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35
34. 물놀이
급하게 뛰어간 곳은 다행히 한우를 키우는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태산이보다 훨씬 큰 덩치의 분홍색 돼지들이 있는 우리였다. 태산이는 그곳에서 자세를 낮추고 엉덩이를 든 채로 커다란 돼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태산이 돼지를 덮치는 순간 태주가 끼어들어 태산이를 잡았다.
“컥. 잡, 잡았다.”
“크르릉.”
크르릉은 무슨 크르릉이냐며 야단친 태주가 태산이를 잘 안아 들었다. 태산이 내려달라며 몸을 뒤틀고 뒷발로 밀었지만, 꽉 안고 놔 주지 않았다. 태주는 주변을 둘러보다 자신을 따라온 카메라를 보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살짝 변명했다.
“아니에요. 저 태산이 안 굶겨요. 간식도 잘 주는데, 진짜로요···.”
태주는 잠시 풀어놨던 어깨끈을 다시 잘 매어주고 사과 바구니를 찾으러 갔다. 분홍색 돼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태산이 에오옹하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지만 단호하게 돌아 나왔다.
“청 사과 다섯 개에 이천 원 할까요?”
“그러자.”
“그럼 반절은 씻어올게요.”
진혁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태주를 보며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태주의 곤란한 표정을 즐길 생각이 가득했는데, 전혀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
태주가 카페 일을 너무 잘하고 있었다. 아직 수입은 많지 않았지만, 즐기면서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얘가 왜 이렇게 일을 잘해. 역시 심보를 곱게 써야 하는구나. 골탕 좀 먹여볼까 했더니.’
태주가 따온 청 사과는 아주 잘 팔렸다. 목장을 떠나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 봉지씩 사 갔다. 기다리지 않고 바로 사 갈 수 있게 담아놓은 아이스커피와 씻어놓은 청 사과가 빠른 속도로 팔려나갔다.
“85,000원. 90,000원···.”
“얼마야?”
진혁은 태주가 돈을 세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정국은 옆 벤치에서 기타를 들고 있었다. 손님이 올 때쯤에 태주와 번갈아 가면서 공연을 했다. 카페 안에서 손님을 기다릴 때와 다르게 장사가 제법 되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이라 손님 숫자가 많지 않았지만, 벌이가 괜찮았다.
“와! 117,500원.”
“뭐? 십일만 원이 넘었어?”
“네. 아까 사과 만 원어치씩 사가신 분들 있었잖아요. 어린이집 단체요. 그 덕분인 것 같아요.”
“허허허.”
진혁은 지난 과수원 카페와 바닷가 소나무숲 카페에서 했던 고생이 떠올랐다. 정국과 둘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비료를 나르고 갯벌에서 조개를 캐고. 기부 금액 맞춘다고 고생한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정국이 형. 우리 돈 엄청 많이 벌었어요.”
“정말? 처음이야. 미션 성공한 거.”
“그래요? 오늘은 사과도 팔아서 그런가요? 제가 보기에도 커피가 너무 싸긴 했어요.”
신이 난 태주가 태산이를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톱스타 2명과 신인이지만 나름 주연급인 배우 한 명, 이 셋이 온종일 벌어들인 돈이 12만 원 조금 못 되는 돈이라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세 명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세 명은 돈을 하얀 봉투에 챙겨 넣어 탁자 위에 반듯하게 올려두었다. 그리고 탁자 주위에 둘러서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이 PD에게 무언갈 바라는 눈빛을 뿌렸다.
“축하합니다. 처음으로 미션을 성공하셨네요. 내일 하루는 편하게 시간을 보내시면 됩니다.”
“이 PD님 정말이에요? 뭐 추가 촬영한다고 할 거 아니에요?”
“안 합니다.”
진혁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이 PD에게 되물었다. 여러 차례 물으며 다른 촬영은 안 한다는 확답을 얻어낸 진혁이 겨우 안심했는지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더운 날씨에 카페 밖에서 장사하느라 체력이 모두 닳은 모습이었다.
이후에는 편하게 앉아 내일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진혁이 근처에 괜찮은 계곡이 있다는 얘기를 해줘서 내일은 그곳에 가기로 입을 맞췄다.
스케쥴에 지친 정국은 카페에 남아 쉬고, 태주는 진혁과 같이 목장을 구경하러 나섰다.
“오리는 꽉꽉♪ 오리는 꽉꽉♪”
“풋! 그게 무슨 노래냐.”
목장 구경을 나선 태주가 저도 모르게 동물 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진혁의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태주가 얼굴을 붉히며 그냥 동요라고 대답하고 빠르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얼마 전에 생일도 지나서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된 태주지만 생각보다 하는 짓이 귀여웠다. 진혁은 괜히 골탕 먹이려 하지 말고 잘해주자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태주가 열심히 해준 덕분에 편하게 촬영할 수 있었으니, 반성하고 앞으론 조금만 놀리기로 했다.
“같이 가.”
“빨리 오세요. 이쪽에 양 있대요. 복슬복슬한 양이요.”
태주는 태산이에게 새로운 동물을 보여줄 생각에 흥분했다. 태산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너무 좁았다. 아무리 정원이 있고, 태주가 많이 신경을 써준다고 해도, 자연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는 것만은 못했다. 이곳이 비록 목장이지만, 다양한 동물이 있어서 태산이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양 흥분하지 않게 내려놓지는 마라.”
“네. 잘 안고 있을게요.”
혹시라도 태산이 때문에 목장의 동물이 놀랄까, 진혁이 주의 주었다. 태주도 사과를 따러 갔다가 겪은 일이 있어서 얌전히 말을 들었다.
“에오옹.”
“풋. 얘 울음소리가 왜 이러니.”
“내려 달라고 부탁하는 소리예요.”
진혁과 느긋하게 동물 우리를 구경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그런지 동물들은 우리에 돌아와 있었다. 태산이 동물들을 볼 때마다 내려달라고 애처롭게 울었지만, 단단히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양도 염소도 태산이보다 훨씬 덩치가 커서 채이면 크게 다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녹음이 우거진 울퉁불퉁한 길을 통과하자, 겨우 차 한 대를 댈만한 공간이 나왔다. 태주와 일행은 점심거리가 든 아이스박스와 돗자리 등을 꺼낸 후에 바로 계곡 쪽으로 움직였다.
진혁의 말대로 경관도 좋고, 시선도 별로 없는 곳이었다. 아니,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촬영진과 태주 일행은 넓게 자리를 잡고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각자의 매니저들에게 편하게 쉬라는 말을 전한 세 명은 본격적으로 휴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태주는 버스킹에 이어서 촬영하는 선율 때문에 긴 팔에 긴바지를 입고 있었다. 배역의 특성상 창백할 정도의 피부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날이 아무리 더워도 선크림에 긴소매 옷을 꼭 챙겨야 했다.
그런 태주와 달리 진혁은 확실하게 휴식기였다. 진혁은 태주가 단역으로 출연했던 드라마 전에 영화를 찍었었다. 작년과 올해 영화와 드라마를 이어서 출연한 후라 내년까지 쉴 예정이었다.
풍덩!
“헉. 태산아!”
태주가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나눠 주는 사이 태산이 흥분해서 물에 뛰어들었다. 호랑이라 그런지 태산이는 평소 물을 좋아했다. 오늘 가는 계곡도 좋아할 거로 생각하긴 했다. 그래도 처음 와보는 계곡에 겁도 없이 뛰어들 줄은 생각 못 했다.
태주는 깜짝 놀라서 태산이를 구하러 계곡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냐우웅.”
“헐.”
바지 단을 접을 새도 없이 급하게 뛰어든 태주의 걱정이 무색하게 태산이는 느긋하게 수영을 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네 발로 요령 좋게 앞으로 움직였다.
태주는 뻘쭘해져서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크크크큭. 태주야 너보다 태산이가 낫다. 얘가 제대로 피서를 즐기네.”
“저도 얘가 이렇게 수영을 잘하는 줄 처음 알았어요.”
태주는 바지가 젖은 김에 그냥 물속에서 놀기로 했다. 앞으로 또 언제 휴가를 올 수 있을지 모르니 즐길 수 있을 때 즐기기로 했다.
물속에서 작은 물고기를 발견한 진혁이 태주에게 잡자고 제안했다. 낚시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거절했지만, 진혁은 기어코 고기잡이에 그를 동참시켰다. 태주는 진혁이 물고기를 모는 방향 앞에 서서 낚을 준비를 했다.
진혁이 천천히 태주가 있는 방향으로 물고기를 몰고 왔다. 태주는 정말로 물고기가 자신 쪽으로 도망쳐 오자 당황했다. 아무런 도구도 없이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 상황이 난감했다.
“에잇.”
태주가 웃옷을 벗어서 넓게 펼쳤다. 그물처럼 물속에 넣어 고기를 건져 올릴 요량이었다. 눈을 반짝이면서 물고기가 오길 기다리는 태주의 모습은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이 PD는 이 모든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특별한 콘텐츠 없이 휴식을 주었지만, 그게 촬영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휴식하는 모습을 찍을 생각이었고 세 명의 출연진도 물론 동의했다.
“와하하. 형님 이거 보여요? 진짜로 잡았어요.”
“봐봐. 봐봐. 진짜네.”
“태산아 이거 봐봐. 고기야. 형이 잡았어.”
처음 잡아 본 물고기에 흥분한 태주가 여러 사람에게 자랑을 하고 있었다. 먹지도 못할, 손가락보다 작은 물고기를 잡고 신이 난 태주가 이번에 자신이 몰겠다며 진혁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드라마 일정으로 피곤한 정국은 그늘 밑에서 잠이 들고, 진혁과 태주는 물속에서 고기를 잡는다고 떠들썩하게 놀고 있었다. 보기 좋은 경관과 어우러진 미남 세 명을 카메라 화면에 담는 스태프의 손길이 분주했다.
*
태주의 얼굴이 붉게 익었다. 물놀이에 선크림이 다 씻겨 내려가는 것도 모르고 놀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내일 당장 다시 촬영을 이어가야 하는데 햇볕에 익은 얼굴이 문제였다.
“어유. 노는 것도 좋지만, 신경 좀 쓰지. 이게 뭐니.”
미나가 감자를 갈아서 팩을 만들어 줬다. 태주는 얌전히 누워서 팩을 받고 있었다. 얼굴에 팩을 붙이고 있는 태주가 낯선지 태산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자세를 낮추고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도 재밌었죠?”
“재밌긴 했지. 나중엔 카메라도 끄고 다 같이 놀았으니까.”
“흐흐. 나중에 또 같이 가요.”
“그래. 이제 말하지 말고 좀 자.”
미나가 태주의 옆에 알람을 맞춰주었다. 태주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다다다다.
퍽!
“억!”
“태산아!”
태주가 잠깐 눈을 감은 사이, 낯선 얼굴을 한 태주를 경계하던 태산이 빠르게 달려와 태주를 덮쳤다. 날벼락을 맞은 태주가 탁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말았다. 태산이는 태주의 가슴을 밟고 뛰어올라 바닥에 가볍게 내려섰다.
“태주야 괜찮아?”
“숨이 턱하고 막혔었어요. 얘가 갑자기 왜 이러죠?”
“풋, 푸하하하. 네 얼굴. 팩 때문에 낯설어서 그런 건 가봐.”
“네?”
녹색 팩을 한 주인을 고양이가 공격하는 장면을 전에 만화에서 봤다며 미나가 설명했다. 감자 팩을 한 태주가 낯설어서 공격한 것 같다는 얘기였다.
‘시스템으로 펫과 주인으로 등록된 사인데. 어떻게 모르지?’
“이건 그냥 태산이가 장난친 거 같아요. 지금까지 같이 있었잖아요.”
“호호호.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태산이가 기다리느라 심심했나 보다.”
놀아주지 않아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태주는 팩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공을 던져 주었다. 날이 갈수록 장난이 심해지는 태산이 덕에 매일같이 요란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
부산에서 스튜디오 촬영을 한 후, 촬영진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선미 역할을 할 배우와는 부산에서 처음 만났다. 결혼식 장면을 찍느라 곱게 웨딩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는데, 미래의 로코 여신이어서 깜짝 놀랐었다.
그녀는 결혼식 장면과 서울에서 태주와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에만 등장할 예정이었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깨끗한 피부에 맑은 목소리. 체구까지 작아 마치 인형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회귀 전 그녀는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가 다양하지 않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로맨틱 코미디 분야에서만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전에 단역으로 출연했던 드라마 ‘사랑비가 내리다.’의 오동돈 감독이 연출한 미니시리즈 드라마에 그녀와 같이 출연했었다. 시청률 기록을 갈아치웠던 작품이었다.
그녀는 태주보다 네 살 연상이었다. 당시에 태주는 한창 몸값이 높아진 상태였다. 그녀도 몇 번 드라마의 주연을 맡아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는 중이었다. 서른하나, 서른다섯 스캔들이 나기 딱 좋은 나이여서 둘 다 서로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
“레디~, 액션.”
태주가 펜을 잡은 선미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작은 손이 태주의 손안으로 쏙 들어왔다. 선미의 손을 쥔 채 작게 하트를 그렸다. 그리고 엄지로 살짝 손등을 쓸고 손을 놔주었다.
쑥스러워 고개를 모로 돌린 태주의 옆 모습을 선미가 곁눈질로 바라봤다. 그리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선미의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났다.
태주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선미와 처음 같이 본 영화의 주제가였다.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신의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태주는 부끄러움을 참던 모습은 바로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사방의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눴다.
생각보다 촬영이 일찍 끝나서 선율의 크랭크 인까지 시간이 생겼다. 보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지만, 수고해준 매니저님이나 미나 누나, 형식 씨에게 휴가를 줄 수 있게 되었다. 그 점이 무엇보다 태주를 기쁘게 했다.
처음 찍는 로드무비에 체력 좋은 견우마저도 힘들어할 정도였다. 태주 역시 매일 정원에서 회복 약을 챙겨 마셔야 할 정도로 지쳤었다. 사상 초유의 폭염이니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무더위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진짜 수고 많았다. 태주야, 너 아니었으면 이거 못 찍었을 거다.”
“별말씀을 다 하세요. 다 같이 수고한 거죠.”
“그래그래.”
연출부 인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서 촬영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태주는 정리에 방해되지 않게 한쪽으로 비켜섰다. 촬영하느라 놓친 복날을 대신해 마지막 촬영일에 다 같이 몸보신 하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아직 편집에 ost 녹음 일정 등 일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다. 예정보다 빠르게 촬영이 끝난 데다, 중간중간 확인한 영상의 퀄리티도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아. 빨리 정리하고 다 같이 고기 먹으러 가자.”
“와아.”
조감독님이 고기를 언급하자, 세트를 정리하는 사람들의 손길이 더욱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