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41
40. 선율 촬영
아이들은 에너지가 다 할 때까지 뛰어놀다가 그냥 잠이 든다고 한다. 태산이는 호랑이지만 아이처럼 끊임없이 장난을 치고 뛰어놀았다. 그러다 지치고 졸리면 아무 곳에나 누워서 잠을 잤다. 잠든 태산이 위치를 희가 알려주면 가서 안고 오는 일은 이미 익숙했다.
오늘도 태주는 과일나무 밑에 잠든 태산이를 안고 와서 굴에 넣어주었다. 굴속에는 태산이가 좋아하는 물건이 가득 있었다. 오두막 안에 두었던 담요와 공, 끈 등이 너부러져 있었다. 태주의 물건도 몇 개 보였다. 흔들의자에 두었던 방석이 굴 바닥에 놓여있었다.
“어이구, 이게 다 뭐야. 형 슬리퍼가 여기 다 있네.”
오두막에서 신는 슬리퍼가 매일 한 짝씩 사라지더니 이곳에 다 있었다. 태주가 손에 든 슬리퍼는 온통 깨문 자국이 나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 굴속에 다시 슬리퍼를 넣어주었다.
“희, 우리 이제 열기구 만들 재료 살 수 있지 않아?”
“태주, 아직 모자라.”
“응? 아닌데. 충분한데.”
“으응, 태주. 희는 이것도 사고 싶어.”
희가 가리키는 물건을 보고 태주는 헛숨을 들이켰다. 희가 가리킨 것은 RPG를 닮은 그물 대포였다.
‘아니. 대체 이런 물건은 왜 팔고 있는 거야!’
“희, 이건 좀. 이런 거로 잡으면 반칙이 아닐까?”
“반칙?”
“응. 하나씩 잡아야지.”
희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태주를 바라봤다. 다른 정원에선 어떻게 잡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물건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희는 별똥별을 많이 잡고 싶은걸.”
“그, 그래? 많이 잡고 싶으면 잡아야지.”
희가 두 주먹을 꼭 쥐고 의욕을 불태웠다. 태주는 이미 말리기엔 늦은 것 같아, 희라면 많이 잡을 수 있을 거라며 응원했다.
“태주, 어서어서 과일을 따자.”
“어? 어어. 알았어.”
그날 태주는 희가 만족할 때까지 과일을 따고, 피부 크림을 만들고, 허브 티를 만들었다.
모든 상품을 상점에 등록하고 잠시 숨을 돌리는 태주에게 태산이 다가와 몸을 붙였다. 어쩐지 위로해주는 느낌이라 살짝 감동했다.
“태주, 태산이가 굴이 좁대. 물건을 좀 치워 달래.”
“읔, 요놈. 갑자기 친한척하더니 속셈이 있었구나.”
태산이의 참견을 들으며 굴을 청소해준 태주는 일찌감치 현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
선율은 태주의 바이올린 독주에 CG가 많이 쓰인다. 그 때문에 태주는 블루스크린 앞에 혼자 서있었다. 회색 티에 면바지, 운동화를 신고 적갈색 바이올린을 들었다. 고가의 바이올린에 어울리지 않는 편한 차림이었다.
오늘 태주는 재하의 혼란한 감정을 표현해야 했다. 사랑하지만 증오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왜 사랑한다면서 자신을 버린 것인지.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가 왜 그녀가 자살할 이유가 되는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연기해야 했다.
‘혼란한 모습을 연기하는 장면이라 다행이야. 실제로 대체 왜 자살을 한 건지 이해 못 하기도 했고.’
재하의 연인은 그와 같은 바이올리니스트로 나온다. 연인은 그를 정성스레 챙기는 인물이었다. 재하가 바이올린 연주만 하도록, 그의 주변을 돌봐주며 길들인다. 그리고 그의 세상에 바이올린과 연인인 자신만 남았을 때 돌연 자살을 한다.
“편하게 연주해봐요. 배경에 숲이 들어갈 거에요. 가을 숲이라 마른 나무도 좀 있고, 바닥에 낙엽도 깔려있다고 생각해줘요.”
“네.”
촬영장에는 지난 5개월간 바이올린 교습을 해주셨던 선생님도 와 계셨다. 앞으로 며칠간은 쭉 스튜디오에 와서 도와주시기로 하셨다. 버스킹을 촬영하는 내내 수업을 위해 서울을 오가느라 고생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선생님은 아직 젊은 나이지만,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경력도 있는 출중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국내에서는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김남숙 교수의 애제자로 더 잘 알려졌다.
태주의 바이올린 취향은 고전음악 중 밝고 생동감 넘치는 곡들이었다. 예전에 익혔던 곡들도 모두 그런 곡들이었다.
하지만 선율의 재하는 혼란과 불안, 의문에 휩싸인 채 몇 년의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연주가 날카롭고 예민하게 들리도록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동안 촬영에 필요한 현란하고 화려한 곡을 익히느라 상당히 고생했다.
태주는 바이올린 선생님이 해주는 주의사항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연주에 들어갔다.
태주의 활이 현에 닿을 때마다 낮고 강렬한 음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스튜디오 안에 태주가 연주하는 곡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단 한 대의 바이올린이 내는 소리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풍부한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바흐의 샤콘느.
태주가 ost에 욕심을 냈었지만, 결국 포기한 곡이다. 바이올린을 배운 것은 회귀 전까지 치면 10년이나 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취미로 배운 연주 실력으로 제대로 연주해낼 수 없는 곡이었다.
곡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는 연주할 수 있었지만, 그 곡에 실린 무게와 감정까지 담아내기는 힘들었다. 선생님은 조금만 더 연습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얘기했지만, 태주 스스로 욕심을 버렸다.
“컷. 재하야. 다시 한 번 가자. 좀 전에도 좋았는데, 이번엔 좀 더 혼란스러운 감정을 살려봐.”
촬영에 들어가자, 이제영 감독님의 말투가 바뀌었다. 배역의 이름으로 부르고 말도 평대로 바뀌었다. 태주에게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 더 기꺼웠다. 평소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벗은 이제영 감독은 거침없이 요구사항을 말하고, 태주를 다그쳤다. 만족스러운 그림이 나올 때까지 태주의 촬영은 이후로도 한참 이어졌다.
*
CG 작업을 위한 촬영을 모두 끝내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김윤선과 같이 촬영하게 된다. 태주는 김윤선과의 촬영을 기대하고 있었다.
김윤선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연기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타입이었다. 재하는 수동적인 인물인 만큼 조금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바로 김윤선의 연기에 휩쓸리고 만다. 리딩 현장에서 비슷한 경험을 할 뻔한 이후로 항상 날카롭게 감각을 세우고 있었다.
김윤선과의 연기는 체력도 정신도 바닥 날 정도로 피곤해지지만, 그만큼 재밌고 만족도가 높았다.
‘선배님도 참. 신인 배우 상대로 너무 하시지. 내가 진짜 경험 없는 초짜였으면 그대로 휩쓸려버렸을 텐데.’
김윤선은 태주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리딩 현장에서 폭군처럼 굴었다. 실제 촬영하는 것처럼 리딩을 진행했다. 단 한 번도 쉽게 간 적이 없었다. 조연 중 김윤선과 친한 사람이 있었는지, 힘 좀 빼시라고 했다가 한 소리 듣는 장면도 나왔었다.
“에고고.”
“수고하셨습니다. 미나 씨?”
“알았어요, 매니저님. 태주야 이거 스프레이 파스하고 스포츠 겔 챙긴 거야. 쓰는 법은 알지?”
“네. 고마워요.”
몇 시간 동안 쉼 없이 바이올린 연주를 했더니, 팔이 부르르 떨렸다. 사실 이렇게 오래 연주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이제영 감독님의 사정을 몰랐다면 휴식을 요구했을 것이다.
중간중간 견우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태주가 그를 말렸다. 자신보다 이제영 감독님이 더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견우도 그제야 감독님의 안색을 살피곤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태주 씨 연기에 집중하시는 건 알지만, 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같은 일은 자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주의할게요.”
견우의 걱정을 알지만, 아마 선율이 끝날 때까지 이렇게 무리하는 일이 자주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까 이성군 형님 오셨었는데, 보셨어요?”
“네. 표정이 좋지 않으시던데, 무슨 일인지 한 번 알아볼까요?”
“음. 부탁드릴게요. 영화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좋겠네요.”
선율과 관련한 일에 이성군이 많이 얽혀있었다. 친한 친구라 해도 과할 정도로 선율의 제작 과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이제영 감독의 상태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견우는 태주의 부탁도 있었고, 자신도 궁금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성군의 매니저와 따로 약속을 잡았다. 회사 근처의 카페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천천히 일상 잡담부터 영화 사정까지 얘기를 나눴다.
“최근 이제영 감독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습니다. 선배님은 아시는 사실이 있습니까?”
“후우. 이태주 배우님도 관련자니 알아두는 게 낫겠다. 이제영 감독 시간이 얼마 없어. 길어야 1년이야.”
“예?”
사라졌다, 돌아왔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었다. 그래도 선율을 찍겠다는 의지가 강해서 이성군과 둘이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러다 이제영 감독이 쓰러지는 일이 생겼고, 둘은 그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손을 쓰기엔 너무 늦었어. 성군이나 나는 제영이가 쉬길 바라지만, 끝까지 촬영을 고집해서.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어.”
“음. 1년입니까.”
“무리하지 않으면. 지금 하는 모양새를 보면 쉽지 않겠지만. 1년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희망 사항이지.”
견우는 입맛이 썼다. 소송과 빚 때문에 수년간 고생한 사람이 건강도 좋지 않다니. 참 불공평하다고 느껴졌다.
“이성군 배우님이 오신 건요? 표정이 안 좋으시던데요.”
“쯧. 이 감독, 제영이 유언장을 만들어놨어. 상속인을 성군이로 해놨더라. 성군이 어쩌다 그 사실을 알았나 보더라고.”
“···.”
“그런 걸 바라서 돕는 게 아닌데.”
알고 싶던 사실을 알았지만, 어쩐지 더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제영이, 이제영 감독 병세는 알리지 말아줘. 아는 사람은 나랑 성군이 뿐이야.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하게 해주고 싶다.”
“알겠습니다.”
태주에게는 잘 둘러대야 할 것 같았다.
*
점심을 먹은 후 태주는 허브 티를 우려 스태프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이번에 수확한 허브는 품질이 상당히 좋았다. 덕분에 차로 우리자 진한 향이 스튜디오 안에 가득 퍼졌다.
“향이 정말 좋네요.”
“태주 씨 잘 마실게요.”
태주에게서 차를 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감사인사를 했다. 아직 늦더위가 모두 가시지 않았지만, 따뜻한 차를 마시는 데 무리는 없었다.
“정말 이렇게 향이 진한데 부드러운 차는 처음이에요. 꿀을 넣어 마셔도 맛있고. 매번 고마워요.”
“하하. 차 다 드시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런데요, 감독님. 재하의 연인이 왜 자살을 한 건지 정말 안 알려주실 거예요?”
“후후. 태주 씨 해석도 괜찮다니까요.”
시나리오에 재하의 연인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 그저 재하가 그녀에게 얽매여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태주는 그녀가 죽음으로 그를 시기하는 자신의 존재를 지운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영 감독은 태주가 연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금 상황을 재밌게 여기고 있었다. 실제로 재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연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덕분에 고민하는 태주에게 답을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
“알았어요. 좀 더 고민해 볼게요.”
“하하.”
이제 스물인 이 젊은 배우는 의욕이 대단했다. 며칠간 스튜디오 촬영을 하면서 자신이 무리하게 촬영을 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도 단 한마디의 불평도 말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실제로는 블루스크린이지만, 태주가 연기하는 배경이 가을의 숲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촬영이 끝나고 태주의 팔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본 후 놀라서 사과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그림이 잘 나왔냐만 물었었다.
이후 촬영하면서 유심히 그의 상태를 체크 하고 있었다. 조연출에게도 부탁해두었다. 자신이 흥분해서 무리하게 촬영을 진행하면 제지해달라고. 태주도, 김윤선도 흥이 오르면 ‘적당히’라는 단어를 잊어버리는 타입 같았다. 자신 역시 그런 스타일이라 주변에서 주의를 일깨워 줘야 했다.
“그녀는 재하가 완전무결하길 바랐어요.”
“흐음. 완전무결이라···. 그런 게 가능한가요? 정말 이해하기 어렵네요.”
고민하는 태주가 안타까웠는지, 이제영 감독이 약간의 힌트를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살한 연인의 심리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내가 연애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걸지도.’
회귀 후 10개월. 회귀 전까지 따져면 근 10년 넘게 연애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연애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 태주였지만, 아직은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희와 별똥별 수집 계획을 세우는 게 더 재밌어 보였다.
연인의 심리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고, 우선 눈앞의 촬영에 집중하기로 했다. 오늘은 비발디를 연주해야 한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좋아하는 곡이지만 어려운 곡이기도 했다.
‘에효, 텔레만 곡 같은 걸 연주하면 얼마나 좋아. 판타지아 좋은데.’
태주는 개인 취향이 듬뿍 반영된 리스트를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영화와 분위기만 맞았다면, 강력하게 추천했을 텐데. 그가 보기에도 어울리지 않으니, 전문가인 음악 감독님이나 이제영 감독님이 넣어줄 리 없었다.
촬영을 위해 대여한 비싼 바이올린으로 그 곡들을 연주해보고 싶은 태주의 작은 욕심이었다.