 깨 놓고 왜 이리 당당해?”
요란한 소리의 주인은 태산이었다. 점심도 건너뛰고 정원을 순찰하더니 배가 고파서 몰래 주방에 숨어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을 금방 지워 버렸다. 먹을 것을 찾다 사고를 쳤다기에는 티 세트가 놓인 위치가 애매했다. 티 세트를 넣어 둔 장식장 안의 음식이라고는 태산이가 절대로 먹지 않을 찻잎이 전부였다. 게다가 이상하게 사고를 친 태산이의 태도가 너무 당당했다.
“왜, 왜 그러는데?”
“냐아앙.”
보통 이런 사고를 치면 태산이는 그가 찾지 못하는 곳으로 숨거나, 숨겨 둔 복원 주문서를 꺼내서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깨진 티 세트 옆에 아주 당당한 자세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냐앙!”
-탁! 탁!
치켜뜬 파란 눈에 심술 가득한 볼. 거기에 불만스럽게 꼬리로 바닥을 탁탁 치는 건방진 태산이를 마주한 태주는 당황했다. 말썽을 부린 것은 제 녀석인데, 어째서 그가 잘못한 느낌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이 녀석. 정말 혼난다?”
“냐아앙.”
“혼난다고.”
“냐아앙.”
“….”
어서 혼내라는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기분 좋은 소리로 우는 태산이를 확인한 후에야 그는 무슨 상황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말썽쟁이가 바라는 것은 지난밤 현실에서처럼 혼이 나는 것이었다. 품에 안고 둥개둥개 어르면서 다정하게 쓰다듬고 대화를 나누는.
‘이놈 자식이, 진짜.’
똑똑한 녀석이니 어제가 특별히 예외였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런 잔망스러운 녀석이 귀여워 못 배길 것이라는 사실도 모를 리 없었다.
“아이고. 넌 대체 어느 집 아이야? 응? 누구네 집 아이라 이리 개구쟁이야, 응?”
“냐아앙.”
“…그래. 네가 어느 집 아이겠니, 우리 집 아이지.”
“냐냐아.”
태주는 행여라도 태산이가 깨진 도자기 조각을 밟을까 바로 안아 들었다. 장난스레 혼을 내는 것도 안전한 곳에서 할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힘을 빼고 얌전히 품에 안긴 하얀 털 짐승과 자리를 옮기다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행동 패턴이 낱낱이 읽힐 정도로 정말 태산이를 오래 키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에휴!”
‘도도는 절대 이 녀석처럼 키우지 말아야지.’
기대로 반짝이는 태산이의 엉덩이를 조금 묵직하게 두드린 태주는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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