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339
외전. 트로피외전. 트로피 04
채드 감독과는 상당히 일방적인 관계에서 서로를 알아가게 되었다. 당시에 태주는 그를 원하는 좋은 국내 작품이 많았기 때문에 반드시 해외 진출을 하겠다는 것보다 조건이 좋으면 한번 고려해 보자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어떻게 알았는지 채드 감독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의 개인 이메일로 대본을 보냈다고.
그때의 태주는 채드 감독을 해외 영화제에서 만났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었다. 만나는 업계 관계자들에게 모두 좋은 작품 있으면 불러 달라는 말을 하고 다녀서, 그 안에 채드 감독이 포함되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하여간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야. 스턴트맨 출신이라서 그런가.’
태주는 채드 감독이 보냈다는 대본은 나중에 훑어보기로 했다. 영화 촬영도 막바지였고, 오늘내일 이틀간은 휴일이었다. 어차피 쉬는 시간, 극성스러운 채드 감독에게 더 시달리지 않으려면 대본을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이고. 우리 도도 코가 루돌프 코가 되었네.”
“히히히. 루돌프.”
“들어가자. 들어가서 따뜻한 거 마시자.”
“응.”
감독 데뷔 전 채드 감독은 스턴트맨과 스턴트 코디 일을 병행했었다. 그러다 부상으로 스턴트를 그만두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감독으로 전향으로 전향했다. 수년간 조연출로 경력을 쌓은 그가 처음 총괄 감독으로서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 였다.
입봉 작품이었던 탓일까. 그는 주변에 사람들이 다가가기 겁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나아가 그 과한 열정으로 영화의 전반적인 것을 속속들이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나마 채드 감독이 집요하고 끈질긴 성격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조언을 귀담아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서 문제가 커지지는 않았었다.
“그 대상에서 배우들은 예외였지만.”
“태주?”
“미안. 잠깐 옛날 일이 생각나서.”
“옛날 일?”
“응. 예전에 채드 감독이라는 사람하고 영화를 찍을 때 있었던 일인데. 채드 감독은….”
정말 몹쓸 사람이었다.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 배우를 붙들고 어마어마한 기대를 쏟아 냈었다.
너는 정말 좋은 배우다. 나는 너를 정말 믿고 있다. 수백 명의 지원자 중에서 너를 고른 것은 네가 이 역할을 가장 잘 해낼 거라 믿기 때문이다, 등등.
리미트 없는 믿음과 신뢰를 쏟아붓는 채드 감독 때문에 배우들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실력 없는 실력을 모두 끄집어내려고 무리했다. 혹은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의지로 필요도 없는 노력을 자진했다.
‘물론 나한텐 그다지 소용없었지만.’
그런 능구렁이 같은 사람한테 당할 만큼 경력이 짧은 태주가 아니었다. 그랬지만 피곤한 얼굴로 매일같이 칭찬 세례를 퍼붓는 채드 감독의 바람을 들어주려 그도 꽤 노력했다.
자신에게 하는 칭찬이 성에 차지 않는 연기를 하는 배우를 고쳐 쓰려는 칭찬과 질적으로 다른 순수한 칭찬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게다가 채드 감독에겐 계약할 듯 말 듯 시간을 오래 끌어 적잖이 미안한 감정도 느끼고 있었다.
*
“테쥬. 최고야. 난 이럴 거라고 이미 알고 있었어.”
“…감사합니다, 미스터 브룩.”
“채드라고 불러. 나도 테쥬라고 부르고 있잖아.”
“네, 채드.”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에 검은색 기묘한 문신을 상체에 그린 태주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감독 채드에게 감사를 전했다. 직후 바로 고개를 채드 감독에게서 돌려 버렸다.
냉정하다고 욕해도 하는 수 없었다. 온몸으로 저에게 호의를 표하는 채드 감독이었지만, 태산이가 어릴 적 제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을 때와 비슷하게 저를 부르는 털북숭이가 소중한 추억을 더럽히는 기분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
“우리랑 계약할 거지?”
“…고려해 볼게요.”
“아우! 알겠어. 그럼 사진 좀 찍을게. 그건 괜찮지?”
“네, 괜찮아요.”
한창석 감독의 영화를 촬영하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만든 연기 실력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만약 채드 감독의 적극적인 요청이 없었다면 이런 자리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콘셉트 디자인 팀이 준비한 샘플 의상을 입어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태주는 황홀한 표정으로 연신 ‘이거지!’를 외치는 채드 감독을 묘한 얼굴로 봤다. 시기적절하게 썩 괜찮은 대본에 매력적인 배역을 만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계약하기는 쉽지 않았다. 가장 적극적이고 호의적인 게 채드 감독이었을 뿐이지, 그에게 다른 오디션 기회가 없는 게 아니었다.
“흐흐. 테쥬. 이 사진, 작가님 보여 드려도 되지?”
“네, 편하게 쓰세요.”
가 해외 진출하기 좋은 기회긴 했지만, 굳이 원작자의 반응이 안 좋은데도 매달릴 마음은 없었다. 원작 소설이 워낙 인기가 많은 탓에 원작자의 입김이 큰 작품이었다. 그런 원작자가 오디션장에서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가 연기할 때는 고개를 돌리기도 했었다.
‘만약 인종 차별하는 사람이라면 앞으로도 볼 일은 없지.’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인기를 끄는 해외 작품이나 감독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 상태에서 조금만 더 인지도를 높인다면, 굳이 자신에게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신경전을 벌이면서 작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태주는 본인에게 그 정도 실력과 매력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테쥬. 기다리고 있을게. 이건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야. 꼭 연락해야 해.”
“연락할게요, 채드.”
대답하는 태주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평소라면 태주의 태도에서 작품에 대한 흥미가 별로 없다는 걸 예민하게 캐치할 채드 감독이었지만, 흥분한 그는 그런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날은 채드 감독이 바라는 대로 의상을 입고 몇 가지 포즈를 취해 주는 것으로 헤어졌다. 꼭 출연해 달라는 당부를 여러 번 들었지만, 태주는 단 하나의 확신도 주지 않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
“나빠! 태주 괜찮아?”
“응? 아! 괜찮아, 괜찮아.”
“도도가 혼내 줄까?”
“하하하.”
태주는 두 주먹을 꼭 쥐고 적의를 불태우는 도도를 안아서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도도가 마시다 만 우유 잔을 쥐여 주었다. 할리우드에서 본 첫 오디션 얘기를 듣고 화내는 것도 좋았지만, 산책으로 식은 몸을 덥히는 게 먼저였다.
“그래서? 나쁜 사람 혼내 줬어?”
“아니. 사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오히려….”
원작자는 생긴 것만큼 강퍅한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중년 아저씨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귀여운 사람이었다. 나중에 듣기로 오디션 당시 그는 태주를 보고 무척 놀라고 당황한 상태였다고 했다. 뱀파이어 왕을 연기하는 태주가 마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느껴져서 똑바로 볼 수 없었다고.
오디션 이후 바빠진 태주가 출연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을 때 원작자인 그가 직접 연락했었다. 대체 왜 아직도 결정을 미루고 있냐며, 혹시 출연료가 마음에 들지 않냐고 물었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혹시 원작 속 캐릭터가 백인인 점이 거슬려서 그러냐고 물었었다. 이 대목에서 태주는 본인이 원작자를 완전히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람은 그냥 겉으로 표현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었어.”
“응?”
원작자는 정말로 타인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에서는 표현을 잘못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전화 통화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메일이나 채팅 같은 텍스트로 소통하는 것엔 문제가 없었지만,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일은 힘들어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 오디션에 참석한 것도 그에겐 엄청 용기를 낸 일이었다.
“나는 도도가 너무 좋아. 도도는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 달리기랑 점프도 잘하고, 자동차도 잘 몰아서 아주 멋져. 우유도 잘 마시고 밥도 잘 먹어서, 식사할 때마다 뿌듯하고 행복해.”
“진짜?”
“응, 진짜. 도도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아이야. 이만한 보석을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거야.”
“나도. 나도 태주 좋아. 안 바꿀 거야.”
태주는 그에게 안기려 몸을 돌리느라 넘칠 뻔한 도도의 우유 잔을 급하게 붙잡았다. 상대에게 감정 표현을 잘못하는 원작자의 얘기를 도도가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드는 중이었는데, 뜻밖의 보너스를 받았다. 그는 품에 꼭 안겨서 좋아한다고 외치는 아이를 마주 안으면서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은 이런 말을 잘못하는 사람이라서 그랬어.”
“왜?”
“으음. 부끄러워서 그랬을까?”
“나는 태주 좋아. 안 부끄러워.”
“하하하. 고마워. 나도 좋아해.”
태주와 도도는 한동안 서로 더 좋아한다고 결론 없는 말씨름을 했다.
“잠들었습니까?”
“응. 그땐 액션 연습이다 뭐다, 네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다시 생각해도 고맙다. 고마워, 호야.”
“아닙니다.”
“방으로 가자. 도도 좀 봐줄래? 난 산이가 가져다 달란 물건 좀 찾아올게.”
“네.”
태주는 아이 머리를 어깨에 잘 기대어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디션 후 채드 감독, 작가와 다시 만난 얘기를 들을 때부터 꾸벅꾸벅 졸던 도도는 얘기가 영화 촬영을 준비하던 시기로 넘어가자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에효. 많이 옮긴 것 같은데도 여전히 엉망이네.”
잠든 도도를 2호에게 부탁하고 건너온 태산이의 방은 여전히 난감한 상태였다. 아파트로 꽤 많은 물건을 챙겨 갔는데도 어느 방향으로 들어가야 할지 고민될 정도로 쌓여 있었다.
‘예전에 보던 동화책을 왜 가져다 달라는 거지? 도도한테 읽어 주려고 그러나.’
태산이가 가져다 달라는 물건은 종류가 다양했다. 태주가 선물했던 그림도 있었고, 해외에서 생활할 때 모은 여행 기념품과 무늬가 화려한 카펫도 있었다. 부탁을 받았으니 챙기긴 할 테지만, 대체 어디에 쓰려는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마그넷 큐브, 크리스털 독수리 장식, 앤틱 선풍기와 라디오 등을 들어내고 카펫을 챙긴 태주는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겨우 물건 하나를 찾았을 뿐인데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연례행사처럼 정리해서 기부하는 데도 태산이의 물건은 쌓이고 또 쌓였다. 그 안에서 몇 가지 물건을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헛! 어디서 많이 본 거다 싶더니 정원에서 가져온 거였네.”
그나 쿠첼루스가 사 주지 않을 만한 물건도 쌓여 있길래 어디서 난 물건인가 했더니, 꿈의 정원 창고에 두었던 것이었다. 그것 외에도 꿈의 정원에서 가져온 물건이 꽤 많았다. 목줄에 넣어서 온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그의 눈엔 쓸모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아이의 시선은 다르니 이런 것도 보물처럼 보이는 모양이네.’
요정 숲 유원지의 상품 교환 구슬이 담긴 유리병을 한쪽에 치우고 태산이가 부탁한 동화책을 챙긴 태주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 보고 놀랄 때가 아니었다. 도도의 낮잠은 두 시간 정도였다. 그 안에 복잡한 미로 속에서 물건을 찾아내야 했다.
“어디 보자. 산이가 말한 그림이 이건가?”
처음 뭐가 뭔지 알아보지 못할 그림을 그리던 그림 실력은 해를 거듭할수록 좋아졌다. 나중에는 계절에 맞춰 태산이가 그린 그림으로 벽을 장식할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그림에 취미를 붙인 이유가 그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 심심해서라는 것이 조금 씁쓸했지만, 그 실력만큼은 자랑스러웠다. 그의 눈앞에 있는 비교적 정리가 잘 된 책장에 쌓인 스케치북들이 그 모든 과정을 담고 있었다.
-파라락!
“어릴 적엔 이렇게 그렸었는데. 최근 그림 보면 이런 실력이었다고 상상도 못 하겠다.”
태주는 물건을 찾는 걸 잠시 멈추고 키 낮은 어린이 책장 가득 꽂힌 스케치북 중 한 권을 펼쳤다. 삐쭉삐쭉, 얼룩덜룩. 투박한 아이 손으로 그린 그림이 스케치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도가 깨기까지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도 좀처럼 스케치북에서 손을 떼기 쉽지 않았다. 아마 조금 전까지 도도와 옛날얘기를 한 여운이 남아서 그런 것 같았다.
“이건 언제 적 그림이지? 촬영장인가?”
그가 보지 못한 그림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태산이가 보여 주지 않으면 일기든 스케치북이든 절대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의 바른 성장을 위해서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여겼었다.
그래서 태산이의 의사 표현이 뚜렷해진 후론 좋고 싫은 이유를 묻고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에 아이의 의견을 꼭 물었었다.
“나? 언제지? 한국인 것 같은데…. 박대성 감독님이랑 촬영할 때인가?”
휘리릭 넘긴 스케치북 안에는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실력을 보면 일고여덟 살 언저리에 그린 것 같았다. 또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머리 색이 모두 검은색인 걸 보면 촬영장은 한국인 것 같았다.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에 그려진 그는 홀로 빛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그림 속 그는 은색과 금색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슈트는 은색, 얼굴과 손은 금색이었다. 수많은 스태프가 무채색인 것과 무척 대비되었다.
“아이 눈에는 내가 이렇게 보였나?”
자신은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그런 존재로 태산이의 눈에 비친 모양이었다. 태주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어쩐지 눈물도 날 것 같았다.
처음 회귀한 걸 알았을 때는 분노에 사로잡혔었다. 십수 년 배우 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모두 수포가 된 상황에 화가 치밀었었다. 그러다 꿈의 정원을 방문하고 태산이를 만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도 챙겨 가도 되나? 일부러 안 보여 줬던 거 같은데, 가져가면 화내려나?’
속으로 태산이가 화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태주는 스케치북을 챙겨 갈 물건들을 쌓아 놓은 곳에 올려 두었다. 그러면서 만약 태산이가 화를 내면 자신이 그림의 주인공이니 그림 모델료로 달라고 하자고 생각했다.
그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감독이 보낸 대본보다 오래전 아이가 그린 그림을 더 욕심내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런 대본보다 태산이가 어릴 적 그린 그림이 더 소중한 것은 당연했다.
채드 감독의 대본이 아카데미나 칸에서 트로피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대본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매년 개최되는 영화제의 트로피는 노력하면 언젠가는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태산이의 그림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색도 금색이라 딱 좋네.”
그가 지금까지 받은 트로피나 목표로 하는 트로피들은 배우로서의 성과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태산이의 그림은 보호자로서의 성과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가 보호자로서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아이에게 제대로 된 목표가, 지향점이 되어주고 있다는 증거였다. 귀중한 트로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