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337
외전. 우리 집 아이. 완>
트로피 01
태주는 오랜만에 태산이와 휴일이 겹쳤다. 사실 휴일이 겹쳤다고 말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저녁 늦게 태산이가 앨범 녹음을 위해서 몇 시간 정도 외출해야 해서였다. 그렇더라도 온 가족이 같이 한나절을 보내는 것은 변함없었다.
“산아, 도도야. 점심 나가서 먹을까?”
“응. 나 삼겹살 먹을래. 도도야, 너도 삼겹살 먹을 거지?”
“응! 삼겹살 맛있어.”
“삼겹살…. 그래. 삼겹살 먹자.”
추운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이었지만, 아직은 수확의 계절이라 불리는 가을이었다. 두 사람에게 몸에 좋고 맛과 향이 다채로운 한정식을 먹일 생각이었던 태주는 삼겹살을 선택한 게 아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 사람, 아니, 쿠첼루스까지 세 사람의 육식파를 당해 낼 수 없었다.
삼겹살로 점심 메뉴를 정한 도도와 태산이는 다시 놀이에 집중했다. 두 사람은 도도의 방에서부터 이 층 거실까지 장난감 자동차 레일을 연결 중이었다. 며칠 전부터 자동차를 여러 개 조립하더니, 오늘 드디어 레이싱 놀이를 할 모양이었다.
‘기특한 우리 태산이. 형 노릇을 톡톡히 한단 말이지.’
어렸을 때는 장난감 자동차, 기차 같은 것들이 쌓여 있어도 가지고 놀지 않았었다. 워낙 밖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해서 선물 받은 장난감 대부분은 창고 자리만 차지했었다. 그러다 양이 어느 정도 쌓이면 그가 추려서 보육원 같은 곳에 기부했었다.
그랬던 태산이가 현실에서 도도와 같이 생활하게 되자 바뀌었다. 생전 가지고 놀지 않던 장난감으로 집안에서 도도와 놀아 주고 있었다. 아마 이곳이 전원주택이나 꿈의 정원처럼 밖에서 뛰어놀기 힘든 아파트 단지라는 것을 고려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다 연결했다.”
“와아! 도도는 빨간 차.”
“그래. 그러면 난 이거. 노란 줄무늬 차.”
“출발해?”
“응. 출발!”
이 층 거실이 장난감 자동차 경주의 스타트 지점인 것 같았다. 난간 사이로 두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장난감 자동차를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잠시 구경하고 있자, 키릭키릭 바퀴를 감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다다 급한 발소리만 남기고 둘의 모습이 장난감 자동차를 쫓아서 사라졌다.
“녀석들. 재밌나 보네.”
꺄꺄 소리를 지르는 도도와 도도 못지않게 큰 소리로 웃는 태산이는 금방 이 층 거실에 나타났다. 물론 두 아이는 곧바로 다시 사라졌다. 레일 설치가 제대로 됐는지 자동차가 멈추지 않고 잘 달리는 듯했다. 두 아이의 웃음소리가 아래층에 있는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태주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일 층 거실의 장식장 정리. 도도의 장난감과 장식품, 대본과 책 등이 트로피와 뒤섞여 두서없이 채워진 장식장. 그걸 정리하는 게 휴일을 맞은 그의 할 일이었다.
“이 책이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었는데.”
그는 원래 침실과 연결된 서브룸을 서재로 쓰고 있었다. 그러다 도도를 맞이하면서 서재에 있던 책을 1층 거실 장식장으로 전부 옮겨야 했다. 태산이가 장난감으로 도도 방을 가득 채우는 바람에 아이 침대와 옷장을 둘 공간이 필요했었다.
게다가 도도의 변신 성공은 그의 예상보다 빨랐다. 겨우 침실을 서재에 꾸밀 계획만 세웠을 때 변신에 성공하는 바람에 급하게 서재를 치워야 했다. 덕분에 거실 장식장 안이 엉망이었다.
“아! 이 트로피. 이제영 감독님은 잘 계시나? 한번 시간을 내긴 해야 할 텐데.”
도도의 장난감은 상자에 따로 모으고 책과 대본 역시 종류별로 칸을 분리해서 정리할 때였다. 대본 상자에 가려져 있던 트로피들이 그의 눈에 띄었다. 그는 그중 가장 눈에 띄는 트로피를 꺼내 들었다.
회귀 전과 같이 무관의 제왕이라는 이름을 얻을 뻔한 그를 구해 줬던 트로피, 이제영 감독의 영화 로 받은 남자 최우수 연기상 트로피였다.
‘데뷔하고 칠 년 만이었던가?’
그때까지 태주는 인기나 작품의 성적에 비교해 형편없는 수상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불공정한 시상식 심사 기준, 이레귤러 박재우의 변칙적인 수상 등. 그를 둘러싼 업계 전반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수상 실적이 나빴었다.
“이 트로피는….”
한국예술대상에서 받은 남자 최우수 연기상 트로피 옆에 있는 트로피는 박대성 감독의 영화를 통해서 받은 것이었다. 박대성 감독의 영화는 영화 내용이나 관객 수, 개봉 수익 같은 것들과는 별개로 회귀 후 그의 연기 인생에 커다란 분기점이 된 작품이었다.
*
태주 일행이 촬영장에 들어서자 모든 스태프의 작업이 멈췄다. 사고 후 제작사 대표나 감독 같은 영화 제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과는 만났지만, 일선에서 작업하는 스태프들과는 인사조차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태프들은 한국 연예계, 나아가 전 세계 토픽으로 뉴스에 올랐던 스토커의 총격 사건의 주인공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개중에는 다른 현장에서 태주와 같이 일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 사건 이후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냐하떼요.”
눈이 마주치는 사람, 분장실로 가는 경로에서 스치는 사람들에게 태주와 아이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는 커다란 사고를 겪은 사람들이 보이는 대인 기피 증상 같은 후유증은 보이지 않았다. 전과 다름없이 촬영을 기대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대단하네요. 대체 개인 스태프가 몇 명이에요?”
“전에 봤을 때는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번 작품 전에 주변을 정리했다더니, 이태주 씨 쪽도 손을 봤나 보네.”
“무슨 얘기에요?”
“이태주 씨 스토커 사건 알지? 제일 책임이 큰 건 백화점하고 브랜드였지만, 소속사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니었잖아. 그래서 그 일 후로 트리즈에서 대대적으로 소속 배우들 스태프랑 경호를 손봤다고 하더라고.”
그렇더라도 꽤 많은 인원이었다. 경호원도 한 무리에 매니저도 여럿으로 보였고, 스타일리스트 같은 사람들도 일고여덟은 되어 보였다. 이태주는 혼자서 다른 연예인 두, 세 명 정도가 데리고 다니는 개인 스태프만큼 데리고 다녔다.
“어지간한 일 없으면 이태주 씨 쪽으로 가지 마.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랬다간 욕먹을 수도 있어.”
“알았어요.”
업계 소문에 밝은 스태프의 얘기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두 전해졌다. 아직 사고가 벌어지고 반년도 되지 않았다. 태주의 경호원들이나 스태프들이 예민하게 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경고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산아. 형 준비하는 동안 호랑 같이 밖에 구경하고 올래?”
“아앙. 사니 이꺼.”
“그림 그릴 거야?”
“앙.”
“그래, 그럼. 그림 그리고 있어.”
태주는 메이크업 콘셉트 회의에서 정한 대로 표현하기 위해 화장대에 화장품을 깔아 놓는 스태프들을 기다리면서 태산이를 챙기고 있었다. 개인 스태프 인원이 늘어서 준비에 빨리 들어갈 것 같아서 산책을 권했지만, 꼬맹이는 컬러링 북과 크레용을 꺼내 들었다.
“태주야, 시작하자.”
“네.”
촬영장에서 일하던 스태프들 사이에서 얘기가 나왔던 대로 태주의 개인 스태프들 구성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트리즈에선 태주의 일이 있고 나서 배우들의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같은 스태프와 행사에 동원될 보안 업체 점검에 나섰다. 그 이후 태주의 스태프들이 충원되었다.
물론 회사와 별개로 태주 역시 개인 스태프들 점검할 생각이었다. 특히 미나의 스타일리스트 팀이 소화하는 과중한 업무량과 2호가 경호원의 업무를 넘어서 로드매니저 역할까지 하는 상황은 꼭 바꾸어야 했다. 그렇게 몇 가지 사항을 조율한 것이 현재 스태프들의 구성이었다.
“새로운 사무실은 어때요?”
“말해 뭐해. 최고지.”
“하하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태주야. 진짜로 쿠첼은 직업이 뭐니? 난 돈 많은 백수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닌 거 같더라.”
“백수 아니에요. 쿠첼 엄청 바빠요. 투자회사도 있고 무슨 임대법인도 갖고 있어요. 누나네 사무실 있는 빌딩도 쿠첼 임대법인 거예요. 그거 외에도 많은데, 사실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쿠첼루스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회사를 운영하는 중인지는 태주 역시 잘 몰랐다. 2호는 쿠첼루스가 알려 줘서 전부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일부러 묻지 않았다. 알 필요도 없었지만, 안다고 해도 그가 도울 일이 없었다. 쿠첼루스는 모든 걸 스스로 통제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쿠첼이 실은 최고의 신랑감이었구나.”
“아하하. 안됐지만, 쿠첼은 이미 애인이 있답니다.”
“진짜?”
“네. 오래됐어요. 저 입대했을 즈음부터 사귄 거 같더라고요.”
“하긴. 쿠첼 같은 사람을 여자들이 그냥 둘 리 없지. 잘생긴 데다 친절하고, 돈까지 많잖아.”
“하하하.”
돈이 많다는 얘기를 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미나 때문에 태주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트리즈 소속은 아니었지만, 이번 점검에 미나의 스타일리스트 팀도 같이 정비했었다. 이때 쿠첼루스의 재력이 많은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었다. 막강한 재력의 일면을 맛본 미나가 입맛을 다시면서 아쉬워하는 게 이해되었다.
“다 됐다. 어때? 배역에 어울리는 거 같아?”
“네. 잘 어울려요.”
“역시. 내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다니까.”
“왜요? 누가 녹슬었다고 했어요?”
“아니. 이번 콘셉트가 쉬워 보이는데 실제론 복잡하잖아. 생각대로 잘 나올까 계속 고민했었거든.”
이번에 태주가 맡은 역할이 그랬다. 내재된 악의나 반사회적 인성을 가졌다거나 하는 역할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범인을 몰이하고 형사를 농락하는, 유희를 즐기는 악역도 아니고 정의감에 나대는 선역도 아닌 그런 역할이었다. 영화의 끝까지 찜찜하고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그런 배역의 특성을 드러내는 메이크업과 스타일링을 위해서 미나는 꽤 고생했다. 착용한 소품 하나에 캐릭터에게서 전해지는 감정의 깊이가 달라지기도 하는 작업이었다. 프리프로덕션 기간 동안 그녀는 수차례 의상 감독, 콘셉트 디자인 팀과 회의를 하면서 그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찾아냈다.
‘피팅하느라 힘들긴 했지만, 확실히 누나 말대로 잘 맞네.’
미나와 스타일리스트 팀이 준비한 수많은 슈트에 저가 브랜드부터 한 벌에 수백만 원이 넘는 명품 코트까지 모두 입어 봤었다. 그래도 적당한 의상을 찾아내지 못해서 제작을 의뢰해야 하나 했는데, 결국에는 미나가 캐릭터가 부각될 만한 의상을 찾아냈다.
“오랜만의 본업이네. 멋지게 해치우고 와.”
“하하하. 그럴게요.”
미나의 말대로 영화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화보와 광고, 인터뷰, 행사 참석 등의 미뤄 둔 일을 처리했었다. 본업인 연기는 뉴플릭스 드라마 시즌 2를 찍은 뒤로는 줄곧 휴업이었다. 이번 박대성 감독의 영화는 사고 후 복귀에 딱 좋은 작품이었다.
*
태산이는 2호가 펼쳐 준 키즈 테이블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크레용으로 칠하던 컬러링 북이 아닌 커다란 스케치북에 마커를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태산이가 그리는 것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그림과 모던한 디자인의 커다란 사무용 책상이 놓인 사무실 세트 안에 앉은 태주였다. 수십 명의 사람 가운데 가장 빛나는 가족이자 주인.
-컷!
“자, 아까 얘기했던 동작도 넣어서 조금 더 가벼운 느낌으로 다시 한번 갑시다.”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채 의자에 앉아서 앞에 선 태주의 모습을 오버 숄더로 찍는 장면이었다.
중요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박대성 감독은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촬영 중이었다. 태주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니터로 확인한 그림들은 충분히 그의 마음에 들었다. 단지 오늘이 태주와 처음 촬영하는 날이라서 감각과 호흡을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
“선배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하하하. 있긴 한데, 남한테 말하긴 그렇고…. 그나저나 저 아이 친척 동생이라고 했지?”
“네.”
“얘기를 듣긴 했는데, 정말 놀라울 정도로 얌전한걸.”
“우리 꼬맹이도 나름 베테랑이라서요.”
연쇄 살인범을 추적하다 용의자와 대면하는 장면이라서 즐거운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분위기가 너무 들뜨지 않게 혹은 감정이 넘치지 않게 신경 써야 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카메라가 잠시 멈추고 다음 신을 준비하는 사이 김광효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척 즐거운 기색이었다. 태주가 궁금한 티를 냈지만, 답해줄 마음이 없다며 태산이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맞지. 우리 태산이가 어지간한 스태프보다 경력이 더 길지. 그나저나 오늘은 진짜 열심히 그리네. 무슨 그림이지?’
태산이는 김광효의 말대로 얌전했다. 그가 촬영하는 동안 키즈 테이블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집에서 챙겨 온 책을 봤다. 그러다 졸리면 어린이 왜건에서 잠을 잤다. 촬영장이 무척 익숙하고 편한 모습이었다.
태산이와 촬영장에 같이 다닌 게 벌써 칠 년이었다. 위장한 고양이 모습으로 독립 영화 촬영장을 따라다닌 걸 시작으로 온갖 스튜디오와 지방 로케이션 촬영을 같이 다녔다. 장난치고 떠들어도 되는 순간과 스태프들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있어야 하는 순간을 구분하는 것은 숨 쉬는 것처럼 쉬웠다.
“정말 기특해.”
“네?”
태주는 순간 김광효가 한 기특하다는 칭찬의 대상이 자신인 줄 착각할 뻔했다. 조금 전까지 태산이에 관해 얘기 중이었으니 태산이를 칭찬하는 말일 텐데, 어쩐지 그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태주의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김광효가 즐거워한 것도 기특하다 칭찬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큰 사고를 겪고도 연기를 포기하지 않은 것도, 늦게 촬영에 합류했어도 준비를 철저히 해 와서 같이 연기하기 편한 것도 모두 즐겁고 기특했다.
-배우님들 다시 들어갈게요.
오늘 촬영은 김광효와 신경전에 가까운 대거리를 하는 장면뿐이었다. 쉬운 촬영이었지만, 첫 촬영이라 어색할 거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계획된 분량 이상으로 촬영할 만큼 주인공 두 명의 합은 좋았고, 걱정했던 아이의 방해도 없어서였다.
스토커 사고, 촬영 일정 전면 수정 등. 속을 있는 대로 끓였던 것과 다르게 태주의 영화 촬영 합류는 그 이상 바랄 게 없을 만큼 순조로웠다.
트로피 02
촬영이 순조로운 것과 별개로 이미 한 달 넘게 촬영을 이어 온 스태프들은 꽤 피로가 쌓인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김광효가 태주에게 저녁 식사를 권하면서 주변을 돌아봤지만, 같이 가려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끼리 가야겠네.”
“오붓하니 좋네요. 어디로 가실래요? 이 근처에 오리 주물럭 괜찮게 하는 집 있는데, 거기로 가실래요?”
“아이한테 너무 맵지 않겠어?”
“로스구이 시켜 주면 돼요. 백숙도 괜찮고요. 사실 우리 꼬맹이가 오리고기를 너무 좋아해서요.”
치킨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리 역시 태산이가 좋아하는 고기 중 한 가지였다. 오리는 생고기도 좋아하고 바로바로 구워 먹는 것도 좋아했다. 사실 태산이는 고기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전부 좋아했다.
김광효와 저녁 약속을 잡은 태주는 분장실로 가지 않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집으로 갈 줄 알고 산책하러 간 2호와 태산이를 기다렸다.
“태쭈.”
“어서 와. 구경 잘하고 왔어?”
“앙! 고양이 봐떠.”
“고양이? 스튜디오 근처에 고양이가 있었어?”
“앙. 사니가 간틱 줘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지루해하지 않게 스튜디오 인근을 한 바퀴 돌다가 고양이 가족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에게 간식을 준 일과 고양이 가족의 생김새를 설명했다.
“우리 산이 너무 착하다. 고양이들이 고마워했을 거야. 그런데 산아 아까 무슨 그림 그렸어? 형도 보여 줄 거야?”
“앙대. 비미디야.”
“비밀?”
“앙. 비미.”
태주는 조잘조잘 떠드는 태산이 얘기를 한참 들어 주다 스케치북 속의 그림을 보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의 촬영이 멈춘 것도 모르고 집중해서 그리던 모습이 궁금해서 말해 봤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나아가 비밀이라며 거절한 이유도 듣지 못했다.
‘비밀? 지금 태산이가 나한테 비밀이라고 한 건가?’
태주는 일순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단순히 그림 한 장을 보여 주기 싫다는 얘기였는데, 그는 어쩐지 둘 사이에 거대한 벽이 가로막은 느낌을 받았다. 아마 태산이가 그에게 비밀을 만들 정도로 자랐을 거라고 인정하기 싫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태쭈, 사니 배거파.”
“…어. 밥 먹으러 가야지.”
비밀이라는 단어 때문에 충격을 받은 태주를 모르는 태산이는 배고프다 칭얼거렸다. 그런 아이를 달래 분장실로 들어가 의상을 갈아입는 그는 정신이 어딘가로 팔린 듯했다.
보여 달라고 다시 졸라 볼까? 집에 갈 때 태산이가 잠들면 몰래 볼까? 비밀이라니! 이러다 금방 자기 다 컸다고 독립한다고 하는 거 아니야? 스케치북 속 그림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생각은 저녁 약속 장소로 도착할 때쯤에는 태산이가 그를 두고 집을 나가는 이상한 미래에까지 가지를 뻗었다.
*
“후후. 다 식었다. 아 해, 산아.”
“아.”
“맛있어?”
“앙! 마시떠.”
“아이, 잘 먹는다.”
아이가 자라면서 스킨십이 줄고 보호자에게 비밀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태주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저도 모르게 예전처럼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먹이고 있었다.
‘무릎에 앉히고 직접 먹일 만큼 어려 보이지는 않는데….’
김광효는 태주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을 때 해 줄 말도 있었고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비록 태주가 회복을 위해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촬영 중반에 합류했지만, 촬영은 앞으로도 두세 달 이상 남아 있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 진행된 촬영에 관해 궁금한 게 있다거나 연기에 조언이 필요하면, 답해 줄 생각이었다. 혹여라도 늦은 합류로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다면, 극복할 수 있게 도울 마음도 있었다.
‘그런 건 나중에 천천히 물어야겠군.’
그의 생각에 지금 촬영하는 영화에 관한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만, 물을 여건이 되지 않았다. 태주가 잘 익힌 고기를 아이 입에 배달하는 게 지상 최대의 과제인 양 굴고 있어서였다. 자기는 고기가 익는 사이 밑반찬 몇 번 집어 먹은 게 전부면서 아이 입에는 끊임없이 고기를 넣어 주고 있었다.
“사니 이제 배부러. 태쭈 꼬기 머거.”
“벌써? 산이 배가 차려면 아직 멀었는데….”
“아앙. 배부러.”
“보자. 우리 산이 배가 진짜 다 찼나?”
“꺄하하!”
장난스럽게 배를 더듬으면서 확인하는 그의 손길에 아이가 자지러졌다. 태주는 귓가에 착 붙는 즐거운 아이 웃음소리에 뜬금없이 들었던 불안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멀어졌다고 느꼈던 거리가 애정과 배려로 메꿔진 기분이었다.
태산이의 식사량을 아는 태주는 몇 점 먹지도 않고 배부르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아마 계속 자기만 먹이는 그가 신경 쓰여서, 그를 배려해서 한 소리일 것이다.
“이제 산이가 먹을래?”
“앙. 사니가 머그께.”
“아이, 착하다.”
“꺄하하.”
흐트러진 머리를 넘겨 주고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해 준 태주가 아이를 옆에 앉혔다. 그는 여전히 비밀로 남은 스케치북 속의 그림이 보고 싶었지만, 더는 괜한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보호자로서 조금이나마 성장한 듯한 뿌듯함을 만끽하던 태주는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같이 있는지,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흠! 드세요, 선배님. 잘 익었어요.”
“난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어서 먹어.”
“…죄송해요.”
“아니, 괜찮다니까. 알아서 잘 먹고 있었어. 너 먹어.”
“네.”
동석한 사람은 신경도 안 쓰고 아이만 챙기는 모습에 처음엔 이게 뭔가 하고 황당해하던 김광효였지만, 이내 그러려니 했다. 온종일 말썽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제 형을 기다린 아이였다. 칭찬도 애정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애정 표현이 과한 감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보기 나쁘진 않았다.
“시즌 2는 언제 공개해?”
“네?”
“뉴플릭스 드라마 말이야.”
“아! 내년 3월에요.”
“후반 작업이 오래 걸리는 건가?”
“그런 것도 있고요. 전 세계 동시 공개라서요. 조율하는 데 시간이 걸리나 보더라고요.”
뉴플릭스 드라마 시즌 1의 반응은 무척 좋았다. 초반 김정훈 감독의 개인사로 인해서 촬영장 컨디션이 엉망이었던 것에 비해 완성된 결과물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특히 숨 막히게 빠른 전개를 가져가면서도 각 캐릭터의 특성을 모두 살린 점이나, 시청자에게 생소한 괴물인 한국판 좀비의 설정을 쉽게 이해시킨 점은 무척 훌륭했다.
“해외 반응 좋더라.”
“전 잘 모르겠는데, 다행히 그런 것 같더라고요.”
“덤덤하네.”
“그게 공개까지 일 년이 걸리기도 하고요. 한 편씩 방송하면서 시청률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가 봐요. 긴장감이 그다지 안 느껴져요.”
“듣고 보니 그렇긴 하다.”
그가 찍은 뉴플릭스 드라마는 지상파든 케이블이든 방송국에서 일정 기간 방송하고 실시간으로 성적을 확인하는 드라마 같은 방식이 아니라서 그런지 반응을 실감하기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뉴플릭스 측에서 스트리밍 성적을 알려 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완강하게 고집해서 더 그랬다.
덕분에 태주가 자신의 해외 인지도를 실감한 것은 태산이, 연우와 해외여행을 갔을 때였다. 그는 공항에서부터 그를 알아보던 사람들의 반응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얘기가 사실이었구나 했다.
“그 정도면 해외 에이전시들 눈에 들만 한데…. 연락 온 곳 없어?”
“해외요?”
“아아. 나한테도 연락이 자주 오거든. 너는 나보다 훨씬 조건이 좋으니 당연히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싶어서.”
“으음. 오긴 왔었어요.”
태주는 김광효가 해외 에이전시를 거론했을 때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거리끼거나 눈치를 볼 만한 내용도 아니고, 견우와 미나의 스타일리스트 팀은 그가 있는 안쪽 룸이 아닌 홀에서 식사 중인 것을 기억하는 중인데도 그랬다.
“선배님은요? 많이 들어와요?”
“어. 요 몇 년 동양인 배우 출연 빈도가 늘어서 그런가, 제법 들어와.”
“저도 프로필 보내 달라는 연락은 꽤 받았어요. 회사에서 유명한 곳 몇 곳에 보냈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해외 나갈 생각 있어?”
“아니요. 해외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한국에서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은걸요.”
“허! 겨우 자리를 잡기는.”
태주와 같은 연령대의 배우 중에서 그만큼 자리를 잡은 배우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서른도 되지 않아서 유명 감독의 영화와 대형 드라마의 주연을 맡고, 광고와 화보를 골라서 촬영하고,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패션 업계나 홍보 대행사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구운 고기를 아이 접시에 옮기느라 정신없는 젊은 배우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제야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유명세를 즐기는 타입이 전혀 아니라더니, 본인에 대한 평가가 꽤나 박했다. 김광효는 가볍게 꺼냈던 화제를 통해서 태주가 어떤 성격인지 감 잡을 수 있었다.
“사실 배역만 괜찮으면 한국이든 해외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건 그렇죠.”
“뭐, 그 전에 외국어가 되어야 할 테지만. 너는 영어 곧잘 한다고 들었는데, 어때?”
“역할 맡으면 해낼 정도는 되는 거 같긴 한데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한국 배우들이 할리우드 배우들보다 연기를 못해서 할리우드에 진출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과거처럼 동양인은 한 작품에 한 명만 출연시킨다거나, 주인공의 조력자나 아시안 갱처럼 제한적인 캐릭터로만 캐스팅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해외 진출이 많지 않은 것은 언어적인 문제가 컸다.
물론 동양인을 주인공으로 영화나 드라마를 찍으려면 백인과 다르게 투자자와 제작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구조적인 문제와 동양인이 주인공이면 흥행을 할 수 없다는 인식도 여전했지만, 그래도 가장 큰 문제이자 제일 처음 넘어야 할 산은 언어였다.
“취미 같은 건 있고?”
“네. 정원 가꾸는 것도 좋아하고, 직접 키운 허브로 차나 로션, 비누 같은 걸 만드는 것도 좋아해요.”
“바이오딘!”
“맞아. 바이올린이랑 기타 연주도 좋아해요. 선배님은요?”
“난 이거.”
김광효는 낚싯대로 물고기를 낚는 시늉을 했다. 낚시는 쥐약인 태주와 반대로 취미로 낚시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두 손으로 낚싯대를 잡는 흉내를 냈을 뿐인데도 입가가 풀어졌다.
“낚시해 봤어?”
“해 바떠여.”
“응?”
“사니 턍어 자바떠여.”
태주에게 건넨 김광효의 질문에 그보다 빨리 태산이가 대답했다. 태산이는 낚시하고 돌고래랑 놀았다며 호박 섬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들었다. 태주는 단편적인 태산이의 경험담에 호박 섬의 존재와 그곳에서 보낸 휴가, 섬 근처를 지나는 돌고래 무리 등에 관해 추가로 설명했다.
“태쭈, 사니 돌고대 보거 시포.”
“그럼 다음에 돌고래 지나가나 바다에 가 볼까?”
“앙!”
김광효는 굳이 무릎에 앉히고 밥을 떠먹일 만큼 아이가 어리진 않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아이는 혀 짧은 발음을 내고 있었지만, 눈에는 총기가 깃들어 있었고 의사 표현도 정확했다. 그냥 저 누구나 선망하는 젊고 잘생긴 배우가 못 말릴 팔불출이어서 그랬던 거였다.
‘스트레스 해소에 신경 쓰라고 조언할 생각이었는데, 쓸데없는 짓이었어.’
연기는 감정도 체력도 많이 잡아먹는 일이었다. 김광효는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주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다. 체력적인 면이든 정신적인 면이든 남은 촬영 기간 탈이 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아이와 다정하게 휴가 계획은 세우는 태주는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단단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었다. 허튼 소문이나 눈앞의 이득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고, 어리석은 선택으로 한순간에 무너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저녁 식사 초대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
태주는 김광효와의 저녁 식사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까 궁금했었다. 지금 촬영 중인 영화에 관한 얘기가 주로 나오지 않을까 짐작했었는데, 아니었다. 해외 진출에 관한 것 외엔 가벼운 신변잡기에 관해서만 얘기하고 헤어졌다.
‘해외 진출이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의 앞으로 대본이 쏟아져 들어오고 배역을 골라서 출연할 수 있게 된 것이 회귀 전 이맘때부터였다. 그전까지도 배역을 고르긴 했지만, 실제로는 얼굴을 알리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출연한 경향이 더 컸다. 현재 한창 촬영 중일 천만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 뒤에야 A급 배우 대우를 받았었다.
주연 이상으로 주목을 받았던 영화였다. 본인이 했던 연기에 아쉬움이 남아 다시 출연할까 고민이 될 정도로 영화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선택한 것은 박대성 감독의 영화였지만, 그만큼 괜찮은 선택지 중의 하나라는 소리였다.
‘박대성 감독님 영화 끝나면 한창석 감독님 영화를 촬영하면 되니, 내년까지는 여유가 있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회귀 전에 출연한 적 없던 작품을 골라서 성공시키는 모험을 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하긴 힘들었다. 그가 출연하지 않았던 새로운 작품은 충분했지만, 몸값이 높아진 만큼 어느 정도 안전한 선택을 해야 했다.
태주는 작품 보는 눈에 자신 있긴 했지만, 그래도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누리는 폭넓은 선택지와 여유는 실패 없이 쌓아 온 성공 기록 덕분이었다. 한두 번 삐끗한다고 저 밑으로 떨어지진 않겠지만, 분명 그를 둘러싼 환경에 변화가 생길 터였다.
“하암!”
“…우리 꼬맹이랑 같이 있을 시간도 줄겠네.”
“태쭈?”
“집에 도착하면 형이 안고 갈 테니까, 코 자.”
“사니 앙 조려.”
앞으로의 작품 선택 문제로 복잡한 제 형의 마음은 모르는 천진한 꼬맹이는 오늘도 졸리지 않는다고 칭얼거렸다. 태주는 그런 아이를 시트에서 품으로 데려왔다. 자라고 말만 하는 것보다 품에 안고 재운 뒤에 다시 시트에 앉히는 게 빨라서였다.
“우리 산이 착하지. 코 자자.”
“…하아암.”
담요로 감싼 아이 몸을 일정한 박자로 토닥이던 태주는 문뜩 저녁 식사 도중 김광효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배역만 괜찮다면, 한국이든 해외든 상관없다던.
김광효의 말대로 차기작을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찾는다면, 선택지가 늘어나니 지금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찾을 것이다. 또 어떤 작품을 선택하냐에 따르겠지만, 지금보다 여유 있는 환경에서 촬영할 수도 있었다.
회귀 전에는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는 해외 진출이라는 단어가 태주의 머릿속 한편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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